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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Oct 27. 2016

10. 파리는 로망이다

유레일 4,507Km의 끄적임 <파리 1>






  환승하기 위해 잠시 들렀던 뮬 하우스는 평범한 도시였다. 대도시는 대부분 에스컬레이터가 있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날도 둘이 캐리어를 맞잡고 낑낑대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우리 나이쯤 돼 보이는 아저씨가 러기지를 번쩍 들어 올려다 주었다. 기차에 탈 때엔 젊은 총각이 ‘도와드릴까요?’라는 말과 함께 기꺼이 올려주었다. 그들의 매너와 친절은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몸에 습득된 것처럼 자연스럽고 유연했다.


      

뮬 하우스 역



  파리 리옹역, 막 도착한 기차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아니 ‘쏟아져 나왔다’ 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거대한 캐리어 군단이 행군을 하듯 빠른 발걸음들이 이어졌다. 역사 내부는 바퀴 굴러가는 소리로 가득찼다. 금요일 오후 파리의 리옹 역에 내린 사람들은 레이스를 펼치듯 발걸음이 빨랐고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파리로 오면서 우리는 소매치기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행용 복대를 했다. 여권과 돈을 넣어 겉 옷 안쪽 허리에 차고 약간의 돈과 유레일 패스만 지갑에 넣었다.    


 

파리 리옹역



  호텔 테르미누스 리옹의 불빛이 역의 맞은편에서 빛나고 있었다. 체크인을 할 때 여권이 필요하다. 그런데 크로스 백을 열어보니 여권이 없다. 겉옷 안 쪽 허리춤의 복대에 넣어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옷을 헤치고 부시럭부시럭 여권을 꺼내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키득키득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리셉션의 아가씨도 따라 웃었다.    


  엘리베이터가 작아서 둘이 짐을 갖고 탈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크거나 럭셔리하진 않지만 두 사람이 쓰기에 부족하지 않은 검박한 방이었다. 4박 예정이니 짐을 어느 정도 풀어서 정리를 하고 마켓을 찾아 나섰다. 먹을 때마다 마치 프루스트를 떠올리는 마들렌과 감자 칩, 초코 칩 쿠키, 우유, 요구르트 등 간식과 물을 샀다.      


   파리는 숙소를 정하기 전에, 구역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파리는 일 드 프랑스 지방의 중심에 위치해있고, 일 드 프랑스 지방은 8개의 존으로 구성되어있다. 파리는 1 존,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서울 및 수도권 지역을 뜻한다. 파리는 다시 20개의 구로 나뉘는데 서울 강남구나 종로구 같은 행정구역으로 가운데부터 달팽이 껍데기처럼 나선형 모양으로 구분된다. 파리에는 ‘파리 역’이 없다. 동역, 북역, 몽파르나스역, 리옹역, 오 스타일 리츠 역, 생 라자르 역 등 6개의 기차역이 있다. 그중 내가 12구의 리옹 역 근처에 숙소로 정한 이유는 마르세이유, 니스, 디종, 몽펠리에 등 남프랑스로 가는 테제베를 탈 수 있고 파리의 명소로 이어지는 메트로가 가까이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였다.      



  파리는 로망이다. 한 번쯤 파리를 동경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오랜 세월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군림해 왔다. 센 강, 노트르담 성당, 에펠탑, 개선문, 몽마르트르 언덕,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물랭 루즈 등 파리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르고 싶어 하는 곳이다. 천재들은 이곳에서 저마다의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겼으며, 2차 대전 당시 파리를 보존하기 위해 항복을 선택했다. 그 결과 역사적인 현장이 거의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말한다.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 현장, 그 거리와 작품 등을 그의 눈과 글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파리는 예술이다. 파리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에만 무려 250개의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다.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하는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숱한 예술가들이 파리에 모여들어 영향과 자극을 주고받으며 불멸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마티스와 로댕, 드뷔시, 사르트르 등 파리에서 생활하며 영감을 받은 예술가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파리는 감각과 욕망의 도시이다. 광장에는 역사가 깃들고 골목엔 삶이 녹아있다. 새벽 6시면 어김없이 빵집이 문을 열고 사람들은 바게트를 사러 간다. 저마다 자기를 나타낼 수 있는 자기만의 옷을 입고 자기만의 향기를 갖는다. 누군가와 똑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을 수치스러워할 정도로 개성을 중시하며 톨레랑스 사상을 존중한다.      

