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사 보나리에서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이른 산책을 나갔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먼 마을에 안개가 자욱하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혹시 저곳의 이름도 무진(霧津)일까?
안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다 발을 멈추었다.
풍경은 멀리서 볼 때 아름다운 법이다.
'가까이 가면 저 모습이 보이지 않을 거야.'
이 여행을 떠나기 전, 이런 말을 썼다.
'새벽녘 안개가 드리운 평원과 구름이 많은 날의 노을을, 그리고 별이 쏟아지는 들판을 걸어볼 겁니다.'
새벽안개를 보았으니 한 가지 바람은 이루어진 거다.
그 안개가 뭐라고 흐뭇하다.
그 후로도 새벽 드라이빙에서 간간히 안개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그리운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사이프러스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
길쭉한 모양이 눈에 쉽게 띄기도 하지만 한 그루만 있어도 아름답다.
사이프러스가 모여있는 군락지로 가는 중에 조수석의 BB가 말했다.
'나 이제 저 나무 이름 외웠어.'
'자꾸 잊어버리신다더니 어떻게요?'
'싸이 더하기, 그래서 싸이프러스'
77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귀여운 멘트에 한참을 웃으며 달렸다.
어떤 농가 앞, 차를 멈춰야 했다.
내비게이션은 직진하라고 하지만 그곳은 엄연한 사유지로 들어갈 수 없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사이프러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주소를 잘못 찾았나 보다 싶어 차를 돌리는데 차 한 대가 올라오면서 차창을 내리는 게 보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여서 나도 유리창를 내렸다.
중년의 남자는 이태리어로 말했다.
차를 한쪽에 주차하고 걸어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아마도 그는 집의 주인이거나 인근 주민인데 나 같은 여행자들이 종종 있었나 보다.
그라찌에 밀레를 연발하며 오가는 차들이 방해되지 않는 위치에 주차를 하고 농가를 통과하여 계속 걸어갔다.
100m쯤 걷다 보니 앞쪽에 강강술래를 하는 아낙들처럼 동그랗게 모여있는 사이프러스가 보였다.
제대로 잘 찾아왔다.
하이킹, 사이클링을 하는 사람도 몇몇도 보였다.
그리고 약 300m쯤 아래쪽 언덕에 낯익은 사이프러스 군락지가 보였다.
작년에 택시 기사인 마테오가 사진 찍으라며 잠시 세워줬던 바로 그곳이다.
당시 내가 차에서 내렸던 도로도 보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도로의 반대쪽 산길로 올라온 것이다.
아침에 안개가 끼면 날이 맑다고 하더니 빛이 너무 강하다.
이런 날의 사진은 영 느낌이 덜하다.
노출을 줄여봐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목적한 곳에 오게 된 게 뿌듯하다.
밀을 추수하고 난 빈 밭이 누렇다.
5월에 느낄 수 있는 가을 풍경이 생경하지만 그 또한 이국적인 모습이라 나쁘지 않다.
발도르차에서 포토 스폿으로 유명한 곳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사이프러스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아니면 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 위에 나란히 서 있는 나무들은 감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그곳들은 대부분 오래된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가 있는 곳이다.
즉 사유지로 들어가는 진입로인 것이다.
아그리투리스모는 이탈리아어로 농업(agriculture)과 관광(tourism)을 합친 단어로 보통 농가나 농가의 별장을 가리킨다.
실제로 농사를 짓는 사람의 집에 머물며 그들이 재배한 식재료로 만든 식사를 제공받기도 한다.
요컨대 이탈리아식 민박이다.
하지만 요즘은 오직 숙박만을 위해 운영하는 곳들이 많다.
평원을 달리다가 보면 침대그림이 있는 표지판을 간간히 보게 된다. 규모가 좀 크고 사이프러스들이 늘어서 있는 곳들로 대부분 아그리투리스모이다.
럭셔리한 풀장을 만들고 세련되게 리모델링하여 특급 호텔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곳들은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진을 찍으려고 찾아오는 많은 여행자들로 인한 불편은 감수해야 할 거라 여겨진다.
포지오 코빌리(poggio covili) 역시 아그리투리스모이고 그곳으로 진입하는 사이프러스길이 유명하다.
일명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의 집이라 알려져 있지만 그와는 무관한 곳이다.
주차할 공간이 있기에 지나는 길에 잠시 들러보았다.
예상대로 많은 여행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특히 한국인들이 많다.
매스컴에 소개되어서인지 나처럼 렌트를 하거나 여행사를 통한 1일 투어가 많아진 듯하다.
사람이 많아 사진 찍기가 마땅찮았다.
숙소가 멀지 않으니 다른 날 이른 아침이나 저녁 무렵에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자매들을 만나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바뇨 비뇨니(Bagno Vignoni)의 주차장을 검색하려고 하던 참이다.
안전벨트를 하고 가방에서 안경과 스마트폰을 꺼내어 구글맵스 어플을 여는 순간이었다.
도로에 세워둔 아그리투리스모 표지판(포지오 코빌리)
그러니까 그게 차에 오른 지 30초나 지났을까?
느닷없이 뒤에서 클래션 소리가 들린다.
'빵빵'
'뭐지?'
