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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Oct 03. 2016

사드와 프루스트의 마들렌

영화 퀼스 - 참아내기 위해 참을 수 없는 것을 쓰다

  








  <퀼스>는 깃털 펜이다. 우아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제목에서 영화의 내용이 궁금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등의 소설을 영화화한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영화 <퀼스>는 ‘사디즘(가학성 학대 음란증)’이란 조어를 탄생케 한 프랑스의 작가 마르키 드 사드(1740~1814)를 영화한 것이다. 


  사드는 귀족 신분이었으나 왕정을 반대했고,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성적 가학성을 작품에 반영했다는 이유로 27년간 감옥살이를 하는 등 살아있는 내내 탄압받았다. 그가 살았던 프랑스는 왕정의 붕괴와 1789년 혁명으로 인한 공화정, 다시 왕정복고의 시대를 겪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기였다. 왕과 왕비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기존에 존재하던 규범과 질서가 시시때때로 휴지조각이 되는 것을 직접 목도한 그에게 정신의 완벽한 자유는 작가로서 지켜야 할 자존심이자 이루어야 할 마지막 욕망이었다. <퀼스>는 그 이성과 광기, 자유와 복종 간의 갈등을 그린 영화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은 단두대와 함께 날이 새고 날이 저물었다. 수천 명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밝히는 것처럼, 공개처형이고 잔인한 고문이 수반된 것이었다. 단두대는 오히려 처형자의 고통을 최소화해주는 자비였으니 오늘날의 프랑스는 그 역사를 어떤 식으로 교육하는지 궁금하다. 



  “쾌락은 내 인생의 모든 것, 생명과도 바꿀 수 없다” 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쓴 소설은 음란하다는 황실의 판단으로 그를 정신병원에 가둔다. 그러나 몸은 가둘 수 있었지만, 자유로운 정신의 문학적 발현이라는 욕망까지는 가두진 못했다. 샤렝턴에 부임한 위선적 도덕주의자 로이 꼴라 박사는 사드에게서 종이와 잉크, 퀼스(깃털 펜)를 빼앗는다. 그러나 ‘쓰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닭 뼈에 포도주를 찍어 침대 시트에 소설을 쓰더니, 그것도 못하게 되자 깨진 유리조각과 손가락에서 흐른 피를 이용해 자신의 발가벗겨진 몸에 글을 쓴다. 그마저 제지당하자 마침내 병실 틈의 구멍으로 소설을 구술(口述)해 옮겨 쓰게 되는 과정에서 대필을 하던 하녀 마들렌은 정신병자의 칼에 목숨을 잃는다. 자신의 안위는 물론 사랑하는 이의 죽음조차도 욕망 앞에선 무력했다. 욕망이 그를 유폐시키고 마들렌을 죽게 한 것이다. 고통에 절규하는 사드는 욕망의 실현을 포기한 것일까? 그는 여기서도 끝나지 않는다. 햇빛 한 가닥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서 자신의 배설물을 잉크 삼아 벽에 쓰기에 이른다. 그 어떤 폭압도 그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던 것이다. 많은 스캔들과 파격적인 소설을 남겼던 인물 사드의 사상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쾌락 일변도’의 성적 행위에 집착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계몽주의의 ‘이성의 압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 했던,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사드가, 정신병원에 구속되어 ‘마들렌’이라는 하녀의 도움으로 글쓰기를 지속하는 것과 비슷한 예가 있다. 프랑스의 20세기 작가인 마르셸 프루스트(1871~1922)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하는 동안 ‘셀레스트’라는 하녀로 하여금 자신이 불러주는 것을 받아쓰게 한 것이다. 셀레스트는 프루스트의 단상들을 정리하거나 원고를 갖고 출판사를 왕래하는 등, 그의 글이 책으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내밀하고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천재적인 남성 작가와 그를 내조하는 헌신적인 하녀의 설정이 자연스레 일치된다. 재미있게도 퀼스 안에는 마치 이러한 추측을 증명하는 것 같은 장면이 나온다. 



  마들렌(케이트 윈슬렛)이 사드 후작(제프리 러시)의 원고를 건네주러 갔을 때 출판업자는 그녀를 유혹하는 말투로 이름을 묻는다. 마들렌이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자 그는 “과자 이름과 똑같군요”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권태에 젖은 청년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맛에 이끌려 기억 속의 어린 시절을 찾아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프루스트는 평생 천식으로 고생하면서 방 전체의 벽을 코르크로 둘러막고 세상에서 자신을 고립시킨 채 <잃어버린…>을 써 내려갔다. 1922년 봄, 프루스트는 완성된 소설에 ‘끝’이라는 말을 쓰고 “이제는 죽을 수 있어요” 하면서도 계속 집필실 램프를 끄지 못하게 했지만 그해 11월 18일 사망했다. 프루스트가 의식의 흐름을 좇아 인간의 내면을 탐색한 기념비적인 작품을 썼다면 사드는 성본능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시도하여 인간의 자유와 악의 문제를 철저하게 추구하였다.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눈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는 프루스트의 말은 가을밤의 바람 한 묶음처럼 나를 흔들었다. 내게 사드의 퀼스처럼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초저녁별처럼 스쳐 지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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