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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an 01. 2024

하루 런던

25.National Gallery, St. Paul Cathedrale






파리에서 런던은 도버해협의 해저 터널을 이용하는 유로 스타를 타면 2시간 20분이면 갈 수 있습니다.

유로 스타 티켓이 항공료만큼 비싸지만 한 두달 전에 예매를 하면 저렴한 값으로 다녀올 수 있지요.

파리와 런던은 1시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에 나처럼 당일치기로 다녀와야 하는 사람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영국은 유럽 연합에서 탈퇴한 나라이기 때문에 여타의 다른 유럽처럼 마음대로 출입국을 할 수 없습니다.

기차로 국경을 넘게 되지만 보안 검색은 물론이고 출입국 심사를 거쳐야 하므로 여권은 필수로 챙겨야 하고 비행기를 타듯 적어도 한 시간 30분 안에 기차역에 도착해야 해요.

만일 45분 내에 도착하지 않으면 기차 티켓이 있어도 승차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20년 전,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에서 런던으로 갔었는데요.

그때는 영국이 EU국가에 속했기 때문에 이런 번거로움이 없었지요.

바닷속으로 기차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바닷속이 훤히 보일 걸로 생각했다가 컴컴한 터널로 들어가서 크게 실망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대영박물관에, 4년 전 런던을 방문했을 때는 테이트 미술관에 갔었지요.

굳이 하루를 런던에 다녀오고자 계획을 세운 이유는 내셔널 갤러리와 세인트 폴 대성당에 가고 싶어서입니다.

런던에서 하루나 이틀 숙박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숙박비가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내겠더라고요.


아침 7시 21분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 6시에 집을 나서서 파리 북역으로 향했습니다.

대부분 캐리어를 한 두 개씩은 갖고 있는데 나만 혼자 이웃 동네 마실 가듯 단출합니다.

비 예보가 있었기에 카메라도 챙기지 않았으니까요.

출국 심사를 마치고 대기실로 들어가니 내가 자주 이용하는 빵집 폴(Paul)이 보였어요.

커피와 크루아상을 샀는데 공항이 비싸듯 그곳 역시 다른 곳보다 값이 비쌌습니다.




파리 북역 유로스타 탑승 대기 구역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역



런던은 거의 모든 미술관이 무료입니다.

그러나 방문할 날짜와 시간은 예약을 해야 해요.

내셔널 갤러리의 오픈 시각은 10시,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역에 내려서 피카딜리행 언더 그라운드를 타러 지하철 탑승구로 갔지요.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 리체스터 스퀘어까지는 4 정류장입니다.

파리는 메트로 한 정거장이 1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도 있을 정도로 거리가 짧지만 런던은 한 정류장이 꽤 멀어요.

키오스크에서 싱글 티켓을 한 장 구매하자 스마트폰으로 카드 사용 내역 문자가 발송되었습니다.

확인을 한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요.

'11600원이 결제되었습니다.'

런던의 대중교통이  비싼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충격이었어요.

지하철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오이스터 카드를 구입하면 비교적 저렴하지만 카드를 구입할 때 보증금을 내야 하는데 그 보증금은 최소 24시간 후에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처럼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돌아가는 사람은 보증금을 떼이는 거죠.

그런 이유로 싱글 티켓을 구매한 건데 그렇게 비싸더군요.

런던은 출퇴근 시간처럼 혼잡한 시간에는 혼잡통행료가 부과되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보했던 대로 비가 내립니다.

사방에서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가 들려오니 느낌이 사뭇 다르더군요.

내셔널 갤러리 앞에는 역시나 우산을 든 사람들이 줄을 서있는 통에 많이 혼잡했습니다.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탑에 가림막이 둘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보수 중인가 봅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13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회화 약 2,3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요.

모두 회화이며 시대별로 전시가 되어 있어 관람하기 편합니다.



내셔널 갤러리 입구





내셔널 갤러리는 은행가 존 앵거스타인(John Julius Angerstein)의 소장품 36점을 영국정부에서 구입하여 3층의 작은 건물에서 공개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요.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는 1793년 처음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건물의 구조적인 문제로 1796년~1801년까지 문을 닫았다가 재개관을 했지요.

