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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07. 2016

I AM LOVE

나는 사랑으로 존재한다






  <아이 엠 러브> 는 한 폭의 정물화 같다. 영화는 무겁고 깊고 두툼해서 한 번 둘러본 것만으로는 온전히 보았다고 하기 힘든, 헤아릴 수 없는 두께의 공간감을 가진 미술관을 닮았다. 세상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못하고 박물관에 걸려있는 명화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게 삶이라고 여기며 살아온 여자, 그러나 자신에게도 소망의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오래도록 서랍에 넣어두었던 자신의 이름을 꺼내 가방에 담는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섬유재벌인 레키 가(家)의 안주인 엠마(틸다 스윈튼), 그녀의 일상은 이태리 명품 카탈로그처럼 우아하다. 가족 만찬을 매번 완벽하게 치러내는 아내이자, 딸과 아들의 인간적인 고민을 보듬을 줄 아는 따뜻한 엄마,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이지만 무언가 마음의 허기를 채울 길이 없는 여자이기도 하다. 예술품 수집 차 러시아에 온 밀라노 상류 재벌가의 장남 탄크레디를 만나 이탈리아로 건너온 후,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은 적이 없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삶이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였던 아이들이 성장해 곁을 떠난 뒤 저택에 혼자 남은 그녀는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느낀다. 뿌리를 통째로 잃어버린 그녀이기에 그것을 대체할 무언가를 열렬히 기다려온 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레키 가의 가족사진)


  여자는 러시아의 광활한 자연을 추억하면서 ‘우하’라 불리는 고향의 수프를 식구들에게 만들어 먹이는 것으로 그리움을 대신한다.


(러시아 수프 우하)


  자신의 원초적 욕망을 실현하고 싶으면서도 제국과 같이 거대하고, 궁전같이 편안한 집안을 포기할 용기는 없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집안 곳곳은 미닫이와 여닫이문, 벽으로 나뉘어 있고 벽난로까지 문으로 닫혀 있다. 심지어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정원의 불빛을 피하기 위해 무겁고 긴 커튼을 내리기도 한다. 주방에서 식당까지 음식을 운반하는 하인들조차 하나 같이 그때마다 무수히 많은 문을 여닫으며 드나든다. 먹다 남은 수프 그릇을 치우는 하인들의 무표정한 모습도 그렇다. 그러한 공간 설정은 레키 가문의 일원들에게 존재하는 심리적인 장벽과 엠마의 격리된 삶을 상징하는 동시에 앞으로 벌어질 어떤 파국을 암시한다.  


 



  영화에는 모란디의 그림들이 상징적으로 등장한다.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 1890~1964)는 흰색, 회색, 갈색 등 주로 다운된 느낌을 주는 색을 구사함으로써 지적이며 명상적인 회화세계를 조성해 나간다. 그는 이탈리아의 화가로서 초기에 몇 점의 풍경화를 제외하고는 평생 정물화만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그림은 마치「책상은 책상이다」(페터 빅셀 著)를 연상시키는데 <나는 사랑이다>라는 제목의 영화와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준다. 그의 정물화는 위엄 있고 엄숙하며 고요하고 무언가 말할 수 없는 품위가 느껴진다. 엠마의 저택에도  걸려있지만, 시어머니가 가문의 전통이니 손자며느리에게 주라며 마치 다 읽은 신문처럼 가볍게 건네던 그림도 모란디의 정물화이다. 이렇듯 영화 전반부는 정물화 같이 감정이 죽어있는 엠마의 모습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있어야 할 자리를 가만히 지키고 서 있는 병과 그릇들은 엠마를 닮아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마저 고요하여 어느 것 하나라도 넘어지면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일렬로 서있는 구도와 탁한 색감의 모란디 그림은 레키 가의 운명을 암시하며 그 속의 엠마를 표현하고 있다.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엠마는 정해진 일정에서 잠시 벗어나 밀라노 대성당 꼭대기에 올라가 무연히 하늘을 본다. 일탈의 욕구를 강하게 암시해 주는 장면이다. 이어 커밍아웃하는 딸 앞에서 카메라는 엠마의 표정보다 수영장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에 앵글을 고정시킨다. 엠마로 하여금 본연의 자아를 갈망하게 하는 계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신은 감히 도전하지 못한 패러다임을 무너뜨리는 딸의 용기가 동경의 대상이 된 셈이다.      


