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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풍경 극장

22. 카레차, 브라이에스, 미수리나 호수

by 전나무




‘호수는 햇빛이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빛에 따라 물빛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그 빛이 만든 반영은 호수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러므로 비가 내리는 날의 호수는 치명적이다.


돌로미티는 상상보다 훨씬 넓다.

어딜 가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내려야 한다.

그러니 효율적인 동선을 미리 생각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미 하루하루의 루트를 치밀하게 구상해 놓았다.

하지만 관건은 언제나 날씨다.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면, 계획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럴 땐 빠른 선택이 중요하다.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가고,

우물쭈물하다 타이밍을 놓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날도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날씨를 확인했다.

오전에는 비가 없었다.

목적지는 카레차 호수 Lago di Carezza.

짐을 챙기고, 숙소 문을 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돌로미티의 풍경은 하나하나 모두 시였고, 액자 없는 그림엽서였다.

나는 감탄했고, 동시에 절망했다.

사진을 찍고 싶은 순간마다, 차를 멈출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중턱에 덩그러니 놓인 교회 하나,

그 옆으로 포개진 집들과

밥 짓는 연기 같은 구름이 흩어진 그 풍경은 어느 여행 정보에도 없다.

그저 짝사랑하는 애인을 먼발치에서 보고 돌아서듯

지나칠 뿐이다.


그래서 인터넷에 넘치는 수많은 사진 속에도 내가 최고라 여긴 풍경들은 찾아볼 수 없다.

돌로미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직접 바라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


1. 카레차 호수: 전설처럼 맑은 거울


며칠째 비가 간헐적으로 내린 탓에, 혹시나 물빛이 탁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그러나 카레차는 코발트빛과 청록빛 거울처럼 제 속을 드러내고, 숲과 산자락, 하늘과 구름이 말간 물 위에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카레차(Carezza)’는 이탈리아어로 ‘부드러운 쓰다듬음’이라는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호수에 사는 요정을 사랑한 늙은 왕이 보물을 한가득 준비했지만,

요정이 나타나지 않자 그 보물을 호수에 던져버렸고,

그래서 지금과 같은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한다.


병풍처럼 펼쳐진 라테마르 산군도 풍덩,

가문비나무도 풍덩,

호수는 거울처럼 나무를 담았다.

나무는 하늘 옆에 누웠다.

산이 가문비와 전나무에게 말을 건다.

돌처럼 오래된 침묵 속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없는 호수 둘레길을 천천히 걸었다.

느리게 걸어도 40분이면 충분한 길.

구름이 해를 가렸다가 놓는 사이,

물빛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오리 몇 마리가 수면에 발을 밀며 활주 하고,

그 뒤로 기다란 물결이 남았다.


그 순간,

마치 누군가 내 조각을 오려 그 풍경 속에 붙여 넣은 것 같았다.

사진보다 먼저인 순간.

멈춰 선 시간.

고요해서 다행이고, 푸르러서 감사했다.



2. 브라이에스를 향한 들꽃길, 그 자체가 천국


카레차를 지나자,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멀지만 괜찮았다.

질리지 않는 또 다른 배경들이 끊임없이 열릴 테니까.


가르데나 고개와 포르도이 고개를 넘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을 달렸다.

지루할 틈도, 긴장을 놓을 틈도 없었다.

산악자전거와 갑자기 나타나는 차들을 경계해야 했으니까.


브라이에스 호수까지 5km쯤 남았을까.

마법 같은 장면이 시작되었다.


도로 양옆, 들꽃들이 무언의 인사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흰색, 노란색, 연보라…

속살이 비치는 꽃잎들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며

빛을 나누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의 선율.

맑은 피아노 소리 너머로 스며드는 슬픔.

그 꽃잎들은 음표를 닮아 있었다.

여림 속에 깃든 감정의 결을 모차르트도, 들꽃들도 알고 있었던 듯.


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그 꽃길을 걸었다.

어쩌면 호수는, 이 장면을 만나기 위한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앞서 가던 차들도, 뒤따르던 차들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속도를 늦췄다.

물 흐르듯 지나간 그 순간.

모두가 알았다.

이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장면이라는 걸.


