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루마니아 브란 성
창백한 피부, 붉게 충혈된 눈, 뾰족한 송곳니, 노출된 정맥을 가진 그들은 햇빛, 불, 마늘, 성수, 십자가를 무서워합니다.
이것은 배운 것도 아닌데 신기할 정도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뱀파이어의 이미지입니다.
'루마니아' 하면 아마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드라큘라일 겁니다.
공포, 스릴러, 판타지 장르는 지극히 불호이지만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곳이라니 안 가보면 섭섭하겠지요?
드라큘라의 배경이 되었다는 브란 성으로 향합니다.
브란(Bran)은 슬라브어로 '문'이라는 뜻입니다.
브란 성은 드라큘라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전혀 무관합니다.
트란실바니아의 절벽 위에 극적으로 세워진 모습이 소설에 등장하는 성과 비슷하다는 점과 드라큘라의 모델이 된 블라드 체페슈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시기쇼아라에 살았다는 것으로 인해 드라큘라의 성이라 알려진 것이지요.
소설 속에서 성을 묘사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드라큘라 챕터 2, 5월 5일"
백작의 성은 엄청난 절벽의 바로 가장자리에 있는데 가끔 깊은 균열이 있고, 강물이 숲을 지나 깊은 협곡으로 굽이쳐 흐르는 은빛 실이 있는 틈이 있다.
뱀파이어에 대한 전설은 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드라큘라만큼 큰 공포를 안겨준 이름은 거의 없습니다.
브램 스토커(Bram Stoker 1847-1912)가 창조한 이 허구의 캐릭터는 사실 블라드 체페슈라는 역사적 인물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1897년에 출판된 드라큘라는 트란실바니아에서 온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의 이야기를 다룬 공포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저자 브램 스토커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몸이 약해 여덟 살 무렵까지 침대에 누워 지내며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썼습니다.
성장기를 지나며 건강이 좋아졌고 열여섯 살 때 더블린의 명문인 트리니티 대학에 입학한 후로 운동선수를 할 정도로 건강해졌습니다.
졸업 후에는 런던으로 건너가 배우 헨리 어빙의 비서로 일했으며, 르 파뉴의 『흡혈귀 카르밀라』를 읽고 공포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요.
당시 런던에서 유명한 미인이던 플로렌스 발콤브는 오스카 와일드의 청혼을 거절하고 브램 스토커와 결혼했습니다.
본인의 청혼을 거절한 여인이 친구와 결혼하자 오스카 와일드는 돌연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브램 스토커는 양성애자였습니다.
스토커는 민속학에 정통했던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의 교수 아르미니우스 뱀버리를 만나서 동유럽의 흡혈귀 설화에 대해서 듣고 《드라큘라》에 대한 착상을 얻게 되었다. 이후에 몇 년 동안 도서관을 다니며 블라드 체페슈를 비롯한 흡혈귀에 대한 유럽 설화와 전설을 조사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출간된 《드라큘라》는 현실적인 가상의 글을 모아 놓은 형태의 서간체 소설로, 그가 신문 작가로 일하면서 쌓은 실력을 토대로 구성한 일기, 전보, 편지, 항해 일지, 신문 스크랩은 소설의 세부적인 현실성의 수준을 더하였고, 실제가 아닌 이야기를 실제처럼 보이게 하지만 다시 허구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독자를 소설에 몰입시킨 후 다시 현실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한다. <출처 : 위키피디아>
브램 스토커는 소설 드라큘라(Dracula,1897년)를 출판하였지만 루마니아를 여행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는 당연히 브란 성을 가본 적도 없지요.
1931년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면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고 지금까지도 연극이나 뮤지컬의 단골 주제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루마니아어로 '드라큘라'는 악마나 용을 뜻하는 '드라크'의 소유격으로, '악마의' 또는 '용의'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블라드 3세가 드라큘라로 불리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때문입니다. (필자의 글 : 드라큘라의 고향 시기쇼아라에 언급)
블라드 3세 체페슈의 아버지 블라드 2세는 헝가리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용의 기사' 작위를 받고, 1436년에 왈라키아 공국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후 그는 기사단을 상징하는 날개 달린 용의 문양이 새겨진 동전을 발행하였고 새로 짓는 교회들에도 용의 문양을 넣었지요.
