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메테오라
칼람바카(메테오라가 있는 도시 이름)로 가는 길.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한 폭의 시간화(時間畵)입니다.
수천만 년 전, 시간은 퇴적되고 바람이 쓸어내려 마침내 하늘로 솟아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바위들.
그 위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삽니다.
뒷 좌석에 타고 있는 친구들이 뭔가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휴식도 취할 겸 고속도로 주유소에 들렀지요.
자동차를 살펴보니 랩핑 한 일부 비닐이 떨어져서 바람에 나부끼면서 들린 소리였더군요.
휴게소 철재 의자를 가져다가 3차 보수에 들어갑니다.
스카치테이프도, 비닐 랩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괜찮습니다.
산토리니로 갈 때까지 며칠만 버티면 되니까요.
이제 거의 선수들이 되어 순식간에 보수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칼람바카의 숙소에 도착할 무렵, 운명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에서의 '첫 비'였지요.
휴게소에서 보수하길 참 잘했습니다.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바위들이 동네 어디에나 떡하니 서 있는 풍경이 생경했지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모습입니다.
숙소인 알리키의 집은 모던하게 꾸며진 아파트식 구조로 깔끔하고 환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발코니로 나가보았습니다.
호스트의 설명대로 메테오라의 암벽들이 그대로 보이는 게 신기합니다.
'공중에 떠 있는'이라는 뜻의 메테오라.
바흐의 첼로 무반주 모음곡, 첫 음이 울리기 시작했을 때의 충격처럼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메테오라는 그렇게 '그라베(Grave)'를 떠올립니다.
그라베는 엄숙하고 무겁게, 또는 장중하고 느리게 라는 뜻의 음악 용어입니다.
묵직하게 갈라진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첼로 소리처럼 그 단순함이 주는 깊이는 웅장했지요.
***
메테오라 수도원들이 모여있는 마을 캄람바카는 어디서나 우뚝 솟은 바위들을 볼 수 있지요.
그곳 사람들은 든든하겠다 싶습니다.
보통 수도원까지의 거리는 3~6km 정도로 멀지 않지만 구불거리는 산길이라 대부분 20~30여분 정도 걸리더군요.
수도원은 엄밀하게 관광지가 아닙니다.
그러니 주차장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냥 도로변에 차를 세워야 합니다.
늦게 가면 수도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를 하고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하지요.
메테오라는 치유의 풍경입니다.
빙빙 돌아 길 끝에서 메테오라에 올라섰습니다.
하늘로 솟은 기암 위에 매달리듯 자리한 수도원들은 이미 현실 너머의 존재입니다.
바람이 낮게 불고, 발밑은 아찔했지요.
'왜 인간은 하늘 가까이에서 신을 찾으려 했을까?'
삶이 복잡해질수록 이런 단순한 공간들이 깊이 와닿습니다.
가끔은 침묵 속에서 자신을 조금 더 또렷하게 듣게 되니까요.
하늘과 땅 사이, 기도는 끝나지 않았고 신들은 지금도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메테오라 수도원들 중 가장 오래되고 큰 그레이트 메테오론과 바를람 수도원은 약 800m, 멀지 않습니다.
그레이트 수도원 앞에 차를 세우고 먼저 바를람을 향합니다.
그곳의 오픈 시간이 더 빠르니까요.
한국인 부부가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혹시 유로화를 빌려줄 수 있느냐고요.
현금이 없어서 수도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서던 차에 우리를 만난 것입니다.
수도원의 티켓은 성인 1인 5유로, 단 현금만 받는데 그걸 모르고 온 모양입니다.
10유로를 빌려주고 부부는 계좌이체를 해줬지요.
바위 옆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195개의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마치 중력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시간이 수평으로 흐르던 일상에서 수직의 시간 속으로, 한 발 한 발 올라갑니다.
절벽 위에 지어진 수도원들은 20세기까지 계단이나 다리가 없었습니다.
