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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Oct 24. 2016

9. 콜마르, 콜롱바주(Colombages)

유레일 4,507Km의 끄적임 <콜마르>




  여행은 계절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끝난 것 같지만 다시 시작되고 다시 돌아옴이 그렇다. 굳이 어디가 예쁜 가를 찾을 필요가 없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한숨이 나오게 예쁜 컬러와 무늬, 집의 모양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그런 마을이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최고의 카메라도 우리의 눈으로 보는 그 이상을 담아낼 수는 없다. 오감이 주는 기쁨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래도 으뜸은 보는 즐거움이 아닐까 싶었다.      



쇼드롱(손잡이가 달린 솥 이라는 뜻) 레스토랑



  콜마르는 스트라스부르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다. 콜마르 역시 잦은 외침을 받았고 2차 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프랑스령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곳이다. 기차를 기다리는 플랫폼 내의 작은 대합실이 60년 대 영화를 보는 듯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한 계단 옆에는 수 십 년 전에 만들어졌을 법한 오래된 타일 그림이 소박해서 더 정감이 갔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역사 또한  단아했다.      



콜마르 역
콜마르 역 플랫폼의 낡은 대합실




 나 어릴 때 집 근처에 벽돌 공장이 있었다. 학교에 갈 때면 머릿수건을 두르고 팔에 토시를 낀 아주머니들이 방금 찍어낸 벽돌을 나무판 위에 하나씩 올려놓는 게 보였다. 집으로 돌아가다 보면 허여스름하게 마른 벽돌들을 차곡차곡 줄 맞춰 쌓아 올려져 있었다. 직육면체의 회색 벽돌은 마치 연탄 공장의 연탄처럼 찍어져 나왔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던 벽돌은 아름다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물건이었다. 공장에서 찍어낸 네모진 회색 시멘트, 그게 내가 가진 벽돌에 대한 정의였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세상엔 너무나 아름다운 벽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자와 질감이 각기 다른 붉은 벽돌이나 재색을 품고 있는 검은 벽돌, 분홍과 녹색이 다정하게 깍지를 끼고 서있는 피렌체 두오모의 대리석, 모양과 크기가 모두 다른 포석들은 획일적인 모양과 크기의 보도블록과는 비교 불가한 멋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나무가 좋고 바람이 좋고 하늘, 꽃, 비를 좋아하던 내가 그만 돌의 예찬론자가 되어버렸다.      




  쌩 마르탱 성당은 100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증축되거나 복원되었다. 다양한 건축 양식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성당 본체를 지탱하고 서있는 벽돌의 색이었다. 각각의 시차를 두고 메꾸어졌을 벽돌 색깔이 세월의 아픔과 질곡을 이겨낸 주름이 아니라 순하게 견뎌낸 편안함처럼 느껴졌다. 돌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선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많은 선택 앞에서 흔들리곤 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순하게 견뎌내면 한낱 벽돌에 지나지 않은데 저렇게 현자처럼 편한 표정이 되는구나 싶었다.        



쌩 마르탱 성당(보수로 인해 군데군데 벽돌의 색깔이 다르다)


  이파리 하나 없이 빈 나뭇가지들이 빼곡하다. 실 같은 가는 줄기 사이로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넓은 공원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지나고, 꽃 집 앞에 서 있는 노부부를 지나, 연극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는 극장을 지나는 동안 20 여분쯤 되었을까? 생김새대로 자연스레 맞춰진 불규칙한 집들이 보였다.     


      

꼴마르의 공연장

 


  길거나 짧은, 또는 굵거나 가는 나무 기둥이나 대들보들이 뼈처럼 드러난 틈새로 가공하지 않은 벽돌이나 짚을 섞은 벽토나 회반죽 같은 가벼운 재료로 메운 집들이다. 꾸불꾸불한 중세 도시의 골목으로 긴 목재를 들여오기도 힘들었고 나무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쉽게 썩었기 때문에 짧은 나무를 이용해 집을 지은듯했다. 외세의 침략이 잦다 보니 비상식량을 저장하는 창고가 필요했을 터, 지붕 아래에 다락방을 만들고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창을 많이 내는 지혜가 돋보였다.      






  도끼날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나무 기둥에서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을 받은 이유는 문과 창의 컬러와 유리창 앞에 놓인 소박한 소품들 때문이다. 결코 값 비싸거나 화려한 장식품이 아니므로 더 정겹고 따뜻하다. 집의 안쪽에선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우리들 취향인 색깔에 감탄이 이어져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예쁜 집이 꽃과 그림까지 품고 있으니 이를 어쩌랴.      