   '문 왼쪽에 검은색 가죽점퍼 있은 흑인 남자 주의해', 얼굴에는 한껏 미소를 띠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한국말로 수상한 사람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메트로 1번을 타고 튈를리에서 내렸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오르세 미술관이다. 비가 간간히 내리는 탓에 바람이 찼다. 유럽의 겨울은 어디나 비가 잦다. 많은 양이 내리는 건 아니지만 여행자에게 불편한 건 사실이다. 겨울 아침의 튈르리 정원에는 텅 비어 있었다. 그  넓은 정원에 나무들이 없었다면 삭막함이 사막 못지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친구 M이 말했다. ‘내 신발에 문제가 생겼어’ 잠시 멈춰 살펴보니 친구의 왼쪽 워커 밑창 일부가 떨어져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제 막 호텔에서 나왔는데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그 신발을 계속 신고 걸어 다닐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문제가 없는 오른쪽 워커의 신발 끈을 풀어 왼쪽 밑창과 신발 발등을 동여매 주었다. 그렇게 신발의 응급조치를 끝내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센 강에는 37개의 다리가 있다. 소르본 대학과 연결되는 생 미셸, 거리의 화가와 음악가들이 몰려드는 보행자 전용 다리 퐁 데자르,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퐁네프, 생 미셸, 미라보 다리…. 그리고 오르세 미술관을 잇는 솔 페르노 다리에도 사랑을 맹세한 연인들의 자물쇠들이 다리 난간 빼곡하게 매달려 있었다. 최근 예술의 다리에 걸린 수십만 개의 자물쇠가 철거되었다. 이유는 다리 붕괴 위험에 따른 것이다. 전 세계의 연인들이 버킷리스트처럼 여기는 예술의 다리 자물쇠는 이제 역사의 장이 되어 버렸다.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버리는 의식만으로 사랑이 지켜진다면 그게 진정한 사랑일까? 자물쇠를 채운 연인들의 사랑은 몇 % 나 지켜졌을까?



솔 페리노 다리

  

  오르세 미술관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건축되었던 기차역과 호텔로 당시에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정도로 화려한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차 량이 길어지자 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파리는 그 오르세 역을 개조하여 미술관으로 개관하였고 오르세 미술관의 컬렉션의 첫 번째 작품은 바로 건물 자체라는 찬사를 받으며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Musee do Orsey

 


  미술관에 들어서니 정면의 대형 시계가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었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고풍스럽고 화려한 대형 시계는 오르세의 얼굴이다. 당시 오를레앙 철도회사는 오르세를 설계한 사람인 빅토르 랄루의 공을 기리기 위해 오르세의 상징인 대형 시계를 ‘빅토르 랄루’라고 명명했다. 내부 중앙의 유리창에 자리한 둥근 모양의 시계와 전시장 통로 옆에 드문드문 마련된 의자들이 그 시절 대합실 풍경을 보는 듯했다. 대리석으로 단장된 바닥에는 로댕, 브루델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조각 작품이 자리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소통하는 플랫폼, 바로 오르세 미술관의 매력이다.  중앙의 거대한 홀과 웅장한 돔 형태의 유리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 채광은 그 어느 미술관의 작품보다 아름답다. 메인 홀 좌우엔 수백 년을 지나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들이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19세기의 미술 흐름이 연대별로 정리돼 있다. 1층에는 쿠르베의 ‘오르낭에서의 매장’, 밀레의 ‘만종’ 등 사실주의 회화와 조각 컬렉션이 자리하고 있고 2층에는 상징주의, 아르누보 계열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3층에는 마네의 ‘올랭피아’, ‘풀밭 위의 식사’,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등 인상주의 화가의 명작들이 소장돼 있다. 1848년 이전의 작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루브르 박물관을 주목해야 하지만 19세기의 미술 작품에 관심이 많은 우리에겐 오르세 미술관이 최고였다.      