굵은 밧줄과 목제 도르래 삼아, 또는 맷돌처럼 생긴 바퀴를 손으로 돌려서 망이나 바구니에 물건을 실어 끌어올렸지요.
밧줄은 언제 교체하느냐는 질문에 '신의 뜻으로 끊어질 때까지'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바구니에는 사람뿐 아니라 식량, 물, 땔감, 가축까지도 실었다고 해요.
지금처럼 편하게 주차하고 사진 찍고 걷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계단과 길을 만든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1921년 바를람 수도원의 돌계단이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1980년대 후반, 그리스 관광청과 정부가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면서 도로 및 인프라가 정비되기 시작했고, 198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자 전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 후 관광객이 급증하며 버스 진입이 가능한 현대식 포장도로와 전망대 연결 등 메테오라는 오늘의 모습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수도사들은 평평한 바위 위에 주변의 흙을 긁어모아 텃밭을 일궈 양파, 감자, 콩 등을 재배했습니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모아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동굴을 식량 보관 창고나 냉장창고처럼 사용했지요.
가끔씩 마을 사람들이 보내주는 식료품이 줄망으로 올라오기도 했어요.
수도사들이 아래로 내려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해요.
생명을 걸고 고립을 택했던 것이죠.
인간이 고립을 택한다는 건, 침묵을 견디는 것이자 생존을 거는 일입니다.
그래서 메테오라의 고요는 단순한 조용함이 아니라 끝까지 버티어 낸 존재들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줄망에 몸을 맡기고 벽돌 하나 없이 바위 위에 삶을 세운 사람들.
그들의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는지 도무지 가늠되지 않습니다.
신앙심은 어쩌면 모성애를 능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숨을 건 인내와 사랑, 절대적인 믿음으로만 설명되는 어떤 감정.
그게 없었다면, 이 고립무원의 세계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었을 테지요.
수도원 안에는 고요한 성화와 나무 의자, 촛불 냄새가 남아 있습니다.
낭떠러지 옆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칼람바카 평야는 한없이 낮아 보였고,
아래 세상은 놀랍도록 작고 단순하게 느껴졌습니다.
루마니아의 목조교회에서 본 것과 비슷한 게 보입니다.
목재 신호 도구 ‘세만드로니(Semandron)’,
이것은 기도 시간이나 수도사 소집 시간을 알리는 전통적인 타악기입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금속 종 대신 사용되었고, 수도사의 영적인 집중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나무 막대기로 나무판을 두드려 소리를 냅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쓰는 목어와 비슷한 도구이지요.
이제 그레이트 메테오론(Great Meteoron)으로 향해 올라갑니다.
어느새 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 바를람 수도원까지 자동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레이트 메테오론은 이름처럼 메테오라 수도원 중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규모가 큽니다.
거대한 바위 꼭대기에 세워진 이 수도원은 마치 세속과의 모든 연결을 끊어낸 듯합니다.
어쩌면 이곳은 인간이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가장 오래된 바람의 구현일지도 모릅니다.
300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그레이트 메테오론은 신비가 아니라 무게로부터 탄생한 경외의 이름입니다.
칼람바카에서 처음 찾아간 음식점 파넬리니오(Panellinio)는 중심가의 좋은 위치에 손님들도 꽤 많았습니다.
그러나 높은 평점과는 달리 음식이 많이 짜고 입맛에 맞지 않았지요.
다음 날 찾아간 '21 Olive',
현대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이름과 달리 인테리어라고 할 수도 없이 여기저기 붙어있는 조잡한 사진들과 빛바랜 조화들로 장식되어 있었지요.
테이블 위엔 삐뚤삐뚤한 손글씨로 쓴 번호가 붙어 있습니다.
키가 자그마하고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주문을 받았지요.
