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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Oct 17. 2016

며칠의 아침이 남았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여행(11.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신관 전시실



  간혹 이런 질문을 듣는다. 어떻게 해야 여행을 잘할 수 있느냐고…. 공부 잘하는 사람, 연애 잘 하는 사람, 여행 잘 하는 사람…. 과연 그 ‘잘’ 하는 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다. ‘잘’이라는 말은 어렵다. 공부 잘하는 법?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잘'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을 그냥 좋아할 뿐이다. ‘잘’이라는 것은 스스로 좋은 쪽으로 가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여행을 하는 순간에도 여행이 고프다. 여행에 대한 허기가 채워지질 않는다. 아마도 제한된 시간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 아침이다. 며칠의 아침이 남았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오늘 다시 발걸음을 떼어 놓는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찬란한 아름다움과 우울함이 동시에 피고 지는 세속적인 도시라고 했다. 그 말은 옳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엎드려 입을 맞춘 센나야 광장,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집필했다는 블라디미르스키 대로의 모퉁이 등은 여전히 찬란한 아름다움과 우울했던 예술가의 흔적을 찾으려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네프스키 대로를 걷다가 우연히 문학 카페(Literaturnoe)를 발견했다. 외관이 너무 허름하고 초라해 보여서 카페라고는 전혀 짐작되지 않을 정도였다. 운하가 보이는 카페 2층 창가 자리는  푸시킨의 단 골석이었다.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결투를 하러 갔다가 다시는 그 카페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후 이 카페에서는 레모네이드를 팔지 않는다고 한다.


since 1816, 200년 된 문학 카페
문학 카페에 그려놓은 푸시킨 커리커쳐



  푸시킨은 모스크바의 한 무도회에서 16세의 미녀 나탈리아를 처음 만났다. 절세미인인 나탈리아는 허영심이 많고 속물적인 여자였다. 그러나 푸시킨은 그녀의 차갑고 도도한 매력에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 위선적이고 천박한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겨우 약혼을 승낙받아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가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여 연년생의 두 딸을 낳았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문학은 관심도 없고 이해도 못했으며 사치만 일삼았다. 가정은 내 팽개치고 부부간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아내 때문에 재산은 동나고 귀중품은 모두 전당포에 잡혀야 했다. 그러므로 푸시킨의 왕성한 문필활동과는 달리 가정은 점점 더 황폐해져 갔다. 사교계의 여왕으로 궁정 행사에 참석한 나탈리아는 급기야 황제의 눈에 들게 된다. 그러나 나탈리아는 황제의 사랑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염문을 뿌린다. 잘생긴 용모로 페테르부르크의 살롱 계를 휘졌던 프랑스의 단테스가 상대였다. 아내의 불륜을 암시하는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푸시킨의 진보적인 사상을 위해하려는 세력가들의 음모라는 말도 있고, 나탈리아와 황제 간의 불륜을 덮어두기 위한 계책이라는 말도 있었다. 이에 참지 못한 푸시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청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단테스의 총에 맞아 38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그는 죽기 직전 아내의 무고함을 믿는다며 오히려 나탈리아를 위로하곤 자신의 장례를 투르게네프에게 부탁하며 숨을 거두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평범한 어휘로 써진 그의 시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는 나탈리아에게 쓴 사랑의 고백 이리라.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말도 없이 희망도 없이 때론 수줍음에 때론 질투심에 가슴 에이며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그토록 진실하게 그토록 다정하게…’ 후략     



