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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17. 2016

그 여자, 릴리 2

글로 읽는 영화, 대니쉬 걸(에디 레드메인)



* 1,2,3,5 : 에이나르(남편) 1인칭 시점

* 4,6 : 게르다(아내) 1인칭 시점     









4. 파리, 게르다 베네거     



  파리에서 열린 나의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      

- 제 남편도 화가예요.

- 그렇군요, 그분도 파리에서 전시를 하나요?      

- 그때 남편이 내 곁으로 다가오며 직접 대답했다.     

- 제 작품은 프랑스인들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답니다.      

- 또 다른 이가 내게 질문했다.     

- 혹시 모델이 여기 왔나요? 정말 매력적인 여인이에요, 그녀를 꼭 만나보고 싶군요.

- 아뇨, 그녀는 덴마크에 있어요.     


  모델이 예쁘다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남편의 얼굴에 흡족하고 충만한 미소가 번졌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환한 표정이었다. 파리에 온 후 남편은 잠자리를 매번 거부했다. 가끔 그의 다리 사이로 내 손이 다가가기라도 하면 전에 없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질색을 했다. 그때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남편을 이해하는 나로서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로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릴리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남편은 늘 우울하고 창백했다. 그림을 그리는 대신 나를 위해 캔버스를 만들어주는 일이 고작이었다.



- 내 옆에서 작업하던 당신이 그리워요. 예전처럼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난 이제 불가능해. 더 이상 바일레의 풍경도 기억나지 않아.     

  남편이 파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미쳤을 때, 그가 어릴 적 제법 친했었던 한 친구가 파리에서 꽤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딜러가 되었다는 말이 기억났다. 나는 그를 찾아갔다.


  대리석 바닥에 황금색 철재 빔으로 고급스럽게 장식된 계단과 질 좋은 타일로 마무리된 벽엔 중후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꽤 고급스럽고 우아한 갤러리였다.       

- 안녕하세요, 한스 악스길입니다. 당신 그림에 대한 평이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현대 미술품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 그건 알고 있어요. 그림 얘기가 아니니 제 얘기를 좀 들어보세요.   


  

  한스는 단정하게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에 훤칠한 키, 그리고 좋은 매너가 몸에 배어있는 전형적인 신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딜러다운 비즈니스 맨의 면모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 파리엔 언제 오셨죠?

- 6개월 되었어요.

- 라스무센이 왜 제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는지 모르겠군요.

- 직접 만나고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제가 알려달라고 했어요. 제 남편의 어릴 때 친구라고….  

- 그래요? 남편 성함이….

- 에이나르 베게너. 기억나세요?

- 에이나르? 당연히 기억하죠. 얼마나 친했는데….

- 당신이 키스했다더군요.

- 아~ 맞아요, 우리가 꼬마였을 때였어요. 부엌에서 둘이 장난치며 노는데 앞치마를 입은 에이나르가 하도 예뻐서 키스했죠. 맞아요. 기억나요. 그때 마침 에이나르 아버지가 부엌에 들어오시다 그 모습을 보셨어요. 저는 엄청 호되게 야단맞고 쫓겨났었죠. 그런데 에이나르는 왜 부인과 함께 오지 않았어요?  

- 사실은 남편이 심하게 방황하고 있어요. 그림도 통 그리지 않아요. 제가 당신에게 도움을 청한 걸 알게 되면 싫어할 게 분명해요. 그의 그림을 잘 아는 딜러가 필요해요. 아니 남편은 친구가 필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그만 말꼬리가 흐려지고 말았다. 그만큼 남편에게 지쳐 있었고 상황을 전달하는 심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한스가 그런 나를 위로하듯 와인 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그렇게 겨우 눈물의 위기를 모면하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말했다.     


- 내일 어떤 딜러가 우리 집에 찾아올 거 에요. 한 번 만나 보세요. 당신 맘이 달라질 거예요.

