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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17. 2016

그 여자, 릴리 1

글로 읽는 영화, 대니쉬 걸





* 1,2,3,5 : 에이나르(남편) 1인칭 시점

* 4,6 : 게르다(아내) 1인칭 시점  





   

1. 코펜하겐, 에이나르 베게너


  드문드문 작은 물웅덩이가 다섯 그루의 나무와 풍경의 일부를 거울처럼 담고, 공기에는 습기의 표정이 배어있다. 호수를 배경으로 비스듬히 겹쳐진 산의 뒤로 어두운 푸름이 묻어있는 곳, 내가 즐겨 그리는 바일레의 풍경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뉘하운 항구에서 한 블록 떨어진 거리에 있다. 건물의 전면은 붉은색이고 경사가 가파른 지붕은 점토 타일로 덮여 있다. 돌출한 지붕창의 창틀은 이끼 때문에 검게 변해 있지만 창이 높게 솟아 있기 때문에 맑은 날엔 집 안 가득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린다.



  물감을 섞고 있는데 딸랑딸랑 종소리가 들렸다. 자전거에 수레를 매달고 세탁물을 수거하는 중국인 아줌마의 등장 신호이다. 그녀가 작은 종을 흔들면 집집마다 빨래가 담긴 자루를 갖고 나와 세탁을 맡긴다. 나는 잠시 붓을 놓고 아무렇게나 벗어 내팽개친 아내의 속옷들을 가지런히 개켜 주머니에 차곡차곡 담았다. 아주머니에게 빨래를 건네주고 안으로 들어오니 게르다가 말했다.




- 에이나르, 울라가 리허설 때문에 오늘 못 온다는데 자기가 울라 대신 모델 좀 해줄래요?

- 알았어, 그러지…

  게르다와 나는 코펜하겐의 왕립 미술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결혼한 지 벌써 6년이 지났지만 6주밖에 안 된 느낌이다. 아내는 임신을 기다리는 기색이지만 별문제 없이 평온하다. 나는 풍경을, 게르다는 인물을 그리는 화가이다.     

  게르다가 견고하게 만들어진 작은 종이 상자를 건넸다. 나는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레 두 손으로 열어 미농지를 젖혔다. 아이보리 색 스타킹이 깨기 싫은 잠 속에 빠진 공주처럼 고이 접혀 있다. 처음 만져보는 물건이어서 일까? 손이 잠시 떨렸다.



스타킹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게르다가 말했다.     

- 앞뒤가 바뀌었어요. 반대로 돌려서 부드럽게 당기면서 신어요. 잘못하면 스타킹 코가 튀니 조심하고요.      

  그리고는 백금 버클이 달린 우유 빛 실크 구두를 내밀었다.      

- 아! 얼마 전 백화점 쇼윈도에서 봤던 그 구두네, 그게 나한테는 안 맞을 텐데?

- 에이~ 그러지 말고 신어 봐요.     

  스타킹이 부드러운 복사뼈를 지나 정강이까지 끌어올려지는 동안, 피부 속에 숨어있는 잔가시들이 일제히 발기한 듯 꿈틀거렸다. 발가락을 뾰족하게 모아서 구두 속에 밀어 넣었다. 스타킹 때문인지 생각보다 매끄럽게 쏘옥 들어갔고 봉긋하게 솟은 발등이 앙증맞아 보였다.



궤짝 위에 놓인 의자에 다소곳이 앉으니 아내가 그림 속의 울라와 비슷한 포즈를 취해보라고 손짓했다. 울라는 오른쪽 다리를 비스듬하게 앞으로 쭉 내밀고 허리는 약간 왼쪽으로 틀은 자세였다.     

- 드레스 끝자락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부분을 그려야 하는데 당신이 이걸 입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울라의 드레스를 내 가슴에 턱 하니 안겨주었다. 그리고는 다리를 발끝까지 곧고 더 길게 뻗으라고 했다. 엉겁결에 옷을 받아 든 나는 왼쪽 손을 허리 부분에, 그리고 오른손은 왼쪽 가슴을 가로질러 사선으로 어깨 쪽을 잡아 드레스를 껴안은 모양새가 되었다. 아이보리 컬러의 시폰 드레스 끝단 아래로 비스듬히 뻗은 오른쪽 다리가 보였다. 낯설다. 하지만 스타킹을 타고 내려가 구두로 이어지는 다리의 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순간 숨을 쉴 수 없는 이상한 흥분감이 밀려왔다. 뱃속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요동쳤다. 겨드랑이와 등허리에 땀이 차올랐다. 온몸이 축축해지는 낯 선 기운이 감돌았다. 내 안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음이 느껴졌다. 드레스를 잡고 있는 내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거즈처럼 부드러우면서 가슬가슬한 드레스의 촉감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신비스러움, 바로 그것이었다. 내 안 어디에선가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기묘하다. 호흡이 가빠지며 봉인이 풀린 듯 나의 아름다움에 취해 넋이 나가는 순간 쇳소리처럼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깨우듯 들려왔다.      