루브르에 비해 내셔널 갤러리는 턱 없이 작고 초라했기에 영국 정부는 자존심이 상했지요.

보다 크고 튼튼한 갤러리 건축이 시급했습니다.

미술관 건축 공모전을 통해 W. 윌킨스의 설계가 당선되었고 1833∼1837년(5년간) 건축, 1838년에 지금의 장소인 트라팔가 광장에 자리하게 된 것이지요.








9,1215,16,18,21,22,24,26,28,29,32,33,34,35,39,41,43,44,45


이 숫자는 내가 보고자 하는 그림이 있는 룸 넘버입니다.

대부분의 미술관과 박물관의 홈페이지에서 대표적인 작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규모가 큰 미술관일수록 준비를 해가는 게 좋지요.

그렇지 않으면 갔던 방을 또 가거나 아예 들어가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낸 시간은 예상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남긴 작품이 약 60여 점 밖에 안 되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을 비롯하여 모네, 시슬리, 클림트, 마티스 등의 그림은 물론이고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고흐의 해바라기와 의자,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모네의 생 라자레역 등을 직접 보니 더욱 감동적이었지요.




A Winter Scene with Skaters near a Castle about 1608-9, Hendrick Avercamp
A Scene on the Ice near a Town about 1615, Hendrick Avercamp
Virginal 앞에 서 있는 젊은 여성  요하네스 베르메르
버지널 앞의 젊은 여인 요하네스 베르메르
하를럼의 성 바보 교회의 내부, 피터 산레담
델프트에 있는 집의 안뜰  피터 드 후흐
모네 생 라자르 역, 클로드 모네
Marly-le-Roi의 워터링 플레이스  알프레드 시슬리
템스강의 전망: 채링 크로스 브리지(Charing Cross Bridge)  알프레드 시슬리
웨스터 민스터 다리 밑 템스강, 클로드 모네
더 스키프(라 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목욕하는 사람들(Les Grandes Baigneuses)  폴 세잔
마드모아젤 헬렌 루아르, 에드가 드가
우산,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엄마와 아이, 피카소
그레타 몰의 초상,  앙리 마티스
트루빌의 해변,  클로드 모네
La Grenouillère의 목욕객,  클로드 모네
더 애비뉴 시든 햄,  카미유 피사로
폭스 힐 어퍼 노우드, 카미유 피사로
Louveciennes에서 보기, 카미유 피사로




내셔널 미술관은 약 2300점의 회화를 보유하고 있고 그림들을 관리하는 직원은 약 250여 명입니다.

미술관에는 각각의 방을 지키는 뮤지엄 키퍼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특히 환경단체의 명화테러범들이 페인트나 토마토소스 등을 그림에 투척하는 사례들이 빈번하게 뉴스에 보도되고 있지요.

그런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거나 관람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처럼 미술관의 방을 지키는 일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오픈 전 아무도 없는 미술관의 그림을 혼자 여유 있게 볼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근사할까 상상해 봅니다.

오늘은 11번 방, 내일은 45번 방, 그렇게 돌아가며 그림을 실컷 볼 수 있으니까요.




내셔널 갤러리, 고흐의 해바라기에 코마토 소스를 뿌린 환경단체 운동가




21번 렘브란트 방에서 그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전시실에 관람자는 나 혼자였고 방을 지키는 노인이 의자에 앉아계셨어요.

천천히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렘브란트를 좋아하세요?'

'네'

'여기 이 그림은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그림이라우,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네요. 이 그림을 눈여겨보세요.'

'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키가 자그마하고 앞니가 두어 개 빠져있는 모습이 순수해 보이는 할머니가 살짝 귀엽습니다.


유럽에서는 공연장에서 티켓을 확인하고 좌석을 안내하는 하우스 매니저나 이분처럼 뮤지엄 키퍼로 일을 하시는 노인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몸을 쓰거나 크게 힘든 일이 아니니까요.

대신 모델같이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남녀 젊은이들이 길거리 청소나 쓰레기 수거를 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들의 마인드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 집니다.