- 그림도 그리지 않는 내가 무슨 딜러가 필요해? 나는 당신 도와주는 일만으로도 만족해.     


캔버스를 나무틀에 팽팽하게 고정하여 못질을 하던 남편이 관심 없다는 투로 건성건성 말했다.  

그게 누구냐면…, 한스 악스길이에요. 저녁 먹고 집에 들르기로 했어요. 당신을 상당히 좋게 기억하더라고요.

다음 날, 한스와 함께 집에 도착하여 현관문을 열자마자 벽에 걸려있는 에이나르의 그림을 보고 그가 말했다.


- 아~, 여기 기억나요. 어릴 때 살았던 집 근처, 바일레의 피요르드네요.

- 네, 맞아요. 파리로 오기 직전에 에이나르가 그린 그림이죠.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거실로 들어선 순간 나는 하마터면 숨이 멎을 뻔했다. 에이나르가 아닌 그녀, 릴리가 소파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청색의 자잘한 꽃무늬 바이어스가 둘러진 황금색 숄 스타일의 블라우스에 동색의 스커트와 흰 스타킹, 그리고 아이보리 구두를 신은 그녀가 책을 보다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나는 서둘러 정신을 수습하고 한스에게 소개했다.

- 한스, 이쪽은 릴리 베게너예요, 에이나르의 사촌이죠. 남편이 일어서며 말했다.

- 어릴 때 바일레에서 오빠랑 함께 한 번 만난 적 있는데 아마 기억 못 하실 거 에요. 반가워요. 한스, 술 한 잔 하실래요?     

한스는 방안 여기저기 놓여있는 릴리의 초상화를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남편이 한스에게 코냑 잔을 건네며 말했다.     



- 지금 에이나르가 없어서 유감이네요. 두 분이 바일레에서 친했다는 얘기는 들었거든요. 그림 그리는 것을 유일하게 동조해 준 친구였다던데…

- 에이나르가 나를 그려주곤 했죠. 길 가의 돌을 집어 바위 위에다가요.

- 결혼은 하셨나요? 한스!

- 아뇨, 오랫동안 혼자 살았더니 굳어져서 그게 편해요.

- 결혼은 꼭 해야 해요. 인생을 희망차게 하고 다른 사람으로 탄생시켜 주거든요.

- 그래요?

- 두 사람 이상의 그 무엇이 되죠. 결혼을 안 하는 건 끔찍한….     

갑자기 릴리의 목소리가 울컥하더니 말을 흐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난처해진 내가 한스에게 그만 가보시는 게 좋겠다고 말하니 나를 돕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은 이미 릴리가 곧 에이나르라는 걸 알아챘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적절한 타이밍에 자리를 피해서 한스가 눈치 못 챘겠지?

- 모르겠어요. 그만 주무세요.

- 게르다, 당신 잠옷 좀 빌려 줄래? 남편이 망설이듯 떠듬떠듬 말했다.

- 안 돼요. 전엔 이런 적이 없었잖아요. 릴리는 결코 자고 간 적이 없다고요.

- 내가 뭘 입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왜냐면 잠이 들면 난 늘 릴리가 되어 꿈을 꾸니까.     

남편은 내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남편이 원하는 대로 내 잠옷을 입혀주니 울다 지친 아기처럼 곤히 잠이 들었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지출이 많았다. 남편은 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는데다가 새로운 드레스와 구두, 모자, 액세서리들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이유도 있었다. 생활비가 부족하다는 내 말에 남편은 릴리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릴리의 초상화들이 잘 팔리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은 릴리가 되어 지내는 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 행복해했다. 그렇게 남편의 모습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웠다.      


