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딱 한 번 만난 여자에게『테스』초판본을 선물하는 남자, 뭔가 다르다.
보통 선수가 아니다.
그녀가 영문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된 작가가 ‘토마스 하디’라는 걸 알게 된 남자가 여자에게 준 첫 선물이다.
낭만적인가? 귀족적인가?
이미 여자의 마음은 떼어 놓은 당상.
이번엔 여자를 명품 헬리콥터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매 준다.
이때 여자는 헬리콥터가 지닌 엄청난 부의 가치보다 안전벨트를 매주는 손길의 사소함에 맘이 끌린다.
아니 보통의 여자들이 그렇다.
“이제, 당신은 어디에도 못 가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어도 좋아’라는 생각이 드는 건 자명한 이치다.
큰 키에 다부진 몸, 시니컬한 성격과 엄청난 부를 배제하고라도 말이다.
최근 계약으로 맺어진 남녀 관계의 자극적인 성애소설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영국 출신의 작가 E.L 제임스의「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이다.
1억만 부 이상 팔린 원작의 명성에 힘입어 영화로 제작, 전 세계 57개국에서 개봉해 56개국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이 책의 힘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누구든 한 번쯤 꿈꿔보았던 또 다른 유형의 사랑에 대한 대리 만족이 아닐까 싶다.
여자가 이제 막 사랑하기 시작한 그 남자는 여자가 먹어야 할 음식과 내일 가야 할 곳과 잠잘 곳까지 정해놓은 계약서를 내민다.
이 말은 불안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의 정서를 자극한다. 녹록지 않은 삶은 없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에 피로가 누적된 한 젊은 여대생이 한 남자의 언행에 의해 신데렐라가 되는 착각을 느낀다.
수갑과 안대와 채찍이 함께하는 종속까지도 꿈같이 아련하게 온 몸을 휘감는다.
꿈틀대는 욕망 속에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구속인지 의문을 가질 겨를이 없다.
환상은 현실과 거리가 멀수록 더 달콤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그레이. 27세,
성공이란 누군가를 조종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하게 된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로 세계적인 기업의 수장이다.
소년 시절 수년 간 유부녀에게 성적으로 이용당했던 트라우마로 인해 스스로를 50가지 다른 빛깔의 그림자로 얼룩졌다고 생각한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사랑이 결혼으로 가는 종착역이 아니라, 여자들의 숨겨진 욕망을 일깨우는 어떤 종교적인 이미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임신에 대한 공포 없이 자신의 본능과 관능의 끝을 들여다보고 싶은 원초적 욕망이 여자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그 증거다.
그가 내세우는 명분은 관능의 한계를 벗어나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종속의 자유와 책임지지 않는 안전함을 계약으로써 사랑을 대신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길들이기와 길들여지기의 한 판 게임같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