우리나라는 길거리 청소, 쓰레기 수거 같은 일은 젊은이들이 기피하기 때문에 대부분 나이 든 사람들이 하지요.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의 방식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34세의 자화상, 렘브란트
높은 방의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남자, 렘브란트의 추종자
Anna and the Blind Tobit about 1630, Rembrandt




45번 방,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물론 크기가 압도적으로 큰 이유도 있지만 마치 무대 위에서 핀 조명을 배우처럼 그림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주인공이 백옥처럼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하얀 피부는 그녀가 입고 있는 흰옷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창백합니다.

하얗다 못해 눈이 시리도록 광택이 있는 드레스로 보아 신분이 꽤 높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흰 천이 눈을 가리고 있지만 길게 늘어트린 금발과 피부를 보면 언듯 봐도 앳된 소녀의 모습이었지요.

그 옆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커다란 도끼와 함께 덩치 큰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어요.

그림 속 정황을 볼 때 아마도 그는 처형을 거행할 사람이겠지만 그의 표정은 그 일을 원치 않는 듯 한 없이 무겁습니다.

그의 손은 도끼가 쓰러지지 않게 겨우 지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지 휘두를 의지는 없어 보였지요.

왼쪽에는 소녀가 벗어둔 주황색 겉옷과 목걸이를 무릎에 얹은 채 체념한 표정의 여인이 머리를 힘없이 벽에 기대어 있고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아예 뒤로 돌아 벽을 잡고 통곡을 하는 듯한 여인이 있습니다.

소녀의 희고 가냘픈 손은 무릎 앞에 놓인 뭔가를 향해 뻗어있고 옆에는 뭔가 이야기를 건네는 건장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대체 저렇게 어린 소녀가 처형을 받게 된 사연이 무엇일까?


가까이 다가가 제목을 보았습니다.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 <제인 그레이의 처형>'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 <제인 그레이의 처형>




이 그림의 주인공 제인 그레이는 헨리 7세의 증손녀입니다.

제인은 5개 국어를 했으며 철학과 문학 그리고 음악에 심취해 독서와 사색을 즐기던 미모의 아가씨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9일 동안 영국의 여왕 자리에 올랐고 메리 튜더를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그 후 제인은 여러 가지 정치적 모함을 받게 되어 갇혔고 메리 튜더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을 거부한 뒤 참수형을 당했지요.

그녀의 나이 17세였습니다.

유모와 하녀의 슬픔과 절망이 담긴 표현과 몸짓, 눈을 가린 제인이 목을 얹어야 하는 참수대의 위치를 찾도록 도와주는 중위의 몸짓, 참수를 집행할 남자의 선홍색 바지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견하고 있고 피가 흥건해질 참수대 앞에는 짚더미가 깔려 있는 내용이었던 겁니다.


제인 그레이처럼 정치적인 이념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단 한 장의 그림에 그토록 심오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정대 잊을 수 없는 그림이었지요.


고흐의 그림이 걸려있는 방은 43번입니다.

흔히 아름다운 걸 보면 그림 같다고 하지요.

고흐의 해바라기 앞에 서니 그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실제 해바라기꽃 보다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가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해바라기
반 고흐의 의자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반 고흐
생 레미 들판의 농부
반 고흐, 게





고흐가 가장 많이 그린 그림은 해바라기입니다.

내셔널 갤러리가 자랑하는 그림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고흐는 파리에 있는 동안 색상을 실험하기 위해 꽃이 있는 정물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고흐가 꽃이 있는 정물을 그린 이유는 당시 꽃 그림이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지요.

그는 파리에서 인상파의 신선하고 다채로운 그림을 본 후 자신의 작품에 더 많은 색상을 도입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초기 꽃 정물화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색상이 있었지만 점점 더 극단적인 색상 대비를 시도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꽃을 그려본 후 해바라기를 선택했지만 다른 화가들은 해바라기가 다소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네덜란드의 시골 마을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아마도 그가 소박한 해바라기를 좋아했던 이유일 것입니다.

세련되지 않은 해바라기는 두껍고, 거칠고, 불완전했으며, 날카로운 꽃잎과 줄기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모양이 변하고 회전했습니다.

