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루마니아 시기쇼아라
여행할 때 숙소를 자주 옮기면 그때마다 다른 지역의 낮과 밤을 경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 곳에 길게 머물며 근교를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방법을 선호합니다.
봇짐장사처럼 매번 짐을 풀고 싸는 게 번거롭기도 하고 뭔가 안정감이 없어서죠.
시기쇼아라에 가려고 합니다.
시비우에서 85km 정도로 당일치기로 다녀올만한 거리죠.
로우 타운에 있는 Eggcellent로 브런치를 먹으러 갔습니다.
평점 4.8의 그곳은 아주 작은 공간에 심플하고 모던한 인테리어가 뉴욕의 한복판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입니다.
게다가 푸짐한 재료와 맛깔스런 플레이팅에 맛도 좋아서 기분좋은 식사를 했지요.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드라큘라입니다.
하지만 시기쇼아라가 그의 고향이라 찾아간 건 절대 아닙니다.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된 시기 쇼아라의 성채는 루마니아인에게도 인기 있는 아름다운 중세 도시입니다.
그곳에는 다양한 길드(재단사 길드, 제화공 등)들의 탑과 이를 둘러싼 돌 벽, 그리고 잘 보존된 아치 등 마치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풍경이 그대로 펼쳐집니다.
입방체 돌로 포장된 골목길, 오래된 색슨 주택, 그리고 언덕 위의 교회와 나무 덮개가 있는 계단을 볼 수도 있지요.
시기쇼아라 성채는 언덕 위의 바비칸(성채 입구를 보호하는 요새) 아치 문을 통과하면서 시작됩니다.
시계탑은 시기쇼아라의 9개 방어탑 중 가장 큰 건물인데 1575년까지 시청 소재지였고, 그 후 법원으로 사용되었다가 오늘날에는 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됩니다.
유럽에는 인형이 달려있는 시계탑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곳 시계탑의 인형은 루마니아에서 유일한 것이라 해요.
시계에는 일곱 개의 린든나무 조각상이 있는데 그것은 달과 화성, 목성, 수성, 금성 토성 및 태양을 신으로 형상화한 7개의 인형으로 요일을 뜻합니다.
정작 루마니아를 가본 적이 없다는 아일랜드 작가 브람 스토커는 트란실바니아에서 전해 내려 오는 전설, 즉 아름다운 여인의 목덜미만을 탐하는 흡혈귀에 매료되어 상당 시간 연구하여 탄생된 소설이라고 합니다.
시계탑 아치를 통과하면 왼쪽으로 노란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블라드 체페슈 3세(드라큘라)가 1431년에 태어나 1435년까지 살았던 집(Casa Blad Dracul)입니다.
블라드 체페슈는 사실 루마니아 왈라카이 공국의 군주이자 영웅인데요.
그는 헝가리와 오스만 사이에서 작은 공국을 지켜낸 인물이지만 대단히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입구에 철로 만든 용이 걸려 있습니다.
블라드 백작은 그 지역의 통치자였는데 기사 자격의 용 훈장을 받게 됨으로 드라쿨 (용을 뜻하는 라틴어는 draco)이라는 칭호가 붙여졌다고 합니다.
중세 시대의 용은 독립, 리더십, 힘,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뱀과 악마가 관련된 성경적 의미 때문에 뱀과 비슷한 용은 사악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루마니아어 단어 '드라큘'은 용과 악마의 두 가지 뜻으로 통용한다고 해요.
현재 1층은 BERARIE라는 레스토랑으로, 2층은 무기박물관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무심코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
좀 더 걷다 보면 작지만 고풍스러운 광장(피아티 체타티)이 나타나는데 옛날에는 길거리 시장이 열리거나 공개 처형 및 마녀 재판이 열리던 곳으로 주요 명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중심입니다.
빨간 꼬마 기차가 여행자들을 기다리네요.
핼로윈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곳곳에 호박 장식들이 많습니다.
연두색 줄무늬나 노란색의 앙증맞은 미니 호박들이 매력적인 오브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어요.
은은한 올리브 그린이 아름다운 건물 베네치아 하우스(casa venetiana).
16세기에 시기쇼아라의 시장은 베네치아에서 온 여성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지요.
그래서 그는 그녀를 위해 창문틀에 돌을 붙여 베네치아 스타일의 집으로 만들었다는 로맨틱한 전설이 있다고 해요.
시기쇼아라에는 입구에 있는 시계탑 외에 9개의 탑이 있습니다.
