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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마이너를 닮은 금요일 오후

3. 로켓(Loket)

by 전나무


스프레이처럼 가느다란 비가 흩어지던 금요일 오후.

휘어지는 강을 따라 도시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고, 다리 건너편의 성은 無言歌처럼 서 있습니다.

바람을 등에 진 안개 같은 비가 흩뿌려 앞이 흐릿해지는 순간, 느린 선율 하나가 떠올랐지요.

C# 마이너의 3 연음으로 시작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2악장.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긴장과 떨림이 맞물린 그 음들이 눈앞의 풍경과 묘하게 겹쳐졌습니다.

C#마이너는 C마이너보다 고작 반음 높은 음계지만 더 깊고 내성적인 편입니다.

검은건반이 많아서인지 때로는 신비롭기까지 하지요.






강이 도시를 팔꿈치처럼 꺾으며 감싸는 지형 때문에 붙여진 이름, 로켓(Loket, 체코어로 '팔꿈치'라는 뜻).

강물의 곡선이 누군가의 팔에 안겨있는 듯한 모습이 다정하게 느껴졌습니다.

까를로비 바리의 파밀리아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뒤, 커피는 이 도시를 위해 남겨 두고 20분을 달려왔으니 커피 수혈이 우선입니다.


파스텔로 문지른 듯한 컬러의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노천에 놓인 작은 카페 갈레리아,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와 커피 향이 동시에 얼굴을 스쳤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같고, 누군가의 집 거실처럼 편안한 분위기.

낡은 목재 테이블 사이로 주고받는 짧은 인사,

웃음이 섞여있지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들,

비에 젖은 옷에서 풍기는 눅눅한 냄새까지도 어색하지 않았지요.

처음 가 본 곳에서 낯선 사람들 틈에 앉았지만, 묘한 안정감이 몸을 느슨하게 풀어주었습니다.

그런 시간을 좋아합니다.



팔레트 모양의 접시에 놓인 조각 케이크,

단아한 나무 트레이 위의 커피잔,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와 입안으로 스며드는 달콤함.

그 모든 감각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마음에 스며들었습니다.



골목을 지나 성 쪽으로 향하자

형태를 세우는 탑과 벽, 거친 돌의 결이 하나씩 또렷해졌습니다.

그저 천천히 걸어가기만 하면 되었지요.

이곳에는 탑 위에 드래곤 '샤르칸'이 잠들어 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는 괴물이라기보다, 불을 지피는 등 주민들에게 작은 도움을 건네던 마을의 수호자였다고 합니다.

성 아래 바위에는 정말 작은 난쟁이 고트슈타인이 서 있는데요.

수염을 쓰다듬으면 행운이, 그가 든 곤봉을 만지면 불운이 찾아온다는 이야기 때문인지 뾰족한 수염이 반질반질합니다.





성 내부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좁은 돌계단, 삐걱거리는 나무, 습한 냄새.

12세기에 세워진 로켓 성은, 왕실의 요새이자 왕들의 임시 거처였고, 마지막에는 감옥이었습니다.

고문 도구와 사슬들이 벽에 걸려 있는 그 공간은 과거의 울음이 돌틈에 남아 있는 듯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름다움은 시대를 넘어 언제나 사랑받습니다.

카프카는 이 마을의 어느 호텔 창가에 앉아

성과 강을 바라보며 자신의 문장을 다듬었고,

72세의 괴테는 이 성에서 17세의 울리케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74번째 생일을 맞으며

성벽 위로 번져가던 노을의 숨결을 조용히 받아들였지요.

그때 탄생한 시가 마리엔바트의 비가였습니다.







로켓 사람들은 이 작은 마을을 사랑했던 괴테를 위해 그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들의 숨결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주 가볍게,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따라오며 마음속에 작은 음영을 만들어냅니다.



부드럽게 자신을 접어 흐르는 오헤르 강,

그 곡선과 달리 단단하게 울리는 ‘Loket’이라는 이름,

비에 젖은 오후 작은 카페에서 손을 녹여주던 따뜻한 차 한 잔,

그리고 흐릿한 성을 향해 걸을 때

귓가에 가만히 스며들던 C# 마이너의 선율.

그 조각 같은 순간들이 오래도록 나를 흔들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도 언젠가는

조용한 바람에 실려 흩어지겠지요.

여행자인 나는, 또 다른 시간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딜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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