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두 번째 알페 디 시우시
벽도 천장도 없는 전시실,
알페 디 시우시(Alpe di Siusi)는 들꽃 미술관입니다.
한 송이, 한송이 모든 순간이 그림이었습니다.
세체다의 봉우리를 등지고 다시 내려오던 길.
나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습니다.
한 번 더 눈에 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곳이 점점 멀어지는 게 실감 나지 않아서였지요.
숨이 차올랐던 오르막은 이젠 내리막이 되어 가벼웠지만 헤어지기 싫은 친구 같았습니다.
오르티세이는 알프스의 대표적인 스키 리조트 타운입니다.
그러므로 고급 호텔들은 대부분 스파, 사우나, 자쿠지, 실내 수영장 등 웰니스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지요.
건물들은 대부분 남티롤 양식으로 파사드의 그림, 발코니의 꽃장식, 박공지붕들이 많아 이탈리아가 아닌 오스트리아 느낌이 물씬 풍기지요.
세체다에서 내려와 건너편의 알페 디 시우시로 올라가는 곤돌라 탑승장까지는 도보로 약 10분.
오르티세이의 호텔들이 모여있는 중심가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라딘어(이탈리아 북부에 사는 라딘 민족이 사용하던 언어)로 몬 세우크(Momt seuc)라는 표지가 보입니다.
빨간 공 모양의 곤돌라를 타고 올라갑니다.
2005m, 세체다 보다는 낮지만 한라산보다는 높습니다.
곤돌라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소룽고 산군.
9번 트레일과 6A 트레일 방향의 표지판에는 목적지별 소요 시간이 표시되어 있지요.
오른쪽이나 왼쪽을 선택하여 걸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그날은 어느 쪽도 자신이 없었어요.
세체다에서 10분이라는 표지판에 나섰던 길에서 헉헉대던 기억이 마음속에 뿌리 박혀 있었으니까요.
지금 눈으로 보이는 길은 일단 내리막이지만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그 단순한 진실이 발걸음을 주저하게 한 겁니다.
로칸다 알핀 몬 세우크라는 이름의 산장 레스토랑의 테라스에 앉았습니다.
커피와 애플파이를 주문했지요.
손바닥만 한 커다란 파이는 촉촉하고 달콤해서 기운이 살아나더군요.
그냥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푸르른 평원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산들거리는 바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렇게 앉아있는 시간도 꽤 달콤하더군요.
사흘 후,
나는 다시 알페 디 시우시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9번 트레일을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길이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느낌이랄까요?
풍경이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듯 발걸음이 저절로 이어집니다.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딸랑, 딸랑...
멀리서 점점 가까워지는 그 소리는 어떤 악기도 낼 수 없는 살아 있는 음악이었지요.
그것은 카우 벨 소리라는 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알페 디 시우시의 아침은 구름보다 먼저 깨어나는 소들의 발소리로 시작됩니다.
양은 구불구불한 초원의 선을 따라 염소는 봉우리의 경계에서 바람과 놀지요.
풀밭은 식탁이자 놀이터이고 산등성이는 침실이자 오케스트라의 무대입니다.
이보다 더 온전한 복지가 있을까요?
요즘 마트엔 <동물복지>라는 이름의 계란이 진열대를 점령하고 있죠.
넓은 닭장, 적정한 운동량, 스트레스 관리까지, 달걀에도 계권이 붙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여긴 다르죠.
이곳의 소, 양, 염소들은 이미 풀옵션 동물복지를 누리는 중입니다.
아침이면 햇살 드리운 언덕 위로 우아하게 출근하여 쌉싸름한 풀, 달콤한 풀, 향기 나는 꽃으로 식사를 하고, 점심엔 그늘에 누워 한숨 자고, 저녁엔 사쏘 롱고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하늘 아래서 여유롭게 되새김질을 하죠.
낮은 울타리 안, 조용히 바라보는 알파카 한 마리와 마주쳤습니다.
그들은 철망 너머의 구경거리가 아니라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 고요한 풍경의 일부였는지도 모르지요.
크고 둥근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 눈빛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평화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곳에선 빠르게 걸을 수가 없습니다.
드문드문 서있는 가문비나무, 무리 져 숲을 이루는 유럽 전나무.
그리고 360도로 뻥 뚫린 초원에 드문드문 서 있는 작은 오두막집들.
누군가는 말하겠죠,
저 오두막들은 이제 쓸모를 다했다고.
하지만 바람은 매일 그곳을 드나들고, 햇살은 지붕 위에 조용한 그림자를 올려둡니다.
소들이 풀을 뜯던 기억, 목동이 저녁을 짓던 냄새, 지금은 오직 초록이 그 모든 것을 품고 있습니다.
이곳에선 낡은 집조차 풍경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선 빠르게 걸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돌로미티에 오고 싶다고 처음 느꼈던 건 유튜브 속의 한 장면 때문입니다.
여행자가 머물던 호텔에서 바라보던 한 컷의 풍경에 푹 빠져버린 거죠.