푸시킨 동상



  에르미타주는 담녹색 외관에 흰 기둥, 황금색 포인트 장식이 잘 어울리는 로코코 양식의 건물이다. 외관에서 풍기는 느낌이 우아하면서 지적이고 품위 있다. 축구장보다 더 커 보이는 광장엔 예상대로 우리보다 발 빠른 여행자들의 줄이 민트 색 본관 앞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입장 시간이 되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본관
오픈 전 부터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다섯 개의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지붕에 176개의 조각상을 이고 있는 1) 겨울 궁전과, 2) 작은(小) 에르미타주, 3) 구(舊) 에르미타주, 4) 신(新) 에르미타주, 5) 에르미타주 극장으로 구분된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런던의 대영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1754년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해 건축되어 왕실 수집 소장품으로 미술관이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현재 350여 개의 방에 총 300만 점이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에르미타주의 미술품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늘어나고 있다. ‘세계 미술계의 큰 손’으로 알려진 프로축구단 첼시의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최근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아트페어에서 자코메티의 조각을 140억 원에 구입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렇듯 좋은 미술품을 조국으로 사들이는 러시아의 컬렉션 전통은 에르미타주를 풍부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모로조프와 시킨이라는 두 거상은 당시 미술의 중심지이던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품들을 구입해 자신의 집에 전시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을 젊은 작가들에게 공개해 20세기 초반 말레비치, 타틀린, 칸딘스키, 샤갈 등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라는 미술사에 길이 남을 사조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소장품은 현재 대부분 에르미타주와 모스크바의 푸시킨 미술관에 편입돼 있다. 이 놀라운 컬렉션 중에는 피카소 청색시대의 주요 작품과 1908년 작품들도 있다.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발표하고 입체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그려진 이 작품들은 입체주의의 비밀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한 시기의 피카소 작품이 이렇게 여러 점 소장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모로조프는 마티스를 러시아에 초청하여 자신의 집에 걸 작품을 주문했다. 마티스가 1910년 러시아를 방문하여 완성시킨 대작이 그 유명한 ‘춤’과 ‘음악’이다.     



  일단 D와 J는 줄을 서고, M과 나는 자동 티켓 발매기를 찾아 나섰다. 자판기 역시 박물관  오픈 시간과 동시에 작동하지만 줄을 선 사람은 많지 않았다. 루브르나 대영 박물관처럼 에르미타주 역시 한 작품에 1초씩만 보더라도 8년이 걸린다고 한다. 1,057개의 방, 전시실을 잇는 동선을 연결하면 27Km, 그러니 애초에 집중할 수 있는 작품을 정하고 시작하는 게 좋다. 우리는 19~20세기 회화가 몰려있는 신관(노란색 건물)만 보기로 했다. 본관보다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고 우리가 좋아하는 화가들의 작품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티켓 자동 판매기



  본관의 웅장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거대한 샹들리에로 장식된 으리으리한 대접견실이 나온다. 그러나 신관은 본관처럼 휘황찬란한 금색의 장식이나 화려한 대리석으로 장식된 계단 같은 것은 없다. 단순한 색깔로 페인트가 칠해진 전시실이 오히려 그림을 돋보이게 한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신관 들어가는 길, 계단 중앙의 초록 유리가 카펫처럼 보인다.




  르누아르 방을 지나 세잔느의 방, 고갱과 고흐의 방을 만나게 된다. 피카소의 <수녀와 창녀>, 고갱의 <기적의 샘물>, 고흐의 <오베르-쉬르-우아즈의 오두막집>과 <아를의 여인들>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 수두룩하다. 사람의 감각이라는 게 참 그렇다. 눈이든, 입이든, 귀든 어느 한 가지가 즐거우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눈이 행복하니 아무 생각도 없다. 간결한 선과 아름다운 색채가 맘에 드는 화가의 방에 이르렀다.   


   



















피카소의 <수녀와 창녀>





‘나는 사물을 그리지 않는다. 오직 사물 간의 차이점을 그린다’ 앙리 마티스의 말이다. <댄스>와 <음악>이란 그림이 서로 마주 보고 걸려있다. 책에서 여러 번 보아왔지만 그림의 크기가 아주 큰 것에 일단 놀랐다.   


   

 <댄스>에는 다섯 명의 여자가 등장하고, <음악>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보라색에 가까운 파란 하늘에 대지를 나타내는 녹색의 구도도 비슷하다. 다섯 명의 사람들도 모두 붉은색이다.   

   


  


  원근법을 무시한 상태에서 <춤>은 다섯 명의 여자들이, <음악은> 은 다섯 명의 남자가 나체로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하고 있다. 두 사람은 서서 악기를 연주하고 세 사람은 앉은 상태에서 평화롭게 노래한다. 이미 만들어진 음악이 아니라 우연히 마음이 맞은 즉흥 연주를 하는 느낌이다. <춤>은 마티스가 삶의 기쁨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새로운 무게를 부여한 작품이다. 무희들은 손을 맞잡고 역동적인 원을 그린다. 더 빨리 춤출수록 발뒤꿈치가 높이 들린다. 오른쪽으로 기운 타원형은 시계방향의 움직임을 말해주며 춤의 불규칙한 에너지를 강조한다. 전면 왼쪽에 있는 두 댄서의 손은 완전히 맞닿지 않았다. 그 틈은 내가 닫아주어야 한다. 춤의 역동적인 리듬 때문에 인체가 뒤틀릴 지경이지만 그 때문에 표현력이 더해진다.      