  2015년 1월, 우리가 오르세 미술관에 갔을 당시에는 모든 사진 촬영을 금지했었다. 그러나 2016년 1월 다시 찾은 파리의 오르세에는 변화가 있었다. 플래시를 쓰지 않는 전제하에 모든 작품의 촬영이 가능했다. 그 이유를 알아보았다. 2015년 4월, 오르세 특별전을 관람한 프랑스 장관이 자신의 트위터에 자신이 찍은 오르세의 작품 사진들을 올렸다고 한다. 특혜라는 반발이 빗발치듯 쏟아졌고 이틀 후 프랑스 정부는 오르세 미술관의 사진 촬영을 허락한다는 공고를 하게 된 것이다.


  

미술관답게 아름다운 카페 캄파나, 브라질의 유명한 디자이너 캄파나 형제의 작품이라고 한다. 금색 철 조각을 바느질하듯 이어 붙인 조명 갓이 각각 다른 길이로 천장에 매달려있다. 조각 거울을 이어 붙인 벽면 구조도 무슨 설치 미술처럼 재미있다. 한쪽엔 오르세 외벽에 부착된 오래된 시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카페를 통로처럼 지나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오르세에서 나오니 비가 그치고 마치 조명이 켜진 듯 곳곳이 반짝거렸다. 다시 솔 페르노 다리를 건너 튈르리 정원의 남쪽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했다.


튈를리 정원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티켓을 사고 라커룸으로 갔다. 우리의 배낭을 받은 후 보관 번호표를 주며 아가씨가 말했다.


'백이 아주 예쁘네요, 제 맘에 쏙 들어요. 어디서 샀어요?'

'고마워요, 서울에서 샀어요.'

'아~ 안타깝네요, 너무 멀군요.'


  우리는 기분이 으쓱했다. 파리지앵이 예쁘다고 할 정도면 우리 안목도 괜찮은 것일테니까 말이다. 오랑주리(orangerie)는 ‘오렌지 온실’이라는 뜻이다. 오랑주리는 미술관이 지어지기 전에 루브르 궁전의 오렌지 나무를 보호하는 온실이었다고 한다. 1927년에 개관한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Claude Monet)의 [수련(Water-lily)] 연작을 비롯해서, 세잔, 마티스, 모딜리아니, 모네, 피카소, 르느와르, 루소, 시슬리 등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오르세에 버금갈 정도로 속이 꽉 찬 옹골진 미술관이다.      



오랑주리 미술관



  오랑주리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작품은 역시 모네의 <수련>이다. 실제로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의 연작을 위해 지어졌다. 모네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기념해 필생의 작업으로 그려온 수련 그림 2점을 국가에 기증할 뜻을 비쳤다. 하지만 당시의 총리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클레망소가 모네의 아틀리에가 있던 지베르니를 방문한 후 더 큰 규모의 장식화를 의뢰했다. 이에 모네는 ‘작품은 시민에게 일반 공개할 것, 장식이 없는 하얀 공간을 통해 전시실로 입장할 수 있게 하고 작품은 자연광 아래에서 감상하게 할 것’의 조건을 요구했다. 요구 사항은 받아들여졌고 모네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네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건축가인 르페브르와 자주 만나서 함께 오랑주리의 전시실 구성에 대해 의논했다. 하지만 모네는 이 특별한 전시실의 개관을 보지 못하고, 개관 5개월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총 8점의 <수련> 연작(높이 2미터, 가로의 합이 1백 미터)은 오렌지를 재배하던 온실 자리에 지어진 오랑주리에 전시되었다.     




  전시실은 수련의 연작을 보다 효과적이고 사실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길쭉한 타원형으로 설계되었다. 모네의 동쪽 전시실에는 아침 햇살 아래에서 감상해야 할 네 작품이, 서쪽 전시실에는 석양 아래에서 감상해야 할 네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8개의 수련을 제대로 보려면 아침부터 석양이 내리는 시각까지 머무르던지 두 번 방문하는 게 옳다. 천장의 새하얀  막을 통해 쏟아지는 부드러운 빛을 받은 수련이 수면 위의 빛과 공기와 어우러져 멋지게 그려져 있다. 압도적인 사이즈의 그림과 빛은 그림을 본다 하기보다 수련이 있는 정원 앞에 앉아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백내장으로 인해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뿌연 안갯속 같은 시각으로 붓질을 계속해나간 모네의 그림에 대한 사랑에 존경과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지하 전시실에서는 1965년부터 유명한 미술 컬렉터인, ‘폴 기욤(Paul Guillaume)’과 쟝 바르테 르(Jean Walter)가 수집한 인상파 회화 컬렉션인 ‘바르테르 기욤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다. 모두 8개의 방에 백 여점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르누아르와 세잔, 모딜리아니와 루소, 마리 로랑생, 마티스와 피카소, 수틴과 위틀리로의 작품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들이 가슴을 방망이질 치게 했다.       