흰 꽃잎 앞에 노란 꽃잎이 비켜서고,

보랏빛 꽃은 바람에 따라 고개를 살짝 흔들 뿐.

모든 것이 있는 듯 없는 듯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사진도, 말도, 목적지도 필요 없었다.

그저 천국이 먼저 와 있던 날이었다.

누군가 브라이에스는 어땠느냐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곳은 목적지가 아니었어요. 그 들꽃길이 진짜 천국이었죠.”






3. 브라이에스에서 미수리나


브라이에스 호수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정오 무렵이니 그럴 만도 했다.


보트들이 잔잔한 물 위를 미끄러졌고,

아이들과 반려견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사진에서 본 것보다 감동은 덜했다.

물빛은 아름다웠지만,

가슴을 탁 치는 감정은 없었다.

그럼에도 물 위에 비친 나무의 얼굴들,

구름 따라 바뀌는 색을 바라보며 마음은 잔잔해졌다.








문득 모레인 호수에 갔던 그 새벽이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대부분의 차량에 CDP가 있었다.

유키 구라모토의 ‘루이스 호수’ CD를 챙겨갔었다.

그리고 호수로 가면서 얼음처럼 투명한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그때의 풍경, 음악, 그리고 마음이 하나가 되었던 순간.

아마도 내게 호수란,

그 기억의 음영으로 정의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호수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중국인 단체 여행객들이 몰려와 소란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내 얼굴 앞까지 몸을 들이밀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곳을 떠났다.







그대로 미수리나 호수로 향하는데 도로변으로 옥색 물빛이 눈길을 끌었다.

어린 자작나무 몇 그루가 한가롭게 서 있다.

그 한적함이 나의 관심을 끌었던 곳은 란드로 호수였다.




미수리나에 도착하니 먹구름은 더 짙어졌고, 풍경보다 고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빛이 없으니 푸르름도 덜하고 물거울도 문을 닫았다.

후드득,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호숫가 호텔 외에는 카페 하나 보이지 않았다.

보트 대여소의 남자도, 호수의 표정도 시무룩하니 나도 덩달아 우울해졌다.

서둘러 코르티나 담페초로 향했다.




4. 코르티나 담페초: 과거와 미래 사이, 비 내리는 도시


2026년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도시.

잠깐이라도 들러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여행을 준비하며 트레치메 트래킹을 야심 차게 계획했었다.

그러나 세체다를 걸어본 후 나는 알았다.

그건 나에게 불가능한 여정이란 것을.


그러니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다.

코르티나는 조용했다.

회색 하늘 아래 건물들은 눌린 듯 서 있었고, 생기보다는 침묵이 감돌았다.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산의 윤곽을 따라 서 있어야 할 침엽수 대신 크레인이, 쇳덩어리 팔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과거를 입고 있는지, 미래를 갈아입고 있는지 모를 도시.

코르티나 담페초

그래도 와보길 잘했다.




5. 돌아가는 길 : 회색 숲의 경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나무들이 숨을 멈추고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누가 이들에게 말을 걸어주었을까.

수천 그루의 나무들이 죽어가는 동안, 누군가는 그것을 보았을까.

자연은 언제나 말없이 스러진다.

그러나, 그 침묵이 가장 큰 외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6. 천천히 열린 무대, 뜻밖의 선물


비를 머금은 능선들이 스크린처럼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휘어진 길 너머로 멀었던 산들이 창가로 가까이 다가왔다.


트레치메, 친퀘 토리, 이름 없는 봉우리들.

수천 겹의 바위결과 수만 번의 비바람을 견뎌낸 능선.

사진에서만 보던 풍경이 현실이 되어 몰려들었다.

아니, 현실이 사진을 밀어내고 있었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거대한 자연이 스스로 무대를 열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를 위해 풍경을 건네고 있었다.


어느새 비는 그쳤고, 구름 사이로 빛이 한 줄기씩 새어 나왔다.

핀 조명을 받은 봉우리들이 은은하게 빛났다.


그렇게 나는 산의 얼굴 하나하나를 마주했다.

구름 아래,

차창 너머로 펼쳐진 뜻밖의 선물 같은 하루.


그날의 돌로미티는,

어쩌다 만난 명품 루트에서 펼쳐진

한 편의 풍경극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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