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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an 14. 2024

지옥의 문으로 들어간 여인

31. Musee de Rodin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조각계의 모나리자라고 할 만큼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작품입니다.

로댕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이 생각이 들었지요.


'살아생전에 성공해서 빛을 본 건 알았지만 이런 궁전에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말이 있지요.

반대로 별생각 없이 맞닥트렸는데 감동이 클 때도 있습니다.

로댕 미술관은 후자에 해당합니다.

나는 아무래도 조각보다 회화에 더 관심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카미유 클로델이라는 조각가를 생각하면 로댕이 곱게 보이지 않는 탓도 있었을 겁니다.



로댕 미술관 전경
로댕 미술관 2층에서 보이는 정원




로댕 미술관은 원래 궁전 수준의 별장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앵발리드와 에펠탑 사이에 있는 박물관에 들어서면 슈트를 입은 신사의 헤어처럼 잘 정돈된 회양목 사이의 기둥 위에 Thinker(생각하는 사람)가 지옥의 문을 바라보며 앉아 있습니다.

조각들이 수를 놓듯 채워져 있는 정원에는 꽃과 나무들이 가득합니다.

삐걱거리는 쪽마루, 격자무늬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가득한 방, 우아하게 조각된 보이세리(Boiserie), 크리스털 샹들리에들의 차분한 색상이 과거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집안 곳곳에서 고상함이 넘쳤습니다.

      

로댕 미술관은 2층의 구조로 모두 18개 방이 있습니다.

점토 스케치, 석고 모형, 조각품과 <지옥문>, <칼레의 시민들> 습작 등도 볼 수 있어요.

조각이 그의 주된 열정이었지만 로댕은 그림에 대한 관심이 많아 수집도 즐겼는데요.

모네의 <belle ile en mer>, 반 고흐의 그림은 무려 3점이나 있는데 <탕기 영감> <아를의 다리 전경> <아를의 밀밭>, 프리츠 톨로의 <작은 마을의 광장> 등의 회화 작품이 있어 놀라웠지요.




<탕기 영감> 반 고흐
<아를의 밀밭> 반 고흐
<아를의 다리가 있는 전경> 반고흐


클로드 모네
 <작은 마을의 광장> 프리츠 톨로
T.F 시몬




오뗄 비롱(Hôtel Biron, 현재의 로댕 미술관)은 매각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아티스트들에게 임대되었습니다.

작가 장 콕토, 화가 앙리 마티스,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아내 등이 세 들어 살았을 정도로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로댕 역시 방 4개를 임대하여 작업실로 사용했는데(1908년) 오래도록 비워져 있어 황량하게 변한 정원에그의 작품 일부와 개인 소장품 일부를 전시하여 생명을 불어넣었지요.

3년 후, 구매자가 나타났습니다.

교육부 사무실로 쓰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호텔 비롱(Hôtel Biron)을 사들인 것입니다.

다른 아티스트들은 모두 떠난 반면 로댕은 그곳을 떠날 맘이 전혀 없었지요.

로댕은 오뗄 비롱이 그의 작품을 영구 전시하는 박물관이 된다는 조건 하에 자신의 컬렉션을 주정부에 유산으로 남기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단 죽을 때까지 그의 거처로 사용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프랑스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오텔 비롱은 로댕의 집이 되었지요.(1911년)

그리고 약 7년 후 로댕이 사망하자 로댕 박물관이 개관하게 된 것입니다.(1919년)




Thinker
Kiss
걷는 남자
세 개의 그림자
대성당





로댕의 작품에서 가장 잘못 알려진 것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그가 프랑스 정부의 작품 의뢰를 받고 만든 <지옥의 문>에 들어있는 수많은 인물 중 한 사람인데요.

" 여기에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리라 "

로댕이 만든 <지옥의 문>의 원천인 단테의 신곡 중 저주받은 자들을 환영하는 지옥의 비문입니다.