 


   알 수 없는 우수와 슬픈 눈빛을 가진 릴리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치솟았고 전시회는 연일 성황을 이루었다. 한스에게는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는데 그가 전시장에 찾아왔다. 에이나르도 왔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런 자리를 싫어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누군가 축하해 줄 필요가 있겠다면서 저녁식사를 사겠다고 했다. 무용가 친구 울라가 올 거라면서 사양하니 갑자기 한스가 내 손목을 잡았다. 그의 눈빛이 무얼 말하는지 물론 짐작되었다. 남편이 있으나 남편을 잃은? 불쌍한 여자를 구제해주겠다는 남자의 배려? 기분이 상한 나는 단호하고 매몰차게 말했다.       

  


- 이러지 마세요. 저는 아직 에이나르의 부인이에요.  

   

  그의 손을 뿌리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어디서 ‘한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래층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그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성과 거의 몸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는 듯 외로움이 밀려오면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현관에 걸린 코트를 집어 들고 문을 여는데 누군가 비가 내린다면서 우산을 건넸다. 하지만 나는 우산을 마다한 채 거리로 뛰쳐나갔다. 무작정 걷다가 어느 벤치에 앉았다. 도랑 물 흐르듯 눈물과 빗물이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갈 곳이 없었다. 남편이 그리웠다. 남편이 필요했다. 릴리가 남편을 훔쳐갔다. 남편을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을 걸 예감했다.     



- 맙소사 게르다, 어디서 이렇게 흠뻑 젖은 거야? 전시는 어땠어?     


  남편은 살구 색 나이트 웨어 위에 화사한 꽃무늬 가운을 입고 있었다. 메이크업은 완벽했고 가발도 어색하지 않게 썩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어딜 봐도 에이나르가 아닌 릴리였다. 내 기분과는 상대적으로 그는 매우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 와 봤으면 알 거 아녜요?

- 내가 저녁 식사를 만들어놨어. 우리 둘이 소박하게나마 축하를 하자고….

- 에이나르, 난 이렇게 살 수 없어요. 오늘 같은 일은 함께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 난 할 수 없어, 게르다. 그건 당신과 에이나르 몫이잖아.

- 바보 같은 게임, 이제 그만 좀 해요.

- 게르다, 이건 더 이상 게임이 아냐.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줘.

- 당신은 전시회에 왔어야 해요.

- 내가 어떻게 갈 수 있겠어. 날 좀 봐. 내 모습을 보라고.

- 어떻게 당신은 릴리만 생각하죠? 난 에이나르가 보고 싶어요. 남편이 필요해요. 남편을 데려다주세요.

눈물이 연신 볼을 타고 내렸고 스팽글이 달린 검정 드레스에선 여전히 빗물이 뚝뚝 떨어져 카펫을 적시고 있었다.                             

-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 난 내 남편과 얘기하고 싶어요. 남편을 안고 싶어요. 난 그 사람이 필요해요. 그 사람을 데려다줄 수 없어요? 노력이라도 해 봐요.

- 안 돼, 미안해 게르다.     

- 남편은 단호했다. 축 쳐진 어깨, 젖은 몸 그대로 다시 집을 나섰다. 릴리는 나를 잡지 않았다. 무작정 걸었다.




  비는 그쳤지만 늦은 밤,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다. 갈 곳이 없었다. 불현듯 생각난 곳이 한스의 갤러리.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한스가 현관으로 들어오다가 계단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물었다.     


- 이런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오?     


  나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는 나를 따뜻하고 힘차게 안아주었다.     

괜찮으냐는 질문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엉겁결에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갑자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그를 뿌리치고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둘 데 없이 허전한 마음과 갈 데 없던 발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릴리의 이야기는 수치심을 잊을 만큼 고통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흰색 차이나 남성용 셔츠 위에 서스펜더로 연결한 남성용 바지를 입은 에이나르가 안락의자에 앉아있었다. 가발도 벗고 메이크업도 지웠지만 발끝을 모으고 앉아있는 자세나 가지런한 손 모양은 영락없이 릴리였다.      



- 당신이 원하는 걸 난 줄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식으로 지낼 순 없겠어.

