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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an 22. 2024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파리의 사소한 궁금증

33. Jardin du Luxembourg






어디에 앉을까?

뤽상부르 궁전의 정원에 왔습니다.

올리브 그린 색의 철재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정면에는 그랑드 바신이라는 이름의 팔각형 연못과 궁전이 보이는 명당자리입니다.

보온병을 꺼내어 따끈한 메밀차 한 잔을 마시고는 허리를 기대어 다리를 조금 뻗습니다.

가방에서 책을 꺼냈지만 바로 읽진 않았지요.

눈을 감고 햇볕에 몸을 맡겨봅니다.

적당한 바람과 따스한 온기, 급할 것도 초조할 것도 없는 세상 편한 시간입니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지요.

한 남자가 작은 배가 가득 실린 나무 수레를 끌고와 자리를 잡더군요.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아이들은 뱃사공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줄을 서서 참을성 있게 기다립니다.     

줄의 맨 앞에는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금발의 통통한 남자아이가 섰습니다.

청바지와 파란색 셔츠를 입고 있는 아이의 아빠는 몇 걸음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배는 검은색과 빨간색의 돛과 십자형 칼이 달린 해골이 그려진 해적선이었습니다.  

준비를 마친 뱃사공은 미소를 짓습니다.

아이가 손짓한 배를 꺼내자 아이는 꼭 쥐고 있던 작은 손을 펴고 동전 세 개를 내밀었습니다.

그 작은 배를 30분 간 빌리는 값은 €6.     

배를 건네받은 아이의 얼굴에는 신남이 풀풀 날립니다.

배를 미는 데 사용될 긴 막대는 아빠가 건네어 받았지요.

두 사람은 그랑 바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어린 소년은 범선을 팔에 안고 행복하게 걸어갑니다.

아이가 들기에는 다소 크고 무거워 보이지만 아빠의 도움을 강력히 거부하며 뒤뚱뒤뚱 걸어갑니다.     

아빠는 장대를 땅에 내려놓고 아들의 팔에서 범선을 받아 물의살포시 내려놓습니다.

아이는 배를 장대로 가볍게 밀어냈지요.

이제 해적선은 바람을 타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해적선을 뒤따라 프랑스 배, 미국 배, 노란색 돛단배 등도 하나 둘 물에 도착했습니다.

배터리도 리모컨도 없습니다.

그저 보트가 연못의 가장자리에 도달하면 나무 막대기로 밀어서 방향을 바꾸어 다시 항해하도록 하면 되지요. 부모들은 나처럼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연못 주변의 아이들을 시선으로 쫓습니다.








이곳의 오리 연못에서 장대로 보트를 밀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장면을 여러 영화에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고 있었지요.

뤽상부르의 연못에서 보트를 대여하기 시작한 것은 약 150년 전부터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일을 부여받은 사람이 바뀌었겠지만 가장 유명한 사람은 므슈 포도(포도라는 이름의 남자)입니다.

1920년대 후반에 그는 자신의 아뜰리에에서 아내가 바느질로 만들어준 돛으로 화려한 목조 범선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2센트에 아이들에게 보트를 빌려주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히트를 쳤고 수십 년 동안 가업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책을 보는데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렸지요.

연못 한가운데에는 해적선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좌초되어 있고 장대를 손에 쥐고 있는 금발의 꼬마는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허벅지까지 오는 부츠를 신은 뱃사공이 달려와 연못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침몰한 배를 꺼내어 들고 나옵니다. 어린 소년에게 범선을 건네주었지요.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금발은 금세 헝클어졌지만 그 모습이 귀엽습니다.

긴급 상황은 종료되고 해적선은 다시 항해를 시작합니다.     



파리 6구에 위치한 뤽상부르 궁전은 루이 13세의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edici)를 위하여 지었습니다.

마리 드 메디치는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이었기에 자신의 고향을 늘 그리워했지요.

그러므로 뤽상부르 정원은 피렌체의 피티 궁전을 모델로  만들었다고 해요.

많은 조각상과 프랑스식과 영국식 정원이 무척 넓게 조성되어 있는데 현재는 프랑스 상원 회의 장소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파리 시내에는 누구나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거대한 광장과 정원이 곳곳에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으로 보주 광장, 튈르리 정원, 팔레 로열, 그리고 뤽상부르 정원입니다.

대부분 궁전에 딸린 것이 대부분이라 관리가 잘 되어 있고 무척 넓은 특징이 있지요.

게다가 수도 없이 많은 의자들이 사방에 놓여있고 고정식이 아니라 얼마든 원하는 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 수가 어마어마해서 빈 의자들이 사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자는 어딜 가나 모양과 색깔이 모두 똑같은 게 궁금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공원에서나 현지인이나 관광객들 누구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항상 무료였던 것은 아닙니다.

몇 세기 전에는 돈을 내고 공원 의자를 빌려야 했습니다.

라 셰이시에르(la chaisière- chaise 의자에서 유래)라고 불리던 의자 빌려주는 여자는 전쟁으로 사별한 많은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들은 방문객들에게 의자를 사용할 수 있는 티켓을 판매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세금이었습니다.

