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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an 04. 2024

캔버스에 스며든 비극의 블랙

27. LVMH, Mark Rothko            





세계적인 슈퍼 리치들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중 하나는 예술일 겁니다.

먹고사는 데 불편함이 없는 그들은 예술세계에서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과 카타르시스를 찾지만 당장 한 끼 식사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예술을 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부자들이 예술과 문화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는 것은 결국 미래 가치에 대한 투자이기도 합니다.

연예인, 운동선수, 재벌, 유명 유튜버 등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일컬어 인플루언서라고 하지요.

그들 역시 예술품의 수집과 투자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른바 화(畵) 테크 라고 하는 말이 생겨날 정도니까요.

얼마 전 삼성은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이라 불리는 문화재와 미술품 23,000여 점을 국가에 기증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 알려지지 않은 예술품의 가치는 아무도 모를 정도라고 하니 슈퍼 리치들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대단합니다.  

  


부자가 예술과 학술 활동을 후원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의 메디치 가문입니다.

그들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섬유 사업으로 가세를 키워 피렌체의 정치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했었지요. 메디치 가문은 전 세계의 고서를 수집하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했습니다.

만일 메디치의 후원이 없었다면 오늘날 남아있는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등의 작품이 탄생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수많은 작품들이 모두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탄생하고 보존해 온 것들이니까요.



마크 로스코의 전시를 보러 가는 날입니다.

전시회를 보려면 루이뷔통 재단으로 가야 하는데 티켓을 예매하면서 셔틀버스 티켓도 구매했습니다.

블루 버스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전기버스는 개선문 앞에서 탑승하면 됩니다.

메트로에서 내려 약 1km를 걸어가도 되지만 이참에 개선문도 다시 보자는 생각이었지요.

 



오전 9시 즈음의 개선문
루이뷔통 셔틀버스



루이뷔통 재단(Louis Vuitton Foundation for Creation)은 LVMH 그룹과 그 자회사가 후원하는 프랑스 미술관이자 오디토리움을 갖춘 종합 문화 센터입니다.

프랑스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LVMH의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의 어머니는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아르노의 현재 아내 역시 피아니스트이며 블랙 핑크의 리사와의 열애설에 휩싸인 그의 셋째 아들 프레데릭 아르노 또한 피아노 실력이 프로급이지요.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어 등 총 4개 언어를 구사하는 프레데릭 아르노(28세)는 현재 세계적인 명품 시계인 태그호이어의 CEO입니다.




베르나르 아르노의 LVMH 가 보유한 브랜드
베르나르 아르노 부자(프레드릭 아르노)




LVMH의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는 현재 일론 머스크에 이어 세계 2위의 재산을 갖고 있는 부자 중에 찐 부자입니다.

그는 2001년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방문한 후 그곳의 건축을 디자인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를 만났습니다.

건축물이 썩 마음에 들었던 거죠.

그리고 예술과 창작에 전념하는 건물에 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파리에 루이뷔통 파운데이션을 개관했습니다.(2014년)

1년 전에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에 갔던 지라 그가 디자인한 건축물의 특징을 조금은 알고 있지요.

만일 마크 로스코 전시가 아니었다면 루이뷔통 재단을 보기 위해 따로 방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스틸과 메탈을 주조로 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건축물에 그닥 정이 가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셔틀버스에서 내리니 오픈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50명쯤은 되었습니다.

빌바오의 구겐하임이 연상되는 건물이 보였는데 그 규모나 디테일이 훨씬 못 미쳐 보였습니다.




마크 로스코 전시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 많았다.
LVMH 파운데이션 전경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전경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 화가로 본명은 마르쿠스 로스코비츠입니다.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예술가이며 거대한 화폭에 단순한 사각형의 색면을 칠한 판화로 유명하지요.

그의 파리 전시는 1999년 파리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이후 24년 만이라고 합니다.

그의 그림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워싱턴 국립미술관, 런던 테이트 미술관, 워싱턴 필립스 컬렉션, 그의 가족이나 개인 소장품 등 115점의 그림이 13개의 전시장에 나누어 걸려 있었습니다.


무관심한 듯 쓱 지나가다가도 결국 발길을 붙잡는 건 오로지 평면에 스며든 기묘한 넓은 색의 면입니다.

캔버스에 칠해진 혹은 덧발라진 오일의 느낌이 아니라 그저 색 자체로 존재하며 은은하게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예술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작가들의 이야기는 수다스럽지만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고요하게 집중하게 되며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게 합니다.