- 그렇군요.       

공연 차 파리에 온 울라를 오랜만에 만났다.      

- 의사를 만나 봐, 에이나르가 너무 말랐어.

- 헥슬러가 내린 진단 몰라서 그런 소리 해? 상처만 되는 진찰을 또 받을 수는 없어.

- 이건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해. 내가 아는 산부인과 의사가 있어. 에이나르 같은 성 정체성에 혼란을 가진 색다른 환자들에게 관심이 많아. 드레스덴에 살지만 지금 파리에 와 있으니까 꼭 만나 봐.       

  베이지색 통바지에 그보다 옅은 베이지색의 큰 카라의 블라우스, 연보라 스카프를 목에 감고 제 천으로 만든 벨트로 재킷의 허리를 졸라맨 정장을 입은 에이나르가 거실로 나왔다. 화장을 하거나 가발을 쓰진 않았지만 어찌 보면 남자 같고 어찌 보면 여성 같은 맵시였다.      

- 해결책을 찾고 싶어. 도서관에 다녀올게.      



  에이나르는 도서관에 가서 <성적 부도덕성에 관한 과학적 연구>라는 책에서 남성과 여성의 생식 구조에 대한 내용을 찾아 읽었다. 그러나 속 시원한 해결 방법은 찾지 못했다. 공원을 지나는데 불량배들의 시비를 걸었다. ‘야! 너 계집애야? 남자야? 아니면 레즈비언? 거시기는 있냐?’ 조롱하듯 질문을 쏟아내며 시시덕거리었다. 에이나르는 대꾸 없이 걸어갔다. 그러자 그들은 다짜고짜  에이나르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찼다.


  

  온통 피투성이가 된 에이나르가 찾아간 곳은 한스의 갤러리였다.

- 이런 모습을 아내에게 보일 수가 없어서 널 찾아왔어. 지금까지 아내는 감내하기 힘든 시간들을 충분히 보내왔거든. 이해가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한스. 매일 아침 오늘 하루는 에이나르로 살자고, 나 자신에게 약속하곤 하지. 하지만 내 안에 에이나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때때로 에이나르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해. 그런데 그건 릴리도 죽이게 되는 거라 할 수가 없어.

- 노력을 해봐, 에이나르, 내가 의사를 소개해 줄게.     


  

  그렇게 한스가 소개해 준 의사와 상담을 했지만 그 의사 역시 에이나르를 정신분열증 환자로 진단하여 구속복을 입혀 강제로 가두려 했다. 그 사실을 미리 안 에이나르가 겨우 도망쳐 집으로 가 아내에게 말했다.     

- 내가 정신분열증 환자로 보여?

- 절대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된 건 다 저 때문이에요. 그때 그 그림만 그리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 아냐, 게르다. 세상 밖으로 날 불러낸 건 당신이지만 릴리는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어. 늘 나를 기다리면서….

- 에이나르, 우리 마지막으로 의사 한 사람만 더 만나 봐요.      

 울라가 소개한 산부인과 의사를 남편과 함께 만났다.    

 


-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상태를 얘기해보세요.

- 교수님, 사실 저는…, 제가 여자라고 믿어요. 정신적으로요.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남편 말에 동의했다.

- 제가 정신이상이라고 생각하실 거 에요. 아니면 아내와 저, 둘 다 그렇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죠.

- 아닙니다. 의사인 저를 정신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당신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같은 남자를 만난 적이 있어요.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그 사람을 연구했습니다. 성전환 수술을 하면 여자가 될 수 있다고 했죠. 그가 원하기도 했고요.

- 그게…, 그게 정말 가능한가요?

- 그는 어떻게 되었죠? 수술에 성공했나요? 궁금함을 참을 수 없는 나는 에이나르보다 더 급히 물었다.

- 수술하기로 한 당일 아침에 그가 달아났어요. 겁이 난 거죠.