혹시 방문객들이 의자를 가져오더라도 요금을 지불해야 했지요.

의자의 종류에 따라 금액은 달랐는데 팔걸이가 있는 안락의자처럼 편한 의자는 당연히 더 비싼 대여비를 내야 했습니다.

놀랍게도 의자 빌려주는 티켓을 판매하던 라 셰이시에르는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는 겁니다.






현재 파리 중심부의 주요 공공 공원들 중 세 곳, 뤽상부르 정원, 팔레 로열, 튈르리 정원에 똑같이 배열된 이 의자는 2002년 디자이너 프레데릭 소피아가 만든 것으로 무게가 더 가볍고 인체공학적이어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파리 공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의자에 대해 궁금한 게 더 있습니다.

파리하면 떠오르는 시그니처 풍경 중 하나가 카페테라스죠.

그 카페테라스의 의자 역시 모양이 모두 똑같습니다.

물론 컬러는 다양하지만요.

게다가 그 의자들은 나같이 도로를 향해 놓여 있습니다.

카페 페라스의 좌석은 객석이고 행인들이 다니는 보도와 차로는 자연스럽게 무대처럼 바라보게 되는 거죠.

다시 말하면 일행과 마주 보는 게 아니라 옆에 앉도록 배열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프랑스 카페의 의자들은 가볍고, 내구성이 좋으며, 보관하기 위해 쌓기 쉽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원래 전통적인 비스트로와 카페에서 사용되었던 등나무 의자의 고전적인 스타일로 천연 등나무를 직조하여 단순하지만 우아한 디자인으로 유명합니다.

게다가 좁은 장소에 더 많은 숫자의 의자를 배치하려면 크기가 작으면서 편하고 우아한 모양이어야 하지요.

당연히 테이블 크기도 아주 작습니다.


카페테라스라는 외부에서 1년 내내 햇빛과 비와 변덕스러운 기온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젖은 의자가 밤새 실내에서 빠르게 건조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등나무 대신 내구성이 강하고 유지보수가 쉬운 플라스틱 의자로 바뀌었고 모양은 변하지 않은 반면 직조법과 컬러는 무척 다양합니다.







카페나 비스트로를 이용하는 여행자들이 가장 저지르기 쉬운 실수를 막기 위한 에티켓을 소개합니다.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규칙이라고 할까요?

파리는 실내보다 테라스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좌석이 가득 찬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테라스에 빈자리가 많다면 편안하게 앉아도 되지만 장소가 혼잡해 보이는데 혼자라면 4인용 테이블을 차지하지 않는 게 에티켓입니다.    

우선 웨이터를 기다렸다가 인원이 몇 명인지 알려주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또한 빈자리가 많다 하더라도 우선 테이블 위에 세팅된 모습을 확인하는 게 중요합니다.     

음료만 마시고 싶다면 포크와 나이프가 놓여 있는 테이블을 피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테라스에는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과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나뉘어 있으니까요.

만일 음료만을 위한 테이블이 없으면 웨이터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대부분의 비스트로나카페는 12시에서 2시는 점심 식사, 7시에서 9시는 저녁 식사만 제공하므로 음료만 할 수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일반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는 의자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우리 식으로 바쁜 그들을 위해 테이블을 직접 재배치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즉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입니다.

좌석을 마련하기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일은 기꺼이 웨이터에게 맡겨야 합니다.


테라스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공간이지만 지나치게 시끄럽거나 떠들썩한 사람은 퇴장을 요청할 수 있으니 너무 큰 목소리로 떠들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합니다.

테라스는 물론이고 레스토랑의 실내 좌석은 정말 좁습니다.

옆 테이블과 거의 붙어있다시피 가깝기 때문에 항상 신경을 써야 합니다.


테라스에서는 흡연이 허용되지만 옆 테이블의 손님들이 음료나 주류가 아닌 식사 중이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리를 피해서 피우는 게 에티켓입니다.

보도의 사람을 관찰하는 것은 테라스에서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즐거움이기 때문에 동반자와 나란히 앉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러므로 거리에서 멀리 떨어진 의자보다 가까운 쪽을 선호하지요. 거리를 바라보는 자리 배치는 그들의 문화이고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익숙한 대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맞대고 앉기 위해 의자를 옮기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만드시 필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내심이지요.

웨이터가 메뉴와 음식, 그리고 계산서를 가져다줄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즉 재촉하거나 서두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처럼 여기요, 이모님 하며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부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구요? 그곳이 파리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바쁘게 움직이는 웨이터들이 좁은 공간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가방이나 다리는 테이블 아래에 두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랑스어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마법의 단어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만나면 무조건 봉주흐(Bonjour), 여러 번 쓸수록 기분 좋은 메흐씨(Merci), 그리고 헤어질 때 오흐 부아(Au Revoir)를 입에 달고 사용하다보니 돌아오는 것은 환한 미소였습니다.     



  




파리의 공원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길거리에도 벤치들이 수없이 있는데요.

대부분이 초록색입니다.

게다가 메트로 입구를 알리는 글씨나 도로명을 알리는 간판, 센강변에 있는 헌책방 부키니스트 등은 대부분 초록색인데요.

