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나무 Jul 03. 2024

풍경의 조각

11. 피엔차, 비탈레타 예배당





발 도르차(Val d'Orcia)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시에나 남쪽의 구릉지대에서 아미타 산까지 지역을 말한다.

그 외에도 산 퀴리코 도르차(San Quirico d'Orcia), 카스틸리오네 도르차(Castiglione d'Orcia)라는 지명도 있기에 도르차가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검색해 보니 오르차(Orcia)는 아미타 산 계곡의 중앙에 흐르는 강 이름이다. 

발 도르차의 면적은 서울과 비슷하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피엔차에서 도로로 내려오면 보이는 발 도르차 전경 사진
발 도르차 주변 코무네 지도
오르차 강



A자매들은 오전에 예정한 대로 발 도르차라는 그림의 한 부분인 캄피 엘리시(Campi Elisi)의 짧은 트레킹을(1.5km)하러 가고 나는 일단 자동차 키의 배터리를 해결해야 하니 발렌티나가 알려준 자동차용품점부터 가기로 했다.


캄피 엘리시라는 이름의 길은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밑밭을 걸어가는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 그루의 사이프러스와 밀밭 사이로 나있는 조붓한 길이다.



영화 글레디에이터 중



숙소에서 피엔차까지는 10km, 그 짧은 거리를 가는데 무려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가다 서고 또다시 출발하는가 싶으면 또 서고를 반복했다.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크기의 하늘, 사람 얼굴처럼 크기와 모양이 다른 구름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이 펼쳐진 구릉, 그리고 간간이 꽂아놓은 색연필 같은 사이프러스...

그 풍경이 나를 자꾸만 붙잡았기 때문이다.


접사에서 망원, 광각의 기능까지 두루두루 갖춘 우리의 눈을 따라갈 수 있는 카메라 렌즈는 없다.

눈에 보이는 모두를 카메라에 담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게다가 나의 몹쓸 기억력은 그 아름다운 풍경을 잊고 말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무시로 비상등을 켜고 차를 세운 후 풍경의 조각들을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저 풍경이다.

바쁠 것 없이 오롯 그곳의 아름다움에 한없이 취하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 무한대로 이어졌다.

사진은 그야말로 조각파이 한 조각을 먹었을 때의 아쉬움처럼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구름이 있어서다.

구름이 아름다운 것은 바람이 있어서다.

또렷하게 파란 하늘에는 목화솜 같은 구름들이 펼쳐져 있다.

어디는 진하고 어디는 연한 초록으로 펼쳐진 높낮이가 다른 구릉들은 제주도의 오름을 닮았다.

초록의 진하고 연함, 그 채도의 범인은 바로 구름의 그림자가 덮고 있어서이다.

하늘을 가리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은 아름다운 대지,

그러고 보면 '자연스럽다'보다 더 좋은 찬사는 없겠다 싶다.

그때부터 나는 그림 속에 있었고 영화의 스크린 속에 있었다.






피엔차 전경









더디게 도착한 곳은 자동차용품점이 아니라 전기자동차 충전소였다.

그녀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어렵겠지만 렌터카 사무실에 전화해서 자동차 키 배터리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알아달라고 말이다.

그녀는 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피렌체의 렌터카 사무실 직원과 통화를 했고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는 긴급 상황이 아니니 괜찮을 거라는 답을 전해왔다.


내가 과민반응을 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렇다면 더 이상 신경 끄고 여행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바꿨다.


한 폭의 유화 같은 그림이 그려진 피엔차의 성문으로 들어섰다.

여행자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작은 테이블을 놓고 그림을 판매하는 할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1년 전에는 숏 컷이던 머리가 그새 자라 올림머리로 헤어 스타일이 바뀐 것 말고는 변함이 없다.



2024년 5월 24일 피엔차
2023년 5월 23일 피엔차




벌꿀색 돌벽은 햇살을 받아 더욱 노랗게 보인다.

앙증맞게 작은 하얀 꽃잎들이 부서져 내릴듯한 재스민꽃,

우리 집이 제일 이쁘다는 듯 문 앞에는 형형색색의 제라늄, 장미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이프러스 세 그루가 그려진 가방을 샀던 그 상점에는 같은 자리에 똑같은 가방이 걸려 있다.

유난히 꼬릿 한 치즈 향기를 뿜어내던 치즈 가게,

숙소에서 만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었던 시청옆  돌 벤치,

거리를 걷고 있는 여행자만 다를 뿐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다.













B와 나는 피엔차 올드 타운 중심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자매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들~ 여기 있었네'


트레킹을 마치고 피엔차로 온 자매들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약 24시간 만에 만났을 뿐인데 24년 만에 만난 것처럼 허그를 하며 반가워했다.