  살구 색 벽에 청회색 갤러리 나무 덧창, 연두색 벽에 노란 격자무늬 창, 노란 벽에 하얀 창문, 붉은 벽에 하얀 창, 딸기 초코, 민트 초코, 피스타치오, 레몬, 바닐라 등 세상의 어떤 어둠이나 슬픔도 닿지 않을 것 같은 색들이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고요한 평화만 자라는 곳이 그곳일 것만 같았다. 비늘처럼 지붕을 덮고 있는 자잘한 기와의 크기와 빛깔도 모두 다르다. 거칠거나 투박해진 나무 창틀에 놓인 작은 초 몇 개, 초록색 병에 담긴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식초병이 나란히 놓인 주방 창턱, 낡은 꽃 리스를 걸어놓은 문, 화려함과 고급스러움 없이 열심히 가꾸고 다듬은 흔적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콜롱바주(Maisons à Colombages, 목골 가옥)



  우리는 예쁜 집들 사이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곳에서 한 달간 살아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슈베르트나 바흐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오믈렛을 만들고, 에맨탈 치즈를 넣은 샐러드와 거칠게 마감한 집의 벽체를 닮은 곡물 빵과 향이 구수한 커피와 함께 향기로운 아침을 만들 것이다.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평화가 우리 곁에 머물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더 즐거운 시간이 지나갔다.       





  스트라스부르에는 쁘띠 프랑스가 있고 콜마르에는 쁘띠 베니스가 있다. 여름엔 작은 운하로  작은 보트가 여행자들을 태우고 투어를 하는데 겨울이라 운영하지 않았다. 어둠이 운하를 감싸며 내려오고 집들은 다투어 작은 불빛들을 꽃처럼 피워냈다. 백조는 어느새 밤을 타고 물길 사이로 사라져 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그 애니메이션은 실제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아름답지 않다. 그림으로, 사진으로, 영화로 오롯 느낄 수 있다면 왜 먼 길, 굳이 찾아올까?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있는 것도 아니요, 유명한 사람의 생가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짚을 넣어 회반죽을 치대어 만든 오래된 벽에 나무 대들보가 장난처럼 박혀있는 집 들일뿐인데 사람들은 환호하고 즐거워한다. 소박한 아름다움은 그 누구에게도 거부감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콜마주의 쁘띠 베니스


  경쟁하듯 흐드러지게 형형색색 피어있는 꽃도 없고, 낮이 짧아 발걸음이 바쁘지만 겨울 여행이 좋은 이유가 있다. 한적함과 고적함이다. 어딜 가나 여행자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여름의 왁자지껄함이 없어 좋다.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흐린 겨울 한 낮, 문을 닫은 레스토랑도 많다. 빵집이나 패스트푸드에 가서 버거를 먹으면 된다. 갓 구운 빵과 과일과 채소를 담은 바구니를 든 동네 아주머니가 미소 띤 얼굴로 눈인사에, 나도 고개를 끄떡한다. 옆집에 사는 사람 같은 친근한 아늑함이 전해진다. 이방인에게 보내는 소리 없는 미소의 눈인사가 얼마나 따뜻한 지 받아본 사람은 안다.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콜마르 역으로 갔다. 유럽은 남녀 구분 없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 간간히 있다. 그곳도 그랬다. 세 칸 화장실이 모두 사용 중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포기하고 대합실 의자에 앉는 순간 보았다. 한 칸의 화장실에서 남녀 한 쌍이 나오는 것을, 그리고 이어서 그 옆 칸에서도 남녀 한 쌍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다. 틴에이저로 보이는 그들은 그렇게 역사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화장실이 비었지만 들어가는 걸 포기했다. 역에서 파는 오가닉 과일을 몇 개 구입하여 기차를 탔다. 이미 깊은 어둠 속에 기차는 달려갔다. 내일은 기차를 타고 뮬 하우스에서 테제베로 환승하여 파리로 간다. 12년 만의 파리는 어떤 색으로 다가올까? 작은 흥분이 밀려왔다.      



역내에서 유기농 농산물을 파는 아주머니
프랑스 알자스 지방을 오가는 기차




조식이 근사했던 스트라스부르, 베스트웨스턴 모노폴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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