모든 미술작품은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기 마련입니다.

내 경우 팝아트보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선호하는 이유가 바로 그 정적인 차분함 때문입니다.




저시실 앞에 설치된 마크 로스코 사진
1층 로비



마크 로스코는 관람객들이 자신의 그림을 관람하는데 다른 작가들의 작품으로 방해받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늘 커다란 작품만 그렸는데 그것은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하고 싶은 이유라고 해요.

      

"대형 작품을 제작할 경우 화가 자신이 그 그림 속에 담긴다."     


그의 그림은 곰곰이 뜯어봐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궁금해할 내용도 없지요.

그저 작가가 선사하는 공간 앞에 있다 보면 스스로 치유받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림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단순히 본다 라는 의미만 두면 되는 것이지요.          


마크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을 관람객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의 공간에 최고의 작품이 걸리도록 직접 큐레이팅하는 것으로 유명한 까다로운 화가였습니다.

이런 그의 요구를 잘 순응해 준 덕에 워싱턴 D.C. 의 내셔널 갤러리, 런던의 테이트 모던, 샌프란시스코 모마, 뉴욕의 휘트니 뮤지엄, 구겐하임 등은 그의 그림을 마크 로스코 재단으로부터 기증받을 수 있었지요.



개인적으로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은 사각형을 분할하여 그린 것만 알고 있었는데요.

첫 번째 전시실은 1930년대 그의 초기 작품인 뉴욕 지하철 풍경 등 고대 신화와 초현실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레퍼토리들을 주제로 하는 그림들로 시작합니다.

그는 관객들이 자신의 그림을 볼 때 45cm 떨어져서 관람하길 원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과연 전시실의 모든 그림 앞에는 일정 거리의 단차를 두고 제지선을 설치해 두었더군요.

아마도 저 거리가 45cm겠지?

그의 자화상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1936년에 그린 유일한 자화상
지하철 입구


지하철



바다 가장자리의 느린 소용돌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의 그림의 특징인 정지된 색채 덩어리가 서로 균형을 이루며 추상화로의 전환을 시작한 것은 1946년의 작품부터입니다.

1950년대 말부터 로스코는 어두운 톤과 차분한 대비를 선호했지만, 1967년의 여러 캔버스와 스튜디오에서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마지막 빨간색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밝은 색상 팔레트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말에 Rothko는 순수한 색상의 영역으로 캔버스를 그렸고 이를 직사각형 색상 형태로 더욱 추상화했는데, 그것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지속되었지요.

그의 작품 제목은 초기 작품을 제외하고, 무제(untitled), 혹은 Red, orange등의 컬러 이름을 붙이거나 No.2 1964 하는 식의 번호만 붙여놓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No.5 / No.22(1950)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러시아의 드빈스크(현재의 라트비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약사이자 지식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낮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질 높은 교육을 시켰고 그의 가족은 늘 독서를 즐겼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들이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될 것을 막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대장암으로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형제들은 온갖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나갔지요.

1913년부터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로스코는 월반을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이어갔고 1922년 장학생으로 예일대학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예일대학의 학생들 대부분이 엘리트주의이자 인종차별주의라는 생각을 한 로스코는 2학년 말에 중퇴했고, 46년 후 명예학위를 받을 때까지 예일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친구가 그를 회상하기를 로스코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독서에 열중했다고 전했습니다.

1923년 가을, 그는 뉴욕의 의류 지구에서 일자리를 찾다가 학생들이 스케치하는 것에 흥미를 느껴 예술가로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지요.

그는 당시 프랑스 아방가르드 운동의 일원이었던 입체파 예술가 막스 베버 (Max Weber)의 스튜디오에서 강좌를 수강했고 그의 칭찬을 받으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 로스코 씨, 작가님의 위선을 솔직하게 인정하시라고요. 현대 미술의 대사제께서 소비의 신전 벽에 그림을 그리는 거 말예요. 예술에 상업주의가 들어가는 걸 욕하시는 분이 지금 돈을 받고 그림을 그리기로 한 거잖아요.


- 나도 거기(시그램 빌딩의 고급 레스토랑 포 시즌스)가 뉴욕에서 제일 돈 많은 놈들이 자랑질하면서 밥 먹으러 오는 데라는 거 알아. 난 내 그림으로 거기로 밥 먹으러 오는 놈들의 식욕을 싹 떨어트려 주고 싶다고.


