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진으로 보는 이아 마을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자며 가볍게 나섰던 새벽 산책은 사흘 내내 이어졌다.
파란 창, 하얀 집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은 나를 실타래처럼 부드럽게 이끌었다.
이아는 낮보다 새벽이 더 아름답다.
하얀 담장 너머로 고양이 한 마리가 졸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잠시 멈칫하다 다시 걷는다.
그렇게 마을 끝에 닿으면 어느새 풍경은 달라진다.
이곳에서는 마음이 느려진다.
빨랫줄에 걸린 얇은 리넨 천 자락, 돌담 아래 제라늄이 선잠을 깨운다.
첫날, 지나가며 보았던 갈라진 벽이 친근하고 한참 전 지나온 집 앞의 푸른 문이 익숙하다.
이아 마을에서는 블루와 화이트가 빛과 그림자의 언어가 된다.
흰 벽이 눈부시면 그림자 속에 들어가 푸른 잉크 같은 푸른 돔을 올려다본다.
세 번째 지나가는 골목인데도 다시 새롭다.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렇게 나는 섬의 귀퉁이에서 엽서 속의 사진을 빚고 있다.
하얀 집들이 몸을 기댄 채 바다를 향해 앉아있다.
먼 옛날, 잘못 내려온 구름들이 절벽에 얹혀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멈춰버린 풍차, 가늘고 낡은 뼈마디가 바람도 삼키는 정적 속에 흔들린다.
그 위태로움 마저 오래된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나도 그렇게 멈춰보고 싶다.
골목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듯, 도도하게 발끝을 옮기는 고양이.
졸고 있는 잠깐의 평화가 피사체가 되는 순간, 나도 그들처럼 골목을 건넌다.
고양이는 시간을 데리고 다니는 자처럼 오래된 문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낯선 골목인데 이상하게 익숙하다.
그리움의 파랑은 둥글게 말려 있다.
빛이 잘 드는 언덕 끝, 바다가 예쁜 곡선 위에 푸른 돔을 얹는다.
이아의 기억은, 언제나 이 돔에서 시작된다.
파란 하늘도 돔 위에 잠들고 내 마음도 눕는다.
시간은 골목을 구부리고, 바람은 색을 바꿔 놓는다.
오래된 간판은 이 마을이 건네는 인사,
골목은 노랗게 숨 쉬고 빛바랜 담장은 기침같이 울퉁불퉁하다.
낡음은 시간이 만든 무늬이고, 누군가 이 길을 사랑했다는 증거이다.
바다 건너 붉고 하얀 지층이 오래된 숨처럼 길게 누워있다.
고정된 시간으로 크루즈는 스냅숏처럼 떠있고
윤슬을 벗 삼은 요트들은 점을 찍는다.
내일도 그 자리에 서 있을 나,
모두가 천천히 늙어가는 아침
바람보다 먼저 깨어 있는 사람들.
음악이 되기 전의 침묵처럼 고요하다.
하루가 시작되는 건 결국 사람들 덕분이다.
누군가는 조용히 배달을 하고
누군가는 꽃보다 아름다운 웨딩 촬영을 하는데
당나귀를 이끌고 해변으로 향하는 노인의 발걸음은 분주하다.
셔터 소리가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나는 조용히 그들의 시간을 훔친다.
여행은 종종 풍경보다 사람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파라솔 아래, 바다를 마주한 의자 두 개,
이아의 가장 아름다운 자리는 아침 예약이 허락되지 않는다.
햇살과 바람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예약도, 가격표도 필요 없는 자리.
등받이가 하늘만큼 긴 핑크 의자는 말없이 바다를 품고,
그 자리에 앉은 이는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손님이다.
오늘도 바람과 햇살이 차지한 의자 두 개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문 양쪽에 커다란 블랙 열쇠 두 개,
그 아래 작고 조심스럽게 새겨진 글씨 하나.
'Secret'
지나갈 때마다 그 앞에 멈춰 선다
이 문안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비밀의 문은 닫혀있을 때 더 아름답다.
어쩌면 나는 이미 그 열쇠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아에서 두 번 찾아간 레스토랑, '네 개의 바람(Four Winds)'.
그곳은 언제나 네 방향이 열려 있다.
바람의 이름이자 신들의 이름,
북쪽에서 내려오는 차고 푸른 바람, 보레아스 Boreas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하고 습한 바람, 노토스 Notus
동쪽에서 오는 불규칙한 바람, 유로스 Eurus
서쪽에서 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봄바람, 제피로스 Zephyrus
나는 여전히 네 개의 바람이 묻어있는 주문서를 펼치는 중이다.
돌아가는 길,
주소도 없고 우표도 붙지 않은 엽서 한 장이 마음속에 남아있다.
빛에 익숙해진 눈동자와, 하얀 벽에 묻은 나의 하루.
풍경은 그대로인데 떠나는 내가 다를 뿐이다.
기억은 늦게 도착한다.
풍경은 바뀌지 않고, 마음속에서 선명하다.
엽서보다 오래가는 건 그날의 바람결이다.
하얀 마을은 멀어지지 않는다.
잊히지 않으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저 흰 벽처럼 조용히,
내 마음 어딘가를 오래 밝히고 있을 뿐이다.
마음이 붙잡힌 풍경.
돌아보지 않아도 따라오는 풍경.
그곳은 산토리니였다.
엽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아직 쓰지 못한 문장 하나, 그것은 읽는 이의 몫이다.
사진엽서 같은 이 글은, 침묵을 위한 음악 없는 음악.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걸 말하고 보여주려는 시도였음을 밝힌다.
그게 시고, 그게 여행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