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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an 13. 2024

프랑스의 알프스, 안시

30.Annecy






나만큼이나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 R이 추천해 준 안시는 호수와 마을을 가로지르는 작은 운하가 있어 알프스의 베니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리 여행을 계획하면서 안시의 에어비앤비를 2박 예약해 두었지요.

물론 기차 티켓도 미리 사두었습니다.

안시까지 직통으로 가는 기차가 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리옹에서 환승하는 티켓을 구입했지요.

리옹에는 Lyon part dieu와 Lyon perche라는 두 개의 역이 있습니다.

10년 전 친구와 리옹을 여행할 때 모르고 잘못 내려서 헤매던 생각이 났지요.


프랑스를 여행하는데 기차는 이태리 고속열차 프레시아 로싸입니다.

불과 6개월 전에 타고 다니던 기차를 만나니 반갑더군요.

기차를 예매하며 좌석을 선택하는데 사일런스석이 보였습니다.

이왕이면 조용한 게 좋겠다 싶어 선택했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유리창까지 작은 도트 무늬로 선팅을 해놓아서 바깥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창으로 스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보는 즐거움이 없으니 낭패였지요.

흡사 창문도 없이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갇혀 묵언수행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일런스 좌석
안시 역



숙소는 기차역에서 약 5분 거리입니다.

2박 3일 머물 거라 캐리어는 파리에 두고 백백 하나에 최소한의 짐만 챙겨 왔습니다.

구시가지의 한가운데에 있는 숙소는 운하도 가깝고 환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작은 스튜디오입니다.

오래된 천장의 서까래와 외벽의 돌은 살려두고 깔끔하고 모던한 가구로 꾸며진 숙소가 맘에 들었지요.





숙소 창으로 보이는 구시가지 골목



딴 나라에 온 듯 파란 하늘과 흰구름이 펼쳐져 있습니다.

매일매일 우중충하고 비 내리는 파리에서 보낸 16일이 보상을 받는듯했지요.  

작은 상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구시가의 골목과 운하 주변에는 여행자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구글맵을 뒤적이지 않고 그냥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그런 곳입니다.

스위스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는 바다라고 해도 믿을 만큼 거대한 호수들이 많지요.

안시호수도 그렇습니다.

제네바에서 차로 45분 거리에 있는 이 매력적인 도시는 13세기와 14세기 제네바 백작과 사보이 백작의 본거지였습니다.


1886년 안시 호수
폴 세잔 안시 호수



안시의 구시가지는 콜마르와 비슷하지만 규모가 훨씬 작고 소박합니다.

어느 카페는 에스토니아의 탈린을 떠오르게 하고 안시 호수는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나 이탈리아의 꼬모 호수를 연상시키기도 했어요.

외젠부댕 그림에서 보던 아이보리와 브라운 컬러 무늬가 있는 얼룩소와 빨간 단풍, 버터코코넛 같은 낙엽들이 옥색의 호수와 더불어 그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물웅덩이에 비친 나뭇잎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장성한 딸의 사진을 찍어주는 엄마, 무등을 태우고 지나가는 젊은 아빠, 그저 모두 편안해 보입니다.


















사랑의 다리(Pont des Amours)라는 명패가 붙어있는 작은 철교가 있습니다.

그곳은 장 자크 루소가 바랑 부인과 처음 만나게 된 곳이라고 하는데요.(루소의 자서전 고백록)

연인이 다리 위에서 키스를 하면 그들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는 말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더라도 다리 뒤로 연결된 바세 운하와 정면의 호수와 산의 어울림이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호수를 따라 유럽의 정원과 산책로가 막힘없이 이어집니다.

시장 가판대에서 치즈와 잠봉 샌드위치, 값싼 와인 한 병을 사서 풀밭에 앉아 피크닉을 즐겨도 좋겠다 싶습니다.

뱃머리처럼 보이는 탑이 보이는 팔레 드 릴(Palais de l'Île)은 띠우 강을 두 개의 운하로 나눕니다.

예전에는 감옥, 조폐국, 법원이었지만 지금은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생수와, 달걀, 치즈, 바게트, 샐러드용 채소를 사 갖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안시는 작은 마을이라 꼭 찾아가 봐야 할 곳도 없으니 서두를 것도 없으니까요.

