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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Oct 16. 2016

나프노무스키와 네프스키 대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여행(10. 상트페테르부르크)










  탈린에서 러시아로 가는 기차는 하루에 단 한 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종착역인 모스크바까지는 800㎞, 16시간 30분이 걸린다. 그러므로 좌석은 거의가 쿠셋(침대칸)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6시간 30분만 가면 되니까 굳이 비싼 쿠셋을 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일반 칸은 러기지 놓을 공간이 없다. 객차 출입문과 인접한 벽면에 트렁크를 세워두고 와이어로 묶어두었다. 기차는 낡고 허름했고 의자는 딱딱하고 불편했다. 그래도 하얀 몸피를 드러낸 자작나무를 바라보며 안나 카레니나를 떠올리는데 기차가 섰다. 국경이다.


  출국심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어서 딱 봐도 러시아 삘이 느껴지는 큰 체구의 공안원들이 기차에 올랐다. 입국심사가 시작되었다. 여권을 걷어가고 티켓을 검사했다. 3년 전에는 비자를 발급받아 러시아로 입국했었다. 그러므로 그때는 입국 심사가 오래 걸리지도 않았고 까다롭지도 않았다. 비자가 없어진 후 입국 심사가 철저해진 걸 체감할 수 있었다. 한참을 지나고 팔뚝에 빼곡한 문신을 한 러시아 공안이 내 러기지를 가리키며 누구 것이냐고 물었다. 열차 승무원이 나를 지목했다. 그는 내게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명령조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가방 열어!’      

 그의 말투가 상당히 기분 나빴다. 그러나 순순히 열어 보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혔다. ‘please’ 좀 붙이면 어디 덧나나? 그런 생각은 사치다. 그들은 총을 메고 있다. 그 상황에서 덤덤했다면 거짓말일 거다. 잘못한 건 없지만 괜히 긴장이 되었다. 혹시 모르는 테러 때문에 랜덤으로 검사하는 것일 거라 짐작했다. 나는 침착하게 캐리어의 잠금장치를 풀고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 덮어놓은 흰색 방수용 덮개를 걷어 올렸다. 옷과 여행 물품을 종류별로 정리한 몇 개의 여행용 파우치가 가지런하게 나타났다. 남자는 내 소지품을 뒤적뒤적하더니 샤워 젤을 꺼내 자세히 살폈다. 그러더니 별 거 아니라는 듯 자리를 떴다. 역시 ‘땡큐’라는 말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를 포함하여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1시간 40분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나프노무스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6개의 기차역이 있다. 그 이름이 독특하다. 예를 들어 상트에서 핀란드 헬싱키로 가려면 핀란디아 역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상트에서 탈린으로 가려면 발틱 역으로 가야 하는 식이다.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오려면 레닌그라드 역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 이름이 레닌그라드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도착지 이름을 기차역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상트에 도착한 시각이 밤 11시 35분, 우리가 묵을 아파트는 상트의 중심가인 네프스키 대로 부근이다. 처음 상트에 갔을 때 택시를 못 잡아서 고생한 기억이 있으므로 이번엔 아파트 호스트에게 픽업 요청을 했다. 우리가 늦게 도착하기 때문에 아파트 열쇠를 인편에 따로 보내야 하므로 그 배송비와 픽업 비를 포함해서 3000 루블을 요구했다. 역에서 환전할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반드시 루블을 준비해서 현금으로 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비싸지만 안전하게 도착하는 게 중요하니까 그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늦은 밤이라 그런지 역에서는 환전을 할 수 없었다. 픽업하러 온 미니 밴을 타고 아파트에 도착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아파트 현관
아파트 내부


  맙소사~ , 이번엔 5층이다. 대문, 중문 2개, 세 개의 비밀 번호를 누르고 5층에 올라가서 다시 육중한 철문을 열쇠로 열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다. 열쇠를 갖고 우리를 기다리던 러시아 남자는 다른 숙소에서처럼 짐을 들어 올려주지 않았다. 약간 할아버지 같기도 했지만 건장한 체격이다. 무뚝뚝하기가 경상도 남자보다 10배는 더하다. 게다가 영어는 원투쓰리도 모른다. 문을 따는 방법만 겨우 바디 랭귀지로 익혔을 뿐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어서 3000 루블을 달라고 했다. 우리는 루블이 없다. 유로를 주면 안 되겠냐? 그가 알 턱이 없다. 필담이 시작되었다. 내일 아침 10시에 다시 오면 루블을 준비해서 주겠다는 뜻으로, 달력을 가리키며 다음 날 날짜와 시간을 써 보였다. 남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OK사인을 보였다.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 러시아답게 넓고 무게 있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보았던 럭셔리함과는 판이하게 다른 아파트였다. 30평은 될 듯 큰 방이 두 개, 거실과 주방이 독립적으로 있지만 뭔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은 분위기. 어쨌거나 새벽부터 탈린 골목골목 누비고 다녔지, 아침 먹고 또 걸었지, 기차에서 총 든 사람이 가방 열라고 해서 놀랐지, 5층까지 짐 올리느라 기운 빠졌지, 영어 못하는 할아버지 때문에 시달렸지, 갑자기 피곤이 엄습해오며 배가 고팠다. 해외 여행 중, 밤 1시의 라면은 먹어본 사람 만이 안다.


