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산토리니, 1867년 할머니의 집
바다 위에 던져진 흰 그림자 같은 산토리니.
그곳은 빛과 바람, 그리고 그리움이 머무는 마지막 풍경입니다.
하얀 벽은 태양과 눈싸움을 하고, 푸른 지붕은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경계를 잃습니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알 수 없는 시공간.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과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들은 매 순간이 엽서입니다.
자석에 이끌리듯 발길이 자꾸 따라갑니다.
이토록 순결하고 단순한 색으로 채워지는 여정의 끝, 산토리니로 들어갈 시간입니다.
***
아테네 공항에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오후 3시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이동할 거리는 약 370km, 쉬지 않고 달려간다고 해도 약 4시간이 걸리지요.
그러자면 일찍 떠나야 합니다.
아침 6시 반, 숙소를 출발하여 공항에 도착하니 12시.
작은 사고가 있었으므로, 후면 상단의 브레이크등이 깨진 것을 설명했습니다.
렌터카 사무실 직원은 잠시 살펴보더니 알겠다고 했지요.
우리는 이미 풀 커버 보험에 들었으니 문제 될 건 없습니다.
그렇게 14일 동안 우리의 튼튼한 발이 되어주었던 포드 투어네오와 작별했습니다.
산토리니로 가는 에게안 항공은 이미 온라인 체크인으로 탑승권은 받았으니 수하물만 보내면 됩니다.
카운터에서 짐을 보내는 수속을 하던 중, T의 티켓은 스탠바이 티켓(Standby ticket)이라 탑승 승인을 담당하는 특정 창구로 가라고 했지요.
스탠 바이 티켓은 일반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좌석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나는 한꺼번에 4인의 티켓을 동시에 예약했고 이미 좌석 번호까지 지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지요.
아무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걱정은 되더군요.
T의 표정이 심란으로 가득합니다.
'큰 일 났네, 친구는 산토리니 못 가겠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농담을 했지만 걱정되긴 마찬가지입니다.
셋은 문제없이 러기지를 탑재했고 직원이 알려준 데스크로 갔지요.
알고 보니 T의 티켓은 스탠바이 티켓이 아니라 ‘비상구 좌석 보안 확인 대기’ 상태의 티켓이었어요.
즉 친구의 좌석이 비상구 옆이고 그 좌석에 앉는 승객이 영어를 할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별도 절차를 거친 것뿐입니다.
설명을 듣고 문제없이 수하물을 탑재했지요.
산토리니에 도착하니 미리 예약해 둔 밴의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그 산토리니 맞아?'
싶을 정도로 사진에서 보았던 그 아름다운 섬은 온데간데없고 황량해보이는 길을 한참 동안 달렸습니다.
약 25분 후, 우리가 탄 밴이 중심광장에 도착하니 숙소 관리자의 딸인 아띠올라가 마중을 나와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슈퍼마켓, ATM, 카페, 레스토랑, 렌터카 사무실 등이 몰려 있어 이아 마을의 여행이 시작되는 포인트라는 걸 알게되기 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도보로 약 20m쯤 걸어가니 우리의 숙소가 보입니다.
1867년에 지어진 베네치아 스타일의 선장 저택,
그곳은 단순히 며칠 머무는 곳이 아니라 하나의 기억처럼 느껴졌지요.
150 제곱미터의 넉넉한 공간에 층고는 4.8미터.
산토리니 특유의 키클라데스식 주거, 그러니까 둥근 아치형 천장에 흰 벽, 작고 푸른 창이 있는 동굴형 주택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고풍스러운 저택이었습니다.
그리스 본토의 영향을 받은 베네치아 양식으로 지어진 집은 해상 무역을 누비던 선장의 위엄이 느껴졌지요.
산토리니에 단 21채뿐인 '베네치아 선장 주택' 중 하나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외관을 맘대로 손볼 수 없는 곳, 그 설명만으로도 그 집이 특별한 곳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쓰기로 한 곳은 원래 메인 라운지(살라, 거실의 개념)였던 것을 침실로 꾸민 가장 큰 방입니다.
그 시절 바다를 누비던 이들의 숨결이 아직도 천장 높은 방 안에 부유하고 있는 듯했지요.
기둥 하나 없이 시원하게 뻗은 아치 천장 아래, 나는 감탄도 잠시 손끝에 닿는 고요를 만졌습니다.
100년도 더 되었을 법한 사진들이 액자에 소중하게 끼워있습니다.
이분이 선장님이고 이분이 옛날 주인이던 할머니겠지...
벽과 나무로 만든 돛단배들이 걸려있고 창문 앞에도 작은 나무배가 두 척 세워져 있습니다.
