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런 거 해보고 싶었어' 선데이 서울 그리스 특집

7. 자킨토스

by 전나무




섬이 많은 나라 그리스.

하늘보다 바다가 더 가까운 이 나라는 약 6,000개의 섬이 있습니다.

섬에선 가끔 GPS보다 신화와 바람이 더 정확한 방향을 알려줄 때가 있지요.

크레타, 미코노스, 낙소스… 등 매혹적인 섬들이 많지만, 내 감정의 나침반은 다른 곳을 가리켰습니다.


'자킨토스(Zakynthos)'

왠지 바람 냄새, 흙냄새, 그리고 황금빛 석양이 섬 전체를 덮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이름.

여행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기울었죠.

가끔은 명성보다 감정을 따라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아테네에서의 5일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특유의 계획형 성격으로 뇌를 가동합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려면… 멀리 주차장에 있는 차를 지금 옮겨놓아야 편할 텐데 방법이 없을까?”

그러면서 거실 창으로 내다보니 기적처럼 숙소의 주차장 출입구와 그 옆 작은 주차 공간이 비어 있습니다.

이건 마치 주차 요정이 "지금이야!" 하고 외치는 것 같았죠.

전광석화처럼 밴을 옮겨 세우고, 곧장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이라 주차장 출입구 앞에 차를 댔어요. 여동생 차가 들어올 시간 알려주시면 그땐 잠깐 옮길게요.”


호스트는 이미 우리 차가 밴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답장도 훈훈하게 왔습니다.


"네! 상관없어요. 동생이 주차하러 들어올 때, 잠시 차를 비켜주시고 들어온 후엔 아침까지 그 자리에 세우셔도 돼요!"


그렇게 뜻밖의 주차 행운을 등에 업고,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짐을 수월하게 실었습니다.

가끔 여행은 이런 '주차의 신'이 함께할 때 더 순조롭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는 항상 수월하게 넘어가곤 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이번에 함께 하지 못한 친구들이 요정이 되어 따라다닌 거라 여기곤 했지요.

페리를 타러 가면서 코린토스 운하에 들렀습니다.

이름은 고전적이지만 풍경은 SF입니다.

절벽 사이를 파고든 청록빛 물길, 그 위를 가로지르는 좁은 철제 다리.

이곳은 자연의 틈새시장이라 할까요?

길이 6.3km, 폭 24m.

좁고 깊은 그 물길은 실용성보다는 상징에 가까웠습니다.

절벽은 마치 오래된 책장을 찢은 듯 갈라져 있고, 그 사이로 청록빛 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지요.






다리를 건널 때면 다리뿐 아니라 마음도 벼랑 끝에 선 듯합니다.

내려다보는 풍경은 아름답지만, 발끝이 간질거리는 것 같아요.

그곳은 단순한 교량이 아니라 고백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아찔함이 밀려오더군요.


돌아오는 길에 보인 번지점프 배너를 보았습니다.

번지 길이 70m, 기본요금 100유로.

익스트림을 즐기는 사람들은 하늘이 물에 입 맞추는 그 장면 속으로 뛰어들 때 아드레날린이 폭발하겠지요?





코린토스를 지나 한적한 바닷가에 멈췄습니다.

멀리 우리가 방금 걸어갔던 운하 위의 다리가 보이니 그 하류 어디쯤입니다.

자동차가 지날 수 있는 철제 다리가 놓여있는데 배가 지날 때는 그 도로가 잠수를 한다는군요.

배가 부딪히지 않으려면 심해 깊이까지 내려가야 할 텐데 신기합니다.


그 옆으로 햇살 속에 하얗게 빛나는 교회 하나가 바다에 걸친 듯 서 있었었지요.

벽면은 정오의 햇살에 젖어 있었고, 청록의 물빛은 그 곁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습니다.

기도같이 조용한 풍경입니다.





운하를 지나, 파트라스에서 점심을 먹고 리오-안티리오 다리를 건넜습니다.

하얀 케이블이 하늘을 가르며 뻗어 있는 그 다리는, 마치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버튼 같았죠.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이 다리의 개통으로 코린트 만을 건너는 데 걸리는 시간이 45분에서 약 5분으로 단축되었다고 합니다.