- 아니 이게 누구람?      

  언제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울라가 드레스를 껴안고 앉아있는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몹쓸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내 얼굴은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발개졌다. 울라는 깔깔거리며 내게 한 아름의 백합(lily) 다발을 안겨주며 볼 키스를 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 걱정 마, 난 이제부터 자기를 ‘릴리’라고 부를 거야!     

  백합의 붉은 입술에서 구릿빛 꽃가루가 드레스 위로, 사타구니 사이에 툭 불거져있는 덩어리 위로 떨어졌다.





2. 판도라 속의 릴리     



  등 뒤에서 나를 안고 있던 아내의 손이 어깨를 넘어와 내 셔츠의 단추를 하나 둘 풀어갔다. 그리고 옷깃 속으로 그녀의 손이 디밀어지는 순간, 들켜버리게 될 긴장감에 숨이 멈춰지는 듯했다. 손에서 뭔가 수상한 감촉이 느껴진 게르다가 앞 쪽으로 와서 다급히 내 셔츠를 풀어헤쳤다. 셔츠 속에 그녀의 나이트 슬립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게 왜 자신의 속옷을 입고 있는지 추궁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침대로 나를 이끌었을 뿐이다. 내가 입고 있는 매끄러운 슬립 위로 그녀의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몸이 오그라들었다.



  순간순간 찌릿찌릿 감전되는 듯한 느낌에 숨이 턱턱 막혔다.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새로운 격정의 환희이며, 감당하기 힘든 희열이었다. 우리는 그 어느 날 보다 더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다. 쇼크 상태에서 깨어나듯 몽롱하게 눈을 뜨니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유리창 너머에 깃들고 있었다. 창턱에 앉은 게르다가 잠자는 나를 스케치하고 있는 듯 보였다.     

- 나 때문에 깼나 봐…, 미안해요. 잠을 못 자겠어서요.

- 왜?

- 이상해요.

- 뭐가?

- 에이나르,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요. 그래서 이상해요.

- 난 원래 아름다웠어. 당신이 몰랐을 뿐이지.     

스케치북 종이 위로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꿈처럼 들리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내가 아내의 속옷을 입고 있었던 건 전날 일 때문이다. 새로 구입한 나이트 슬립을 입은 아내의 몸을 만졌을 때 느껴졌던 보드라운…, 갑자기 그 보드라운 감촉이 견딜 수 없게 그리웠던 것이다. 마침 게르다는 그림 딜러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중이었다. 나는 서랍을 열고 그녀의 속옷을 꺼내어 침대 위에 펼쳤다. 가슴과 밑단에 은방울꽃 무늬의 레이스가 장식된 복숭아 빛 슬립이 마치 내 것처럼 친근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녀의 슬립을 입었다. 그 위에 바지와 셔츠를 입고 타이를 맸다. 공단이 살갗에서 미끄러지는 게 바람결에 날리는 스카프처럼 부드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낯 선 집에 살다가 내 집에 돌아온 친근함이랄까? 엄마 품 같은 포근함이랄까? 뭐라고 딱히 표현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물밀 듯 전해졌다.    

   

  구름이 드문드문 떠 있었지만 한쪽의 열린 하늘에서 총을 쏘듯 햇살이 뉘하운 항구를 따사롭게 물들이고 있었다. 노란 벽과 초록의 지붕과 하얀 프레임에 둘러진 유리창들이 물속에 평화롭게 비쳐 보이는 아침, 거실 카펫 위에 여덟 장의 스케치가 놓여있었다. 아마도 지난밤 아내는 한 숨도 못 잔 듯했다. 그림 속의 모델은 침대에 손바닥을 대고 모로 누워 자거나, 가슴에 손을 얹고 잠든 나였다. 놀라웠다. 그가, 아니 내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때 아내가 집으로 들어오며 나를 불렀다.     

- 그림이 아주 좋은데? 잘 그렸어 게르다.

