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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an 17. 2024

낭만에 대하여 (파리의 살롱과 마담)

32.Musée de la Vie Romantique







카바레, 살롱, 마담은 프랑스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룸(room)이라는 단어가 더해져 뭔가 은밀하면서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룸살롱이라는 말로 흔히 쓰이고 있지요.


원래는 미술품을 장식해 놓은 방, 접대를 위한 넓은 공간이라는 뜻의 살롱은 서유럽의 사교 문화로 귀족 계층의 마담이 자신의 저택에서 주최한 문예를 중심으로 하는 교류회였습니다.


오늘 가려고 하는 낭만주의 박물관(Musée de la Vie Romantique)은 19세기 파리의 예술가들이 자주 방문하던 살롱입니다.

살롱에서는 당시 인플루언서인 예술가, 학자, 철학자들이 모여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연주하고 토론을 하며 친목을 나누었습니다.

이곳은 2013년 시립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무료입니다.

정원과 온실을 갖춘 이 건물은 낭만주의 대표적인 예술가 중 한 명인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아리 셰퍼(Ary Scheffer, 1795~1858)가 1830년부터 거의 30년 동안 임대하여 사용했고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외동딸 코렐리아가 구입하여 보존해 온 집입니다.




낭만주의 박물관 입구
유리 온실의 로즈 베이커리 티 룸 앞 정원
유리 온실 티룸




셰퍼와 그의 딸 코넬리아는 매주 금요일 밤이면 조르주 상드, 프레드릭 쇼팽, 외젠 들라크루아, 프란츠 리스트, 찰스 디킨슨과 같은 유명인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박물관은 현재 빅토르 위고의 집, 발자크의 집과 함께 프랑스 3대 문인 박물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데요.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실의 중앙에 걸려 있는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입니다.

중앙 거실을 비롯한 3개의 방은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를 비롯해 그가 썼던 생활용품, 장신구, 상드의 오른팔과 쇼팽의 왼손 석고 모형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낭만주의 박물관이라기보다 상드의 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는 상드가 근처의 오를레앙 광장에서 쇼팽과 함께 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상드의 물건과 초상화가 있는 중앙 거실
조르주 상드



가운데 초상화 코넬리아
풀랑의 악보
상드의 오른팔과 쇼팽의 왼손




2층에는 아리 셰퍼가 그린 그의 딸 코넬리아와 메조소프라노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 루이 필립 1세의 부인이자 프랑스 여왕인 마리아 아말리아(Marie-Amélie, 1782~1866)의 초상화 등이 있습니다.  

아리 셰퍼는 회화의 강국인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파리 에콜 데 보자르를 졸업한 화가로 단테(Dante), 괴테(Goethe), 바이런 경(Lord Byron), 월터 스콧(Walter Scott)의 작품을 주제로 한 그림과 함께 문학을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주로 유명했는데요.

아리 셰퍼의 부인은 배우 뺨치게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더군요.




아리 셰퍼의 죽은 부인


메조소프라노 폴린 비아르도








다음 그림은 <피아노 앞의 리스트>라는 제목으로 피아노 제작자 콘라드 그라프의 의뢰로 제작되었는데요.

당시 살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술가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란츠 리스트가 살롱에서 친구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우선 리스트의 발치에서 등을 드러내고 앉아 있는 사람은 마리 다구 백작부인, 왼쪽에 남자 옷을 입고 안락의자에 기대어 리스트 쪽으로 고개를 빼고 바라보는 사람이 조르주 상드, 상드 옆에 앉은 사람은 삼총사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이며, 붉은 스카프를 매고 상드의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서있는 남자는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입니다. 빅토르 위고와 뒤마는 동갑내기 작가입니다.

빅토르 위고 옆에 구레나룻이 길게 난 남자는 악마의 트릴이라는 표현이 생겼을 정도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인데요. 리스트는 파가니니를 무척 존경하여 피아노계의 파가니니가 되리라 결심했습니다. 리스트의 곡 중 유명한 <라 캄파넬라>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나단조>의 마지막 론도 악장의 주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라 캄파넬라는 바이올린으로도 연주하지요. 

파가니니 옆에 서 있는 퉁퉁한 남자는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윌리엄 텔로 유명한 작곡가 롯시니입니다.