즉, 지옥의 문 맨 위에서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상가(Thinker), 생각하는 사람'은 시인 단테를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옥의 문



그러므로 <지옥의 문>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은 크기가 작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작품은 그것의 크기를 변형하여 단독 조각으로 만든 것으로 그의 사후에 제작된 것이므로 로댕의 생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첫 번째 버전이 파리의 로댕 미술관에 있고 27개의 다른 주물은 전 세계 미술 박물관, 조각 정원이나 기타 세계적 수준의 컬렉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옥의 문 상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 중 한 명이자 현대 조각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로댕(François Auguste René Rodin,1840 – 1917)은 파리의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늘 "나는 바보 같은 아들을 두었어"라고 한탄하며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었던 로댕을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14세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하여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고 있었는데 로댕이 공예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었던 누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로댕은 사제가 되겠다고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신부의 길을 가는 것이 맞지 않음을 알아본 수도원장은 로댕의 조각과 스케치의 모델이 되어줄 만큼 그를 신경 써주었고 결국 수도원장의 설득으로 수도원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로댕은 재수도 삼수도 아닌 네 번째 시험에서 비로소 에콜 데 보자르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로댕은 스물네 살 때 평생 반려자로 살았던 재봉사 로즈 뵈레를 만났습니다.

로즈는 내성적이고 수줍은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재봉사로 일하며 집안일을 맡았고 로댕은 조각 일을 하며 일요일에는 근처의 숲을 산책하며 다정한 시간을 보냈지요.

 


로즈 뵈레




2년 후 두 사람은 아들 오귀스트외젠 뵈레(Auguste-Eugène Beuret, 1866~1934)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평생을 동거인으로 살았지요.

사실혼 관계로 살면서 평생을 자신에게 헌신한 아내 로즈에 대한 미안함과 상속 문제가 거론될 만큼 부를 얻은 로댕은 1917년 결혼식을 했습니다.

평생의 염원을 이룬 로즈는 안타깝게도 결혼 2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로댕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는 온갖 자질구레한 병에 치매까지 보태어져 일흔일곱에 발작을 일으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는 신이다." 였는데 돌보던 간호사가 이렇게 대꾸를 했다고 하네요.

"맞아, 당신은 똥오줌도 못 가리고 헛소리하며 죽어가는 신이야."

아내 로즈가 세상을 떠난 지 9개월 만이었습니다.



로댕 미술관 정원
칼레의 시민
발자크 동상
피에르 드 위상
Thinker



사실 로댕에게는 로즈 뵈레보다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이름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년 ~ 1943년)이 있습니다.


카미유는 어린 시절부터 숲 속에 있는 괴물같이 생긴 바위에 매료되어 잠도 안 자고 흙을 반죽하여 뭔가를 만드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그녀가 흉내 내던 대상은 나폴레옹 흉상, 비스마르크 흉상, 또는 그녀의 가족들이었지요.

중요한 것은 까미유가 데생과 조각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녀가 열 다섯 되던 해,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노장의 조각가 알프레드 부쉐(Alfred Boucher,1850-1934)가 조각의 기초 지식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카미유의 아버지에게 그녀가 갖고 있는 예술적 자질과 천부적 소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그녀의 재능을 키워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카미유 클로델




아버지의 후원으로 17세의 카미유는 정식적인 조각수업을 받고자 파리로 이사를 합니다.

알프레드 부쉐는 까미유를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시키기 위해 그 학교의 교장에게 카미유가 만든 다윗과 골리앗 습작을 보여 주었습니다. 교장은 매우 놀라며 그녀가 로댕에게서 수업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을 했지만 카미유는 그때까지 로댕을 만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실력이 깜짝 놀랄 정도로 출중했지만 당시 가장 권위 있는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는 여학생들을 받지 않았기에 입학을 할 수 없었지요.

그에 카미유는 사립학교에서 수업을 받으며 그곳에서 사귄 여자 친구들과 함께 공동 작업실을 마련했지만 당시 그들에겐 영감을 불러일으켜줄 선배 여성 조각가가 없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카미유의 작업실에 찾아와 많은 충고를 해주던 알프레드 부셰가 로마상을 받게 되어 오랫동안 이탈리아로 가게 되었지요.