- 그래요? 고마워요. 울라와 함께 차 마시고 왔어요. 울라가 무도회에 올 거냐고 묻던데요?

난 안 갈 거라는 거 알지?.

걱정 마세요. 그럴 줄 알고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당신은 다녀와, 가서 맘껏 즐기고 오라고.

싫어요. 혼자 가서 무슨 재미람?

난 그런 데 가면 어쩐지 연기하는 느낌이 들고 어색해, 그게 불편하고 싫어. 당신도 알잖아?     

  나는 파티를 즐기지 않는다. 원래 말 수도 적을뿐더러 사람들이 많은 자리가 불편하다. 더욱이 내 그림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게 부담스럽다.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건 어때요?

특별히 생각해 둔 사람이라도 있어?      

게르다는 실실 웃으며 지난밤 여자 슬립을 입고 잠든 나를 스케치한 그림을 턱으로 가리켰다.     

-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 당신 아주 그럴듯할 게 보일 거 에요. 아주 재밌을 걸요?

- 안 돼, 가당치도 않은 얘기야.       

  나는 뜻밖의 제안에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지만 녹진한 흥분이 용오름처럼 솟구쳐 올랐다. 신이 났다. 게르다 역시 어릴 적 인형 놀이하듯 나를 릴리로 변신시키는 일을 재밌어했다. 다음엔 수염을 더 바짝 깎으라며 내 얼굴에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이러다 딴 사람이 될까 두렵다며 아이라인을 그리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눈꺼풀에 전해졌다.      

- 내가 해볼게     

  붓을 받아 든 나는 거울 속의 나 아닌 나를 보며 아이라인을 또렷하게 그렸다. 마치 10년 동안 아침마다, 화장을 해왔던 여인처럼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세상에…, 당신이 훨씬 더 잘 하는데요?     



  게르다는 신이 난 듯 흥분된 목소리로 화장한 나를 그리고 싶다면서 이런저런 포즈를 요구했다.     

- 옆으로 비스듬히 앉으세요. 다리를 꼬고 고개를 살짝 들어봐요. 손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그러나 나는 그녀의 주문에 개의치 않은 채 두 발끝을 모아 세우고 한쪽 손끝을 모아 턱 선에 대었다. 그리곤 바로 허리를 벽 쪽으로 틀어 남자에게 교태 부리는 여인 같은 자세를 취했다. 내 안의 누군가가 지시를 내리듯 이러저러한 포즈가 저절로 나왔다. 그 순간, 내가 아닌 나를 느낌과 동시에 그게 진정한 나임을 깨닫게 되었다.         


천하게 굴지 말아요. 미스 릴리, 당신 정말 천부적인 끼가 있군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당신이 날 흥분시켜서 그런 거잖아.     

  그 후, 시장에 가거나 카페에 앉았거나, 나는 눈에 보이는 모든 여성들의 표정과 말투, 몸짓과 손 모양 등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을 따라 하다 눈이 마주치면 겸연쩍게 외면하는 게 어색하긴 했지만 그 마저도 행복했다. 아내가 걸음걸이를 가르쳐 주었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두 다리의 무릎 안쪽이 살짝 스치면서 구두의 뒤 굽이 다른 구두의 앞 코에 놓이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릴리로서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게 흘러갔다. 본격적으로 의상을 구하기 위해 울라가 일하는 극장 분장실로 들어갔다. 가발과 드레스와 구두를 골라 이것저것 써 보고 걸쳐 보는 일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우리 둘은 어린아이들처럼 깔깔대며 갖은 장난을 다 했다. 예쁜 게 너무 많았다. 맘에 드는 것도 너무 많았다. 그런 신세계가 마냥 황홀했다.     


  

  울라가 초대한 무도회 당일, 외출에서 돌아온 게르다가 선물이라며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미 눈에 익숙한 터라 그게 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박스엔 그날 내가 입을 드레스에 완벽하게 어울릴 법한 물빛 스타킹이 들어있었다.      





3. 첫걸음      



  게르다는 청회색 드레스에 벨벳 케이프를 두르고, 나는 가슴이 파인 초콜릿색 드레스에 시폰 로브를 걸쳤다. 캐미솔 안쪽에 양말을 돌돌 말아 집어넣었으므로 가슴도 제법 봉긋해 보였다. 호랑나비 모양의 장식 빗도 머리 뒤에 꽂았다. 얌전하게 모은 손엔 자잘한 자수가 놓인 앙증맞은 파우치가 들려 있다.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조신하게 걸어보려 애썼지만 뾰족한 구두가 익숙하지 않아 때때로 발목이 삐끗거리곤 했다. 쇼윈도에 비친 나의 두 볼은 월계화처럼 붉고 턱 선은 찻잔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그깟 발목의 고통쯤이야 내가 느끼는 행복감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쪽의 의구심을 져버릴 수 없어 아내에게 물었다.     

