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바이아 마레
시비우에서의 5박이 휘리릭 지나갔습니다.
오늘은 루마니아의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바이아 마레(Baia Mare)까지 장거리 운행을 해야 합니다.
그곳은 마라무레슈 주의 주도로 우크라이나 국경까지는 불과 50km로 가깝지요.
루마니아에 간다고 했을 때 우크라이나가 코 앞인데 괜찮냐며 걱정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런 염려는 전혀 없었습니다.
우선 든든하게 가득 주유를 했습니다.
루마니아의 도로는 대부분 1차선이고 마을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30km~50km의 속도 제한이 있는 터라 좀처럼 속도를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보다 이동 시간이 많이 걸리지요.
중간 지점인 클루지 나포카(Cluj-Napoca, 약 200 km)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다시 약 150km를 더 가야 합니다.
클루지 나포카는 루마니아 제2의 도시지만 학문과 문화예술에 있어서는 루마니아 제1의 도시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문화 예술의 제1도시인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클루지 시내 중심가의 주차장은 이미 만차, 출차하길 기다리는 차들이 주르르 차례를 기다립니다.
과연 대도시다운 풍경입니다.
다행히 차들이 금방금방 빠져서 오래 기다리지 않고 주차를 할 수 있었어요.
우리가 찾아간 곳은 '나폴리 센트랄레'라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대학 도시답게 단체 학생들이 식사를 하고 있더군요.
센스 있는 웨이트리스가 한쪽 공간의 조용한 좌석으로 안내했어요.
그녀는 아마도 필리핀 사람인듯했습니다.
좀처럼 동양인을 볼 수 없는지라 친근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마 그녀도 그랬던 것 같아요.
3,600개가 넘는 구글 리뷰의 평점이 4.5인 그곳은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메뉴에 깔라마리가 없어서 해산물 모둠 튀김과 새우가 들어간 리가토니 파스타를 주문했는데 따끈한 게 간도 적당히 짭조름하면서 고소했지요.
무엇보다 식재료가 신선하고 실한 게 맘에 들었습니다.
클루지 나포카는 대도시답게 도로와 인도가 꽤 넓고 대형 쇼핑몰도 보였습니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커다란 성당이 보이는데 그것은 테오토코스 대성당 (Catedrala Adormirea Maicii Domnului )으로 클루지 나포카에서 가장 유명한 루마니아 정교회입니다.
성당 앞에는 트란실바니아의 변호사이자 혁명가인 아브람 이안쿠 동상이 서 있는데 그곳 광장 이름도 이안쿠 광장입니다.
맞은 편의 노란색 건물은 오페라 극장인 루시안 블라가 국립극장입니다.
루시안 블라가(Lucian Blaga: 1895-1961)는 루마니아의 중부 란크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클루지 나포카에서 활동하다가 세상을 떠난 루마니아의 저명한 시인, 극작가, 소설가, 철학자라고 해요.
시비우(Sibiu)에는 루시안 블라가 대학교가 있고 클루지에의 국립극장에 그의 이름을 붙인 걸 보니 꽤 유명한 사람인가 봅니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끝도 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을 볼 수 있는데 마른 옥수숫대가 바싹 마른 채 그대로 서있어요.
루마니아는 유럽 연합(EU)에서 옥수수 생산 3위국으로 동물 사료, 바이오연료, 전분, 오일 등에 쓰인다고 합니다.
북쪽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양 떼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꼬불꼬불한 1차선 산길에 접어들었는데 양들이 도로를 가로질러가는 모습이 보였지요.
'양 떼다, 양들이 나타났어, 저거 찍어야 하는데 어쩌지'
차를 멈추었지만 카메라를 꺼낼 시간은 없고 내비게이션을 보고 있던 L이 급하게 영상을 촬영했습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없었지요.
양의 몸집보다 훨씬 작은 개 한 마리가 수십 마리의 양들을 몰고 뒤쫓아 가더군요.
양치기 아저씨는 마치 런웨이를 걷는 모델처럼 겉옷을 어깨에 척 걸치며 휙~ 하고 휘파람을 불며 양들을 따라갑니다.
양들이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가서 아쉬울 정도였지요.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한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게 비현실적입니다.
그때부터 비슷한 언덕길을 지날 때면 '양들이 출근할 때가 됐는데, 양들 퇴근 안 하나?' 하며 은근히 다시 만나길 기다렸지요.
숙소로 들어가기 2km쯤 전, 독일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카우 플란트에 들러 물과 부식 재료들을 구입했습니다.
오후 6시가 넘어서야 숙소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시비우를 출발한 지 9시간 만이죠.
그런데 호스트가 알려준 자리엔 다른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호스트에게 연락을 했더니 깜짝 놀라며 경찰에 신고할 테니 잠시 주차할 수 있는 다른 공간을 알려주었습니다.