좀 쉬고 나서 야경을 보러 나가자 생각했습니다.

구시가의 중심이고 1층은 레스토랑이 있는 2층 방이다 보니 바깥으로 오고 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지요.

우리나라처럼 알루미늄 새시가 있는 2중창이 아니고 옛날 나무 창문이라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갑자기 바깥이 조용합니다.

커튼을 열고 내다보니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로 빗줄기가 보이더군요.

노천카페에 있던 사람들이 비를 피해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서 조용해진 겁니다.


'그러면 그렇지, 적우행(나의 다른 이름)이 왔으니 비가 내려줘야지'


지난 16일 동안 파리에서 지내는 동안 비 내리는 날에 대해 가졌던 원망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한 달 내내 비가 내리면 어떠랴, 비 또한 내 것이고 다시 맞지 못할 오늘이라 여기면 모든 게 소중하지 않은가. 그야말로 '했었다'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뭔가를 '하는 중'

그게 중요하니까요.




안시는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토요일에 열리는 벼룩시장이 유명하다기에 여행 날짜를 10월 마지막 금토일로 정했어요.

그 마지막 토요일 새벽입니다.

뭔가 덜거덕 거리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 잠에서 깨었지요.

창밖을 내다보니 천막을 치고 가판을 정리하는 사람들의 손놀림이 분주합니다.

벼룩시장을 준비하는 사람들이지요.

일찌감치 밖으로 나가봤습니다.

구 시장의 길을 따라 빼곡하게 들어선 벼룩시장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습니다.

하지만 파리 최대 규모의 생투앙과 방브 벼룩시장에 비하면 물건의 질도 떨어졌고 값도 생각보다 많이 비싸더군요.

생투앙에서 7개에 10유로를 주고 구입한 뱅글과 똑같은 게 있어서 물어보니 한 개에 10유로라고 합니다.

심지어 사진촬영을 못하게 하는 상인도 있었지요.

여행자가 뭔가를 구입할 때 우선하는 조건은 가격과 무게입니다.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하고 돌아다니다가 만난 빵집 폴에서 커피를 마셨지요.


























지는 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언제부터인가 해가 뜨는 광경을 보면 눈물이 나곤 하는데 석양은 그냥 편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저녁 무렵 야경을 몇 장 찍고 들어오는 길에 갑자기 깔라마리(지중해식 오징어 튀김 요리)가 먹고 싶었어요.

구글맵으로 숙소 근처의 레스토랑 메뉴에서 깔라마리를 검색하고 세 군데쯤 찾아갔지만 모두 없다고 합니다.

하는 수없이 리틀 이태리라는 피자 집으로 갔지요.

피자만큼 만만한 게 없습니다.

게다가 평점이 4.6, 집에서 10m도 안 되는 곳이었지요.

카운터좌석이 하나 남아있어서 웨이팅 없이 바로 앉을 수 있었습니다.

마르게리따 피자와 리몬첼로 아페롤을 주문했지요.

피자도 맛있지만 아페롤은 최고였습니다.

포지타노에서 마셔봤던 리몬 첼로는 신맛과 단맛이 무척 강해서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거든요.

피자 한 판을 다 먹을 수는 없으니 도우의 가장자리는 남기고 가운데 얇은 부분만 잘라먹었습니다.

친절한 웨이트리스는 서비스라며 스트레이트 잔에 리몬첼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마치 한식당에서 식사 후에 주는 수정과처럼 말이죠.

리몬첼로 스트레이트는 얼음이 들어있지 않아 알코올 도수가 좀 더 강했지만 깔끔한 청량감이 맘에 들었습니다.











안시의 숙소를 예약할 때 살짝 맘에 망설였던 건 소음에 관한 후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구시가지의 중심이고 레스토랑과 술집들이 몰려있다 보니 밤에 많이 시끄럽다는 얘기가 간간히 쓰여있었지요.


'낯선 곳에서의 소음도 흔치 않은 경험이야, 소음도 음악이려니 여겨보자고...'