그 밝은 색상은 그가 네덜란드, 파리, 아를에서 보낸 시절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흐는 해바라기가 시든 후 씨앗이 된 모습도 즐겨 그렸고 자신의 해바라기 그림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란은 조르주 지닌(1841-1915, 모란을 즐겨 그리던 프랑스 화가)의 것이고 접시꽃은 Quost의 것이지만 해바라기는 어떤 의미에서 내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테오에게) 1889년 1월 22일 또는 23일


그가 죽은 후 친구들은 그의 장례식에 해바라기를 가져왔고 그의 바람대로 해바라기는 고흐의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는 모두 12점이 있는데요.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 그림을 여러 버전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중 4점은 파리에 있을 때 그렸고, 8점은 아를에서 그렸습니다.

파리에서 그린 그림은 바닥에 놓여있고 아를에서 그린 해바라기는 모두 꽃병에 꽂혀있으며 비슷하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파리에서 그린 해바라기는 2~3송이지만 아를에서 그린 해바라기는 15송이와 12송이로 나뉩니다.

다섯 작품은 현재 내셔널 갤러리에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까지 전 세계 미술관에서 볼 수 있고 하나는 개인 소유, 다른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2 cut sunflowers, paris 1887
2 cut sunflowers, paris 1887
2 cut sunflowers, paris 1887
4 cut sunflowers, Paris August-September
1888년 해바라기, 2차 세계대전 때 화재로 소실
1888.8 아를 개인소장
1988.8 아를,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미술관
1888 아를, 런던 내셔널 갤러리
1989.1 아를, 필라델피아 미술관



아를에서 그린 해바라기 그림은 사실 고갱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것입니다.  

고흐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해바라기 정물화를 그렸을 때 폴 고갱(Paul Gauguin)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요. 고흐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자신이 존경하는 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정확하게 감상한 것은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느낌을 확증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흐는 따뜻하고 밝은 빛을 찾아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술가 커뮤니티를 설립하여 예술가들이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영감을 줄 수 있길 바랐지요.

고흐는 3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7회의 이사를 했는데요.

아를에서 비로소 자신만의 방을 갖게 되었습니다.

방은 작고 허름하지만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했지요.

그러므로 남긴 그림이 <고흐의 방>인데 실제로 그 방은 그림과는 색깔이 달랐다고 해요.

고흐는 그 방을 갖게 된 행복감을 그림처럼 밝게 표현한 것입니다.


고흐는 고갱을 아를에 초대했습니다.

만일 아를에 오면 고갱의 방을 해바라기 그림으로 장식해 주겠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고갱이 아를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4점의 해바라기를 그려 고갱의 방을 밝게 장식했지요.

그것은 우정과 환영의 표시였으며 예술적인 지도자로서 고갱에 대한 빈센트의 헌신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고갱은 고흐가 자신의 방을 위해 장식한 해바라기를 보고 '완전한 빈센트'라고 했습니다.



고흐와 해바라기, 폴 고갱



하지만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은 마찰이 심했고 얼마가지 않아 금이 갔습니다.

고갱이 아를에 온 지 한 달 만에 두 사람은 심하게 다투었고 고갱은 자신의 짐도 내팽개친 채 파리로 떠납니다.

이에 화를 참지 못한 고흐가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되었지요.

아를을 떠난 고갱은 고흐에게 편지를 씁니다.

'내 짐은 다 버려도 되지만 내 방에 걸려 있던 해바라기 그림은 보내주면 좋겠소.'

고갱은 그만큼 고흐의 해바라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고흐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지요.




아르놀피니의 초상화  얀 반 에이크
핑크색의 마돈나('La Madonna dei Garofani')  라파엘
총독 레오나르도 로레단  조반니 벨리니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룬
땅부르 액자를 들고 있는 마담 드 퐁파두르  프랑수아-위베르 드루에
내셔널 갤러리의 대표적인 그림, 싸우는 테메레르  조셉 말로드 윌리엄 터너
Portrait of Hermine Gallia 1904, Gustav Klimt
마담 무아테시에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클로드 모네 수련




파리에 있는 동안 그의 그림이 걸려있는 미술관을 많이 다녔지만 그의 해바라기를 담은 엽서나 프린트화를 판매하는 기프트숍은 없었어요.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라부 여인숙에서도 찾지 못했는데 내셔널 갤러리에는 있더군요.