  



  오랑주리 바로 옆은 콩코르드 광장이다. 센 강 오른쪽 기슭의 샹젤리제 거리와 튈르리 정원 사이에 있는 콩코르드는 파리의 한 복판이다. 광장은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 있어 파리 시내 주요 볼거리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서쪽으로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문에 이르는 광대한 전망이 펼쳐지고, 그 반대 방향으로는 튈르리 정원과 루브르 궁전의 우아한 경관이 보인다. 북쪽으로 마들렌 교회, 남쪽으로 앵발리드 방면의 전망도 아름답다.      


콩코드 광장


  콩코드 광장에서 대 관람차 뒤로 개선문이 보였다. 뒤로 돌아서면 카루젤 개선문이다. 센 강 쪽으로는 오르세 미술관의 시계가 보인다. 국회 의사당, 알랙상드르 3세 다리를 건너면 앵발리드, 그 반대편 샹젤리제 대로로 향해 걷다 보면 왼쪽에 그랑 팔레스, 쁘띠 팔레스가 있다. 고층 빌딩이 없고 사통팔달로 툭 터진 파리는 어디든 고개만 돌리면 가고자 하는 명소의 방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카루젤 개선문
단두대가 있던 곳의 분수


  콩코르드 광장은 1755년 루이 15세의 기마상을 세운 광장이었다. 1789년 대혁명 때 기마상이 철거되고 기요틴이 설치되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곳에서 결혼했고,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이외에도 혁명군 지도자였던 당통을 포함한 1,300명의 사람들 역시 그곳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기요틴을 만든 기요틴 역시 그곳에서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분수대가 있는 자리에 단두대가 있었다고 한다.      

  1795년 공포 정치가 끝나고 광장의 명칭은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로 바뀌었다. 광장 중앙에는 1833년 이집트의 총독이 루이필리프 왕에게 선물한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 오벨리스크는 23미터의 기둥으로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집트의 람세스 2세 때 제작된 것으로 룩소르 신전에서 옮겨오는 운송 기간만 약 4년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인간의 집념과 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 오벨리스크를 운송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을까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센 강을 따라 걷다가 만난 알렉상드르 3세 다리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알려져 있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의 뒤에는 앵발리드, 앞쪽으로는 그랑 팔레스, 프티 팔레스를 연결해 준다. 이 다리는 샹젤리제나 다른 편의 앵발리드를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는 특별한 지시를 받고 만들어져서 다리의 높이는 고작 6m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리의 네 군데 코너에 세워진 네 개의 화강암 기둥 덕분에 먼 곳에서도 눈에 들어온다. 이 기둥들 꼭대기에는 각각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와 금박을 입힌 조각상이 얹혀 있다. 알렉산드르 3세는 러시아 차르의 이름으로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친교를 표현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알렉산드르 3세 다리



  멀리 바토무슈 선착장이 보였다. 우리는 센 강의 유람선 무료 티켓을 갖고 있었다. 단 그게 바토무슈 선착장에서만 탈 수 있는 것인지 그때는 몰랐다. 사흘 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에펠탑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어느 골목엔가 들어서니 갑자기 그 커다란 탑이 보이질 않았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간신히 방향을 잡았고 드디어 탑이 보이는 골목에 도착했다.        