통행료가 비싼 단점이 있지만 시간이 곧 돈이니까요.



킬리니 항구에 도착한 후 페리 티켓을 받으려 갔더니 사무원이 말합니다.

"당신들의 차는 미니밴이라 추가 요금을 내야 해요."


페리를 예약할 땐 정확한 차의 길이를 몰라 4m 미만에 체크하고 승선료를 지불했는데 사무원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말했습니다.

아마 밴에서 내리는 우리를 티켓 창구 너머로 본 듯해요.

이럴 땐 그냥 웃고 냅니다.

여행자는 유연해야 하니까요.

과일을 판매하는 작은 트럭에 수박이 보입니다.

5유로랍니다.

한 통 샀습니다.







이오니아 해의 잔잔한 물결이 배 밑을 쓰다듬으며, 자킨토스는 어느새 시야 안으로 성큼 들어왔습니다.

여행은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그곳에 마음을 데려다 놓는 일입니다.

자킨토스 숙소는 한적하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단독공연을 펼칠 수 있는 무대 같은 곳이지요.


섬에 도착하자마자 마트에 들러 식재료와 생수를 사서 싣고 곧바로 숙소로 향했습니다.

올리브 나무가 심어져 있는 구불길을 한참 동안 달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Villa NINA'








웰컴 과일 바구니, 로제와인과 주스들이 냉장고에 가득합니다.

테라스 너머로 펼쳐진 풍경 모두는 그냥 가슴이 벅찼습니다.

해가 수평선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장면은 말로 다 하지 못하겠어요.

풀장도, 바람도, 시간도 모두 느리게 흘렀습니다.

그곳에서 나흘 밤을 보낼 생각에 뿌듯했지요.

1층엔 거실, 주방, 넓은 침실 둘, 욕실, 그리고 위층엔 침실 셋과 욕실이 있습니다.

나는 2층의 발코니가 있는 방이 마음에 들었어요.

LJ는 나를 2층에 혼자 둘 수 없다며 의리 있게 따라 올라와 맞은편 방에 짐을 풀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졌지요.




필자가 사용한 2층 발코니 방




다음 날 아침, 뾰로롱~ 하는 새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새인지 풍경인지 모를 청명한 소리.

발코니로 나가 보니 쌀랑한 공기가 폐 끝까지 닿는 느낌이에요.

급히 경량 패딩을 걸치고 다시 나가봅니다.


그런데, 차량 위의 래핑에 뭔가 이상한 빨간 자국이 보이는 겁니다.

'저게 뭐지?'

잘 보이진 않았지만 깨진 상부의 브레이크등이 드러난 게 아닐까 싶더군요.

아마 아테네를 떠나기 전날, 숙소 앞에 밤새 주차해 놓았던 밤에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밴을 슬쩍 점령하여 비닐을 뜯어놓은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내려가서 확인해 보니 추측이 맞았습니다.






2차 보수 작전에 들어갑니다.

이번엔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가 와도 뜯어내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도구를 이용했습니다.

나한테 자질구레한 여행 용품들을 담아 온 플라스틱 케이스가 있었거든요.

그걸 잘라서 덧댄 다음 래핑을 하니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되었지요.





밴의 2차 보수가 끝나고 이번엔 수영장 물 정화에 나섭니다.

맑은 물 위에 흩어진 꽃잎과 나뭇잎, 그리고 간간이 빠져있는 날벌레들.

뜰채를 들고 마치 아이처럼 신이 나서 퍼올렸지요.

햇살이 반짝이는 풀 위에 나뭇잎이 미끄러지는 것도, 뜨는 건지 가라앉는 건지 헷갈리는 벌레의 실루엣도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으니까요.

그 모습을 본 친구가 말했지요.


"너 여기 집사 같다. 지금 엄청 잘 어울려."


파자마에 슬리퍼, 아침 공기가 차가워 경량 패딩을 걸쳐 입은 모습만 봐도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의 모습이었겠지요.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깨도 팔도 점점 무거워지고, 긴 뜰채는 마치 장대처럼 휘청거립니다.

허리도 결리고, 자세는 점점 우스꽝스럽게 구부정해갔습니다.