사이드 미러로 확인하니 내가 차에 타러 갈 때 막 도착한 자동차였다.
한국인은 한국인을 귀신같이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분명 한국인이다.
그들도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걸 당연히 알았을 거다.
그곳은 따로 주차 공간이 없으므로 갓길에 세울 수밖에 없다.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었는지 아그리투리스모의 사이프러스길로 들어가는 진입로 중앙을 떡 하니 막고 정차하는 게 보였었다.
앞 차가 떠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리거나 다른 주차 공간을 찾아 이동하는 게 마땅하다.
클랙션을 울려대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곳은 한국이 아니다.
시동 걸고 바로 출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꾸물대는 성격도 아니고 행동이 빠른 편이다.
당연히 오랜 시간을 지체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편의를 위해 떠날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무턱대고 출발할 수는 없었다.
응급상황도 아닌데 이태리의 거대한 평원 한가운데서 클랙션을 연속으로 울려대다니 창피한 노릇이다.
마치 '뭘 꾸물거리는 거야, 빨리 꺼져.'라는 듯 말이다.
신경이 곤두서고 집중이 안되니 구글 맵 서치가 더 더뎠다.
마음 같아서는 내려서 왜 그러시냐고 정중하게 묻고 싶었다.
아니, 아예 시동을 끄고 카메라를 챙겨 차에서 다시 내릴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들과 똑같은 사람은 되지 말자며 참고 또 참았다.
매너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에티켓을 배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나서 엉뚱한 이유로 인해 기분을 상하게 된 것이 어이없었다.
내 맘 같지 않은 게 많다.
어디를 가든 같은 풍경은 한 곳도 없다.
외롭게 뚝 떨어진 농가 하나, 아니면 빨간 꽃 양귀비가 반쯤 피어있는 들판, 고작 300~400m 위에 보이는 꼬무네들의 성당 종탑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속상했던 마음이 사그라글고 있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제법 많이 했다.
가장 크고 대표적인 로마, 피렌체, 베니스, 밀라노 등은 3~4차례 가봤고
이번 여행을 마치면 이탈리아에서만 50개가 넘는 크고 작은 도시들을 가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외우게 된 단어들이 조금 있다.
이태리어는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되기 때문에 비교적 읽기는 쉽다.
간혹 이건 뭐지? 하며 의아한 게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음인 g와 n이 거듭 나오는 단어이다.
예를 들어 화장실은 Bagno이다.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바그노가 되지만 바뇨라 읽는다.
지금 가고 있는 곳의 이름은 바뇨 비뇨니인데 철자는 바그노 비그노니로 소리 내어야 할 것 같은 Bagno Vignoni이다.
이태리어의 g는 n과 l앞에서 묵음이다.
쉬운 예로 이탈리아 요리 중 뇨끼라는 음식이 있다.
치즈와 감자를 넣어 부드럽게 반죽한 이탈리아식 감자 수제비 같은 음식이다.
이 뇨끼의 철자는 gnocchi인데 맨 앞의 g 역시 n 앞에 있기 때문에 묵음이라 뇨끼라고 말한다.
대신 g가 있으면 노끼가 아니라 뇨끼, 즉 복모음으로 소리 낸다.
메인 광장에는 천연 온천수로 가득 찬 사각형의 커다란 욕조가 있다.
연못도 아니고 분수도 아닌 사각형의 물 웅덩이가 신기하다.
유황과 미네랄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목욕탕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에 들어가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물에 반영된 로지아의 모습이 사진에서 보듯 아름다웠다.
바뇨 비뇨니의 건물들 역시 전형적인 꿀색 토스카나 석재로 만들어져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물씬 들었다.
마을이 정말 작은데 아직 오전이라 상점이나 레스토랑들이 오픈하지 않아 더 조용하고 호젓하다.
길을 따라 쭉 걸어가니 물이 졸졸졸 흘러가게 만들어 놓은 물길이 있었다.
손으로 만져 보니 약간 미지근한 정도이다.
어린아이들이 들어가 발로 물장난을 한다.
길 끝에 난간으로 내려다보니 옥색의 샘이 보였다.
파르코 데이 물리니( Parco dei Mulini)라는 천연 온천이다.
하지만 그곳 역시 물 온도가 높지 않아 요즘은 찾는 이가 거의 없다고 한다.
입구에 호텔이 있고 ztl 지역 알림판이 있다.
유황 온천이 흐르는 물길 절벽 아래로 보이는 온천 Parco dei Mulini
점심으로 먹은 메뉴 중 브루스케타(납작하게 자른 바게트를 구운 후 그 위에 치즈, 프로슈토, 토마토 등을 얹은 전채 요리)가 무척 맛있었다.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자매들은 그곳을 더 돌아보기로 하고 나와 B는 몬테풀차노로 향했다.
토스카나에는 몬테풀차노, 몬탈치노, 몬티키엘로, 몬테리조니 등 이름이 비슷한 지명들이 유독 많다.
그 이유가 뭔지 알아봐야겠다.
호스트인 발렌티나에게 메시지도 보내야 한다.
저녁 식사 후 자매들을 우리 숙소에 초대하려고 하는데 먼저 그녀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다.
와인 파티를 빙자한 수다 타임이 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