대장장이의 탑 (Turnul Fierarilor) , 정육점의 탑 (Turnul Macelarilor) , 모피상의 탑 (Turnul Cojocarilor) , 로프 메이커의 탑 (Turnul Franghierilor) , 재단사의 탑 (Turnul Croitorilor) , 무두장이의 탑 (Turnul Tabacarilor) , 구두장이의 탑 (Turnul Cizmarilor), 틴스미스의 탑 (Turnul Cositorilor)
이 탑들은 모두 도시를 방어하는 기능을 했는데 각각의 이름은 그 탑들을 관리했던 장인들의 이름을 붙여서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길드별로 탑을 만들어 쌓고 각각의 공산품을 만드는 공간이기도 하면서 방어의 목적이기도 한 것이지요.
구두장이의 탑은 바로크 건축의 영향으로 길이가 다른 면의 육각형 바닥이 특징이며 나무로 만들어진 게 특징입니다.
작은 전망대가 있어 올라가니 출입금지라는 알림이 붙어있는 문이 보여 얼른 내려왔는데요.
알고 보니 그지역의 작은 방송국으로 운영되고 있더군요.
그 외에도 대장장이 탑은 현재 화가의 작업실로 쓰이며 로프공의 탑은 교회 묘지의 경비실로 유일하게 사람이 거주한다고 합니다.
시기쇼아라에서 가장 궁금했던 게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학자의 계단(Scara Scolarilor)', 뭔가 궁금하죠?
언덕 위에 학교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학교를 오갈 때 질척하고 미끄러운 언덕을 오르내리느라 힘들었지요.
겨울에는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으로 추위를 견뎌야 했고 여름이면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 다녀야 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에서 학생들을 보호하려고 만들었다고 해요.
정말 감동입니다.
초기에는 300개의 계단을 만들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계단은 176개,
그런데 놀라운 건 이 계단이 1642년에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지붕을 보니 루체른의 카펠교가 생각납니다.
천장과 벽 모두 검은 칠을 한 나무로 덮인 계단 통로는 흡사 에스컬레이터를 연상시키는 구조였습니다.
나무판자 사이로 드문드문 싸이키 조명 같은 햇빛이 파고들어 어두운 계단을 비춰주더군요.
천천히 올라 밖으로 나가니 작은 언덕 위에 학교가 있습니다.
맞은편에는 산상교회와 작은 묘지도 있더군요.
더불어 기도를 드리러 가는 주민들도 그 계단을 편리하게 이용했겠지요.
내려갈 때는 계단 옆 오솔길을 택했습니다.
주차장 근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어요.
루마니아에 온 이래 처음으로 비로소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는 웨이트리스를 만났습니다.
사회주의 이념이 남아있어서인지 루마니아 사람들은 대부분 표정이 없고 무뚝뚝합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딜 가나 먼저 인사를 건네기는커녕 대부분 화난 사람 같은 표정이에요.
긴 머리의 포니 테일이 잘 어울리는 웨이트리스는 상냥하고 몸이 상당히 빠르더군요.
주문을 받으면서도 상냥하게 웃고 표정이 늘 밝았습니다.
많은 손님들을 혼자 응대하는데도 음식은 빠르게 서빙되고 손님이 떠난 테이블은 바로 정리가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음식도 더 맛있게 느껴지고 내친김에 커피도 주문하였습니다.
어차피 카페를 찾긴 힘들 거니까요.
시비우로 가는 길에 메디아슈(Mediaş)라는 작은 마을에 들러보려고 합니다.
이름을 자꾸 까먹어서 메리야스로 외우니 한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비우와 시기쇼아라 사이에 위치한 메디아슈는 두 도시에 가려져 여행자들이 잘 방문하지 않는 곳이라 마치 비엔나의 그늘에 있는 브라티슬라바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름답고 정갈하며 운치 있고 조용한 마을이었어요.
게다가 웨이팅 줄이 가히 메디아슈의 성심당이라 할만한 빵집을 발견했지 뭐예요?
내부도 제법 널찍하고 브런치 메뉴와 커피 메뉴가 꽤 다양합니다.
맘에 들만큼 큼지막한 잔에 담긴 커피는 그동안 루마니아에서 마셨던 것 중 최고였습니다.
게다가 피스타치오와 화이트 초콜릿이 올려진 조각 케이크 '뉴욕 롤'도 일품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디저트를 만나 흥분되어 정신이 없었던 게 분명합니다.
한참 먹다 보니 사진을 안 찍은 거예요.
비주얼은 망가졌지만 그래도 추억의 한 컷, 찰~칵!
글을 쓰다 갑자기 이름이 궁금해서 구글 타임 라인으로 찾아보았습니다.
'카페테리아 리디아(Lidia)'네요.
루마니아에 가면 메디아슈도 들러보시고 리디아에도 꼭 가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