- 게르다, 나 이만하면 예쁜 건가?

- 당연하죠. 당신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 하지만 당신이 최고 아름다워.     



  무도회장엔 한껏 치장을 하고 온 남녀들이 샴페인 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멀찌감치 서 있던 울라가 먼저 알아보고 깜짝 놀라 소리치며 다가왔다.     

- 어머나~ 릴리잖아!

- 맞아, 바이나 르에서 온 에이나르 사촌 여동생 릴리야.

- 아~ 너무 아름다워요, 어서 들어가요 릴리!     



  우린 울라와 차례로 볼 키스를 나누고 살롱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춤을 추는 사람들, 턱시도와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입은 젊은 남녀들, 너나 할 것 없이 미소를 담뿍 머금고 있었다.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실제 맞닥뜨리니 훨씬 긴장되었다. 엄마 손을 잡은 아이처럼 게르다의 손을 꼭 잡은 나는 제발 내게서 떨어지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절대로 안 떨어지겠다는 그녀의 약속을 듣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여기저기서 시선들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왈츠를 추는 신사도, 포마드를 발라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남자도, 하얀 기둥 옆에 앉은 남자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내는 내가 너무 예뻐서 쳐다보는 거니까 자신감을 가지라고 응원했다. 그때 멀리서 한 여인이 게르다를 부르며 손짓했다. 아내는 나와 함께 있겠다고 했지만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그녀가 이쪽으로 올지도 모르니 가보라고 했다.



홀로 남은 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도 크게 뜨지 못한 채 혹시 발을 접질리지 않을까 조심조심 홀의 한쪽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어색함에서 벗어나려고 수첩에 메모를 하는데 누군가 내 옆으로 와서 말을 걸었다.     

기자세요?

아뇨.

그럼 시인이신가요?     

당황한 나는 대답 대신 파티가 열리는 홀 밖으로 나와 창밖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따라 나와  자기소개를 했다.     


- 저 이름은 헨릭 산달입니다. 혹시 일행이 있으세요?

- 네, 제 사촌오빠의 와이프랑 같이 왔어요.

- 사촌이 누군데요?

- 에이나르 베게너.

- 아~ 그 화가 저도 알죠. 실력 있는 사람인데 과소평가받고 있는 게 안타까워요.

그래요?     

파티가 열리는 홀로 다시 들어가려는 나의 팔을 잡더니 아래층 계단으로 이끌었다.      

- 솔직히 말하지만 저는 로맨틱하고 은밀한 사람입니다. 당신을 줄곧 지켜봤는데 다른 여자들    과는 다른 점이 있더군요.

- 저는 도시에 와 본 건 처음이에요. 아마 촌스러워서 그럴 거 에요.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키스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군요.

이만 가봐야겠어요.


갑자기 그가 내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쳐다보았다. 가슴이 어찌나 뛰던지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순간 그의 입술이 내게 닿았다.     

- 아직 허락 안 했는데…

- 물어봤다가 만일 거절이라도 하면 제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남자에게 여자로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흥분되었다. 그때 갑자기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가 괜찮으냐고 물었고 당황한 내가 일어섰다. 그 순간 저만치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르다와 눈이 마주쳤다. 아내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남자는 게르다에게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손으로 코를 막고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 릴리가 다시는 여기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산달과 키스하는 거 봤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당신이 눈치챘는지 모르지만 난 가끔 내가 아닐 때가 있어, 어제 그 순간 나는 그저 릴리였을 뿐이야.

아뇨, 릴리는 실체가 아녜요.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그저 우리가 재미로 꾸민 일종의 게임일 뿐이잖아요.

알아, 하지만 뭔가 달라졌어.

그만두세요. 이제 릴리는 없어요.

노력해볼게.     