따라서 용은 차츰 왈라키아 공국의 상징물로 자리 잡았고, 루마니아 국민들은 블라드 2세를 블라드 드라쿨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드라쿨'은 악마가 아니라 용처럼 용맹하고 현실적인 사람을 의미하며 용감하고 현실적인 영주였던 블라드 2세를 '블라드 드라쿨'이라고 불렀고 블라드 체페슈 또한 드라쿨의 아들이라는 뜻의 '드라큘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L과 나는 사람이 많고 시끌벅적한 곳에 가면 에너지를 뺏기는 타입입니다.
한가하고 조용한 의미로 보면 루마니아는 아주 적절한 곳이지요.
브란 성은 비수기가 따로 없다고 할 정도로 인기 있는 곳이라 일찍 서둘렀습니다.
브란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8시, 어플로 찾은 주차장은 아직 문도 열지 않아 공원 옆 외부에 주차를 했지요.
입구에는 허름한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그곳들 역시 아직 오픈 전입니다.
새벽에 비가 내렸는지 보도는 검게 젖어 있고 잔뜩 찌푸린 하늘은 곧 뭔가를 흩뿌릴 태세입니다.
드라큘라의 으스스한 배경과 잘 어울리는 분위기였지요.
따뜻한 차 한잔하고 싶어도 마땅한 곳이 없더군요.
어찌어찌 작은 찻집을 찾았습니다.
괴기스럽지만 앙증맞은 소품들이 꾸며져 있습니다.
드라큘라 마을인 데다 이틀 후면 핼로윈 데이라 여기저기 해골 투성이입니다.
오픈 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입구로 모여들었지요.
이윽고 문이 열렸습니다.
티켓은 오직 키오스크로 구매하는데 다행히 여러 개라 금방 구매했어요.
가파른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아름답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단풍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생각 외로 산과 나무가 많아 눈이 호사합니다.
드라큘라가 가장 싫어하는 십자가를 지나니 감시탑이 있습니다.
브란 성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건축양식이 추가되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이 결합되어 있어 겉모습이 다채롭습니다.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단 드라마틱하게 무서운 드라큘라의 상징물들을 기대하고 왔다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특히 어린아이들 눈에는 그저 밋밋한 옛날 가구들뿐인 그곳이 지루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 성은 가장 최근까지 시나이아의 펠레슈 성 옆에 있는 펠리쇼르 성에 살았던 에든버러 마리( Maria de Edinburg, 1875년 ~ 1938년)의 소유였습니다.
펠레슈 성을 건축한 카롤 1세에게 후세가 없어서 조카인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1865-1927)에게 왕권을 물려주어 루마니아 왕국의 두 번째 군주가 되었고 그의 부인 마리는 왕비가 된 겁니다.
1914년 카롤 1세의 죽음으로 페르디난트는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지만 공교롭게도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대관식은 1922년까지 미뤄졌습니다.
3남 3녀를 둔 부부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마리는 대놓고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등, 바람기가 심하고 문란했어요.
막내의 친부는 오랜 연인이었던 바르부 슈티르베이라고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부모가 모두 푸른 눈인데 비해 막내 미루치아는 갈색 눈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둘째 딸과 둘째 아들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나, 장남과 장녀는 모두 남편의 아이로 여긴다고 해요.
어머니의 불륜을 알게 된 장남 카롤 2세는 평생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카롤 2세는 왕족 신분에 맞지 않은 평민여성과 멋대로 결혼했다가 그 결혼을 무효화하고 정식으로 결혼했으나, 또다시 새로운 여성과 사랑의 도피를 했고 왕위 계승권마저 박탈당하게 되었지요.