- 저는 절대 달아나지 않을 거 에요.

- 그가 현명했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 수술은 아직 그 누구도 시행해 본 적이 없거든요.

- 어떤 수술이죠, 교수님?

- 2번 수술하게 됩니다. 1차에 남성 성기를 완전히 제거하고, 그게 성공한다면 2차 때 여성의 질을 만들 겁니다. 하지만 수술 후에 다시 복원시킬 방법이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해요.

  에이나르는 떨고 있었다. 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방법이 있다는 희소식에 대한 강렬한 흥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 하지만 실패의 위험이 큰 수술입니다. 감염이나 합병증이 생길 수도 있고요.

  박사의 말에 나는 겁이 나서 소리쳤다.

- 엄청나게 위험한 수술이군요.

- 유일한 희망이야, 가만히 있어봐 게르다.

- 저는 내일 낮에 드레스덴으로 떠납니다. 베게너 부인, 제가 남편을 도와줄 수 있지만 그러나 수술한 후에는 절대로 부인의 남편이 아니게 된다는 걸 명심하세요.

 

  나는 남편을 사랑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편을 싫어한 적이 없다. 첫 키스는 물론이고 청혼도 내가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남편이 원하는 것은 오직 릴리로서의 삶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한다면 동의해줘야 옳은 거라고 믿었다.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에이나르는 드레스덴으로 가서 성전환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그는 나와 동행하길 거부했다. 그는 자신이 홀로 수술을 받고 릴리가 되길 소망했다. 나는 남편을 따라가서 곁에 있어주고 싶었지만 남편은 그게 아내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스와 내가 에이나르를 배웅하러 기차역으로 따라 나갔다.   

  


- 소원을 이루게 되겠군. 친구, 힘 내. 너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야. 아니지, 당신들 둘 다 내 친구지.

- 나를 다신 못 보게 될 거야, 한스.        

 몸조심하라면서 한스는 에이나르와 깊은 포옹과 볼 키스를 나누었다.     

- 여보, 제발 나도 따라가게 해줘요.

- 안 돼, 게르다. 당신은 에이나르를 사랑하지만 나는 이제 그만 그를 보내줘야 하거든.      

  나는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에이나르에게 건네주었다. 언젠가 남편이 자신의 드레스를 사 오면서 나한테 선물했던 실크 스카프이다. 나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가라고, 조심하라고, 행복하라고,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기차가 수증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출발했다. 플랫폼을 빠져나오는데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억눌렸던 온갖 슬픔이 솟구쳐 올라 참을 수 없었다. 나를 뒤따라오는 한스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눈물이 줄줄 새어 흘렀다.      


 




5. 드레스덴, 릴리의 탄생     


  

  기차가 엘베 강을 건너고 있었다. 잔뜩 흐린 구름이 깔린 하늘 아래 툭 터진 강 양쪽으로 옛 궁전과 성당들, 그리고 정박한 배들이 보였다. 이곳이 릴리의 고향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권을 꺼내 표지를 열었다. 양복을 입은 내 사진이 붙어 있다. 머지않아 잊힐 이름, 에이나르 베게너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배어나왔다.      



   페이즐리 무늬의 진한 초록색 벨벳 투피스에 단정한 벨트를 맸다. 산부인과인 만큼 다른 여 환자들보다 촌스럽게 보이고 싶지 않아 옷매무새에 특히 신경이 쓰였다.      

-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릴리예요. 바르네크로스 박사님을 만나 뵈러 왔는데요.

- 성이 뭐죠?

- 엘베~, 강 이름과 같죠. 릴리 엘베.

- 아~ 그렇군요. 저쪽 의자에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어요?     

  

  

  간호사는 친절하고 상냥했다. 나는 얌전하게 앉아 주변을 살펴보았다. 주로 만삭의 임산부들이었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다정하고 친근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그 어떤 누구도  여자 옷을 입은 남자로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저 그곳의 여자들처럼 평범한 여성일 뿐이었다.     