해바라기와 아를의 의자가 프린트된 작은 그림을 샀습니다.

유럽은 대부분 종이 백을 많이 사용합니다.

빵집을 물론이고 심지어 고기도 종이에 싸줍니다.

환경오염을 줄이려는 의도지요.

종이백에 넣어주길래 물었지요.


'혹시 플라스틱 백이 있나요?, 비가 내려서요.'

'네, 종이백은 무료지만 플라스틱백은 구입하셔야 해요.'

'얼마예요?'

'20펜스예요.'

'네? 20파운드라고요?'


펜스를 파운드로 잘못 알아들은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고 판매원은 웃으며 친절하게 20펜스라고 다시 말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비닐 백을 구매하여 젖지 않게 잘 단단히 여민 후 백팩에 넣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려고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미리 보내주었던 컨펌 메일에는 카운터 좌석이라는 게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여러 번 경험했던 터라 이제 높은 의자가 어느 정도 익숙했지요.

미슐랭 스타를 받은 곳이지만 가격도 합리적이고 인테리어가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고급스럽지 않은 곳이라 선택한 곳입니다.

엔다이브와 얇게 슬라이스 한 배에 잘게 부순 호두 가루를 얹고 부라타 치즈에 올리브유와 비네거를 뿌린 샐러드는 눈으로 보았을 때 우선 색깔이 거의 흰색에 가깝고 플레이팅이 너무 단출해서 약간 밍밍해 보였지요.

하지만 맛은 무척 깊고 풍부했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쫀쫀한 식감의 부라타 치즈는 고소하고, 서양 배와 엔다이브에 뿌려진 비네거는 상큼하면서도 감칠맛이 일품이라 나이프와 포크질을 멈출 수 없었지요.


실크 행커치프라는 이름의 파스타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가장자리를 톱니처럼 모양을 낸 넓은 파스타 안쪽에 월넛 버터를 넣은 후 손수건처럼 접은 후 달걀노른자를 얹은 모양입니다.

셰프가 다가오더니 치즈를 원하는지 물어본 후 직접 갈아주었지요.

파스타 모양새 역시 심플하지만 식감이 쫄깃하고 고소하여 끊임없이 자르고 먹고를 반복했습니다.

제법 크고 두툼한 파스타는 접혀 있어서 양이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접시를 싹 비웠지요.

그렇게 두 접시를 비우고 나니 디저트를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영국식 억양의 웨이트리스가 음식이 어떠냐고 물어보았지요.

두 개의 엄지를 세우며 정말 맛있었다고 기쁘게 대답했습니다.




부라타 치즈 샐러드와 행커치프 파스타



레스토랑에서 세인트 폴 성당까지는 2마일, 약 3.2킬로 미터로 비가 내리는 걸 감안하면 걸어서 약 50분 정도 걸리겠더군요.

배도 부르고 또다시 비싼 언더그라운드를 타고 싶지도 않고 하여 걷기로 했습니다.

런던의 길거리는 파리보다 훨씬 단정한 느낌입니다.

단 거리에서 벤치나 쓰레기통을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빨간색 2층 버스와 빨간색 우체통, 그리고 여전히 쉽게 볼 수 있는 빨간 공중전화박스가 비 내리는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런던의 상징들



횡단보도 앞 신호등이 빨간 불이 켜질 때면 Wait, 초록불이 켜지면 Go라는 글씨가 함께 표시되는데 Stop보다 Wait이 훨씬 부드럽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횡단보도 위에도 주변을 확인하라는 글씨가 쓰여있는데요.

원 웨이, 그러니까 그곳은 일방통행 도로가 많으므로 Look left , Look right, 그리고 양방향 도로의 횡단보도에는 Look both라는 글씨가 거의 쓰여있습니다.

건너기 전에 차가 오는 방향을 한 번 더 쳐다보고 확인하라는 뜻이지요.   

단순하지만 무척 세심하고 배려 깊은 싸인이었습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런던에 있는 성공회 런던 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바로크 스타일의 대표적인 건축물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더불어 런던을 대표하는 종교시설로 영국 왕실의 결혼식이나 넬슨 경과 윈스턴 처칠, 마가릿 대처의 장례식 같은 국가적인 행사가 거행되는 장소이자 위인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성당의 길이는 무려 158.1m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답니다.