(밀라노의 두오모에 오른 엠마)

                             



(밀라노의 두오모에 오른 엠마)




  그런한 그녀에게 감정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람이 있으니, 아들 에두아르도의 친구 안토니오이다.  두 번의 우연한 만남 이후에 엠마는 안토니오가 셰프로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그가 섬세하고 감성적인 손으로 빚은 붉은 새우요리를 먹으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희열과 조우하게 된다. 마치 황홀경에 도달한 듯 안토니오가 만든 음식을 탐하던 엠마의 달뜬 표정 연기는 최고였으며 그 어느 정사 신보다도 더 야릇한 흥분을 전해 준다. 정해진 식단의 최고 요리만 먹던 엠마에게, 안토니오는 유기농 날 것으로 삶의 또 다른 맛을 제공해 준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안토니오는 숨이 막힐 듯한 레키 가문의 틀에서 숨통을 열어주는 작은 구멍이며 코마에 빠져 있는 의식을 꿈틀거리게 하는 산소 호흡기로 다가온다. 이렇듯 영화 <아이 엠 러브>에서의 음식은 엠마가 지니고 있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상실한 자아를 일깨우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안토니오와 처음 섹스를 나누었던 날, 엠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간다. 방광이 터지기 직전까지 참았던 듯 시원하게 배뇨를 하면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울음이 환한 미소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오르가슴은 참았던 소변을 볼 때 느끼는 짜릿함과 비슷하다는 말을 되짚게 하는 대목이다. 아들의 친구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것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아닌, 기존의 잣대를 뒤엎으며 진정한 행복을 논하는 이 장면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상징한다.


 카타르시스는 종교적으로는 정화를, 의학적으로는 배설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장면의 엠마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불륜을 저질렀다는 기준에서는 정화의 역할을 하지만 엠마의 억압되었던 삶을 헤아리자면 배설로 해석할 수 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엠마의 모습은 그간 억눌린 정서의 배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불륜이 치료제로 작용하며 억압된 심리를 해방시켜준 셈이다.


  아들의 친구 안토니오에게 매료된 엠마는 그가 아들 에두아르도와 함께 레스토랑을 개업하려는 도시 산레모(Sanremo)를 찾아간다. 밀라노에선 낮은 채도로 일관하던 엠마의 의상이 밝은 오렌지 빛으로 바뀐 걸 볼 수 있다.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 이때처럼 엠마가 자유로워 보인 적은 없다. 이탈리아 남부 휴양도시로 유명한 산레모에는 러시아 정교회가 있다. 엠마가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기에 더 없이 잘 어울리는 설정이다.




(안초니오를 만나러 산레모에 간 엠마)

                            



  

  안토니오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묻자 엠마는 잊고 살았던 자신의 이름 키티샤를 기억의 서랍에서 꺼내어, 어릴 적 할머니한테 배웠던 수프를 만들며 몽롱한 행복에 취한다. 그때 엠마는 오렌지 빛깔의 드레스가 아닌 안토니오의 낡은 셔츠와 물 바랜 바지를 입고 있다. 감정과 육체가 고향을 찾은 듯 편안해 보인다. 미각과 영혼의 벼락같은 개안을 경험하며 눈발 날리는 잿빛의 밀라노 같던 그녀의 영혼은 따뜻한 햇살이 번지는 산레모에서 바람 속의 나뭇잎과 더불어 마음껏 풀어진다. 흔들리는 풀잎, 주변을 맴도는 벌레, 서로를 쓰다듬는 손길, 피부의 솜털과 그 사이를 흐르는 땀이 담긴 화면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힘있게 드러낸다. 저택을 장식한 명화나 도자기처럼 완벽한 구도 속의 정물이던 그녀는 마침내 자연의 풍경을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바람이 된 것이다. 이제 그녀가 단지 숨을 쉬기 위해서 일탈을 넘어선 필사의 탈출을 감행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음을 알리듯 안토니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잘라준다.      





  이 영화의 제목은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움베르토 죠르다노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Andrea Chenier> 중,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La Mamma Morta> (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도 삽입되었음) 가사의 일부로 어머니가 죽으면서 아들에게 “나는 사랑이다”라고 하는 부분을 영화의 제목으로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I am love>는 “나는 사랑이다”로 직역하기보다는 “나는 사랑으로 존재한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영화 전반에 오페라 아리아와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과 산레모의 밝은 자연이, 영화 주요부에 감각적인 영상으로 흐르며 마치 자신의 위험한 사랑을 향해 온몸으로 달려가는 엠마를 묘사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엠마가 안토니오와의 만남을 통해 잊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 죽어 있던 엠마의 영혼에 생명력을 전달하며 해방으로 인도했다는 뜻으로 해석하자면 말이다.




  <아이 엠 러브>는 이처럼 잊고 살았던 자아를 찾아가는 여주인공 엠마의 여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이것을 상징하는 코드가 여러 번 드러난다. 어느 날, 안토니오와 엠마의 불륜을 알아챈 아들이 흥분한 끝에 엠마와 언쟁하다가 실족하면서 풀에 빠지며 돌에 머리를 부딪쳐서 병원으로 옮겨지나 끝내 목숨을 잃는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엠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들의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든다. 이때 어둠으로 뒤덮인 에두아르도의 방은 자궁이 되고, 엠마는 짧은 꿈을 꾸며 다시 태어난다.      




  장례식에서 아들을 잃었다는 슬픔과 자신이 원인을 제공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엠마는 남편에게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기로 마음먹는다. 성당 안, 비에 젖은 그녀가 구두를 벗는다. 엠마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길 원하는 첫 번째 몸짓이다. 그 순간 성당안을 맴돌던 한 마리의 비둘기가 창 밖으로 푸드덕 날아간다.