 


- 1주일이나 기다려야 한다고요? 왜요?

- 체중을 좀 늘리셔야 해요. 우리가 하려는 수술은 아주 위험합니다. 감염 위험을 낮추려면     몸이 건강해질 필요가 있어요. 베게너 씨.    

지금의 몸은 제 것이 아니에요. 제발 이 몸을 빨리 가져가 주세요. 교수님….     

  드디어 내일 1차 수술을 받게 된다. 가발을 벗고 화장을 지웠다. 거울 속의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에이나르 베게너를 보내줘야 할 시간이다. 심경의 변화는 없다. 그저 편안하고 홀가분한 기분이다.      

- 움직이면 안 돼요, 릴리.      

  간호사의 말이 희미하게 들렸지만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수술이 끝나고 다량의 모르핀이 투여되었지만 약 기운이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아픔에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왔어요, 이제 괜찮을 거예요. 함께 있어줄게요.     

게르다였다. 눈물 때문에 눈을 떠도 그녀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 릴리~     

게르다가 릴리를 불렀다. 고맙고 행복했다. 고통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햇살 좋은 엘베 강변의 테라스로 나왔다. 바깥공기를 느껴보는 게 며칠 만인지 모르겠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있고 게르다는 전처럼 내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다.      

- 연필 소릴 들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 당신은 언제나 내 실물보다 예쁘게 그려주곤 했지. 그리고 나면 난 당신이 그린 것처럼 더 예뻐져. 당신은 날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지금은 날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어. 당신에겐 그런 힘이 있어. 게르다, 우리 다시 덴마크로 돌아가서 살까? 우리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게르다는 말없이 내 손을 잡으며 미소로 대답했다.      



  코펜하겐의 뉘 하운은 달라진 게 없었다. 세탁물을 수거하는 중국인 아줌마의 종소리도 여전했고 항구에서 생선을 파는 사람들도 여전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게르다와 내가 쓰는 침대를 트윈 베드의 의미로 가운데에 커튼을 달아 반으로 나누었다는 것, 이제는 게르다가 나를 ‘릴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백화점 향수 코너의 판매원으로 취직했다. 파리에 살았다는 게 부각되어 쉽게 일을 얻을 수 있었다. 동료 여직원들은 내게 날씬한 몸매의 비결 좀 가르쳐달라며 부럽다고 했고 그때마다 나의 희열은 마치 구름을 밟고 다니는 듯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어딜 가나 사람들은 내게 숙녀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었고 누구보다 완벽한 여성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날 밝게 만들었다.       



어젯밤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뭔데?

당신이 결혼하는 꿈이요.

사실은 나~, 결혼하고 싶어.

한 때는 당신과 내가 부부였잖아요.

당신이 결혼한 건 에이나르였지. 지금의 나는 릴리잖아.     

   출근길에 우연히 헨릭 산달을 만났다. 난 그간의 일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 그러니까 의사가 당신을 여성으로 만들어줬다는 말이요?

자연의 실수를 바로 잡은 것뿐이에요. 그리고 그건 의사가 한 게 아니라 신이 한 거죠.

그러니까 당신이 진짜 여자가 됐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묻는 그에게 나는 그저 빙긋이 웃었다. 그날 밤, 게르다가 물었다. 폰네스바흐 백화점 일은 즐거우냐고…. 그림을 다시 그릴 생각은 없냐고…. 그러나 나는 하루빨리 완벽한 여자가 되고 싶은 일념밖에 없었다.



   2차 수술을 받기 위해 나는 의사의 처방보다 자주, 그리고 더 많은 약을 먹었다. 그래야 더 빨리 수술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게르다는 너무 이르다,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나의 신념은 확고했다.      