1980년 찰스와 다이애나가 결혼식을 올리던 장면을 TV 중계로 보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신부의 드레스 자락은 성당의 계단을 다 덮을 정도로 길게 이어졌고 버진 로드가 너무 길어 신부가 더 긴장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성당 주변은 111m인 세인트 폴 대성당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였고 오늘날까지 런던의 스카이라인의 기준점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런던의 미술관이 모두 무료인데 반해서 성당의 티켓은 무려 23파운드(약 37000원)로 상당히 비싼 편이지요.

대신 한국어 지원이 되는 오디오 가이드가 있어서 유용했습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눈에 잘 띄는 특성은 지름 34m의 거대한 크기의 돔인데요.

돔의 열주들 위에는 석조 난간이 둘러쳐진 널찍한 발코니가 있어 그 위에 올라가 주위의 전경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돌의 회랑(Stone Gallery)이라고 부르고 돔 아래에 있는 회랑을 '속삭이는 회랑(Whispering Gallery)'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돔 안에서의 작은 속삭임도 34m나 떨어진 반대편에서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스톤 갤러리와 꼭대기의 골든 갤러리에 올라가 런던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비가 많이 내리고 시야가 좋지 않아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특이할만한 것은 돔의 내부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인데요.

여타의 다른 성당의 돔들이 화려한 채색을 한 것과는 달리 단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소박하면서도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는 느낌이어서 훨씬 좋아 보였습니다.





돔의 무채색 그림
중앙 제단



중앙 제대 바로 앞 바닥에는 그리니치 최초의 자오선인 플램스티드보다 2년 전인 1673년에 확립된 본초자오선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제의를 입으신 신부님께서 제단을 살짝 빗긴 자리에 마련된 마이크 앞으로 나오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성당을 찾아준 사람들에게 환영의 인사와 함께 간단한 기도를 시작하셨지요.

그곳을 찾은 사람들 대부분은 구경하던 것을 멈추고 잠시 의자에 앉아 신부님의 기도를 듣고 있었지요.

오가는 사람이 뜸해진 틈을 타서 본초 자오선 중앙에서 사진을 찍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손가락으로 V를 그리고 생끗 생끗 예쁜 미소를 지으며 '너도 찍어 내가 찍어줄게'라는 한국말은 매너 없이 너무도 크게 들려왔습니다.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굳이 성당 안에서, 그것도 신부님이 말씀을 하시는 와중에 제단의 정면 중앙을 활보하며 기념사진을 찍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본초자오선



지하로 내려가니 성당을 설계한 사람을 비롯하여 영국의 위인들 200여 명의 묘가 있는데 주로 석관을 바닥 아래 묻어놓아 겉으로 드러난 묘는 많지 않았습니다.

가벼운 스낵을 먹을 수 있는 좌석과 기념품 숍, 화장실이 있는데 마침 단체로 체험 학습을 하러 온 초등학생들이 바글바글합니다.

맘에 드는 상품이 꽤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역시나 가격이 비싸서 구입은 하지 않았지요.

 



세인트 폴 성당의 지하에 있는 넬슨 제독의 묘



런던에서 계획한 하루 일정이 끝났습니다.

파리로 돌아가려면 판크라스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야 하는데 그곳까지 걸어간다고 해도 시간이 남습니다.

맘만 먹으면 템즈 강변으로 가서 보수 중이라 가림막이 쳐있던 빅벤과 웨스터민스터 사원을 볼 수도 있었지만 굳이 피로를 더하고 싶지는 않더군요.

그냥 비 내리는 런던 거리를 천천히 걷기로 했지요.

약 50분을 걸어 역에 도착했습니다.


유로 스타를 타는 곳은 역의 가장 안쪽이었는데 책 모양으로 만들어진 크리스마스트리가 흥미롭더군요.

그곳까지 가는 동안 피아노가 세 대나 있을 만큼 역은 길고 큽니다.

한 남자가 피아노를 치고 있습니다.

