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비닐랩과 스카치테이프의 대서사시
나는 곧잘 여행과 일상을 틈과 틀로 비교하곤 합니다.
그 틀이 헐렁하길 바라기에 스케줄을 느슨하게 만드는 편입니다.
그마저도 간간히 스킵하고 숙소에서 쉬는 날도 많습니다.
여행에서 중요한 건 새로운 경험과 마음의 여유라고 생각합니다.
보는 것을 떠나 그 순간을 어떻게 느끼고 어떤 감정을 품느냐가 중요하거든요.
느긋하게 흐르는 시간을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는 작은 행복,
예상치 못한 우연한 만남,
마음 가는 대로 걷거나 멈출 수 있는 여유,
그리고 그 순간들을 기록하며 되새김질하는 이 시간까지도 모두 여행이 주는 즐거움입니다.
주차장에서 작은 사고가 일어난 다음 날,
아테네에 도착한 이튿날이니 오전은 숙소에서의 쉼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아크로 폴리스 티켓은 오후 1시로 예약해 두었지요.
아침 식사를 마친 오전 10시, 렌터카 사무실에서 답장이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당신이 원하면 자동차를 다른 차량으로 교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교체한 차량에 대해서는 보험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후면 브레이크등 파손된 것 만으로 차량까지 교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운행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요.
다만 혹시 비가 내리면 파손된 부분에 전기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지요.
그 문제에 대해 질문했더니 이번엔 이런 답이 왔습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로 지원 서비스에 전화해서 물어보세요.
그러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비닐봉지 같은 걸로 덮는 게 좋을 겁니다.
그게 어려우면 본사에 전화해서 교체할 차량이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하며 본사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지요.
무성의하기 짝이 없습니다.
말은 쉽지요.
문제는, 우리가 탄 차량이 9인승 포드 밴이라는 것.
차체는 높고, 브레이크등은 하늘 꼭대기쯤에 붙어 있습니다.
우리들 키가 서장훈 급이 아닌지라 사다리 없이 손이 닿을 리 없다는 겁니다.
카센터에 의뢰해 볼 생각도 했지만 다음 날이 토요일이고 우리는 일요일까지 아테네에 머물 예정이니 그것도 여의치 않았지요.
다행히 자동차는 지하 주차장에 있고 당분간 비 예보는 없으니 그나마 안심입니다.
월요일에는 자킨토스 섬으로 들어가는 페리를 타야 하므로 아테네에서 지체할 시간도 없었지요.
자킨토스의 auto repair shop을 검색했더니 몇 군데가 있더군요.
일단 자킨토스에 가서 수리를 의뢰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을까 궁리에 들어갔습니다.
구글에서 포드 투어네오(Ford Tourneo) 트렁크의 이미지 검색을 했습니다.
그리고 검색창에서 뭔가를 발견하고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그곳엔 홈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큼직하게.
“어머나 LJ, 여기 좀 와 볼래?
트렁크 문을 열면 중앙에 커다란 홈이 있네? 그렇다면 우리도 짐칸에 올라서서 이 구멍으로 래핑할 수 있겠어."
그러나 구글에 올려진 사진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주차장으로 갔지요.
그리고 자동차 트렁크를 열었습니다.
'유레카~'
윗부분 중앙에 커다란 홈이 보이시나요?
짐칸을 밟고 올라가 윗부분의 홈을 통해 손을 집어넣어 랩핑만 하면 문제없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비닐 랩과 넓은 스카치테이프, 혹시 몰라 커다란 주방용 쓰레기용 비닐봉지도 한 묶음 샀습니다.
이제 어벤저스 팀의 작업만 남았지요.
T와 J를 밴의 공식 등반대원으로 임명합니다.
작업팀 두 친구는 트렁크 짐칸을 밟고 올라가고, DIY팀인 나와 LJ는 재료를 잘라 건네고 그들이 넘어지지 않게 받치며, 조명도 서포트했습니다.
다행히 우리들 모두 키가 크기에 짐칸에 올라서서 브레이크 등을 보수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지요.
우선 한쪽 부분의 깨진 플라스틱 조각을 주워내고 부스러기를 깔끔하게 제거합니다.
서포트팀은 랩을 재단하고 테이프를 넉넉한 길이로 잘라 건네주지요.
세 겹, 네 겹.
우리가 덧댄 건 단지 비닐이 아니라, 서로를 믿는 마음과 할 수 있다는 조용한 확신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 우리는 자카란다보다 더 찬란했을 겁니다.
우리의 손길이 닿은 브레이크등은 반짝이는 새 비닐 슈트를 입고 무사히 생존했습니다.
마치 외계 행성에 내려온 탐사선처럼 말입니다.
65세 한국 아줌마 넷이 밴 트렁크에 올라가 비닐랩으로 DIY 수리를 한 이 일은, 그리스 신화에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비너스의 탄생" 보다 '브레이크등의 부활"이 더 짜릿했지요.
이제 코린토스 운하를 지나고, 자킨토스 섬, 델피와 메테오라, 산토리니까지 비닐 랩과 스카치테이프라는 방패를 두른 우리의 밴은 그리스 대륙에 대서사시를 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