준비해 간 귀마개 덕에 12시가 넘도록 먹고 마시고 떠드는 여행자들의 시끌벅적한 소음에도 끄떡없이 잘 잤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장터를 여는 사람들의 손길은 새벽부터 부지런합니다.

어제의 벼룩시장 상인들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오늘은 각종 과일, 채소, 치즈, 햄, 잼 등이 가판대를 질서 정연하게 채우고 있었지요.

벌써 2박이 지나 오늘 떠나야 하는 여행자는 딱히 살만한 게 없습니다.

장 구경을 마치고 다시 호수 반대편으로 산책을 나갔지요.

파리에서 하지 못했던 새벽 산책이라 기분도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사람들로 늘 북적이던 젤라토 집도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언덕 위에 있는 샤토 박물관에 올랐으나 아직 이른 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었지만 내부를 꼭 보고 싶던 마음은 없었으니 상관없었지요.











숙소를 정리하고 짐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잠시 침대에 누워 무심코 오븐에 붙어있는 시계를 보니 스마트 폰보다 1시간이 빠르더군요.

게다가 손목시계 역시 스마트 폰보다 1시간이 빠른 겁니다.

뭔가에 홀린 듯 갑자기 당황스러웠지요.

만일 그 시계가 맞는 거라면 당장 기차를 타러 출발해도 촉박한 시간이었습니다.


당황해서 서둘러 집을 나섰지요.    

부지런히 걸어가 역의 시계를 보니 손목시계가 한 시간 빠른 거였습니다.

안시를 떠나 리옹역에 도착하니 흡사 전쟁터같이 인산인해입니다.

일요일이라 그런가 싶었지만 출발과 도착을 알려주는 역의 전광판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았지요.

리옹에서 출발 예정인 기차들의 시간표에는 연착 시간이 줄줄이 도배가 돼있다시피 하더군요.

길게는 2시간이 넘게 연착되는 상황인데 다행히 내가 타고 갈 기차는 20분 딜레이 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안시에서 시계 때문에 숙소에서 서둘러 나오느라 한 시간을 기다렸고 리옹에서 갈아탈 기차가 30분 후였는데 약 한 시간으로 늘어난 거죠.

리옹역은 파리 리옹역만큼이나 역사가 크지만 화장실은 단 한 곳밖에 없습니다.

줄 선 사람이 어림잡아 50여 명은 되더군요.

화장실을 사용하려면 1유로 동전이 필요한데 설상가상 동전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많이 사용하지 않지만 유럽에서는 탭 기능의 신용카드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비상용으로 챙겨갔지요.

다행히 탭 카드를 찍을 수 있는 기계가 있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어야겠는데 역 안에 있는 폴 빵집에도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전광판 앞에는 수시로 출발 시각이 바뀌는 열차 시간과 플랫폼을 확인하려는 여행자들로 가득합니다.

20분에서 35분, 그리고 55분으로 계속 바뀌다가 1시간 3분 늦은 2시 3분에 리옹을 출발했지요.

늦은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승무원들이 서비스로 쿠키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프랑스는 예고도 없이 수시로 파업이 일어나는데 그중 철도 파업이 가장 많습니다.

나는 다음 일정이 없으니 상관없지만 비행기라도 타야 하는 여행자들은 그야말로 대책 없이 발만 동동 구르게 되는 거죠.








파리 리옹역에 도착하니 그곳 역시 혼돈의 카오스입니다.

연착으로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과 파리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의 떠밀려 다니는 수준이었어요.

어쨌거나 무사히 파리에 도착했지만 그날은 11번 메트로가 운행을 하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1번 메트로를 타고 빈센스역에 내려서 트램 3b를 타고 포르트 데 릴라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다시 129번 버스를 타면 되지만 그걸 기다리느니 걸어가는 게 빠르겠더군요.


안시를 출발한 지 8시간 만에 파리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역시 집이 최곱니다.

돌아오는 길이 힘들어서였는지 2박 3일의 안시 여행은 큰 감동이나 아쉬움 없이 끝났습니다.

여행도 인생처럼 예정대로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인생이 멀고 긴 하나의 여행인 것을 생각하면 당연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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