                            


(탄크레디와 엠마)


  엠마는 말한다. “당신이 알고 있던 엠마는 더 이상 없어요. 난 안토니오를 사랑해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은 격한 분노를 나타내지도, 심한 욕설을 토해내지도 않는다. 단지 집에 걸려 있던 정물화 한 점을 떼어내듯 엠마에게 걸쳐주었던 자신의 재킷을 휙 벗기며 “넌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어.”라는 한 마디를 던지곤 자리를 떴을 뿐. 함께 살아온 해묵은 사랑이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어 끝나버리는 탄크레디와 엠마의 대화가, 미묘한 리듬으로 그러나 질척하게 미끄러진다. 하지만 이것이 엠마에게는 오히려 면죄부이자 허가증이 된다. 아들 에두아르도의 죽음은 엠마가 레키 가문과의 연결고리를 끊는 계기가 되고, 남편 탄크레디는 처음부터 엠마를 없었던 사람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녀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다. 한없이 망설이고 괴로워했지만 일단 감정의 천칭에서 내려가기로 결심하는 순간 그녀는 백지장 같은 찰나를 맛본다. 엠마는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모여 앉은 가족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방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녀는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옷과 시계 반지를 미련없이 벗어던진다. 그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녀 이다의 표정과 행동이다. 엠마는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지만 이다는 그녀 맘을 다 알고 있었듯, 말없이 옷장에 들어있는 오래된 옷 몇 가지를 꺼내 가방에 챙겨줄 뿐이다. 서랍에 갇혀있던 엠마가 키티샤가 되는 시점이며, 정물에서 생물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가족보다 그녀를 더 이해한 건 하녀 이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속에서 찬바람 한 줄기가 소용돌이를 쳤다. 러시아에서 입고 왔을 법한 허름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엠마가 이다와 아쉬운 포옹을 나누고 계단을 내려가자 이다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토해낸다.


  엠마가 가족들이 모여 앉은 거실 앞에서 발길을 잠시 주춤거리자 벽을 경계로 서있던 딸이 말없이 고개만 단 한 번 끄떡이며 공감의 눈물을 글썽거린다. 엠마가 떠나고 굳게 닫혀있던 현관문은 열린 채 공허하고 긴 울림을 남기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엠마가 떠난 저택의 텅 빈 현관)

                            

  엔딩 크레디트에 이어 추가로 삽입된 장면에서 동굴 속에서 포옹하고 있는 엠마와 안토니오의 실루엣을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불륜이며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것으로 세상에서는 쉽게 허용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엠마와 안토니오는 사랑 이외의 그 어떤 욕망이나 간섭도 존재하지 않는 태고의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으로 표현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화면의 구도와 영상미를 진하게 채워주고 있는 것은 음악이다. 심장을 쿵쾅거리게 울리는 강렬한 오케스트라 곡은 미국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존 아담스의 작품으로 엠마의 뜨겁고도 혼란스러운 감정을 잘 대변해준다. 그밖에 구스타프 말러의 4번 교향곡 중 바이올린 트레몰로는 가식적인 교양 아래에서 들끓는 사람들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이 엠 러브>의 음악은 인물의 심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때로는 서정적으로, 때로는 민첩하게 활기를 불어넣는다. 이러한 연주가 더해진 것이야말로 영화의 완성이요, 음악이 영화에 미치는 절대적인 영향력이다. 영화의 색조 또한 무채색에서 시작하여 파스텔 풍과 비비드한 컬러로 이어지다 마지막엔 다시 무채색으로 돌아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물론 <아이 엠 러브>가 대책 없이 이런 양식의 힘에만 쫓겨 가는 영화는 아니다. 이것들을 돌파하고, 끝내 자궁이라는 식상하기도 한 원초성의 상징에 도달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마치 흑백 영화처럼 눈이 내리는 밀라노의 풍경을 시작으로, 산레모의 작렬하는 태양, 그리고 아들의 장례를 마치고 난 후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가을비까지 영화는 1년이라는 시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현대적 감성으로 만들어진 고전적인 느낌의 영화이며 21세기에 재탄생한 ‘인형의 집’ 같고, 이탈리아로 무대를 옮긴 ‘채털리 부인의 연인’ 같기도 한,  <아이 엠 러브>는 영화라기보다 오히려 현실을 더 닮았다. 건축과 패션, 음식과 그림, 음악, 신발 등 여러 가지 코드가 영화의 주요한 소스로 등장하여 근사하고 세련된 영상을 만든다. 또한 어떤 특정 사건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식의 방점을 어디에도 두지 않는다.


사랑이란 게 그렇다.

삶의 어떤 장면에서 우리는 얼마나 마음 놓고 밝게 웃을 수 있는가?

쾌감의 탄식을 터뜨리게 하는 일상의 집요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껍데기에 둘러싸인 나를 벗어나, 나를 규정하는 것들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아이 엠 러브>,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엠마, 아니 키티샤의 가방 속이 충만하기를 바랄 뿐이다. (*)




( I  AM LO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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