MH와 SY는 아페롤 스프리츠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차가운 생맥주를 받아 든 SH는 바로 덩실덩실 어깨를 들썩이며 환하게 웃는다.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테라스 카페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 여유로운 시간, 그 맛 또한 여행의 참 맛이다.


피엔차에서 시간을 보내겠다는 자매들과 헤어져 숙소로 들아왔다.

유럽의 세탁기는 거의 3시간이 걸려야 끝이 난다.

돌아오자마자 빨래를 꺼내 탈탈 털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빨랫줄, 그마저 정겹다.

뜨거운 햇살과 올리브 나무 사이로 불어온 바람으로 빨래는 뽀송뽀송 마를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유럽의 시계는 느리게 간다.

수동 기어를 사용하는 소형의 올드카가 대부분이며 인터넷도 무척 느리다.

요즘도 에어컨이 없는 집이 더 많다.

오래된 건물이 많아 설치가 어렵고 미관을 해치는 실외기는 보이지 않게 설치해야 하는 규정 때문이라고 한다.


토스카나에 있는 작은 코무네(이탈리아의 행정구역으로 지방지자체, 즉 작은 마을을 뜻함)들은 거의 대부분 산 꼭대기에 있다.

그곳들은 예외 없이 어디나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문을 통해 마을로 들어간다.

숙소가 있는 작은 마을 몬티키엘로 역시 인구 200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1년 전 피엔차에서 사이프러스 그림이 그려진 가죽 가방을 살 때 주인이 작은 사진엽서를 가방 안에 넣어주며 말했다.


'이 아름다운 예배당은 가보셨나요?'

'아뇨, 못 가봤어요.'

'기회가 되면 꼭 가보세요. 정말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네, 그럴게요.'


엽서에 그곳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마돈나 디 비탈레타(Madonna di Vitaleta)'

그 후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살펴보다 그 예배당을 발견했다.

뭔지도 모르고 먼발치에서 찍은 사진 중에 그 예배당이 있었다.




1년 전 피엔파에서 구입한 가방, 여전히 같은 가방을 팔고 있었다.
그때 알게된 비탈레타 예배당
2023년 5월, 우연히 찍은 비탈레타 예배당




마돈나 디 비탈레타 예배당은 산 퀴리코 도르차와 피엔차 사이의 발 도르차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는 장소 중 하나이다.

그곳은 숙소에서 멀지 않다.

오후 5시쯤 혼자 숙소를 나섰다.


도로를 벗어나 샛길로 들어서니 비포장길로 이어졌다.

벌목된 통나무들이 길가에 수북이 쌓여있고 자동차는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흙길을 달려본 지도 오랜만이다.

자갈과 모래로 털털거리는 느낌이 마치 오래된 재즈 LP에서 흘러나오는 지직거림처럼 정겹다.

자동차 대여섯 대가 자연스럽게 주차되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아마도 그곳부터는 걸어야 하나보다.


길의 왼쪽으로는 둥글게 말아놓은 커다란 건초더미들이 드문드문 놓여있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노란 유채꽃이 하나둘 피어나고 있었다.

300m쯤 걷다 보니 이미 사진으로 익숙해진 예배당이 조그맣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이프러스들이 양쪽으로 좌청룡 우백호처럼 예배당을 보호하듯 서 있다.

사실 이곳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포토 스폿이며 웨딩촬영, 또는 스몰 웨딩, 야외 리셉션과 파티도 열리는  곳이다.



비탈레타 예배당 가는 길














역시나 그때도 웨딩 촬영을 하는 커플이 보였다.

비탈레타는 교회나 성당이라는 말보다 작은 예배당이라고 하는 게 적절할 만큼 작고 심플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위치이다.

우리나라 사찰들을 가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더라도 절의 위치가 참 좋다는 걸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곳 역시 그런 생각이 가장 컸다.

천사가 이곳에 예배당을 지으라고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진짜였겠구나 싶을 정도로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 주변 경관은 거침없이 아름다웠다.


유채꽃이 하나둘 피어나고 있는 초록 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떤 장식 하나도 없이 단순하고 소박한 예배당이 좋았다.

차와 식사를 판매하는 레스토랑이 문을 닫아 아쉬움이 컸지만 한 동안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제 가야지 하면서 돌아가는 중에도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행복한 실종자처럼 나는 없고 발바국 소리만 저벅저벅 들렸다.


9일 후, 다시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또 다른 시간의 아름다운 예배당을 만날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의 기준, 만족의 잣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