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나무 Jan 07. 2024

샹티이 성의 셰프, 바텔

29. Chateau de Chantilly






기차역에서 샹티이 성까지 약 2.5km,

샹티이 숲을 지납니다.

간간히 자전거가 지나가고 나 혼자 길을 걸어갑니다.

10월 말이 무색하게 푸르고 거대한 초원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길이 보였습니다.

레이스가 달린 넓은 챙모자를 쓴 귀부인들이 흙먼지 날리는 마차를 타고 그곳을 지나다녔을 테지요.




샹티이 역
샹티이 숲









목적 없이 펼쳐진 초원

줄지어 서있는 키 큰 나무들

이런 곳을 걸어본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싶습니다.

그 길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맘이 벅찼지요.

초원을 벗어나 작은 도로로 들어서니 학교 앞에 부모님들이 하교할 아이들을 기다립니다.

무심코 지나치는데 눈에 익숙한 글씨가 보였습니다.

École Paul Cezanne(폴 세잔 학교)

학교 이름이 폴 세잔이라니 프랑스 다운 발상입니다.

세잔의 고향은 남프랑스의 엑상 프로방스로 그곳에서 오래도록 살았습니다.

지난해 엑스를 여행할 때 세잔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왜 샹티이의 초등학교에 그의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구글링을 해보았지요.

세잔은 1888년 여름, 샹티이에서 몇 달 동안 살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한개가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았던 샹티이거리였습니다.




École Paul Cezanne(폴 세잔 학교)
샹티이 거리 Allée à Chantilly 1888



드디어 궁전이 보입니다.

다 왔구나 싶었지요.

그런데 그곳은 놀랍게도 샹티이 성이 아니라 마구간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말도 궁전에 살더군요.




Great Stables
Great Stables




프랑스에는 약 4만 5천 개의 샤토(샤토는 프랑스어로 성)가 있습니다.

프랑스 전체에 있는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이 3만 6천 여개인데 이보다 성이 더 많다는 겁니다.

17세기~19세기 귀족이 0.5%였던 것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18세기의 프랑스는 극심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급속한 인구 증가로 인해 식량은 턱없이 부족하여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으며 파리의 물가 상승은 빵 폭동을 불러왔습니다.

부패한 귀족층과 세습적인 군주제 체재에 대한 불만, 그에 따른 어마어마한 세금 부담, 식량난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곪아 터진 것입니다.

불과 1%도 안 되는 귀족들과 성직자는 세금은 한 푼도 안 내면서 권력과 부를 남용하며 사치스런 생활을 이어갔고 이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지요.

그렇게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왕의 부부가 참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에 성이 많은 첫 번째 이유는 주로 군사 및 보안 목적 때문입니다.

영국과의 100년 전쟁을 치르면서 프랑스 전역의 도시, 마을을 요새화하고 부유한 지주와 귀족이 영국군의 표적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지요.


현재 프랑스에는 버려진 성이 많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규모가 크고 역사가 깊은 성을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을 유지할 자원이 없는 일부 성주들은 그대로 방치하여 폐가처럼 변한 곳도 있고 간간히 철거되기도 합니다.

그중 대다수는 국내외 구매자가 매입하여 거주하거나 개조하여 파티나 결혼식, 휴양을 위한 B&B로 운영되는 성도 많다고 합니다.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파리 근교의 궁전으로는 베르사유가 단연 으뜸이지만 퐁텐블로, 샹티이 궁전 역시 거리가 비교적 가깝습니다.(뮤지엄 패스 사용 가능)

화려한 것보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더 좋아하기에 궁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샹티이에 온 것은 콩데 미술관 때문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북쪽으로 41㎞ 떨어진 샹티이 성은 1528년부터 1560년 사이에 건립됐으며, 후에 그랑 콩데(Grand Condé)와 후손에게 상속돼 콩데 성이라고도 부르는데요.   

마지막 소유자였던 앙리 도를레앙(Henri d‘Orléans)이 성과 소장품을 프랑스 학사원에 기증하여(1897년)

콩데 미술관(Musée Condé)이 설립되었습니다.

또한 콩데 미술관의 모든 예술품을 외부로 대여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는데 그것은 기증자의 기부 조건이라고 합니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과 네덜란드 헤이그의 마우리츠 하이스 미술관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외부로 대여하지 않는 규정이 있는 것과 같지요.




샹티이 성 앞에 세워진 몽모랑시 동상







콩데는 왕에게 불복종한 일로 인해 거의 10년 동안 경제적인 지장을 겪고 있었습니다.

1671년 4월, 수년간 샹티이 성의 대대적인 보수를 마친 콩데는 루이 14세와 귀족들을 자신의 성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동안 소원했던 왕에게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의도였지요.