숙소라기보다 한 권의 역사 소설 같았지요.
식탁 위엔 숙소의 외관이 그려진 마그네틱 두 개가 웰컴 선물로 놓여있습니다.
출입문, 그러니까 대문이 있는 앞면에는 골목을 향한 작은 정원이 있고 뒷면에는 에게 해가 펼쳐지는 발코니가 있습니다.
노을이 내려앉는 저녁이면 그 발코니에 앉아 햇살이 물 위에서 천천히 식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저녁 식사를 해야겠다 싶습니다.
호스트인 로단티는 아테네에 살고 있습니다.
몇 달 전, 산토리니에 수천 차례 지진이 이어졌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었지요.
학교는 휴교에 들어가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섬을 떠나 본토로 피신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5월에는 괜찮아야 할 텐데 하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고 그녀에게 짧은 안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얼마 후 돌아온 답장은 간결했지만 따뜻했습니다.
"우리는 무사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여기는 뉴스에서 보도하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답니다. 이곳은 평소와 같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
그녀의 집에 도착한 첫날 저녁, 작은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화장실 한 곳의 변기에서 물이 계속 새고 있는 겁니다.
즉시 로단티에게 연락을 했지요.
아래층에 살고 있는 관리인 아포스톨리스, 그러니까 우리를 집으로 안내한 아띠올라의 아버지가 바로 달려와 변기를 살펴보았지요.
그리고는 로단티와 통화를 하더니 다음 날 아침 배관공이 와서 수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까지 계속 새고 있는 변기의 물을 잠궈야하니 나머지 다른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해 달라고 했지요.
산토리니는 화산섬이라 지하수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강도 없고, 비도 적은 곳이라 물이 부족한 섬이지요.
빗물을 저수조에 모으거나 해수를 담수화하여 사용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기도 간헐적으로 나갔습니다.
다행히 그때마다 아포스톨리스가 올라와 조용히 해결해 주고 돌아갔지요.
다음 날 아침, 배관공 두 명이 와서 수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로단티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목소리지만 힘이 있었지요.
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어요.
"여행의 첫날부터 여러 가지 불편을 드려 정말 죄송해요.
작은 사과의 마음으로, 페이스트리와 케이크를 보내드리고 싶어요.
오후 4시에 배달 예약을 했는데 그때 쯤 괜찮으세요?"
그리고 그날 오후, 우리는 묵직한 케이크 두 상자를 받았습니다.
페이스트리 한 상자와 여러 종류의 조각 케이크 한 상자였지요.
한 상자는 매번 우리의 불편함을 도와주는 아포스톨리스와 아띠올라에게 가져다주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숙소 바로 아랫집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그날 저녁, 붉게 물든 노을은 바다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고 구름은 숨바꼭질을 하듯 빛의 장난을 즐기고 있습니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선 앤서니 라자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은 공기를 따라 퍼져갑니다.
하늘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번지고, 노을빛이 구름 가장자리를 금빛으로 물들였죠.
하늘은 푸르름을 잃고 보랏빛과 회색 사이 어딘가로 변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눈썹처럼 가느다란 초승달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어 하늘 위에 살며시 자리를 잡습니다.
그토록 화려한 노을과 여린 달빛 사이에 서니, 시간이 멈춘 듯합니다.
붉은 노을과 은은한 달빛이 어우러져, 하루의 끝자락에 내려앉은 고요한 마법 같은 순간이 발코니를 감싸 안았습니다.
저 멀리 바다 위에 크루즈들이 불을 켜고 별빛보다 먼저 깜빡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여행지의 풍경이라기보다 우리들의 이야기였지요.
누군가의 인생에 한 장면으로 남을 밤, 우리는 발코니에서 오래도록 그 아름다운 풍광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메테오라에서 아테네, 아테네에서 산토리니의 이아 마을까지 긴 여정을 이어온 하루의 분주함이 저 멀리 사라졌습니다.
붉은빛은 지나간 하루의 열정을, 그리고 초승달은 다가올 밤의 고요함과 희망을 상징하는 것처럼 마음에 스며듭니다.
그렇게 자연이 내게 건네는 은밀한 위로 속에서, 나는 잠시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순간을 기억하며 내일의 또 다른 빛을 기다려봅니다.
'나는 내일 새벽에 실종될 예정! 그러니까 기다리지 말고 아침 식사 먼저 하면 좋겠어.'
푸른 바다와 하늘 사이, 순백의 집들과 골목이 어우러진 이아 마을의 숨겨진 비밀을 찾으러 가려합니다.
고요한 돌길을 천천히 디디며 가장 하얀 이름의 한 조각이 되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