이것은 2인극으로 만들어진 연극 <레드>의 대사 중 일부인데요.

로스코와 그의 조수가 하는 대화입니다.

 

1958년 음료 회사인 시그램이 초고층 건물을 완공했을 때 로스코는 그 건물에 새롭게 문을 여는 고급 레스토랑인 Four Seasons 벽화를 의뢰받았지요.

로스코에게 시그램 벽화는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으로 조화로운 일련의 그림을 디자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크고 특정한 인테리어를 위한 예술 작품 공간 콘셉트를 제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로스코는 3개월에 걸쳐 진한 빨간색과 갈색으로 이루어진 3개의 전체 시리즈로 구성된 그림을 그리던 중 로스코는 잠시 휴식을 위해 가족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지요.

그때 하퍼스 매거진은 시그램의 벽화는 '음식을 먹는 모든 개자식들의 식욕을 망치는 것'이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로스코는 레스토랑의 식사 분위기가 자신의 작품 전시에 부적절하고 가식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뉴욕으로 돌아온 로스코는 포 시즌스 레스토랑을 방문하여 프로젝트를 취소하고 선지급으로 받았던 현금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비싼 음식을 먹는 사람들 따위들은 절대로 내 그림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지요.

시그램 포시즌스에 걸리기로 되어있던 그림은 현재 런던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 9점이 기증되어 있고 일본 벚꽃의 가와무라 기념 미술관에 7점이 전시 중입니다.




런던 테이크 갤러리에 기증된 시그램 벽화



미국의 필립스가 그의 그림 네 장을 구입한 후 워싱턴 DC의 필립스 컬렉션을 만들면서 그의 명성은 크게 알려지고 부를 쌓아나갔습니다.

그의 그림은 록펠러 가문을 포함한 유명한 수집가들에게 판매되기 시작했고 1961년 존 F. 케네디의 취임 무도회에서 조셉 케네디 옆자리에 초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예술계는 앤디 워홀, 리히텐슈타인, 로젠퀴스트 등의 팝 아트 작품으로 관심이 쏠렸고 이에 로스코는 팝아트 예술가들은 '사기꾼이자 젊은 기회주의자'라고 하며 반발했습니다.



The Rothko Room The Phillips Collection



나는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마크 로스코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일종의 스탕달 신드롬입니다. 


-스탕달 신드롬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이 1817년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방문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아름다운 그림 베아트리체 첸지의 그림을 감상하다가 무릎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수차례 경험했다.

스탕달은 자신이 겪은 현상을 그의 책《나폴리와 피렌체: 밀라노에서 레기오까지의 여행에 묘사했고 '스탕달 증후군'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왔다. 19세기 초반부터 우피치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감상하다가 어지러움을 느끼거나 기절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었지만, 1979년에 이탈리아의 정신의학자 그라지엘라 마게리니(Graziella Magherini)가 이런 현상을 경험한 약 100여 건 이상의 여행객들의 사례를 조사하면서 유명해졌다. (출처 : 위키백과)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그림, 베아트리체 첸지



"나는 오직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극, 황홀, 파멸 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그림들을 마주했을 때 부서지고 운다는 사실은 내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을 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가 어릴 때부터 읽었던 칼 융, TS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등의 책을 읽음으로써 시작되었고 로스코에게 가장 중요한 니체의 거서 <비극의 탄생>으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예술가에게 비극을 아름다움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니체의 생각을 로스코는 그림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지요.


1968년 초, 로스코는 가벼운 대동맥류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로스코는 의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과음과 흡연을 했으며, 운동을 피하고 건강에 해로운 식습관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큰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종이에 아크릴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육체적으로 덜 힘든 형식이었지요.

동맥류로 인한 건강 악화와 스트레스로 인해 로스코는 부인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1969년 이혼했고 자신의 스튜디오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인 1970년 2월 25일, 로스코의 조수는 로스코가 부엌 싱크대 바닥에 피범벅이 되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66세)

그는 바르비 투르산염을 과다 복용하고 면도날로 오른팔의 동맥을 절단했는데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살하던 날, 시그램에 걸기 위해 제작했던 벽화는 테이트 갤러리에 전시하기 위해 런던에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6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의 캔버스에서 비극의 음률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림을 보았기에 일종의 선입견일 수도 있겠지요.

레드와 블랙이 주를 이루다가 마지막에는 온통 블랙으로 가득했습니다.