파티는 4월 23일 목요일 저녁부터 4월 25일 토요일 저녁까지 3일 밤낮 지속될 예정이었고 루이 14세와 200~600명의 베르사유 궁정원들을 대접하려면 수많은 하인과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콩데는 이 거대한 행사의 총감독을 페이스트리 셰프이자 케이터링 담당자인 프랑수아 바텔(1631-1671)에게 맡겼습니다.

바텔은 1663년에 콩데 왕자의 <음식 총책임자>로 승진한 후 성에서 사용되는 모든 음식과 관련된 구매, 공급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담당하고 있었지요

축제의 성공에 운명이 달려 있던 왕자는 그 모든 책임을 바텔에게 전하여 압박을 가했습니다.

왕의 환심을 얻기 위한 파티를 위한 준비할 기간은 겨우 15일,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바텔은 12일 동안 잠도 안 자고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671년 4월 23일, 초대된 손님들 일행은 사냥을 마치고 샹티이에 도착합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는 은식기로 세팅된 80개의 테이블, 30개의 꿩과 메추라기, 오르톨란, 자고새 등 다섯가지 코스로 구성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24개의 바이올린은 룰리(Lully)의 음악을 연주하고 이 행사를 위해 특별히 작곡된 몰리에르의 코미디 발레를 공연할 예정이었지요.











하지만 파티에 참석한 인원은 예정보다 75명이나 초과되어 테이블이 부족했고 바텔은 준비를 더 완벽하게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지게 되지요.

'나는 명예를 잃었어 이런 불명예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어'라는 말을 반복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저녁 식사를 마친 왕자가 바텔을 찾아와 식사가 매우 훌륭했다며 부족한 두 테이블의 고기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위로했습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안개가 많이 끼고 날씨가 좋지 않아 불꽃 놀이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즈음 민물고기인 연어, 송어를 잡는 게 어려운 시기여서 영국 해협의 최대 어항이었던 단골 가게에 가자미를 비롯한 생선을 미리 주문해 놓았던 터였지요.

바텔은 남들은 모두 자고 있을 시각인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모든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생선은 2박스만 도착했습니다.

그는 '그게 다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예, 선생님.'

중요 식재료가 도착하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 수 없게 되었고 전날에 이어 연이은 실패를 한 바텔은 견딜 수 없는 수치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서 칼로 자신의 복부를 찔렀습니다.

한번, 두번, 세번을 거듭 찌른 후 죽음에 이르렀지요.

주인을 실망시킨 굴욕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택했던 위대한 셰프이자 마스터인 바텔의 종말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순간 주문한 생선이 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요리를 담당한 바텔을 애타게 찾고 있었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뒤늦게 생선 요리가 제공되었지만 손님들은 바텔에 대한 미안함과 예의로 이 요리를 먹지 않았습니다.

당시 자살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자살한 사람은 심각한 죄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장례식은 물론 매장도 허락되지 않았고 시체를 선반에 묶어 끌고 가거나 쓰레기로 버려지던 시대였지요.

하지만 그의 죽음 소식에 눈물을 흘린 콩데는 그를 조심스럽게 묻어주었고 바텔은 프랑스의  특별한 잔치를 주최했던 전설의 셰프로 남았습니다.




프랑수아 바텔



콩데 미술관 컬렉션은 회화 830점, 드로잉 및 판화 5,000점, 조각 250점, 오래된 사진 1,000점 등 15,000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술관에 걸린 그림의 위치는 당시의 모습 그대로 라고 하는데요.

그것 또한 기증자의 요청이었습니다.


아말 공작이 엄선한 85점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가장 큰 방에는 크고 작은 금빛 액자들이 빼곡하게 걸려있었습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회화처럼 수준 높은 성화와 일반 작품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 렘브란트와 보티첼리의 <가을>, 라파엘로의 <로레트의 성모 마리아>, 사세타의 <프란치스코의 신비로운 결혼>,들라크루아의 <두 명의 포스카리> 로의 <시골의 콘서트>, 반 다이크의 < 여인의 초상> 등이 있습니다.


오늘날과 그 시대가 정의하는 아름다움에는 차이가 있지만 표현력이 풍부한 눈, 주름진 얼굴과 사진같은 정교함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그림들에는 흥미로운 스토리가 담겨 있기에 상상하는 맛이 쏠쏠합니다.

그들이 입고 장착한 무기와 갑옷, 또는 치렁치렁하고 프릴이 많은 여성들의 드레스들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늘 궁금합니다.








카미유 코로
들라크루아
반 다이크
반 다이크
반 다이크
앵그르
렘브란트
렘브란트



<오를레앙 가의 성모> <세 가지 미의 신> 등 라파엘로 그림은 따로 작은 방을 마련해 걸려 있었습니다.

