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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Oct 10. 2016

시굴다, 재미따~니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여행(7. 시굴다)



  시굴다 가는 길, 낡은 파란색이 정겨워 보이는 전차가 지나갔다. 낡은 전차 하나를 보았을 뿐인데 마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다. 다리 건너편에 부드러운 삼각형 모양의 독특한 건물은 국립도서관이다. 버스 터미널 옆 하천에는 수련이 수줍게 떠있고, 녹슨 난간과 낡은 벽을 지나면 터널 형태의 지붕이 몇 개 보이는데 그곳이 중앙 시장이다.      



낡은 트램
국립 도서관
중앙 시장



  바르샤바 문화 과학 궁전과 거의 똑같은 빌딩이 보였다. 라트비아 과학대학으로 러시아 구역의 랜드 마크라고 한다. 바르샤바처럼 소비에트 연방 시절인 1950년, 소련에서 지어준 건물인데 사람들은 ‘스탈린 생일 케이크’라고 부르며 비꼰다고 한다.      


라트비아 과학 대학
바르샤바 문화과학 궁전


  리가 역은 외관상 무척 커 보였다. 광장에는 흑백 사진이 전시되고 있었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보아, 라트비아의 대표적인 뮤지션이겠거니 짐작했다. 맨 앞에 같은 사람의 사진이 여러 장 전시되어 관심을 갖고 이름을 보았다.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레이몬츠 파울스( Raimonds Pauls), 바로 백만 송이를 작곡한 사람이었다.      



리가 중앙역
백만송이 장미 작곡가 레이몬츠 파울스( Raimonds Pauls)



백만 송이 장미



  9시 30분 리가를 출발해서 10시 46분 시굴다 도착. 1시간 16분 동안 10개 역을 지나는 이를테면 비둘기호 같은 완행열차이다. 1.9유로니까 2400원, 무척 싸다. 기차 티켓은 따로 없다. 영수증이 곧 티켓이다. 장난감처럼 빨강, 노랑, 파랑, 흰색의 앙증맞은 색깔의 기차가 플랫폼으로 천천히 들어오고 있다. 꽃을 든 사람들이 간간히 보였다.


리가에서 시굴다 가는 기차
걸어다니는 꽃


      




  흐린 하늘 아래로 길쭉길쭉한 침엽수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세월의 더께를 입은 양, 나무 둥치의 아래쪽으로 갈수록 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고 그라피티로 치장한 벽돌담들이 간간히 지나갔다. 가는가 하면 서고, 서는가 하면 출발했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우리나라 70년대를 떠올리듯 검박했다.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따라 가 보고 싶었다. 이름 모르는 시골길을 하릴없이 걷다 보면 하얀 레이스 커튼 사이로 꽃이 핀 화분이 놓여있는 낡은 창이 보일 거다. 린넨 식탁 매트 위에 투박한 빵과 따뜻한 스튜가 따뜻함을 전해줄 시골집, 그런 곳에서 한두 달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언젠가 목적지 없는 기차 여행을 하고 싶다. 여기가 좋겠어하면 내려서, 두어 시간 걷다가 빵 하나, 과일 한쪽 먹고 또 기차를 타는 거다. 인자한 표정의 할머니들이 길가에 나란히 앉아서 햇빛을 쬐고 있는 풍경을 지나 허름한 카페에서 얼 그레이나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는 호사를 누리고 싶다. 구름이 흘러가는 방향이거나 해가 지는 쪽이어도 좋으리라. 머지않아 그런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시굴다 가는 풍경





  시굴다 역에 도착했다. 역사의 바깥은 오렌지와 화이트로 이방인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느낌이더니, 안쪽은 연두와 화이트로 멜론 아이스크림처럼 상큼하다. 커다란 격자 모양의 창틀에 들어있는 유리창들이 어린이 눈동자처럼 맑다. 맑은 유리창을 보면 우체국이 생각난다. 유치환의 시 때문일 것이다.      


시굴다 역
시굴다 역 내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유치환 행복 중) 




 투명하게 맑은 창으로 밖을 보니 에메랄드 빛 하늘대신, 꽃을 든 사람들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니 생각나는 시가 있다.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 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이수익, 우울한 샹송 중)       







  역사를 나가니 광장의 중앙에 둥근 화단이 있고 그 중심에 키 큰 시계가 서 있다. 갖가지 꽃들이 꿈처럼 피어있다. 이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손자를 데리고 나온 할아버지의 얼굴에 번지는 웃음과, 화단 한쪽에서 책을 읽는 아가씨, 그 모두는 하나하나의 꽃이었다.