페르디난트 1세가 죽은 후 손자인 미하이가 왕위에 오르게 되나 카롤 2세는 아들의 자리를 뺏어 왕으로 즉위하여 독재를 펼치다 퇴위되었습니다.
막장드라마 같은 왕족이었지요.
브란성 내부에는 고문 박물관, 마리 왕비의 스위트룸, 음악실, 잘 관리된 안뜰을 포함하여 약 57개의 방이 있습니다.
방 사이에는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그 입구는 타일로 만들어진 벽난로 뒤에 숨겨져 있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매우 좁다고 해요.
나름대로의 품격과 중후한 느낌이 있지만 왕비가 거쳐했던 성이 너무 소박한 게 아닌가 싶었지요.
알고 보니 성의 소유권이 공산당에게 넘어갔을 당시 당 간부들이 고가의 장식품들을 싹 다 훔쳐갔기 때문이랍니다.
음악실 겸 서재에는 18세기와 20세기에 유행한 토스카나 르네상스식 가구들이 있습니다.
피아노는 독일 제품이더군요.
영화에서 보았듯이 그곳 역시 책장을 한쪽으로 밀면 다른 방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밀정이나 침입자를 막기 위해 미로였습니다.
왕가의 여름용 식당으로 사용되었던 로지아를 비롯하여 각각의 방에는 포르투갈의 아줄레주를 연상시키는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커다란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는데 큰 방에는 두 개가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입장료치고는 꽤 고가인 70 레이(약 21,000원) 티켓을 구매했지만 성의 내부는 딱히 특별할 것 이 없어 그저 시들했습니다.
눈길이 가는 것이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창문으로 내려다 보이는 주변 풍경이었어요.
그림처럼 아름답다가 아니라 그림에도 없는 오직 그곳에만 존재하는 자연인 거죠.
창문만 보이면 밖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여기 풍경은 계절과 상관없이 아름답겠구나'
펠레슈 성에서도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왕궁이나 성은 어딜 가나 외부 풍경도 아름답기 마련입니다만 브란 성 주변의 경치는 꾸미지 않은 자연이라 더 친근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창틀이 들어간 풍경 사진을 찍으면서 생각난 곳이 있습니다.
몇 년 전 겨울, 체코의 체스키 크룸로프의 성에서 창틀 너머로 바라보았던 눈 쌓인 풍경이었지요.
그림처럼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림을 이기는 아름다움입니다.
4층에는 페르디난트 1세의 네 번째 자식인 니콜라스를 위한 방이 있는데 영국의 이튼 스쿨에서 유학할 정도로 똑똑했으나 왕실의 몰락으로 우여곡절 끝에 1979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사망했습니다.
페르디난트 1세 침실의 벽난로 주변에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 더 품위 있고 모서리를 밧줄모양으로 장식한 네오 바로크식 가구 세트, 비엔나 스타일의 정교한 추시계, 촛대, 중국제 카펫, 네오 고딕식 기도대 등이 있어 그나마 왕의
품격을 살려주는 듯합니다.
비더마이어 스타일의 가구들은 밤나무로 만들어 튼튼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나마 도둑맞지 않은 왕관과 유리, 세라믹, 메탈로 만들어진 장식용품들이 유리 테이블 안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마리 여왕이 사용하던 의상실에는 드라큘라의 영화의상들이 전시되어 있고 약간의 무기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테라스로 나가니 뾰족탑과 붉은 지붕이 주변의 나무와 깔맞춤인 듯 조화롭습니다.
그곳은 포토 스폿인지라 너도 나도 사진을 찍는 통에 개인사진을 찍어도 단체 사진이 되는 마법이 펼쳐집니다.
브란 성 안뜰의 오래된 우물은 가짜입니다.
14세기에 요새가 지어졌을 때 60피트 깊이의 바위를 뚫어 비밀 방을 만들고 침략이 있을 경우 성의 보물을 숨기는 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브란 성은 1938년, 마리 왕비의 셋째 딸인 일레아나 공주가 상속받았습니다.