피아노 위에 놓인 흉상은 낭만주의의 문을 연 베토벤이며 벽에는 바이런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지만 이런 모습은 당시로는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피아노 앞의 리스트> 조세프 댄 하우저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는 공공연하게 남장을 했던 작가였습니다.

1800년대 프랑스에서는 건강, 직업 또는 스포츠(예: 승마)의 이유 외에 여성들이 남성복을 입으려면 허가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상드는 허가 없이 남장을 즐겼는데 당시 귀족 여성의 전형적인 드레스보다 저렴하고 튼튼하다는 이유였지요.

동시대 여성보다 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여성이 금지된 장소, 심지어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장소에도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스캔들이 되던 시기였지만 상드는 파이프 담배나 시가를 즐겨 피웠지요.

일부 사람들은 그녀의 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녀의 글이 훌륭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녀의 반항적인 행동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이러한 행동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책을 출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조르주 상드라는 남자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조르주 상드의 책이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상드의 책은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보다 더 인기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발자크는 그녀의 글이 형편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들의 비평 기준이 부적절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지요.


자녀가 둘이나 있는 이혼녀 조르주 상드는 연하남 쇼팽을 만나 10년 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그 스토리를 알려면 우선 마리 다구(Marie d’Agoult, 1805~1876) 백작 부인과 피아노의 왕이라 불리는 프란츠 리스트의 부적절한 스캔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은 당시 프랑스 사교계의 여왕, 살롱의 그랑드 마담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지성과 미모와 재력을 겸한 셀럽이지요.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난 그녀는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유창했고 영어도 잘했습니다.

15살이나 많은 그녀의 남편 샤를 다구 백작은 기병대 대령 출신으로 인품은 훌륭했지만 피아노를 치고 문학, 역사,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와는 코드가 맞지 않았지요.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별다른 행복이나 의미 없이 거의 독립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그녀의 유일한 낙은 살롱의 마담으로 예술인들과 지내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마리 다구 백작 부인
마리 다구 백작 부인



27세의 유부녀 마리는 21세의 총각 피아니스트 리스트를 보는 순간 한눈에 반했지만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서서히 접근했어요.

그녀가 쓴 회고록에 리스트를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라인강의 여신 로렐라이 같았다. 날씬한 몸매에 고고한 자세, 우아하고 위엄 있는 걸음걸이, 고개는 거만하게 꼿꼿했고 고전풍으로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은 금이 녹아 흐른 듯 풍성하게 굽이쳤다. 표정은 꿈을 꾸는 듯하면서 우수가 서려있었다.'




Franz Liszt




당시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헝가리)는 BTS급의 슈퍼 스타로 팬클럽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옆모습에 자신이 있었던 리스트는, 관중들이 자신의 오른편 얼굴을 보며 감상할 수 있도록 피아노를 측면으로 돌려놓고 연주한 최초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훤칠한 키에 금발을 날리며 무대로 나와 악보도 보지 않고 피아노를 연주하면 귀부인들이 울면서 쓰러졌다고 하지요.

연주가 끝나면 떼 지어 몰려들어 그의 스카프와 벨벳 장갑을 서로 가지려고 잡아당기며 싸움을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리스트는 점점 마리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취하게 되고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은밀한 만남을 이어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의 불륜은 도마에 오르기 마련이고 소문은 연기처럼 퍼져나갔습니다.

파리 사교계의 중심인물들이었던 두 사람의 스캔들이 세간에 알려지고 더 이상 파리에 살 수 없는 두 사람은 스위스로 사랑의 도피를 했습니다.

리스트는 마리와 제네바 음악원에서 교수직을 얻어 6년 동안 살면서 3명의 아이를 얻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바그너와 결혼하게 되는 코지마입니다.



그들의 가십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힐 무렵 리스트와 마리 커플은 스위스 생활을 정리하고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책을 즐겨 읽던 리스트는 마리에게 조르주 상드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마리는 여성으로서 독립적이고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상드의 문학적 재능과 당당한 자세에 매료당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상드는 자신과는 반대로 공주 같은 마리의 외모에 매료되어 마리에게 글을 써보라며 격려했습니다.

