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플젠(Plzen)
여행에서 짜릿한 순간은 계획하지 않은 뭔가를 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뜻밖에 마주친 주말 장터나 벼룩시장도 그중 하나지요.
어릴 때, 아버지가 엄마 몰래 용돈을 슬그머니 쥐어주셨을 때처럼요.
사람들이 물건을 고르고, 어떻게 웃고, 어떤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는지를 바라보다 보면 마치 그곳에 은밀한 초대를 받은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 사소한 분위기가 마음을 들뜨게 만듭니다.
장터는 오감을 흔드는 작은 축제입니다.
갓 구운 빵 냄새,
과일의 맑고 선명한 색들,
엄마 손을 잡고 잰걸음으로 쫓아가는 어린아이의 앙증맞은 모자,
허름한 장바구니를 들고 천천히 움직이는 할아버지의 걸음,
거스름돈을 건네며 지어 보이는 상인의 미소,
테이블 위에 놓인 오래된 물건들이 품은 시간까지,
무엇을 사지 않아도 괜히 흐뭇합니다.
필수도 아니고 계획에는 더더욱 없던 공간.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곳에 있다 보면 그냥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그게 장터가 주는 묘미입니다.
플젠의 토요일 광장이 바로 그랬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틈에 자연스레 끼어 다음 날 아침을 위한 빵과 치즈를 골랐습니다.
주말 장터는 오전만 반짝 열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종이봉지 너머로 전해진 갓 구운 빵의 온기가 이 도시가 우리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온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광장 귀퉁이에는 황금빛 분수 세 개가 조용히 물을 뿜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과거 이 도시의 문장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그 형태는 현재의 시간을 얇은 금빛으로 덧칠해 놓은 듯 이질감이 들었어요.
하지만 햇빛이 닿을 때마다 물줄기가 사라졌다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옛 숨결 위에 현대가 얇게 겹쳐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광장 한쪽에 회색 선들이 촘촘히 얽힌 시청사가 보입니다.
밑의 색을 긁어 무늬를 드러내는 즈그라피토(Sgraffito) 기법은 문양이라기보다 '시간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 묘하게 생생합니다.
오래된 벽인데도 손끝으로 더듬어보고 싶을 만큼 고요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지요.
그림도 조각도 아닌 그 기법은 대부분 회색이나 브라운 컬러의 단색이어서 좀 더 깊이 있는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그날 이후 체코 곳곳에서 즈그라피토를 얼마나 자주 보게 될지 그땐 미처 몰랐지만요.
체코의 여러 도시를 돌다 보면, 바르톨로뮤(St. Bartholomew)의 이름을 가진 성당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바르톨로뮤는 도시의 상업과 공동체를 지켜주는 수호성인이라고 해요.
광장이 있는 곳마다 이 성인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얹혀 있는 이유입니다.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는지 버진 로드가 될 통로 옆에 꽃장식이 얹혀 있었습니다.
그 모든 풍경을 뒤로하고 걷다 보니 멀리 필스너 우르켈 공장의 굴뚝이 보입니다.
바람 끝에 쿰쿰한 냄새가 스며 있었습니다.
맥주의 역사가 아니라 필젠(Plzen, 영어로 Pilsen 필센)이라는 도시 전체가 발효되는 냄새 같았지요.
지금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그 이름의 시작점은 그렇게 조용한 공기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오크통 깊숙이 스며드는 효모처럼 플젠이라는 도시도 자신만의 시간을 천천히 숙성시키고 있는 듯합니다.
체코 사람들은 맥주를 '흐르는 빵'이라 부릅니다.
무려 30년 넘게 세계 1위의 1인당 맥주 소비량을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체코인의 연간 개인 소비량은 188.5리터,
330ml 기준으로 평균 468병에 해당합니다.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2위인 오스트리아가 107.8리터이니, 맥주를 흐르는 빵이라 부를 만합니다.
1842년 세계 최초의 라거가 태어난 도시.
작은 양조장에서 시작된 수많은 시간,
여전히 매일같이 생산되고 마셔지는 수많은 한 모금의 삶들.
황금빛, 부드럽고 깔끔한 질감, 촘촘한 거품,
마시는 순간 혀끝에서 가볍게 튀는 산뜻함까지 도시의 이야기는 맥주 안에서 은근히 이어져 있었습니다.
플젠의 토요일은 오래된 것들과 지금의 것들이 한 지점에서 얇게 겹쳐지는 하루였습니다.
금빛 분수,
시청사의 회색 패턴,
성당의 고딕 첨탑,
장터의 소란한 일상까지.
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듯하면서 한 장의 풍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지요.
정작 이런 순간 때문에 여행을 하게 되는 겁니다.
무언가를 보러 간 것보다 예기치 않은 장면이 조용히 다가와 그 도시의 온도를 한 겹 더 얹어주는 시간.
플젠의 토요일은 그런 얇고 선명한 층으로 지나갔습니다.
프라하로 돌아온 그날 저녁,
부드러운 거품이 잔 끝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필스너 세 잔이 식탁 위에 놓였습니다.
그 투명한 노란 액체 속에 보석 같은 기포들이 뽀글뽀글 살아 움직입니다.
술에 약한 두 친구들,
그리고 발효주인 맥주보다 증류쥬인 위스키의 단단함이 더 맞는 필자.
그럼에도 오늘은 필스너 한 잔을 마셔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플젠에 대한 예의랄까, 작은 인사랄까.
입술에 닿는 순간,
가벼운 거품이 먼저 혀끝을 간질이고 이내 번지는 미묘한 쌉쌀함은
낮 동안 걸었던 광장,
황금 분수의 금속성 반짝임,
성당의 어둑한 그림자를 하나씩 불러왔습니다.
취하지도, 들뜨지도 않는 라거 한 모금은 플젠에서의 하루를 조용히 묶어주는 따뜻한 매듭처럼 느껴졌지요.
여행지에서 마시는 술은 언제나 그렇듯,
기분을 흐리게 하기보다 하루의 감각을 제자리로 데려다 놓는 쪽에 가깝습니다.
예의는 갖추었으니 이제 위스키를 마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