그러나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다른 왕실의 재산들처럼 몰수당했다가 2006년 일레아나 공주의 후손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들에게 반환되었고 현재 소유주는 일레아나 공주의 차남입니다.
역시나 기념품점을 통과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브란 성은 드라큘라를 모티브로 한 제품들이 많은 이유도 있지만 루마니아 그 어디에서도 구매욕구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직 여행지로서의 발전이 덜한 이유도 있을 테고 이제 막 경제 발전을 시작하는 단계라 그런지 디자인이나 품질이 썩 우수하지는 않았습니다.
성에서 나와 마을로 들어서니 상점들이 모두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했어요.
다만 성에서 내려다보이던 산과 나무, 잘 구워진 비스킷 같은 나뭇잎들에게 더 눈길이 갔습니다.
로마네스크식의 친환경 재료로 만드는 맛있는 음식이라는 상호(D.O.R)를 가진 레스토랑으로 갔습니다.
아직 오픈 시간이 안 돼서 주변을 산책했어요.
어딜 봐도 가을가을하는 노랗고 붉은 색깔들이 따뜻해 보입니다.
90분 동안 버스와 트램을 탈 수 있는 대중교통 요금이 800원, 감자 1kg이 600원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뚝뚝하고 잘 웃지 않아 말을 건넬 때마다 늘 어색했던 시간들,
소달구지를 자가용 대신 타고 다니는 농부들,
그러나 정직하고 소박한 자연처럼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프랑스의 알자스의 작은 골목들을 다닐 때처럼 탄성이 나올 정도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마을이 없었고
상점의 물건이 예뻐서 지갑을 수시로 열어야 하는 일 또한 없었으며 매일매일 디저트를 판매하는 카페를 찾아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던 루마니아.
그러나 어딜 가나 오버 투어로 몸살을 앓는 유럽의 유명 관광지보다 한적하고 조용했으며 수줍고 순수한 농부와 할머니들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트랜스 퍼가라산 하이웨이의 구름 속을 슬로비디오처럼 미끄러져 내려가던 시간,
시비우의 눈을 찾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했으며 서푼차 블루라는 이름의 파란 나무탑이 있는 즐거운 묘지에서는 돌아감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어 의미 있었지요.
잘 구워진 쿠키같이 바삭바삭할 것 같은 노란 단풍의 물결 사이로 달리는 낭만을 즐겼고 레이스처럼 예쁘게 쪼개만든 물결무늬 지붕의 수도원에서 만난 수녀님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지폐로 나이를 알려주던 할머니의 주름살, 호두 파는 소년이 수줍은 미소도 생각납니다.
식사를 마치고 속소로 돌아가는 길, 드디어 다시 만났습니다.
오른쪽 언덕에서 도로로 내려오는 경사로에 수십 마리의 양 떼 무리들이 주르르 서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바이아 마레로 가던 길에 양 떼를 만나 이후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마지막 선물처럼 만난 양 떼가 반가워 급히 차를 멈추었지요.
그런데 도로 갓길에 내려와 동태를 살피는 양몰이 개 한 마리는 좀처럼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자동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지요.
횡단보도를 지키는 선생님 격인 양몰이 개가 움직이지 않으니 양 떼들은 순하게 언덕에 대기 중입니다.
'내가 기다리잖아, 지나가도 돼.'
하지만 개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 내 뒤로 차들이 주르르 늘어났지요.
내가 졌습니다.
아쉬움과 섭섭함이 컸지만 차를 출발시켜야 했지요.
내일은 브라쇼브를 떠나 부쿠레슈티로 돌아가 차를 반납하고 암스테르담으로 갑니다.
직항이 취소되어 파리를 경유하는 항공권으로 변경해서 긴 하루가 될 겁니다.
소박하고 고요함이 매력인 루마니아, 한 번의 지나감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루마니아 여행의 스톱 오버 지역 : 비엔나, 브라티슬라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델프트, 덴하그가 이어집니다.
'물쭈메스크(Mulțumesc=Thank you) Roma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