마리는 살롱을 다시 열었고 상드를 같은 건물의 아래층에서 살 수 있도록 방을 내어주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같은 건물 아래층에 살던 상드는 당연히 마리가 운영하는 살롱의 단골 멤버였습니다.


리스트가 절친인 쇼팽(리스트보다 한 살 적음)을 모임에 데려온 것은 쇼팽이 파리에 온 지 5년쯤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쇼팽은 26살, 상드는 32살이었습니다.     

상드는 쇼팽을 본 순간 첫눈에 호감을 느꼈지요.

상드와 쇼팽은 마치 마리와 리스트 커플과 평행 이론처럼 닮았습니다.

쇼팽과 리스트는 총각이었고 상대 여성인 상드와 마리는 각각 그들보다 6살 연상이었으며 아이를 둔 유부녀였으니까요.


쇼팽은 상드를 처음 본 순간,


'뭐 저런 괴상한 여자가 다 있어. 여자가 맞긴 한 거야?'


도대체 여성스러운 점은 찾을 수 없는 기괴한 모습이었지요.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잠시도 그녀의 손을 떠나지 않는 시가였습니다.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을 즐기던 쇼팽은 바지 위에 투박한 남성용 프록코트를 입고 통이 높고 챙은 짧은 남성용 모자를 쓰고 있는 상드를 본 쇼팽은 그녀의 차림새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상드의 피부는 까무잡잡했고 머리카락도 검은 데다가 목소리는 쉰 소리에 여성스러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요.


폴란드의 귀족 자제들과 어울려 자랐고, 파리에서 역시 명망 있고 예의 바른 귀족 가문의 여인들을 주로 보아온 쇼팽에게 상드의 모습은 그저 파격일 뿐이었습니다.

호감은커녕 오히려 불쾌한 느낌이 들었지요.

게다가 쇼팽의 마음속에는 마리아 보진스카(1819~1896, 폴란드)라는 어린 소녀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드는 보진스키보다 무려 15살이나 많은 아줌마였으니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지요.   




조르주 상드



반면 상드는 쇼팽을 본 순간


'쇼팽은 너무 아름다워요. 혹시 여자 아닌가요?'


훗날 상드가 그녀의 소설에 쇼팽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몸도 마음도 섬세했다.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독특한 아름다움, 감히 말하자면 성별도 나이도 모호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슬픔을 담은 여인의 고운 얼굴에 올림포스의 젊은 신처럼 순수하고 늘씬한 몸을 지닌 천사랄까. 그러한 조합을 완성하는 것은 다정하면서도 준엄하고,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표정이었다.'


     

아리 셰퍼가 그린 쇼팽




상드는 쇼팽과 다시 만날 기회를 만들어 달라고 리스트에게 간청했습니다.

상드는 이미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소설가였지만 쇼팽은 음악 애호가와 귀족에게 피아노를 레슨 하는 사람 정도로 인지도가 낮았습니다.

.     

얼마 후 쇼팽은 자신의 새 아파트에서 저녁 파티를 열어 몇몇 친한 친구들을 초대했습니다.

리스트는 그 파티에 상드를 데리고 갔지요.

상드는 평소에 입고 다니던 칙칙한 바지 대신 하얀 판탈롱에 붉은 허리띠를 둘렀습니다.

아마도 폴란드 국기를 연상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드레스는 아니었지만 나름 신경을 썼다는 게 보였지요.

상드는 쇼팽의 호기심을 얻기 위해 갖은 애를 썼고 사람은 이런저런 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상드는 기타와 하프시코드를 연주할 수 있었고 오페라와 연주회를 즐겨 찾던 음악애호가였습니다.

상드의 음악 지식에 놀란 쇼팽은 날이 갈수록 그녀가 생각보다 밝고 지적이면서 상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쇼팽은 여전히 폴란드 귀족 집안의 딸이며 친구의 여동생인 9살 아래의 마리아 보진스카를 마음속에 품고서 애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보진스키의 부모는 약혼까지는 허락하였으나 폐가 약하고 병약한 쇼팽에게 딸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1837년 쇼팽은 결국 마리아로부터 파혼을 통보받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했지만 그 상처는 너무 컸습니다.