그러자 부셰는 오귀스트 로댕(1840~1917)에게 노트르담 데 샹에 있는 작업실에 있는 자신의 제자들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고 로마로 떠났습니다.

당시 43살의 로댕은 조각가로서 정상에 있었고 카미유는 열아홉 살의 어린 학생이었지요.

그녀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댕은 그의 작업실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작업실의 카미유 클로델



여성 화가도 드문 시기에 로댕의 작업실에 등장한 젊은 여성 조각가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말없이 점토를 반죽하여 손과 발을 만들 뿐이었지요.

당시 로댕은 장식 미술관에 설치할 <지옥의 문>을 막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공동 작업으로 만든 부분들이 누가 만든 것인지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여 비평가들의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카미유와 로댕은 스승과 제자사이의 미묘한 갈등, 예술가로서의 경쟁 그리고 작품에 대한 질투심등이 작용하며 결코 간단하지 않은 사랑을 시작하게 됩니다.

키스, 지옥의 문을 만드는 10년 동안 두 사람은 스튜디오와 침실에서 늘 함께 했으니까요.



로댕과 카미유가 주고받은 편지




예술적인 천재성은 개인의 내면에서 나오며 타고난 재능에 비례하여 인정받게 될 거라고 생각을 갖고 있던 카미유는 은둔 생활을 하며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카미유와 로댕은 단지 제자로만 세간에 알려져 있었지요.

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저나간 소문은 카미유의 부모에게까지 알려졌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게다가 카미유는 임신과 유산을 겪게 되었지만 때가 되면 자신의 재능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카미유는 예술가의 친선 모임에서 끌로드 드뷔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카미유는 스물넷, 스물여섯의 드뷔시는 음악가로서 아직 명성이 알려지지 않은 시기였어요.

두 사람을 연인으로 보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매우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카미유는 드뷔시에게 그녀가 조각한 왈츠의 청동상을 선물로 주었고 드뷔시는 죽을 때까지 그 왈츠 상을 간직했다고 합니다.



왈츠 (카미유 클로델)



집에서 쫓겨난 카미유는 부르봉가 19번지의 아틀리에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아틀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1893년부터 1905년까지 카미유는 로댕의 그늘을 벗어나서 왕성하게 창작했습니다.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로 로즈 곁에 머무르는 로댕을 비난하면서 세 점의 작품을 만들어 경멸감을 표현했습니다.

말하자면 로댕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지요.

1897년 까미유 끌로델은 옥으로 만든 <뜬소문(Les Causeuses)>을 샹 드 마리스의 살롱전에 출품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뜬소문(카미유 클로델)



1899년 카미유는 살롱전에 대리석으로 만든 클로토를 출품했고 룩셈 부르크의 박물관에서 전시하기를 원했지만 박물관에 전시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작품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카미유는 로댕이 이 작품을 훔쳐갔다고 비난을 퍼부었고 자신의 영감을 도용했다며 날이 갈수록 증오를 쌓아갔습니다. 이 사건은 두 사람이 결별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카미유의 <중년(1894-1900)>은 로댕과의 관계가 짙게 나타난 작품입니다.

나이 든 여인(로즈 뵈레)이 한 남자(로댕)의 어깨를 감싸고 어디론가 이끌고 있습니다.

이 중년의 남자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발을 떼고 있어요.

하지만 미련이 남았는지 뒤에 있는 여인에게 한 손을 뻗고 있습니다.

젊은 여인(카미유)은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가지 말라고 애원하듯 두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합니다.

이 작품의 데뷔는 카미유와 로댕의 관계에 있어 종말의 신호였습니다.

이 작품에 충격을 받고 불쾌감을 느낀 로댕은 애인의 관계를 완전히 끊게 되었으니까요.

처음에 석고로 만들었던 이 작품을 청동으로 제작하려고 했으나 로댕의 영향력에 의해 정부가 막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카미유는 석고상을 자신의 작업실에 보관하고 비밀리에 두 번씩이나 청동작품을 만들었지요.




중년(카미유 클로델)



파리 예술계의 거부로 인해 카미유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며 행동이 점점 이상해졌습니다.