경찰에 신고한다는 말에 놀랐지만 그들의 룰이려니 여길 수밖에 없었지요.
장을 봐온 부식들과 캐리어를 옮기고 내려오니 어느새 우리의 주차 공간이 비었더군요.
그새 경찰이 왔다간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차를 옮겼습니다.
그 숙소 역시 디퓨저향이 강합니다.
그것들을 찾아 베란다로 내놓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별도로 구분된 거실은 아까울 정도로 넓었습니다.
발코니로 나가니 광장의 분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뷰가 근사하더군요.
필요 이상 넓고 근사한 숙소에 도착할 때마다 함께 하지 못한 친구들이 더욱 생각나곤 하지요.
거실은 물론이고 넉넉한 크기의 침실과 욕실이 만족했습니다.
이번 숙소도 성공!
다음 날 찾아간 바이아 마레의 올드 타운,
세인트 스테판 타워 근처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햇빛을 받아 근사한 자태를 드러냅니다.
체험학습을 온듯한 학생들, 엄마와 나들이 나온 아기들이 햇살 좋은 공원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시비우보다 훨씬 북쪽인데 기온이 훨씬 높고 따뜻했습니다.
광장 한쪽에 카리용(Carillon)이 보입니다.
카리용은 크기가 다른 종을 음계의 순서대로 달아놓고 치는 악기인데요.
중세 때 사람들에게 교회 예배의 임박함을 알리거나 화재, 폭풍, 전쟁 등 재난을 알리기 위한 한 방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16세기부터는 음악가들이 악기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카리용은 성당의 종탑에 있는데 외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처음 봅니다.
유화 느낌 물씬 풍기는 낡은 집과 화가들의 조각상이 있는 광장, 숙취 때문인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든 아저씨의 모습이 낭만적이네요.
관광지가 아니라 여느 올드 타운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상점도 거의 없고 카페는 몇 군데 있는데 그나마 문을 연 곳이 별로 없었지요.
광장 주변에서 커피를 마신 후 다시 걸어봅니다.
명색이 주도인 바이아 마레의 시내 한복판인데 허름하고 남루한 집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찾아간 정육점의 탑(Butcher's bastion)은 15세기 도시 성벽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요새로 지금은 임시 전시장으로 쓰인다는데 굳이 티켓을 사서 들어가 볼 정도는 아니더군요.
그보다 관심이 쏠린 곳은 길 건너편에 보이는 시장이었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그곳은 이즈보아렐로르(Piata Izvoarelor)번역하면 '봄' 시장,
시장 이름이 '봄'이라니 멋지죠?
농산물을 얹어놓은 작은 가판대가 수없이 늘어서 있었는데요.
루마니안 삶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유럽의 시장은 알록달록하고 잘생긴 과일들을 아주 예쁘게 디스플레이해 놓지요.
모양과 크기와 색깔이 너무 똑같아서 모형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말입니다.
과일뿐 아니라 고추, 당근, 양파, 토마토들이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깨끗하고 정갈하게 놓여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기 마련인데요.
봄 시장에서 판매되는 농산물은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할까요?
가치를 높이기 위해 전문적으로 재배한 농산물이 아니라 그냥 텃밭에서 대충 키운 느낌입니다.
좋은 의미로는 유기농이지만 저런 것도 사가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들 비들 시들었거나 크기가 아주 자잘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말린 허브, 야생 버섯 등 거의 모든 농산물이 그랬어요.
파프리카 속에 채 썬 양파를 넣은 반찬은 아마도 김치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특이하게도 루마니아는 어디서나 유독 국화 화분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요.
국화는 아시아가 주생산지라서 유럽에서 보기 드문 꽃이죠.
장례식에서 조차 장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갖가지 색깔의 소국을 우리나라처럼 대량으로 팔고 있는 게 신기했습니다.
혹시나 하여 찾아보니 루마니아의 국화는 모란입니다.
어딜 가나 조화로 만든 장식이 많으니 '루마니아는 조화로운 나라'라고 별명을 붙였어요.
시장에는 양동이에 꽃다발을 꽂아두고 파는 아낙네들이 많았는데요.
조화로 만든 리스 장식도 있고 말린 꽂으로 만든 작은 꽃다발도 있었습니다.
비슷한 모양의 꽃다발을 파는 분이 여럿인데 그중 유독 눈에 띄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손으로 손수 짠 것으로 보이는 검정 스웨터 위에 초록색과 아이보리색을 섞어 만든 손뜨개 조끼를 입고 머리엔 바부슈카를 쓴 모습이 영락없이 우리네 할머니처럼 친근합니다.