러시아 황실 자기 로모노소프 튤립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곧 네프스키 대로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길이 4.5km, 폭 30m가  넘는 쭉 뻗은 거리 좌우로 대부분의 명소들이 모여 있다.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는 86개의 강 사이로 아름다운 운하와 다리가 18~19세기의 건물들을 아우른다. 덕수궁, 비원, 창경궁들이 모여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환전을 했다. 그리고 가까운 곳부터 차례로 가보기로 했다. 3년 전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상트는 아기자기한 골목이나 낡은 벽이 있는 올드 타운 같은 것은 없다. 건축이나 도로, 운하의 규모가 러시아답게 웅장하고 큼직큼직하다. 심지어 사람도 크다.      


푸시킨 동상




  푸시킨 동상 바로 뒤에 러시아 국립 박물관이 있다. 상트에 오면 누구나 찾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엔 러시아의 작품은 없다. 러시아 예술을 느끼고 싶다면 그곳 국립 러시아 박물관에 가야 한다. 만만찮은 규모의 박물관에는 고대 러시아 예술부터 민족적인 테마를 반영한 19세기 전반의 회화와 사실주의로 접어든 19세기 후반 작품까지 전시되어 있다. 나폴레옹과 맞서 승리를 거둔 국가적 자부심이 묻어나는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국립 러시아 박물관


  



  푸시킨 동상을 등지고 섰을 때 오른쪽의 노란 건물은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이다. 마린스키 극장에 뒤지지 않을 만큼 세계 정상의 콘서트와 발레가 공연되는 곳이다. 3년 전, 상트에 왔을 때는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의 연주도, 마린스키 극장의 오페라와 콘서트도 관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 기간에는 콘서트 일정이 전무했다. 마린스키 극장에 다시 가보지 못하는 게 무척 아쉬웠다.        



미하일로프스키 극장



  러시아 국립 박물관의 왼쪽으로 걷다 보면 바로 운하가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운하를 가로막듯 눈에 확 띄는 화려한 컬러의 쿠볼(양파 모양의 돔)이 보인다. 피의 구세주 성당 (피 위에 선 교회)이다. 러시아 정교회 건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구근(球根) 즉,  양파 모양의 돔인데 그것은 대지에서 타오르는 하느님의 촛불을 상징한다고 한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성 바실리 교회를 본 따 지었다.



피의 구세주 성당

  



  피의 구세주 성당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사연은 이렇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폐지해 이천만 명을 해방시켜 '해방자 짜르(황제)'라고 불렀던 개혁 군주인데 1881년, 알렉산드르 2세가 피살당했다. 훗날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그가 피를 흘리며 죽은 장소에 성당을 지었고 그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성당의 내부는 외부 못잖게 화려하다. 벽이며 천장의 장식은 모두 모자이크 화이다. 당대 러시아 대표 작가들이 10년에 걸쳐 만든 그림의 면적을 모두 합치면 7천 제곱미터, 그러니까 2천 평이 넘는다고 한다. 색감이 무척 아름다워 구석구석 살피고 싶지만 많은 사람이 운집하여 혹시나 소매치기가 있을까 조심스러웠다.               


피의 구세주 성당












모든 그림이 모자이크화인 피의 구세주 성당




 피의 구세주 성당의 바로 옆에 미하일로프스키 정원이 있다. 표트르 대제가 네바 강과 폰탄카 운하가 만나는 곳에 만든 유럽식 정원이다. 정원을 구경하고 나가면 네바 강을 만날 수 있고 국립미술관 쪽으로도 나갈 수 있다. 여기저기 웨딩촬영을 하는 신랑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였다.     



미하일로프스키 정원
웨딩 촬영하는 신랑 신부




  네프스키대로 중앙 4거리에 아르누보 양식의 초록색 건물이 있다.  1901년 미국 재봉틀 회사 싱어가 러시아 판매 본부로 지었다는 싱어 빌딩이다. 싱어는 뉴욕 본사처럼 마천루로 짓고 싶어 했지만 상트는 예카테리나 겨울 궁전보다 높게 짓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네프스키대로에 아르누보 건축의 새 바람을 일으켰던 건축가 파벨 수조르가 건물 제한 높이를 넘어 유리 지구 상을 한껏 높이 세우는 편법을 썼다. 그 유리 탑 정면에 미국의 상징 독수리상도 크게 올려 상트 시민들의 반감을 샀다고 한다. 싱어 빌딩은 당시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 중앙난방, 에어컨, 지붕에 쌓인 눈을 자동으로 녹이는 제설 시설까지 획기적인 첨단 시스템을 자랑했다. 싱어 빌딩은 러시아 혁명 후 국유화된 뒤 정부 출판사가 되었고 지금은 국영 서점 ‘돔 크니기(책의 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싱어 빌딩