쇼팽은 사랑의 실패가 안겨준 절망감을 상드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누이나 어머니 같은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던 거죠.

얼마 지나지 않아 쇼팽은 그 모습을 상드에게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쇼팽을 자상하게 챙기고 보듬어 주는 상드의 손길은 더없이 편안하게 느껴졌고 두 사람은 한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쇼팽의 폐결핵은 심각했고 그이 건강을 위해 따뜻한 곳을 찾아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들 편이 아니었는지 이상 기온으로 늘 비가 내리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어 쇼팽의 건강은 더 악화되었지요.


  


조르주 상드와 쇼팽(들라크루아)




쇼팽과 상드의 관계가 무난하게 이어지고 있는 반면 마리는 가끔씩 우울증이 도져 감정이 폭발했고 리스트는 그런 마리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는 그가 집에 붙어있기를 바랐지만 리스트에게는 여전히 그를 좋아하는 팬들을 찾아 연주 여행을 다니며 자주 집을 비웠지요.

마리는 급기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쇼팽과 상드를 질투하기에 이르렀고 리스트와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지요.

그후 마리는 상드처럼 다니엘 스턴(Daniel Stern)이라는 남성의 이름을 필명으로 책을 썼습니다.

그때 쓴 소설은 리스트와 자신의 관계를 소재로 쓴 것인데 남자 주인공은 속이 좁고 재능이 얄팍한 음악가로 그려졌습니다.


쇼팽과 상드 역시 파리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별했고 쇼팽은 39세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간이 흘러 마리와 리스트 사이에 태어난 딸 코지마(1837-1930)는 리스트의 친구였던 바그너(1813-1883, 독일)의 부인이 되는데요.

그러니까 친구였던 두 사람은 하루아침에 장인과 사위가 돼버린 것입니다.

당시 바그너는 부인이 있었고 코지마는 바그너 제자의 부인이었으며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24살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딸 너무 닮은 코지마의 사랑과 원하는 건 다 가져야 했던 남자 바그너의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당시 귀족과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살롱 역시 갖가지 스캔들이 많았었지요.

특히나 자유분방한 기질을 갖고 있는 예술가들의 연애사는 수없이 많습니다.

연예인들이 가십의 타깃이 되듯 당시에도 특권층인 사람들은 남의 시선과 입방아에 더더욱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19세기의 살롱문화가 수그러들면서 새롭게 생겨난 것이 카페(Café)입니다.

시인, 화가, 철학자, 음악가들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예술적 영감을 얻었지요.


카페는 살롱보다 상대적으로 남아있는 곳이 많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가 즐겨 다니던 파리의 <카페 되 마고>, 나폴레옹과 카사노바가 단골이던 베니스의 <카페 플로리안>, 괴테와 바이런이 단골이던 로마의 <안티코 카페 그레코>, 프로이트와 스탈린, 클림트가 즐겨 찾던 빈의 <카페 첸트럴>, 파리 최초의 <카페 르 프로코프>는 볼테르, 빅토르 위고 등의 문인들과 나폴레옹, 벤자민 프랭클린 등 정치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입니다.

많은 여행자들은 그 도시에 도착하면 순례를 하듯 그 오래된 카페를 찾아다니기도 하지요.

나 역시 모두 가본 곳들입니다.


르 프로코프는 이번 파리 여행에서 갔던 레스토랑 중 가장 만족도가 높은 곳이었습니다.

예약했던 시간보다 약간 빨리 도착하였지요.

르 프로코프는 1686년에 오픈했으니 약 350년의 역사가 깃든 곳입니다.

내부에서 풍기는 고풍스러운 멋은 저절로 옷매무새를 고치게 하고 의자에 앉아서도 허리를 곧추 세워야 할 것만 갔았지요.


1686년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거주하던 프란체스코 프로코피오가 설립한 이곳은 생제르맹 데 프레의 중심부에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카페 되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 역시 생제르맹 데 프레에 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와 작가 장 자끄 루소, 볼테르 등에게 일찍부터 인기를 끌었던 이곳은 벤자민 프랭클린과 나폴레옹의 단골 카페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오픈 전이지만 비가 오는 관계로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고 비어있는 카페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프렌치 웨이트리스는 나를 벽 쪽 테이블로 친절하게 안내했습니다.