바토무슈 선착장
센 강


  에펠탑은 센 강 서쪽 강변의 샹 드 마르스 공원 끄트머리에 있다.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 때 구스타브 에펠의 설계로 세워진 탑이다. 높이 301m, 세계 최고였다. 에펠탑을 건축할 당시에는 품위 있는 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철덩어리를 세워서는 안 된다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소설가 모파상은 에펠탑의 모습을 보기 싫어 파리 시내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에펠탑 내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완공된 후에는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고, 오늘날에는 파리의 랜드 마크로 자리 잡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 줄을 섰다. 테러 때문에 소지품 검사가 무척 삼엄했다. 고급 레스토랑 '쥘 베른'은 전망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남쪽에 있는 직통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360도로 펼쳐지는 파리 시가지의 전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샹 드 마르스 공원 너머로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와 몽파르나스 타워가, 북쪽으로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하얀 사크레 쾨르 성당이 보였다. 샤요 궁전과 라테 팡스의 신 개선문도 미니어처같이 작게 보였다. 탑의 내부에는 간단한 음료와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있었다. 다리가 아픈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간식을 먹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좋았다.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과 에펠탑은 공통점이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 독립 100년을 기념하여 1886년 프랑스에서 기증한 것이고, 에펠탑은 프랑스혁명 100주년에 맞춰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과 에펠탑은 미국과 프랑스의 랜드마크로, 세계 관광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나라의 대표 건축물로 사랑받고 있다.      



  에펠탑에서 내려오니 다리가 아팠다. 센 강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아니 닿을 듯 가까워 보이는 에펠탑을 좇아서 얼마나 걸었는지 그제야 반응이 나타나는 듯했다. 메트로를 타고 노트르담 성당으로 향했다.     


 



  파리에는 센 강의 중심에 두 개의 작은 섬이 있다. 시테 섬과 생 루이 섬이다. 시테 섬 끝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성모 마리아’란 뜻의 이 성당은 1163년부터 20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파리 인근에서 채취한 대리석으로 만든 거대한 사각의 쌍 탑과 첨탑이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12세기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은 어느 쪽에서 보아도 감탄을 자아낸다. 나는 센 강의 왼쪽 기슭에서 보는 남쪽과 뒤쪽의 모양을 가장 좋아한다.

 

노트르담 성당 후면



   수난의 시대를 거친 노트르담 대성당은 나폴레옹 1세가 미사를 부활시키고 자신의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그 명색을 되찾았다. 그 후 빅토르 위고의 명저 <노트르담 드 파리> 등의 영향으로 재인식되어, 19세기에 대규모 복원이 실시되었고 약 800년 동안의 얼룩진 역사를 씻어 내는 대대적인 개장 공사를 통해 건설 당시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대성당 내부는 3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되어있다. 색색의 유리를 통과하는 빛의 색깔이 아름다워서 '장미 창'이라고 불린다. 가장 오래된 것이 서쪽의 장미 창으로 1210년경에 제작된 것이다. 남쪽과 북쪽의 장미 창은 지름이 13m나 되어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안쪽 입구에 있는 우아한 성모자 상은 14세기 작품으로, 그 이름도 <노트르담 드 파리(파리의 성모 마리아)>라고 불린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나와 메트로 정류장을 찾아가고 있었다. 규모가 아주 크고 우아한 르네상스 건물 앞 광장에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도심 한 복판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시민들을 보며 역시 파리는 다르구나 생각했다. 비누 방울 놀이를 하는 천진한 아이들, 연인 또는 가족끼리 스케이트를 지치고 있는 사람들의 여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 건물이 뭐냐고 물어보니 오뗄 드 빌(Hotel de Ville)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말을 ‘빌 호텔’ 그러니까 호텔이라고 생각했다.      


‘무척 크고 오래된 호텔 같은데 스케이트장 때문에 시끄럽겠어’

‘그러게, 위치도 좋고 4성급은 넘을 것 같아.’     


  그때는 몰랐다. 오뗄 드 빌(Hotel de Ville)이 프랑스어로 시청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그곳은 파리 시청이었다. 1260년에 루이 9세가 파리 시민들에게 시장 선출권을 부여한 것을 계기로 건립했다고 한다. 그 먼 옛날에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시장을 뽑을 수 있는 권리를 줬다는 것이 멋지고 흥미로웠다.     



Hotel de Ville 파리 시청
파리 지하철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훌륭하게 임무를 다한 워커는 호텔로 돌아와 사망했다. 친구와 나는 워커의 장례식을 치렀다. 워커는 그렇게 파리에 묻혔다.  




파리 시청 건물을 배경으로 한 시청 앞 광장의 키스(로베르 두아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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