  피의 부활 성당에서 운하를 따라 네프스키 대로 쪽으로 쭉 걸어가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비슷한 네오클래식 양식의 카잔 성당이 보인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노랫소리가 들렸다. 여러 합창단이 돌아가며 성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소리만 들릴 뿐 전혀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몇 겹이나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당의 가장자리에 마련된 의자에는 머릿수건을 쓴 할머니들이 기도하듯 노래를 듣고 있었다. 마치 상트 곳곳에 서 있는 푸슈킨의 시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굳은 믿음이 얼굴 가득 느껴졌다. 까치발을 들어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양 손으로 카메라를 번쩍 들어 올려 감각으로 초점을 맞추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반복하니 성가대와 지휘자가 어지간히 윤곽이 잡힌 사진이 찍혔다. 여행자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카잔 성당은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어졌다. 반원형 회랑에는 94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늘어서 있다. 건물 내부에는 19세기 초의 거장들이 그린 이콘(icon)이 있고, 특히 카잔의 마리아 상이 유명하다. 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이 진두지휘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성당 안에는 프랑스군에게서 빼앗은 107개의 군기와 승리의 트로피 등이 걸려 있다. 우리도 잠시 바닥에 주저앉아 성가대의 노래를 들었다.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갔다.   




카잔 성당






고상한 품위가 느껴졌던 러시아 할머니

  




  네프스키 대로의 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현대적인 내부와 어울리게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피자와 스파게티를 먹은 후 커피를 주문했는데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율리어스 마이늘이 나왔다. 비엔나에 갔을 때 카페 첸트랄에서 마셨던 그 커피 잔을 보는 순간 너무 반가웠다. 숙소로 돌아가 잠시 쉬었다가 이삭 성당으로 가보기로 했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비엔나 첸트랄 카페
비엔나의 자허 카페 메뉴


  택시를 타고 이삭 성당으로 이동하던 중 빨간 신호등에 잠시 정차했을 때였다. 옆에 정차한 승용차 운전자가 막간을 이용하여 코털을 자르고 있었다. 나도 막간을 이용하여 사진을 찍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12년부터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전 1917년까지 200년간 로마노프 왕조의 수도였다. 젊은 시절, 신분을 숨긴 채 유럽 여러 나라에서 문명과 기술을 습득할 만큼 러시아의 유럽식 근대화를 갈망한 표트르 대제가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왕궁을 옮겨온 후 도시의 이름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페트로그라드, 그리고 레닌그라드에서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뀌었다.         





  공사 기간 40년, 동원된 인민 50만 명, 황금빛 돔을 만드는 데에 쓰인 금 100㎏, 늪지인 사원 바닥을 고르기 위한 말뚝만 2만 4천 개, 수용인원 1만 6천 명을 자랑하는 이 도시의 랜드마크가 성 이삭 성당이다. 두 번째 찾아왔지만 처음 그 감동처럼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이삭 성당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으로 지어질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 101m, 둥근 천장이 21m, 길이가 11m, 폭이 97m인 이 성당은 64~114톤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의 돌들로 둘러싸고 있는데 1만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내부에는 중앙에 있는 카를 브리쵸프의 작품을 비롯하여 성경의 내용과 성인들을 묘사한 예술가들의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고, 그 밖에도 수 백 점의 동상과 부조 장식. 현재에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삭 성당
공작석이라는 이름의 초록색 대리석






  이삭 성당은 프랑스 출신 궁정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이 설계하고 그의 감독 아래 1818년부터 1858년까지 무려 40년 동안 지었다. 초록색 대리석 돌기둥은 우랄 산맥에서 생산된다는 공작석인데 희귀한 만큼 성전에만 장식하였다 한다. 거대하고 화려한 샹들리에, 성당으로 들어가는 4개의 큰 문, 무게가 10톤이 넘는다는 청동 문에는 성서 속의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해 놓고 있다. 청동을 떡 주무르듯 부조로 만들어 놓은 게 인간이 신의 손을 빌린 게 아닐까 싶었다. 성당 한가운데의 돔, 12 사도상을 조각해 놓고 천정 한가운데는 홀을 만들어 그 속에 백금 비둘기(예수님의 상징)가 날아가는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백금 비둘기는 길이만 해도 3미터가 넘는다고 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유리창과 그림의 컬레버레이션인 돔 천장으로 들어오는 빛이 환상적이었다. 유색의 돌조각을 이용해 완성된 모자이크 화가 62점이나 있는데  돌조각의 배치와 색감이 뛰어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들었다.      



초콜릿 박물관
네프스키 대로의 중심인 싱어 빌딩 앞


해탈한 표정의 거리 악사



  저녁 메뉴는 카레라이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마켓에 들러 감자와 양파, 양배추와 소시지를 샀다. 오늘의 셰프는 M과 식영과 출신의 J, 두 자매이다. 눈이 즐거웠고, 귀가 즐거웠고,  맛있는 식사로 입이 즐거운 마무리까지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해 질 무렵 이삭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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