프랑스의 레스토랑은 대부분 엉트레(스타터) - 메인요리(육류, 생선) - 디저트(치즈나 케이크)가 세트로 구성되어 있는 메뉴가 따로 있고 엉트레, 메인, 디저트 중 따로 단품을 주문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세트 메뉴의 가성비가 좋지만 음식의 구성이 맘에 들지 않으면 단품 메뉴를 주문하면 되니까요.

일단 세트를 살펴보니 마음에 썩 드는 메뉴가 없었습니다.

프로코프의 시그니처 메뉴 코코뱅은 프랑스 전통 음식의 하나로 일종의 스튜인데 닭고기를 와인, 돼지비계, 버섯, 그리고 기호에 따라서 마늘과 함께 넣어 만들지요.

시그니쳐 메뉴니까 먹어볼 수 있겠지만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겠다 싶어서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것으로 주문했습니다.


양파 수프, 에스카르고(달팽이 요리), 디저트로는 크림 브륄레.

결론은 매우 만족입니다.

양파와 치즈가 걸쭉하게 가득 들어있는 수프는 비 내리는 오후의 꿉꿉함을 이겨낼 만큼 풍미가 깊었습니다.

상상했던 대로 양이 많았지만 빵과 함께 먹다보니 어느덧 둥그런 그릇이 바닥을 보였지요.

달팽이요리는 향기로운 바질 페스토와 버터의 고소함이 어우러져 역시나 기대를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크림 커스터드 위에 유리처럼 얇고 파삭한 캐러멜 토핑을 얹은 디저트 크림 브륄레는 화룡점정이었습니다.

스푼으로 표면을 톡톡 두드려 깨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이 속살을 드러냅니다.

적당하게 달콤하고 크리미 하면서도 표면의 바삭함이 어우러지는 게 마치 맛의 협주곡 같았습니다.

메인 디시 없이 엉트레(전식) 2가지와 디저트만 주문한 식사는 완벽했습니다.




양파 수프


에스카르고
크림 브륄레




솔직히 며칠 전 방문했던 미슐랭 2 스타 레스토랑 르 그랑 베푸보다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웬만해선 주눅이 들지 않는 성격이지만 혼자 가기에는 부담스러웠거든요.

미슐랭급 레스토랑 중에서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이다 보니 격식 있는 옷차림이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고 할까요?

주로 전문적인 비즈니스를 하는 분위기의 손님들이 대부분이고 세트 메뉴는 혼자 먹기에 양이 너무 많았다는 점입니다.  

디너라면 격식 있게 코스를 주문하는 게 맞지만 점심 식사는 라이트 하게 해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통했던 것입니다.

 

레스토랑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곳이 화장실이죠.

2층으로 올라가니 커피 값이 없어 맡겨진 후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는 나폴레옹의 모자가 유리장에 들어있더군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만석임에도 불구하고 나직한 말소리로 도란도란 식사를 하던 사람들, 맛있는 음식과 합리적인 가격 등, 뭐 하나 빠짐없이 만족했던 곳이지요.




나폴레옹의 모자




100년 200년이 지난 후 파리 사람들은 무엇을 추억하며 다닐까?

그때도 이곳이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오니 빗발은 더 거세어졌더군요.

잠시 걷다 보니 야외 테라스에 어닝이 설치된 카페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곳이 끌렸던 이유는 모든 좌석에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비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 또한 나쁘지 않더군요.


카페 바로 뒤에 생 제르맹 데프레 성당이 있어 들어갔습니다.

푸른빛의 천장에 그려진 금빛 작은 별은 러시아의 성당을 연상시켰고 내부 장식은 화려하지만 차분한 느낌이었어요.

그곳에는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의 묘가 있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그의 말이 새삼 감사했습니다.


명언이라는 건 사실 모두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예로

'아는 것이 힘이다.'(베이컨)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다.(에디슨)


하지만 누군가 그렇게 명확하게 짚어주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받고 힘이 되기도 하니까요.










데카르트의 묘




틀에 가두어 놓은 삶보다 틈이 많은 삶을 선호하는 필자는 분명 낭만적인 사람일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가끔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합니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 - 작곡 작사 노래, 낭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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