점심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나서인지 우리 외에 한 팀의 손님만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접시에 푸짐하게 담긴 그릭 샐러드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주문, 서빙, 요리까지 할머니 혼자 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리스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샐러드지만 그것은 딱 한 사람의 손맛에서만 나오는 맛, 그것이었습니다.
마치 시골 방앗간에서 직접 짠 참기름으로 무친 나물처럼 훨씬 고소하고 간이 잘 맞았지요.
그냥 토마토와 오이, 올리브유가 아니라 메테오라의 바람과 할머니의 손끝, 그리고 수도원처럼 오래된 정성과 시간의 응축, 뭐 그런 것일 거라 생각합니다.
벽에는 빛바랜 사진 액자가 붙어 있습니다.
무슨 대회에선가 상을 받은 듯한데 아마도 요리 경연대회가 아닐까 추측했지요.
음식 맛이 그럴만했거든요.
그 후로도 주문한 음식이 드문드문 나왔는데 무심한 듯 담긴 그것들은 모두 맛깔스러웠습니다.
'바실리키'
그녀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만으로도 그리스 산골 마을의 바람 냄새, 로즈메리 향, 따뜻한 빵 껍질의 바스락 거림이 연상되지 않은가요?
아마도 우리 나이 또래이지 싶은 바실리키는 역시나 계산도 직접 하십니다.
그 흔한 포스기도, 계산기도 없이 작은 종이에 테이블 넘버와 음식 이름, 그리고 가격이 쓰여있었지요.
당연히 덧셈은 암산으로 하셨습니다.
음식이 맛있었다며 엄지 척을 보여주고 바실리키와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사진 한 장을 찍고 나오는데 뭔가를 깜빡했다는 듯 우리를 다급히 불러 세웁니다.
그리고는 디저트용 과자를 하나씩 손에 쥐어주셨지요.
칼람바카에도 정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너무 달아서 한 입 먹어보고 기절할 정도였지만요.
다음 날 아침, 루사노 수도원으로 향했습니다.
루사노 역시 바를람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수녀원입니다.
한참 동안 계단을 오르고 나니 이번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아찔한 높이의 다리가 나타났지요.
다행히 다리의 길이가 길진 않으니 두 눈 질끈 감고 건넜습니다.
수도원은 생각보다도 훨씬 작고 아기자기하며 예쁩니다.
작은 예배당에는 오래된 금빛 샹들리에와 갈라진 이콘, 파스텔 색감의 성화들이 벽면 가득했습니다.
건물의 창문 틈으로 햇살이 들어와 내다보니 기둥 같은 바위가 우뚝 서있습니다..
딱히 구경이라고 할만한 게 없을 정도로 조그만 공간이었지요.
아기자기한 정원이 보이는 곳은 수녀님들의 거처이며 기도장소인가 봅니다.
당연히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었지요.
수도원들은 공통적으로 정성이 가득 들어있는 꽃들로 가득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여행자가 오고 갈 테지만 한 번도 피로를 드러내지 않는 정원.
아무도 없을 때 보이지 않는 손들이 물을 주고 마른 꽃잎을 떼어내겠지요.
관광과 신앙, 세속과 절제, 고요와 소란이 서로 어긋나는 듯 어우러지는 그 풍경,
그게 바로 메테오라의 진짜 풍경일지도 모릅니다.
아기오스 스테파노스 수도원은 유일하게 계단을 오르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수녀원입니다.
유일하게 누구나 접근하기 쉬운 곳이니 시간에 쫓기는 단체 여행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리라 짐작했습니다.
그래도 한 번 가보고 주차가 어려우면 돌아가기로 하고 나섰지요.
메테오라에 가기 전, 그곳의 수도원들이 모두 보이는 파노라마 뷰 포인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테파노스로 가는 길에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지요.
게다가 운이 좋은 건, 승용차 몇 대만 주차되어 있고 사람들이 많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360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멀지만 다섯 개의 수도원들이 모두 보이는 전망대였습니다.