‘맑다’ 청명한 날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첫인상은 맑음이었다. 

‘깨끗하다’ 여긴 보도블록도 손 걸레질 하나? 할 정도로 깨끗했다.

‘단아하다’ 거창한 건 없다. 오래된 집 몇 채가 단정하게 앉아있었다.

‘고요하다’ 텅 비지 않았는데 고요했다. 공기에서 조차 고요라는 맛이 느껴졌다.

아니다. 이 정도로는 모자라다. 뭐라 해야 할까? 평화로운~ 이라든가, 그림 같은~ 이라든가  그런 표현은 하고 싶지 않다. 작은 파라다이스였다. 그렇다. 말이 필요 없다. 

그냥, ‘작은 파라다이스’     


 





  빨간 부직포 러그 위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부인이 꽃을 들고 포즈를 취한다. 여러 가지 색의 자잘한 꽃으로 만들어진 부케를 들고 있다. 또 다른 부인이 그 자리에 선다. 역시 흰 원피스에 한 송이 하얀 백합을 들었다. 사진을 찍는 남자는 사뭇 진지하다.      






  시굴다에 온 것은 투라이다 성에 가기 위해서다. 걸어가면 1시간, 케이블카를 타도되고 버스를 탈 수도 있다. 버스 시각까지는 약 50분의 여유가 있다. 이끌리듯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이 아니라 공원이다. 차도와 인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초록의 잔디와 아름드리나무,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에는 거의 모두 꽃이 들려 있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노란 들꽃 한 묶음, 해바라기 한 다발, 그야말로 꽃묶음을 너 나할 것 없이 들고 간다. 리본이나 포장지로 한껏 치장한 꽃다발은 값싼 화장을 한 여인 같아 싫다. 그러데 그들은 툭하고 꺾은 꽃만 들었다. 옷차림으로 볼 때 무슨 행사에 가는 것 같지 않다. 평범한 점퍼를 입은 할아버지도, 청바지를 입은 아가씨도, 아내의 손을 잡고 가는 아저씨도…. 





‘꽃을 들고 가는 이유가 뭐예요?’

‘이곳 사람들은 모두들 꽃을 들고 가네요?’ 

묻고 싶지 않았다. 묻지 않았다. 이유는 2가지, 꽃을 들고 가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와,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꽃을 들고 가는 거라면 내 상상의 아름다움이 반감될 것 같아서다.



     






  꿈을 꾸는 듯했다. 이런 곳이 있다니…. 마을엔 우체국도 음식점도 기념품점도 있다. 고흐의 노란 방과 똑같은 노란 벽, 분홍색이 칠해진 나무 우편함 같은 사소한 것들에 기분이 두둥 그냥 좋았다. 거리엔 꽃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플라스틱 양동이에 무심하게 푹 꽂아둔 꽃, 글라디올러스, 백합, 해바라기, 장미…, 고작 16,000명이 살고 있는 그곳은 사람보다 꽃이 많았다. 역에서 보았던 하얀 옷 입은 여인들과 또 다른 여인들 네 명이 근처 레스토랑에서 여전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노래 말마따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시굴다’ 두고두고 기억에 날 곳이다.          



시굴다 우체국




  투라이다 까지는 미니버스가 오가는데 요금은 650원. 가느다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우리나라 관광지처럼 민속공예품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있다. 투라이다는 가우야 국립공원 안에 있는 성과 요새이다. 꽃과 풀, 나이 든 나무, 그리고 이끼 옷이 어우러져서 멋진 풍경을 만들고 있다. 성으로 가던 중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교회를 들어가 보았다. 대결하듯 몸짓을 부풀리는 현대의 기업형 교회보다 훨씬 믿음이 가는 곳이다. 교회 제단의 오른쪽에 전통의상을 입은 아가씨가 창밖을 바라보고 서있다. 순간 마네킹인가? 의심이 갔다. 그녀는 중세 그림 속의 여인 같았다.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옛날 생활상을 보여주는 민속 박물관들을 차례로 지나 걷다 보니 무너진 돌담 저쪽에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투라이다 성 가는 길목의 목조 교회






   검표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데 거의 나이 지긋한 분들이다. 이곳은 오래전 이 지역에 살던 리브 인들이 독일 십자군들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이다. 투라이다는 '신의 정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붉은 벽을 싸고도는 초록의 담쟁이덩굴이 벽돌 탑을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건물 중간 높이의 외벽에 나무로 만든 발코니가 죽 이어져 있는데 그곳에 라트비아의 문장이 그려진 천이 걸려있다. 그 문장들의 컬러가 오래된 붉은 벽돌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마치 나이 많은 할머니가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파는 500원짜리 플라스틱 목걸이를 한 것 같이 귀여운 모습이랄까?      