  <음악>도 요소를 채택한다. 초록색 언덕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다섯 개의 인체가 등장한다. <음악>에 나오는 남성 인체들은 <춤>의 타원형 모티프와 같은 동력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대신 그들은 고립되어 있고 음표처럼 한 줄로 배열되어 있다. 그 외에도 <화가의 가족들>, <붉은 방>, <푸른 식탁보>, <대화>등이 한 방에 걸려 있다. 행복한 향기가 나는 그 방에 한 동안 앉아 있었다.      










  10년 전 프랑스 니스에 다녀오면서 마티스 미술관에 들르지 못했던 것이 내내 아쉬웠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하듯, 다시 프랑스 여행을 하게 되었고 당연히 니스를 일정에 넣었다. 그렇게 흥분과 기대를 갖고 찾아간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엔 회화 한 점이 제대로 없었다. 드로잉과 색종이를 오려 붙인 작품 외의 밝고 사랑스러운 컬러의 회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르셰 미술관이나 오랑주리가 낫다. 에르미타주는 렘브란트와 마티스의 작품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의 컬렉션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는 시각과 지식, 눈의 촉각으로 느끼는 세계, 그림자의 중요성 등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다. ‘돌아온 탕자(1668∼1669)’는 렘브란트가 말년에 그렸는데 웬디 수녀가 쓴 <유럽 미술 산책>에서 에르미타주에서 가장 볼만한 작품으로 뽑은 작품이다.    

  


  렘브란트 작품 중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에 있는 ‘야경’(1642년)과 에르미타주에 있는 ‘돌아온 탕자’는 최고로 꼽히는 걸작이다. 한때 네덜란드는 러시아에게 ‘돌아온 탕자’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러시아가 이 그림을 사 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1년 동안 순회 전시를 하도록 무료 임대해줬다고 한다.      




  ‘돌아온 탕자’는 실제 렘브란트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 어린 고백이다. 그림에서 따뜻한 화해의 빛을 느끼게 된다. 렘브란트는 유복한 제분업자 아들로 태어나  20대 중후반에  명성이 자자한 화가가 되었다. 스물여섯 살에는 좋은 집안의 규수와 결혼도 했다. 암스테르담은 물론 유럽 최고 작가로 군림했다. 하지만 부와 성공 뒤로 절망과 고독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두 아들과 딸이 생후 얼마 안 돼 잃었고 셋째 아들 역시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아내 역시 서른 살에 병으로 떠났다. 아내는 남긴 넉넉한 유산은 곧 바닥이 났다.  살던 집에서 쫓겨났고 파산했다. 그렇게 엄청난 상실과 쓰라린 아픔을 겪은 뒤 그린 것이 돌아온 탕자이다. 이 작품이 위대한 것은 한 인간으로서 패배를 아주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버지 같은 신에게 고해하고 안기는 것으로 인생의 실패를 인정하고 패배를 끝낸 것이다.     


 

  아들의 어깨 위에 얹힌 아버지의 두 손을 주목하면, 왼손은 투박하고 힘줄이 울퉁불퉁 솟은 노인의 것인데, 오른손은 가늘고 여린 여인의 것이다. 아들을 어루만지는 손은 무뚝뚝하지만 은근한 아버지의 사랑이 보인다. 한없이 따스한 어머니의 자애를 다른 한 손에 담았다. 아들의 발바닥과 신발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곤궁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았는지 보여준다.      





  에르미타주의 창으로 네바 강이 흘러가는 게 보였다. 그 모습 또한 창틀을 액자로 삼은 에르미타주의 작품처럼 느껴졌다.      





  에르미타주 궁전 광장은 어마어마하게 넓다. 광장의 중앙에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하여 세워진 알렉산더 원기둥이 높게 서 있다. 기둥의 꼭대기에는 한 장의 화강암으로 만든 십자가를 안은 천사상이 있다. 


     

현대적인 디자인의 자전거 인력거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나와 네바강 선착장으로 가는 도중에는 이렇다 할 레스토랑이 없다. 사람들이 후드 트럭에 줄지어 서 있었다. 우리도 그들처럼 빵에 칠리소스와 머스터드를 듬뿍 뿌려진 소시지를 넣은 핫도그와 달달한 커피를 하나씩 사서 보도블록에 앉았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매콤한 맛 외엔 별 특별하지 않은 빵을 순식간에 먹었다. 







  선착장으로 갔다. 배를 타고 네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약 40분 후 여름궁전에 도착할 것이다.  여름 궁전은 40km쯤 떨어진 핀란드만 연안에 표트르 대제가 조성한 궁전으로 황금 분수와 정원이 아름다운 곳이다. 배를 타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는 홀로 갈 곳이 있었다.