그 어떤 수식도 필요 없는 최고의 경치, 그것도 무료로 볼 수 있는 곳(main obsertation deck of Meteora)입니다.
한참 동안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데 관광버스 두대가 도착,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지요.
단체 여행자들은 한국과 중국, 저마다 사진을 찍느라 분주합니다.
좀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서둘러 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소란이 고요를 무너트렸거든요.
신들도 도망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스테파노스 수녀원 부근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주차해 놓은 차들이 거의 1km는 되는 듯합니다.
운전을 한 J가 수도원 앞에 우리를 내려주고 주차할만한 곳을 찾아 되돌아갔습니다.
이미 세 곳의 수도원을 가봤으니 굳이 티켓을 사고 들어갈 건 아니다 싶어 주변만 돌아보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도로변의 돌난간에 앉아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 남자가 보였습니다.
도화지엔 스테파노스 수도원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어도 된다는 허락을 구했지요.
영국에서 왔다는 그는 한국을 여러 번 가봤다고 하더군요.
묵묵히 붓을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깊이 바라보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풍경을 눈으로 담고, 그림이라는 도구로 시간을 붙잡는 사람들에겐 늘 고요한 힘이 느껴지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의 그림은 수채화 물감 외에 종이와 천 조각들도 붙어 있습니다.
펜으로 선을 그리고 면은 무늬가 있는 종이 조각과 천 조각을 콜라주한 뒤 바탕은 연한 수채 물감으로 채색하는 방식이었지요.
팔레트 옆에 놓인 화첩 사이로 삐죽이 나와있는 종이들과 천조각들도 보입니다.
뭔가 색다른 방식을 추구하는 아티스트구나 싶습니다.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방해가 될 것 같고 또 친구들이 기다릴 생각에 좋은 시간 보내라는 인사로 자리를 떴습니다.
혼자 여행지의 풍경을 작품으로 남기고 있는 그 여유와 집중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림 대신 사진과 글로 남기고 있으니 그것도 괜찮습니다.
그와 나는 각각 다른 두 개의 각각 창으로 바라보는 것이니까요.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1. 그레이트 메테오론 수도원 (Holy Monastery of the Great Meteoron)
메테오라에서 가장 크고 역사 깊은 수도원으로 수도사들이 거주,
메테오라에서 가장 크고 역사 깊은 수도원.
14세기 초 아타나시우스 수도사에 의해 창립.
화요일 : 휴무
300계단
2. 바를람 수도원 (Holy Monastery of Varlaam)
수도사들이 거주, 1350년경 설립, 벽화와 박물관이 유명.
금요일 : 휴무
195계단
3. 루사노 수도원 (Roussanou Monastery)
수녀들이 거주, 아름다운 꽃 정원이 있는 여성 수도원.
사진 촬영 금지
수요일 : 휴무
140계단
4. 아기오스 스테파노스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St. Stephen)
수녀들이 거주
가파른 계단 없이 편편한 다리로 연결돼 있어 접근이 쉬움.
휴무일 없음
계단 없음
5. 성 니콜라오스 아나파사스 수도원(St. Nicholas Anapausas Monastery)
수도사들이 거주.
소규모 수도사 공동체, 협소한 공간에 세워졌지만 내부의 벽화가 인상적.
월요일 : 휴무
140계단
6. 성 삼위일체 수도원 ( Holy Trinity Monastery)
수도사들이 거주, 가장 고립된 위치 하여 영적 고요가 깊은 곳.
목요일 : 휴무
300계단
* 입장료 : 현금 5유로(카드 사용 못함)
* 복장 규정
남성은 긴 바지(무릎 아래까지 오는 반바지 포함)를 착용해야 하며, 여성은 무릎 아래까지 오는 치마나 드레스를 입어야 합니다.(수도원에서 치마를 무료로 빌려줍니다.)
민소매 상의는 남녀 모두 착용이 금지됩니다.
어깨와 무릎을 가리는 복장이 필수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