투라이다 성






  돌아갈 때는 다른 쪽 길을 택했다. 사과나무가 많다. 떨어진 것 중에 하나 주워 먹어보니 상큼하고 맛있다. 애기 주먹처럼 작은 사과를 하나씩 먹으며 산책하듯 걸었다. 돌로 만든 현대 조각품이 잔디 여기저기 놓여있다. 주차장 근처에 오니 민속촌처럼 옛날 집들이 몇 채 있다. 아직도 운영하는 대장간, 수초와 연꽃이 피어있는 호수에는 오리가 둥둥, 나무 그네와 키 작은 사과나무 몇 그루, 오래된 창고 앞에 갖가지 색의 달리아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한다.   



 







  리가로 돌아가면 러기지를 찾아 타르투로 가는 룩스 버스를 탈 예정이다. 그러려면 시굴다 역에서 3시 반 기차를 타야 한다. 우리가 타기로 한 버스 시각이 다 되었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승용차 주차 요원에게 물어보니 그 버스는 이미 지나갔고 3시 차가 올 거니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3시 5분이 지났어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초조하다. 3시 반 기차 다음은 5시 반이다. 어떻게든 룩스 버스를 타야 한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기로 했다. 리가 가는 방향과 시굴다 방향에 각각 한 사람씩 서고, 두 명은 그대로 버스 정류장에서 혹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때 저 멀리서 기적처럼 버스가 나타났다. 리가와 시굴다 방향 길가에 서 있던 친구 D와 나는 숨이 턱에 차오르게 정류장으로 뛰었다. 그때가 3시 16분, 투라이다로 올 때 공사 중이라 한쪽씩 일방통행으로 교차하는 구간이 있었다. 그 구간을 지날 때 초록불이 켜진다면, 그래서 건너편 차들이 지나가도록 기다리지만 않는다면 기차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사 구간이 가까워졌다. 초록불이 켜져 있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멈춤 없이 시굴다 역 까지 달려갔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냅다 뛰었다. 기차표는 미리 사두었던 터였다. 장난감을 닮은 기차는 우리를 태운 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은 연일 37-38도를 웃도는 날씨가 지속된다는 문자가 날아들었다. 시굴다에서 리가로 돌아가는 8월 6일 오후 15:41 기차 안에 표시된 전광판의 현재 기온은 19 °C. 너무 행복해서 미안했다. 





    

  완행열차 안에서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게 신기했다. 빵과 납작 복숭아를 먹다 보니 전광판에 RIGA라는 글씨가 떠있다. 시계를 보니 거의 다 왔구나 싶었다. 당연하게 기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이건 뭐지? 데자뷔 같은 이 느낌은? 옆에 서는 역무원에게 물었다. 

‘여기 리가예요?’ 

‘노! 재미따~~니, 리가 이즈 넥스트!’ 넥스트, 넥스트, 넥스트… 메아리처럼, 환청처럼, 넥스트가 거짓말처럼 들려왔다. 재현된 악몽처럼 또다시 후다닥 기차에 올라탔다. 캐리어가 없으니  거의 날아가는 수준이다. 그곳 역시 리가의 바로 전, 그러니까 서울 가기 전, 용산 역 같은 곳이었다.      

역 이름 재미 따~~니, 재미따 까지는 이어서 빨리 발음하고, ‘따’는 음정을 높여서 길게 끌어 소리 내다 미끄럼 타듯 내려와 ‘니’를 붙여야 한다. 재미 따~~ 니, 안 재미 따~~니를 따라 하며 깔깔거렸다. 그 이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중앙시장에 들렀다가 호텔로 돌아가려면 좀 돌아가야 한다. 배고 고프고, 피곤하기도 해서 시장은 패스, 역 광장에 있는 대형 슈퍼마켓 리마에서 장을 보기로 했다. 크루아상, 요거트, 우유, 과일 등을 샀다. 물은 룩스 버스에서 줄 테니까 생략! 지름길이겠다 싶은 방향을 따라 호텔을 찾아갔다. 이제 라트비아를 떠나 에스토니아로 간다.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주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한 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눈     (조그만 사랑 노래 전문 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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