  2차 수술을 받으러 갈 때 게르다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다. 상심한 그녀는 거절했다. 앞으로 빨리 나아가고 싶은 마음과, 게르다에게 갖는 온갖 미안함, 괴로움과 불안, 설렘, 이런 게 복합적으로 섞여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 처지가 서러웠다. 1차 때 보다 훨씬 위험한 두 번째 수술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훨씬 고통스러웠다. 온몸이 불구덩이에 휩싸인 듯 열이 내리질 않았다. 희미하게 빗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가늘게 떠 보니 게르다와 한스가 곁에 있었다.     



- 난 이제, 온전한 릴리가 되었어.     

   그 말을 들은 게르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릴리”라고 불러주었다. 온몸이 불에 타들어가듯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활짝, 그리고 예쁘게 웃고 싶었다.    

  


게르다, 나 밖에 나가면 안 돼? 정원에 나가고 싶어.

릴리, 아직 무리예요, 좀 더 쉬어야 해요. 나중에요.

부탁이야, 날 좀….



  게르다와 한스가 나를 휠체어에 태워 정원이 보이는 발코니로 데리고 나갔다. 비는 그쳤고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다. 하늘엔 퍼레이드 하듯 흰 구름이 떠있고 시든 장미와 데이지 몇 송이가 보였다. 게르다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물은 그렁그렁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랑스러운 아내였고, 든든한 후원자요, 영원한 친구며 동반자인 여인. 그녀가 없었으면 내 안의 릴리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없이 고맙고 또 고마운 게르다.     

- 더 이상 내 걱정은 하지 마, 게르다.

- 릴리, 그건 이미 오래된 습관이에요. 하지만 나는 습관을 고치는데 오래 걸리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대체 내가 무슨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당신에게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을까? 난 이제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어.

그래야죠. 아무 걱정도 하지 말아요.

- 어젯밤 정말 아름다운 꿈을 꿨어, 꿈속에서 난 엄마 팔에 안겨있는 아기였는데 엄마가 날     내려다보면서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릴리~’하고 불렀어. 난 이제 정말 릴리가 된 거야.



- 릴리~     

  게르다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바람소리처럼 들렸다. 내 몸의 공기가 피시식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그녀를 잡은 손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 릴리…….     







6. 회귀, 바일레     



  사납게 부는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날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가 보였다. 한스의 차를 타고 에이나르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다. 우린 줄곧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한 풍경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드문드문 작은 물웅덩이가 다섯 그루의 나무와 풍경의 일부를 거울처럼 담고 둘러싼 공기에서 습기의 표정이 느껴지는 곳. 호수를 배경으로 비스듬히 겹쳐진 산 뒤에선 어두운 푸름이 묻어나는 곳. 에이나르가 자주 그리던 그림 속의 풍경, 바로 바일레였다.



  차에서 내려 절벽 끝에 섰다. 피요르드를 바라보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목에 두른 스카프를 날려버렸다. 한스가 스카프를 잡으러 쫒아갔다. 내가 말했다.     

- 놔두세요. 그냥 날아가게….     



 릴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목에 매고 있던 스카프였다. 날아가는 스카프가 릴리 같아서 눈물 어린 웃음이 났다. 언젠가 에이나르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끔 당신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 사라질 것 같아, 당신이 그리는 이 늪 속으로…’ 그러자 남편이 말했었다.

‘걱정 마, 나는 안 사라져, 늪은 내 마음속에 있거든’.


내가 우려했던 것처럼, 남편의 말처럼, 그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늪으로 떠났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그는 자신 속에 있는 릴리를 찾은 것이다.     


- 안녕, 릴리~.



* 1930년 에이나르는 세계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당시로선 목숨을 건 위험한 선택이었다. 유럽 사회는 충격을 받았고, 덴마크 국왕은 두 사람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했지만 에이나르의 바뀐 성을 법적으로 인정해 여권을 발행했다. 에이나르는 2년에 걸쳐 5번 수술을 받았고 1931년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내 게르다는 1940년(54세)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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