그 이유가 뭘까요?

그 녹색은 캐리지 그린(Carriage Green)이라는 역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프랑스혁명의 어두운 역사와 1793년 1월 21일에 이루어진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의 참수에서 비롯되었는데요.

왕과 왕비의 참수형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날로 되돌아 보겠습니다.










1793년 1월 21일 새벽 5시, 루이 16세는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 무렵 루이 16세는 프랑스 왕이라는 직함을 박탈당했고 루이 카페(Louis Capet)로 불렸지요.

하인의 도움으로 옷을 입은 후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하고 마지막 영성체를 받았습니다.     

루이는 그날 아침 가족을 만나지 않고 신부에게 마지막 소원을 전했습니다.

그의 인장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결혼반지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물려주라는 것이었지요.

왕은 성전 감옥을 지나 뜰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 녹색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근위대 사령관이 있었습니다.

루이는 신부와 함께 마차에 올라 아침 9시에 성전 감옥을 떠났습니다.     

녹색 마차는 느린 속도로 한 시간 동안 파리를 통과했습니다.

마차 앞에서는 드러머들이 북을 두드리고 마차 뒤에는 기병대들이 천천히 뒤따랐습니다.

마차는  루이 15세 광장에서 혁명 광장으로 이름이 바뀐 지금의 콩코르드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군중 앞에서, 루이 16세 국왕은 녹색으로 칠해진 마차에서 내려 단두대에 올랐습니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위엄은 있으나 체념한 모습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가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내가 죽더라도 복수는 절대 생각지도 말거라.'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외투를 벗고 타이와 셔츠를 풀었지요.

경비원은 왕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루이 16세는 양손을 등 뒤로 묶는 것을 거부했고 경비병은 전 왕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 그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단두대로 이어지는 길로 지나가는 일은 어려워 왕은 신부의 팔에 기대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계단에 도착했을 때 왕은 신부의 팔을 놓고 담담하게 섰습니다.     

그의 그런 모습에 군중은 조용해졌고 왕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전가된 모든 범죄는 무죄입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루이의 목은 단두대 칼날 아래로 밀어 넣은 판자 위에 놓였습니다.

기요틴의 칼날은 순식간에 루이의 목 위로 떨어졌고 폐위된 루이 16세는 그렇게 삶을 마감했습니다.

사형집행인은 잘린 머리를 치켜들고 많은 군중에게 '보아라 반역자의 머리로다'라고 외쳤습니다.

'공화국 만세'

함성이 혁명 광장 전체에 퍼졌습니다.

프랑스 국왕의 사망 시각은 침대에서 일어난 지 5시간 22분 뒤였습니다.     

루이 16세의 시신은 표시가 없는 무덤에 던져졌다가 1815년 왕정이 복원되고 난 후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습니다.






약 9개월 후인 1793년 10월 16일, 흰색 옷을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 오르기 위해 머리카락이 잘렸습니다.    

그녀의 나이는 고작 37세였지만 머리는 이미 하얗게 변했고 피부 역시 창백했습니다.

오후 12시 15분, 그녀는 10개월 전 남편의 목을 참수한 악명 높은 사형집행인을 맞이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섰지요.     

그녀의 시그니처인 파우더 블루 실크와 새틴과는 너무나 다른 흰색 옷을 입은 앙투아네트는 우연히 사형집행인 발을 밟았습니다.

그녀는 남자에게 나즈막하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캐리지 그린(Carriage Green)은 루이 16세가 단두대로 향할 때 마지막으로 탔던 녹색 마차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후 파리시는 공원 벤치를 칠하거나 도시 가구나 비품을 수리할 때마다 모두 동일한 캐리지 그린 색상으로 칠해졌고 지금까지 공공연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오랜 농경사회의 영향으로 고향에 집착하고 다른 도시로 이사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반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보일 정도로 전통을 중시하지요.

또한, 중세 봉건주의적인 영향으로 기사도 정신에 바탕을 둔 이상주의 성격을 갖고 있어서 쉽게 열광하고, 규율이 없을 정도로 개인주의적입니다.

흔히 똘레랑스(tolérance)라는 말을 하는 게 그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똘레랑스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중의 하나인데요.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의 의견이나 생각을 그대로 용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외부의 압력에 대항하여 싸울 때에는 혁명적인 면을 보이는데, 이는 프랑스 대혁명을 통하여 민중의 힘으로 자유를 쟁취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프랑스인들은 명랑하고 낙관적이며, 좋은 포도주와 음식을 즐기는 미식가들로 알려져 있고 파리 사람들은 태평하고 충동적이며 변덕스럽고, 불평이 많고 비판하기를 좋아하며 재치와 유머가 풍부하고, 어릴 적부터 생활 속에서 예술을 접하기 때문에 보는 눈이 날카롭다고 합니다.

이것저것 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타인에게 영 무관심한 파리 사람들이 카페테라스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즐기는 모습은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파리지앵들은 남들에게 무심한 척하면서 은근슬쩍 지켜보는 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보았네요.

이상은 파리에서 지내면서 사소하지만 궁금했던 몇 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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