사실 그 전시실은 섬뜩하여 오래 머무르지 못했지요.

이미 그의 캔버스에는 죽음이 들어와 앉아있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한 여성이 그의 작업실을 찾아와 따뜻한 색감이 돋보이는 행복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을 하자 로스코는 '빨강, 노랑, 주황, 그거 지옥의 색이 아니냐'라고 반박했다고 해요.    

생애 말기에 로스코는 회색 직사각형 위에 검은색 직사각형이 균일하게 나타나는 "Black on Grays" 시리즈를 그렸습니다.

이 캔버스와 로스코의 후기 작품 전반은 그의 우울증과 자살과 관련되어 있지만, 그 연관성은 비판을 받았지요.

그의 후기 그림은 흑백의 침울한 팔레트였고 1950년대에 자주 사용한 밝은 색상과 대조되므로 아마도 그것은 '화상 자살 메모'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로스코의 아내였던 멜은 그보다 6개월 뒤 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고혈압으로 48세에 사망했습니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로드햄 클린턴의 첫 데이트는 예일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린 로스코 전시회였고 패션 디자이너 지방시는 1971 년 로스코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직물을 선보였습니다.

또한 12 음기법으로 유명한 작곡가 쇤베르크는 Finding Rothko라는 곡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로스코가 캔버스에 그린 작품은 총 836점으로 제목은 대부분 작품에 사용된 색상으로 명명되었고 경매 낙찰가는 해가 갈수록 계속 올라가고 있는데요.

2005년 11월, '마티스에 대한 경의( Homage to Matisse , 1954)'는 2,250만 달러에 팔리며 공개 경매에서 전후 그림 최고 기록을 경신했고,      

2007년 5월,  White Center (Yellow, Pink, and Lavender on Rose,1950)는 뉴욕 소더비에서 7,280만 달러에 팔리며 기록을 경신했는데 데이비드 록펠러에 의해 팔렸습니다.     

2012년 5월,  Orange, Red, Yellow (1961)는 뉴욕 크리스티에서 8,680만 달러에 판매되어 공개 경매에서 전후 그림에 대한 새로운 명목 가치 기록을 세웠습니다.


로스코는 코팅되지 않고 처리되지 않은 캔버스에 안료와 혼합된 바인더의 얇은 층을 직접 적용하고 상당히 묽은 오일을 직접 칠하여 겹치는 색상과 모양의 조밀한 혼합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붓놀림은 빠르고 가벼웠으며, 그는 죽을 때까지 이 방법을 계속 사용했다고 합니다.




마크 로스코의 마티스에 대한 경의(1954)
Yellow, Pink, and Lavender on Rose,1950
Orange, Red, Yellow (1961)




뼈대만 남은 남자가 걸어가는 모습의 자코메티의 조각과 온통 블랙과 그레이로 가득한 그의 후기 작품들을 끝으로 13개의 전시실을 돌아보고 나니 기운이 빠지더군요.

루이뷔통 재단의 건물 곳곳에는 그곳의 건축을 디자인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스케치가 곳곳에 걸려있고 건축 과정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아마도 베르나르 아르도 회장의 그에 대해 갖고 있는 존경과 만족의 표현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1층 로비에는 예약제로 운영하는 미술랭 스타 레스토랑과 기프트 숍도 있습니다.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오디토리움과 누구나 그림을 그리거나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공간이 좋아 보였습니다.







레스토랑 천장에 설치된 조형물
미슐랭 레스토랑


베르나르 아르노와 프랑크 게리
프랑크 게리의 스케치
프랑크 게리가 전하는 루이뷔통 파운데이션의 설립 이야기
루프탑에서 보이는 파리 라테팡스 전경
LVMH 모형
마크 로스코의 연혁





얼마나 몰입을 했는지 기를 다 빼앗긴 듯 피곤이 몰려오더군요.

외부로 나가 재단 주변을 돌아볼 수도 있지만 별로 내키지도 않을뿐더러 그럴만한 여력도 없었습니다.

셔틀버스의 출발을 기다리며 기념품숍에서 구매한 그의 도록을 뒤적였습니다.

이런 말들을 남겼더군요.


- 침묵은 매우 정확합니다.

- 나에게 예술은 정신의 일화입니다.

- 모든 것을 말하는 것보다 적게 말하는 것이 더 큰 힘이 있습니다.

- 내가 화가가 된 이유는 그림에 음악과 시만큼이나 강렬한 감정의 힘을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크 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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