그 영상 속의 호텔 Adler Lodge Alpe가 거기 있었습니다.
영상 속의 그 풍경이 지금 내 눈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지요.
애들러 로지 알페 앞의 초지에는 <프라이빗, 노 엔트리>라는 그 팻말이 붙어있습니다.
아마도 호텔 소유겠지요.
잔디와 꽃들, 모든 것이 누군가의 애정 어린 손길 아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민가 한 채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잔디를 깎고, 풀을 베고 있었지요.
이런 외딴곳에 사는 느낌은 어떨까?
그 장면이 이상하리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저절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다시 배웠지요.
아름다움은 우연이 아니고, 유지되기 위해선 누군가의 꾸준한 손길이 필요하다는 걸.
길가에 나무 벤치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등받이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어요.
“이 경치를 사랑했던 도널드 A 스트롬본을 추모하며.”
카메라에 풍경보다 더 깊은 마음 하나가 담겼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을 도널드 A 의 고요한 오후 같은 마음이요.
나도 그곳에 잠시 앉아 도널드가 되어 경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것을 나도 보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알페 디 시우시에는 이런 고원이 축구장 8000개의 넓이로 펼쳐져 있다니 가늠이 안됩니다.
지금 보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데 말입니다.
파노라마 리프트는 아직 운행을 시작하지 않았더군요.
리프트를 타고 아랫마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올 생각이었지요.
걸어서라도 살트리아 마을까지 내려가고픈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이미 오후의 끝자락을 넘고 있었고 곤돌라의 마지막 운행 시간을 놓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쯤에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르막길을 따라 발을 옮겼지요.
그리고 놀라운 일들이 시작됐어요.
손톱보다 작은 노란 꽃, 쌀 한 톨만 한 꽃잎들이 조랑조랑 달린 보라색 꽃들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낮은 자세로 피어 있었거든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그 길 위에서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들꽃들은 그 험준한 산과 예측 불가한 날씨 속에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오래도록 익혀온 듯해요.
꽃잎도 키도 작고 이파리와 꽃대도 가늘지요.
그렇게 바람에 쓰러지기보단 휘어지며 살아남는 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건 약함이 아니라 지혜죠.
강함이란, 꼭 단단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이 풀들이 조용히 말해주고 있어요.
내려가지 못한 길이 아쉬운 대신 올라가는 길에서 들꽃들의 속삭임을 들었습니다.
그 작은 얼굴들을 보려면 몸을 낮추고 고개를 들이밀어야 겨우 보였습니다.
알페 디 시우시의 들꽃 미술관으로 초대합니다.
볼수록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곳에는 빨간색 계열의 꽃은 거의 볼 수 없고 대부분 흰색·노란색·보라 계열의 꽃이 많다는 특징이 있었지요.
아마도 이 현상은 우연이 아니라, 자연이 수천 년 동안 선택해 온 전략일 겁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색은 조용해집니다.
고산지대는 '꽃의 바다'보다 '색의 균형'을 택한 거죠.
강렬함 대신 조용하고 은은한 조화, 그 화려하지 않음에 더 오래 남습니다.
일단, 붉은색 꽃이 피려면 안토시아닌이라는 색소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에너지를 좀 많이 필요로 한다고 해요.
그런데 고산지대는 아침저녁 기온차도 심하고, 밤에는 추울 정도니까 꽃 입장에선 에너지를 아껴야 살아남죠.
그래서 상대적으로 적은 에너지로 낼 수 있는 흰색이나 노란색, 보랏빛이 많은 것이랍니다.
자연이 오랜 시간 고른 생존의 팔레트에 놓인 하얀색, 노랑, 보라를 고산의 색이라고 명명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돌로미티의 여름 들판은 소박한 색으로 가득합니다.
눈이 부시지 않아서 오래 바라보게 되고, 화려하지 않아서 더 깊이 마음에 남지요.
게다가 벌이나 나비 같은 수분 곤충들도 고도가 높아질수록 종류가 적어요.
그들은 자외선에 민감하고 특히 노랑, 흰색, 보라색을 잘 인식합니다.
반면 빨간색 꽃들은 대부분 새들을 유인하는데 돌로미티는 조류 수분 환경이 부족한 고산지대라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토양도 한몫하겠죠?
얕고 척박한 흙에서는 키가 크고 화려한 꽃들은 버틸 수 없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곳의 꽃들은 줄기부터 잎까지 전부 가늘지만 단단하게 진화한 것입니다.
바람 불면 꺾이지 않고 휘어지고, 햇볕에도 살 타지 않게 잎도 작고 좁고요.
그러니까 이 들꽃들은 그냥 연약한 게 아니라 아주 똑똑하게 적응한 겁니다.
화려하진 않아도, 부드럽고 유연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피어나는 꽃들.
바람 부는 들판에서 작은 들꽃들에게서 인생을 배웁니다.
들꽃 미술관은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동이라는 값을 치르고 씨앗이라는 선물을 받았지요.
그리고 싹이 돋아났습니다.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