     

네바강의 로스트랄 등대

  


  버스를 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내버스에는 버스비를 받는 차장이 있다. 돈을 내며 물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 가죠?’

‘번호는 맞는데 반대 방향을 가는 버스를 타야 해요.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서 건너간 후 타세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주머니 차장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는 네바 강을 건너 한참을 달린 후 강변도로에 정차했다. 강바람이 거칠게 불어왔다. 버스를 잘못 탄 것이 오히려 좋았다. 제대로 탔다면 내가 그 시각, 그 장소에 있지 못했을 것 아닌가. 여행이란 길을 잃을수록 묘미가 있는 법이다. 사진을 찍다 보니 버스가 왔다.   






의자에 앉아 있는 분이 버스 차장 아줌마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 가려고 하는데요. 거기서 내릴 수 있게 알려주세요.’

차장 아주머니는 20분 정도 걸리니까 꼼짝 말고 앉아있으라고 했다. 역시 나이가 지긋한 분인데 영어가 유창했다. 많은 승객들이 한꺼번에 몰리면 차장 아주머니는 정신없이 바쁘다. 그래도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차비를 거두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을 할 즈음 졸음이 쏟아졌다. 얼마 동안 졸고 있었을까,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차장이 내게 다가왔다. 

‘걱정 말아요, 나는 당신이 내려야 할 곳을 알려줘야 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어요.’ 그렇게 2~3개의 정류장을 지나 차장 아줌마는 내게 내리라는 사인을 보냈다.   






  모든 건 지나간다. 기쁨과 환희와 즐거움의 것이든, 회환과 슬픔과 고통의 것이든…. 그 지나감이 멈춘 곳, 묘지가 아닐까? 3년 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1주일 동안 머물면서 찾아가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그러므로 친구들과 떨어져서 차이코프스키와 도스토옙스키를 만나러 그곳에 가는 중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작은 리어카에서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이 보였다. 골목엔 구걸을 하는 사람들이 엎드려있고 그들 곁을 지나는 게 영 맘이 불편했다. 작은 다리를 건너니 정면은 수도원으로 향하는 문이고, 양쪽으로 묘지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있다. 매표소에서 물어보니 예술가 묘역 티켓은 200 루블, 수도원은 200 루블, 나사로 묘지는 공짜란다. 티켓을 사고 예술인 묘역으로 들어갔다. 안내판에 무덤의 지도가 표시되어 있다. 내 손에는 영문으로 표기된 안내도가 들려있었지만 정작 묘비는 모두 키릴 문자라 구분이 쉽지 않았다. 마침 예술가 묘역에는 한 무리의 여행자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고맙게도 영어였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 틈에 끼어 귀동냥을 하며 따라다녔다. 도스토옙스키, 글린카, 림스키 코르샤코프, 무소르그스키, 보로딘 등이 가까운 곳에 잠들어있다.  





알렉산드로 네프스키 수도원 입구


수도원 성당




예술가 묘역 입구




도스토옙스키 묘지



  그들이 묘역을 빠져나간 후 나는 차이코프스키 묘지 앞 벤치에 앉았다. 아무도 없었다. 마치 오래된 연인을 만나러 온 듯 그의 흉상을 바라보았다. 동성을 사랑하는 이유 하나 때문에 비소를 마시고 죽어야만 했던 비운의 음악가,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카잔 성당에서 치러졌다. 그의 마지막 작품, 비창은 유서가 된 셈이다.


       

차이코프스키 묘지


  여름 궁전에 갔던 친구들과 겨울 궁전 앞에서 만났다. 우리는 헤어진 지 3년은 된 듯 달려가 허그를 했다. 




운하 투어를 할 요량으로 네프스키 대로를 걷다 보니 가장 가까운 곳이 문학 카페 앞이었다. 약 1시간 정도 보트를 타고 운하 곳곳을 돌아보는데 보트 한쪽엔 두꺼운 담요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보트는 일정 수의 사람이 승선하면 출발하는 듯했다.  오늘도 눈이 호강하고 다리가 애쓴 하루였다.


     

운하 위 다리
사진의 오른 쪽이 마린스키 극장 구관, 왼쪽이 신관 ; 운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다리에 부착해 놓은 마린스키 극장 홍보물
숙소 옆 앤틱 상점






에르미타주 박물관 신관 서점,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볼수록 기분 좋아지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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