루마니아의 중년 부인이나 할머니들은 거의 대부분 머리에 삼각형으로 접은 스카프를 쓰고 다니는데요.
그것의 이름이 바부슈카(Babushka)입니다.
그런데 바부슈카는 여성이나 소녀가 머리에 쓰고 턱 아래에 묶는 머릿수건이나 스카프의 뜻도 있지만 할머니나 나이 든 여성을 지칭하는 러시아어이기도 합니다.
길에서 흔히 보이는 여인들이 쓰는 바부슈카는 블랙이나 진한 브라운 바탕에 가장자리에는 자잘한 꽃무늬가 있는 것들로 수수하고 예뻐 보였어요.
할머니도 검은색 바부슈카를 쓰고 계셨지요.
우리도 하나 사서 추울 때 쓰고 다니자며 기념품 판매하는 곳마다 들어가 봤지만 온통 빨강, 초록 등 컬러풀한 것만 있어서 사지 못했습니다.
할머니의 꽃을 하나 팔아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었습니다.
'꽃이 얼마예요'?
할머니는 치마 위에 매고 있던 전대에서 헝겊으로 만든 낡은 지갑을 천천히 꺼내셨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외국인이니까 바디 랭귀지를 하시려는 거죠.
친구 L이 숫자 정도는 알고 있음을 절대 알 리가 없으셨겠지요.
그리곤 지폐를 하나하나 보여주시며 설명하십니다.
'꽃다발 한 개는 15 레이고 꽃다발 두 개는 25 레이라오'
'한 개만 살게요.'
꽃값을 지불하고 카메라를 들어 보이며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니 수줍게 웃으시며 잠시 망설이십니다.
그리고 말없이 다시 지갑에서 돈뭉치를 천천히 꺼내시더니 10 레이 짜리 7개, 1 레이 짜리 6개를 보여주시며 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즉 당신의 나이는 76세로 너무 늙었다는 뜻이려니 합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엄지를 내밀며 말했지요.
'아니에요, 할머니 예뻐요.'
할머니는 그제야 웃으시는데 앞니가 거의 빠졌더군요.
사진을 찍으라는 손짓을 하십니다.
88세이신 내 어머니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할머니,
얼굴에는 골짜기 같은 깊은 주름이 가득하지만 아름다웠습니다.
자연스러운 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으니까요.
짙고 굵은 눈썹이 강단 있어 보이지만 수줍은 미소는 여전히 아가씨같이 곱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뭔가 수심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사진을 보여드리니 늙어서 안 예쁘다고 하십니다.
그냥 느낌으로 알아듣는 거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니 의자에서 일어나셨는데 애기같이 키가 정말 작습니다.
나는 무릎을 한참 구부려 할머니와 키를 맞추려고 했음에도 할머니는 내 어깨만큼도 자라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 줄어들기도 했겠지만 그 작은 몸으로 살아온 76년의 세월은 어땠을까요?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 것과 같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나
'늙은 말이 길을 잘 찾아간다'는 뜻의 중국 고사성어 노마지지(老馬之智 : 원뜻은 늙은 말의 지혜가 쓸모 있다)처럼 늙음은 결코 나쁜 게 아닙니다.
쿠바에 갔을 때 노인들의 사진을 제법 많이 찍었는데요.
그때 굵게 패인 주름살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느꼈습니다.
얼굴의 주름은 그 사람이 걸어온 하나의 역사입니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지요.
물론 나이가 들어도 자연스럽게 주름이 덜하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인위적으로 뭔가를 주입하고 당겨서 만들어진 얼굴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젊어 보일 수는 있지만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내 얼굴의 주름살도 사랑하자 합니다.
자꾸만 할머니의 모습을 뒤돌아보며 시장을 빠져나왔습니다.
루마니아어로 할머니는 부니카(bunica)입니다.
'Mi-e dor de bunica (할머니가 보고 싶어요)'
그 이유가 뭘까요?
역시나 역사지구 근처에는 점심 식사할만한 곳이 없습니다.
숙소 근처에 있는 떼라(Terra:포르투갈어로 지구라는 뜻)라는 이름의 브런치 맛집으로 갔지요.
시간은 훌쩍 지나 오후 3시가 가까웠지만 영국식 아침 식사와 수란과 피스타치오를 얹은 오픈 샌드위치를 주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의 인테리어는 '지구'라는 상호에 걸맞은 콘셉트에 음식도 맛있었어요.
거기다 바로 옆의 '베이글 샵'이라는 빵집에는 베이글은 물론이고 크루아상, 바게트, 시나몬 롤 등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갖가지 빵이 있었지요.
든든하게 구입해서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세상 가볍습니다.
내일은 '즐거운 묘지'에 갈 겁니다.
어떤 사연들을 만나게 될지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