  아내는 눈물을 글썽였지만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 후 나는 줄곧 불안했다. 초조했다. 머리가 아프고 불안정한 시간이 지속되었다. 뭔지 모르게 슬프고, 뭔가를 잃어버린 상실감이 느껴졌다. 채색을 기다리는 풍경의 스케치가 며칠 동안 이젤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녀 부탁대로 릴리를 데려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없던 생리적 현상이 규칙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한 달에 한 번, 심한 위경련을 겪게 되는데 그게 꼭 생리통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때마다 어김없이 코피가 쏟아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황급히 옷을 챙겨 입었다. 진정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 절절함 외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가 찾아간 곳은 울라가 발레 공연을 하는 극장의 드레스 룸. 연습이 끝났는지 다행히 극장엔 아무도 없었다. 빽빽하게 걸려있는 발레리나의 튀튀들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분장실로 들어갔다. 드레스를 만졌을 뿐인데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전신 거울 속에 낯 선 남자가 서 있었다. 먼저 모자를 내려놓고 외투를 벗었다. 재킷을 벗고, 타이와 셔츠의 단추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에이나르인지, 릴리인지…. 맨 살로 드러난 가슴골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거울 속의 사람이 누구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주위를 다시 두루 살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마지막까지 입고 있던 드로즈를 벗어 내렸다. 아~ , 눈을 감았다 뜨면 다리 사이에 대롱거리는 그것이 작고 쓸모없는 빨간 무처럼 변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벅지 사이, 아니 가랑이 뒤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그게 보이지 않으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오른손을 허리에 얹고 허벅지를 모아 붙이고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거울 속에 들어있는 사람은 분명 릴리였다.



스퀘어 네크라인에 레이스로 장식된 푸른 새틴 원피스를 가져다 벗은 몸에 대보았다. 촉감도 디자인도 맘에 들었다. 마음이 진정되며 더없이 편해졌다. 며칠 동안 시달렸던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내 안에 있는 게,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걸 확실히 깨달은 나는 릴리의 모습으로 헨릭 산달을 찾아갔다. 헨릭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반갑게 맞아주었다.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던 중 자연스레 키스로 이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헨릭의 손이 드레스를 입은 내 사타구니 쪽을 더듬으며 “에이나르~”라고 속삭였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손을 뿌리치며 “이러지 마세요!”라고 소리쳤다. 그는 내가 에이나르 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걸 눈치 채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다. 게다가 나를 여성으로 좋아한 게 아니라 남자로서 접근한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다. 그는 게이였다.


  나는 황급히 그의 집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솟구쳤다. 길가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내가 남자 같아?’ 몇 발자국 걸어가 또 다른 유리창 앞에 비친 나를 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릴리가 남자라고?’



 상처로 얼룩진 나는 집으로 돌아와 드레스를 갈아입는 것도 잊은 채 테이블 앞에서 울고 있었다. 뒤늦게 돌아온 아내가 영문도 모르면서 내 손을 잡으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 그제서 게르다는 내가 릴리에게 집착하는 것이 더 이상 가벼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아내의 설득에 동의하여 함께 병원을 찾았다. 의사가 물었다.     

- 릴리는 어디서 온 거죠?

- 내 안에서요.

- 대개 이런 건 정신 질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통증과 불임은 성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지만 치료가 가능합니다. 방사선은 기적이에요, 나쁜 건 파괴하고 좋은 건 살려주죠. 한 번 받아보세요.     

  의료진은 나를 침대 위에 눕히고 넓은 가죽 벨트로 상체를 묶었다. 그리고 거즈로 가려진 사타구니 쪽에 방사선을 쪼이기 시작했다. 유리창 너머로 애처롭게 나를 쳐다보는 게르다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눈물이 흘러내려 양쪽 귀가 젖어들었다.        



- 베게너 씨, 기분이 좀 어떠세요? 의사가 물었다.

- 당신이 릴리를 아프게 했어요.      

  나의 대답에 의사는 성 도착증이라는 정신이상 진단을 내렸고 아내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무렵 게르다는 아트 딜러인 라스무센에게서 게르다의 그림들이 모두 팔렸다는 전갈을 받았다. 전에 없는 낭보였다. 게다가 파리 <에티엔 뒤프르 갤러리>에서 초대받아 전시를 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모두 릴리를 모델로 한 그림들이었다. 아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파리로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었다.     

- 난 함께 갈 수 없어.

- 왜요? 제가 당신을 돌봐줄 게요.

- 서두를 거 없잖아?  

- 날 위해서 그것도 못해줘요?

- 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 화를 내는 거지?

- 닥터 헥슬러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 날 정신병원에 가둬야 한다고 했겠지.

- 모든 게 잘 될 거 에요. 난 알아요. 날 믿어요.

- 그래 당신 믿어.





덴마크 /코펜하겐 뉘하운, 2014 년 7월  ㅣ 독일/ 드레스덴 , 2016년 1월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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