거지같이 누더기를 입고 거리를 배회하고 술에 취하는 등 타락한 생활을 했습니다.

로댕이 자신의 작품을 표절하기 위해 자신을 스토킹 하고 있다는 편집증에 빠진 카미유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파괴하고 작품 중 약 90점만 남겨 두었습니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지쳐버린 까미유는 모든 창작활동을 중단하고 파괴적인 칩거생활에 들어갑니다.

창문이 열리지 않는 1층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견딜 수 없는 냄새가 새어 나왔습니다.

벽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의자는 부서진 채 구석에 처박아 놓아 두었습니다.

카미유는 그렇게 부르봉의 작업실에 7년 동안 외부 출입을 삼간 채 자신을 가둔 채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습니다.

1910년, 카미유의 아파트가 물에 잠기자 그녀는 망치로 자신이 만든 모든 석고 틀을 부수었습니다.

시끄러운 소리와 냄새를 견디지 못한 이웃은 동생 폴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녀의 예술을 지원해 주신 유일한 분인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남동생과 여동생은 아버지의 사망 사실과 장례식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던 카미유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장례식에 참석한 남동생 폴은 카미유의 정신병원 수속절차를 위한 증명서를 발송했습니다.

그렇게 카미류 끌로델은 1912년 3월 빌르 에브라르의 수용소에 강제로 입원되어 9월에는 몽드베르그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1943년 10월 19일 사망하기까지 마지막 인생의 30년을 정신 병원에서 지옥 같은 삶을 보냈지요.  

그녀의 간곡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단 한 번도 면회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카미유의 어머니는 그녀가 조각가로서 살아가는 것을 끝까지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녀를 돌보던 의사들이 환자가 가족들과 가까이 살거나 퇴원시키는 것에 대해 별로 반대가 없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미유는 온몸이 퉁퉁 붓고 음식물을 삼키지 못했으며 탈수 증세를 보였습니다.

소식을 들은 남동생은 그제야 카미유를 방문했고 카미유는 한 달 후 사망하였지요.

그녀의 나이 79세였습니다.

남동생 폴은 무덤이나 표지석 비용을 지불하지 않겠다고 하여 카미유는 병원 직원 몇 명만 참석한 가운데 정신병원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인도 바라나시의 버닝 가트(화장터)에 다녀온 후 여행기에 이런 말을 썼습니다.


'세상에 외롭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랴? 죽음 앞에 비난받을 생이 어디 있으랴?'


다만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을 했을 뿐인데 지독하고 처절하게 끝이 난 그녀는 모든 걸 다 주었나요? 모든 걸 빼앗겼나요?

카미유 클로델은 지옥의 문을 조각하며 이미 자신을 그 속에 새겨 넣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카미유 클로델 묘지



'생각하는 사람'의 옆모습이 보이는 곳에 몇 개의 벤치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그곳에 앉아 조각을 바라보더군요.

그야말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도 옆의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조각을 바라보았지요.


여행이 끝나면 단테 알레기에리의 신곡에 다시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 쓰는 글 대부분이 필자가 궁금해서 찾아보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만 참고로 파리의 로댕 미술관에 있는 <지옥의 문>은 사본입니다.

그러니까 <지옥의 문> 오리지널은 필라델피아의 로댕 박물관에 있더군요.

파리 로댕 미술관을 비롯하여 도쿄, 취리히, 스탠퍼드, 시즈오카, 그리고 서울 등에 7개의 작품은 주물을 떠서 복제한 작품들입니다.

석고로 만들어진 <지옥의 문>은 1917년에 복원되어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로댕 박물관 <지옥의 문>
오르세 미술관 <석고 지옥의 문>




기회가 된다면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100km가량 떨어진 노장쉬르센(Nogent-Sur-Seine)에 문을 연 카미유 클로델 미술관 (Musée Camille Claudel)에 가보고 싶습니다. (2017년 개관)




카미유 클로델 미술관 (Musée Camille Claudel)
파도(카미유 클로델)
로댕 두상(카미유 클로델)
연인(카미유 클로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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