그중 <로레트의 성모 마리아>는 <베일의 성모 마리아>라고도 불리는데, 그림 속의 마리아가 얇은 천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에는 아기 예수·마리아·요셉으로 이루어진 성가족이 등장하지만, 그냥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고 있어요.

엄마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가 잠잘 때 덮어주었던 천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립니다.

아기가 벌레에게 물리지 않도록 덮어 준 천을 걷어냅니다. 그건 일종의 모기장이지요.

천을 올리자 잠을 깬 아기 예수가 천을 붙잡으려고 하고 요셉은 마리아 뒤에서 조심스럽게 바라보는데요.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성가족 역시 우리의 보통 가정처럼 평범하게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렸다고 합니다.




라파엘로 <오를레앙 가의 성모>


라파엘로 <세 가지 미의 신>


라파엘로 <로레트의 성모 마리아>




또한 샹티이 성에서 빠트릴 수 없는 곳은 도서관입니다.

1500여 점의 사본과 1만 2500여 점의 진귀한 도서가 있는데 열람과 관람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이 도서관에 소장된 ‘베리 공작의 풍요로운 날들’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1410년)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채색 사본으로 꼽힌다고 하는데 고딕 양식으로 그려진 131장면의 아름다운 삽화가 있습니다.

수백 년 전에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존 상태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섬세하고 또렷한 채색, 다시 말해서 디테일이 섬세한 컬러가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다른 성과 마찬가지로 샹티이에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던 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 가장 기품 있으며 귀한 공간은 작은 예배당이었지요.












성에 실제로 거주했던 귀족들의 초상화와 도자기 등 생활가구와 용도별 방이 있는데 다른 곳과 별 다른 차이는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은 건물 크기의 수백, 수천 배가 넘는 정원과 연못을 갖고 있는데요.

상티이 역시 정원과 호수를 다 돌아보려면 4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정면의 호수에는 많은 백조들이 노닐고 있었고 핼로윈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천막과 음향 시설들을 설치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잠시 볜치에 앉아 그야말로 백조의 호수를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귀족이 되어보는 거죠.


















당시 프랑스 왕족이 가장 좋아하는 활동은 개를 데리고 사냥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반려견과는 차원이 다른 목적에 의해 개를 사랑한 것이지요.

성의 입구에 두 그룹의 개 조각상이 있는데 19세기 최고의 동물 조각가 중 한 명인 어쿠스트 카인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조각의 옆에는 콩데 마크가 새겨져 있고 각 개들의 이름이 밑면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보았던 말들의 궁전은요.

콩데의 7대 왕자인 루이 앙리 드 부르봉이 말 240마리와 사냥개 400마리를 위해  Great Stables을 지었습니다.(1719년에서 1740년)

오늘날 마구간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곳에는 말의 마구간과 박물관이 있습니다.

샹티이 성 근처에 프랑스 최대 규모의 경주마 훈련 커뮤니티가 있는데 무척 넓어보이더군요.

실제 그곳에서 훈련하는 경주마와 경마를 즐기는 사람들의 개인 소유의 말도 있다고 합니다.














파랗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합니다.

이젠 비가 내려도 그러려니 하며 웬만하면 우산을 꺼내지도 않을 만큼 적응이 되었어요.

왔던 길을 되짚어가지 않고 마을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거리는 조금 멀어지겠지만 어떤 동네인지 궁금했거든요.

젊잖은 샹티이 성의 분위기처럼 거리는 소박하고 조용했습니다.

그 흔한 카페나 기념품 숍 하나도 없더군요.

마을을 지나는 길은 길지 않았고 곧 샹티이 숲길로 들어섰습니다.





샹티이 숲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 왕에게 환심을 사려고 무리한 파티를 열었던 콩데, 주인님의 파티를 망쳤다는 생각에 자살을 한 셰프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나는 평범한 것을 요하게 여기는 편인데 사실 평범하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풍족하고 사치스러운 것에 대한 열망이 클수록 불만도 커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집 근처에는 이틀이 멀다 하고 드나드는 작은 빵집이 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작은 바게트 하나, 슈케트 열개와 납작하게 썬 사과가 가지런히 올려진 애플파이 한 개를 샀지요.

이 모두가 6유로도 안됩니다.

닭다리가 가슴살보다 값이 더 싼 게 신기했던 테이크 아웃 상점인 치킨 촉에서 전기구이 닭가슴살도 두 쪽 샀습니다.

고소한 치킨과 달콤한 디저트를 먹을 생각에 벌써 신이 납니다.

마음이 편하면 그런 사소함 조차 소소한 기쁨이 되지요.

시냇물 아래로 작은 돌멩이들이 구르듯 무심한 시간이  지나갑니다.




치킨 촉





 



매거진의 이전글 1년 집세 200억, 곡물 창고에 사는 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