LJ가 뜰채를 이어받아 2차 작업에 들어간 동안 J는 저 멀리 올리브나무가 심어진 넓은 정원을 마치 이 집주인마님처럼 유유히 거닐고 있습니다.

그 포스가 어찌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던지요.

누구는 집사처럼, 누구는 주인마님처럼 유쾌하게 오전을 보냅니다.

햇살은 구름 사이를 드나들고, 한층 맑아진 풀에는 우리들 웃음소리가 물수제비처럼 통통통 튕겨져 나갔습니다.





그날 오후, 샤워 후 환복을 하고 수영장 옆 테라스로 하나둘씩 모였습니다.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났습니다.

내년이면 50년 세월을 함께한 사이.

어느새 60대 중반, 이토록 적나라하게, 이토록 당당하게 함께 수영복을 입고 나서는 건 처음이었지요.


쑥스러움도, 민망함도 있었지만 왠지 그보다 더 큰 감정은 '우리가 아직 이렇게 건강하게 함께할 수 있다'는 기쁨이었습니다.

2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니, 길고 곧은 팔다리를 자랑하는 T가 맨 먼저 등장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핑크색 지브라 수영복을 입고 거침없이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J는 주황빛 반바지 비키니로 발랄하게 입장하며 그 특유의 유머러스한 자세로 몸을 앞으로 꺾었다 뒤로 젖혔다를 반복하며 나타나 큰 웃음을 주었지요.

그다음 출전자는 LJ.

흡사 옛날, 미스 코리아 스타일의 청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그녀는 단아함이 물씬 풍겼습니다.


그렇게 세 친구들은 물속에서 물개처럼 영법을 바꾸며 수영을 즐기지만 나머지 한 명은 물을 바라보는 철학자.

그러니까 필자는 물에 발끝 하나 못 담그는 사람이라는 걸 고백합니다.

수영은 못하지만 드레스 코드와 분위기는 맞춰야죠?

네이비와 레드 스트라이프의 홀터넥 브라탑에 과감한 블랙 쇼츠를 입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입수할 것 같은 위장 패션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손엔 카메라를 들고

'이쪽 빛이 좋은데? 살짝 고개를 돌려 볼까?'

하면서 친구들의 유영과 깔깔거림을 기록하느라 물 밖에서 분주하게 움직였지요.

그날 완전히 예상을 뒤집은 하드캐리가 있었습니다.

일찍 등장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T는 선베드에 누워 한쪽 다리를 세우기도 하고, 나뭇가지 이파리를 살짝 만지며 뭔가 우수에 빠진 표정을 짓거나 여러 가지 포즈를 자연스레 구사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지요.

급기야 발가락으로 수영장 물을 살짝 튕기며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사가 나왔습니다.


"나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었어."


나는 그 대목에서 그만, 카메라를 떨어트릴 뻔했습니다.

웃다가 주저앉고 말았으니까요.

그 표정이며 포즈는 다분히 의도된 콘셉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너무 완벽했으니까요.

그러자 옆에서 친구를 지켜보던 J가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거, 옛날에 많이 보던 포즌데, '선데이 서울' 같은 주간지에서 말이야."

수영장은 순식간에 1970년대의 레트로 잡지 촬영장이 되어버렸고 우리들의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세월을 지워버렸습니다.


풀장 옆 파티오의 테이블엔 페리를 타기 전에 트럭에서 산 수박과, 모둠 과일이 보기 좋게 세팅되어 있고 와인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와인잔도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진짜 만찬은 우리가 오랜 시간 쌓아온 이야기와 물에 젖지 않아도 흠뻑 젖는 우정이었습니다.

그날의 하늘빛, 바람, 웃음, 그 모든 게 카메라가 아닌 우리들 마음에 선명하게 저장되었지요.

수영은 못 해도 괜찮았습니다.

나는 이미 친구들의 가장 깊숙한 마음속을 유영한 기분이었으니까요.






햇살도 살짝 취했나 봅니다.

바람에도 와인의 향기가 묻어났지요.

조금 있으면 테라스 의자에 나란히 앉아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볼 겁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두 볼도 자킨토스의 노을처럼 붉고 예쁘게 물들어가고, 두 번째 밤이 찾아올 겁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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