쎄미 클래식을 메들리로 연주하다가 중간에 캔 맥주 한 모금 마시고 바닥에 내려놓은 후 다시 연주를 하고 또 마시고를 반복했지요.

그의 곁에는 일행 같아 보이지 않는 한 남자가 그의 연주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서 있습니다.

이윽고 피아노 연주를 마친 남자가 일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나고 강렬한 터치로 재즈를 연주합니다.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설치된 책으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
역에는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가 여러 대 있음



폴의 외부 테이블에 앉아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으며 그들의 연주를 지켜보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지요.

내 옆자리에 두 남자의 수다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 소리 또한 백색소음이라 여기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지금 이 시간을 얻으려고 파리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와서 갤러리와 성당을 거쳐 여기에 앉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특별한 순간은 소중하다.'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sir John betjeman



드디어 내가 탈 기차를 체크인한다는 싸인이 전광판에 떴습니다.

옆 좌석에 여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고 예쁜 아가씨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는 앉았습니다.

노트북을 꺼내놓고 뭔가를 하는가 싶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펌을 해서 부풀려진 길고 풍성한 머리칼에 양 손가락을 넣어 쓸어내리기 시작했는데요.

그건 거의 강박적인 행동이었고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다 보니 멀미가 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겉 보기엔 너무나 세련되고 지성적인 외모의 그녀가 겪고 있는 불안정하고 초조한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날은 하필 11번 메트로가 10시 이후에는 운행을 안 하는 날이었지요.

11번 노선은 2024년 4월에 6개의 정류장이 증설되는 관계로 아예 운행을 안 하거나 10시 이후에 운행을 안 하는 날이 있었고 역마다 공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버스를 타야 했지요.

파리 북역에서 버스를 타고 집 근처 종점에 내려 약 1km를 걸어가야 합니다.

전광판에는 내가 타야 할 48번 버스가 25분 후에 도착할 예정 표시가 되어 있었지요.


한 남자가 몸을 비틀거리며 반대쪽에서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기온이 꽤 쌀쌀한 밤인데 얇은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그는 실실 웃으며 헛소리를 해댔지요.

술에 취한 건지, 약을 한 건지, 지적 장애가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를 피해 정류장 뒤편에 숨어 서 있는데 버스는 30분이 되어도 오지 않았지요.

주변 상점은 이미 문을 닫았고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던 정류장 앞의 케밥점도 셔터를 내렸습니다.

두려움은 점점 커져갔고 우버를 부를까 생각하던 차에 버스가 왔습니다.


앞에도 빈자리가 있지만 여성 두 명의 맞은편 좌석에 앉았지요.

그런데 문제의 그 남자와 정류장에 서 있는 흑인 청년 한 명도 내 뒤를 따라 버스에 타는 겁니다.

게다가 문제의 비틀거리던 남자는 내 뒷자리에, 흑인 청년은 맨 뒤에 앉았지요.

늦은 시간이어서 버스는 타는 이도 내리는 이도 없이 달렸고 내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옆에 있던 두 여성이 중간에 내린 것이지요.

유리창으로 뒤에 앉은 남자의 동태를 살피며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행히 나보다 두 정거장 앞에서 내리더군요.

이제 맨 뒤에 앉은 청년이 문제입니다.

혹시 나쁜 생각을 갖고 나를 따라서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왜 나쁜 예감은 비껴가지 않는 걸까요?

그는 나와 같은 곳에서 하차했습니다.


다행히 내가 내린 정류장 포르트 데 릴라에는 사람들이 간간히 있었고 불이 켜진 상점도 꽤 있었지요.

나는 거의 경보 수준으로 걸었습니다.

한참을 내달리듯 걷다가 뒤돌아보니 흑인 청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더군요.

온전히 나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든 두려움이었지만 무척 긴장되고 겁이 났던 한 시간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 반, 17시간 30분 만에 돌아온 거죠.

21803보, 16.56킬로를 걸었더군요.

긴장이 풀리니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왔습니다.

밤 12시가 되어가는데 라면 물을 올렸습니다.


인생은 도착하지 않는 긴 여행입니다.

도착점이 있는 여행이라면 그건 죽음이겠지요.

멀고 긴 하루를 보낸 후 들었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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