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이름 스칸디나비아 (7. 코펜하겐)
비행기 창으로 볕뉘가 수줍게 비집고 들어옵니다.
고도가 낮아지고 있어요.
마치 자동차가 계단을 내려가듯 툭툭~
구름층을 내려갑니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지만 햇살의 온기는 같아요.
제가 선호하는 호텔의 위치는 중앙역 근처입니다.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죠.
즉, 공항이나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편리하고, 중앙역 가까이에 올드 타운이 많은 이유입니다.
그런데 코펜하겐 중앙역 부근은 무척 비쌌어요.
상대적으로 공항 옆 힐튼 호텔이 여러 가지로 매력적이더군요.
어차피 코펜하겐을 떠날 때도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그것도 좋겠다 싶었지요.
그래서 결정한 힐튼은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우선 공항 내부에서 호텔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어 아주 편했어요.
게다가 호텔 로비에는 항공 이착륙 스케줄과 기차가 들고 나는 시각을 알려주는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어요.
호텔 로비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나가면 되는 거죠.
베르겐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왔기 때문에 아직 이른 아침이에요
호텔에 러기지를 맡긴 후 시내로 갔습니다.
지상으로 올라가자마자 맥도널드가 보여요.
아침을 먹으러 들어갔죠.
우리보다 몇 배나 비싼 버거 세트라 그런지,
아니면 살짝 긴장한 공항 노숙에서 에너지가 모두 빠져나갔는지 아주 맛있었습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벼룩시장이 열렸어요.
벼룩시장의 쥔장은 대부분 노인이 많아요.
삶을 정리하는 의미일까요?
그런데 낡은 물건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 역시 연세 지긋하신 분들인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너무 낡아서 저걸 신을 수 있을까 싶은 신발들이 무슨 설치 미술인 양, 벽에 붙여 놓았어요.
옅은 보라색의 면 티에 하얀 천을 벨트 삼아 허리를 둘둘 감고 회색 꽃무늬의 검정 스커트를 입은 할머니가 눈에 띈 건 인도코끼리 수가 놓인 빨간 모자 때문이었어요.
언뜻 보면 보헤미안 같지만 시크한 멋을 한껏 풍기더군요.
초록과 카키가 섞인 스웨이드 페도라가 보였어요.
저는 페도라를 무척 좋아합니다.
이미 여러 개를 갖고 있지만 또 욕심이 나더군요.
‘메이드 인 이태리’라는 라벨이 붙어있는데 조금 낡아서 앤티크 한 것이 맘에 들었어요.
쥔 할아버지는 이탈리아 명품이라며 새 것이면 무척 비싼 물건이라고 연신 자랑을 늘어놓으십니다.
어찌어찌 값을 깎았죠. 당장 머리에 썼어요.
‘네 모자 멋져’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남자가 엄지를 척! 하고 올리며 외치더군요.
‘감사해요!’
스칸디나비아에서 제일 크고 활기찬 도시인 코펜하겐은 덴마크 본토와 스웨덴 사이의 셸란이라는 이름의 섬입니다.
셸란은 덴마크에서 가장 큰 섬이니까 말하자면 서울이 제주도에 있는 격이에요.
인구는 대전과 비슷하죠.
궁전, 공원, 정원, 분수, 광장 등이 시 전체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뉘 하운으로 갔어요.
항구 양쪽으로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허리를 맞대고 이어져 있어요.
포스터컬러 물감으로 테두리를 정성껏 칠한 듯 선명했어요.
운하에는 색과 모양과 크기가 다른 요트들이 자연스레 정박해 있고요.
물이 있는 풍경은 늘 부드럽기 마련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항구 도시는 어디든 예뻐요.
그리고 모두 다른 게 신기하죠.
아마도 집의 모양과 컬러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뉘 하운에 있는 집들은 모두 한결같이 세모 지붕을 갖고 있어요.
그 뾰족 지붕에 작은 창문이 있는 건 필시 다락방일 겁니다.
영화 <대니쉬 걸>에서 뉘 하운 항구가 나오는 장면이 있어요.
얼마나 반갑던지요.
뉘 하운은 '새로운 항구'라는 뜻으로 코펜하겐의 관문 역할을 한 곳입니다.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선원들이 먹고 마시며 회포를 풀던 서민적인 선술집이 붐볐던 곳답게 여전히 카페와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더군요.
뉘 하운에는 세계적인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거주한 집들이 있다고 해요.
가난한 안데르센은 그 동네에 사는 동안 집세를 못 내서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답니다.
뉘하운의 벤치에 앉았어요.
여행자, 산책 나온 부부, 어린 자녀를 데리고 나온 엄마, 캠핑 온 주니어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넘쳐났어요.
구경 중에 최고는 단연 사람 구경입니다.
사람들의 패션 품평회를 펼쳤지요.
누구든 우리 포커스에 들어오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배꼽 빠지게 웃는 거죠.
남들은 그게 뭐가 우습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냥 그러고 노는 게 놓아요.
얼마나 웃었는지 허기가 지더군요.
예쁘고 늘씬한 아가씨의 청춘에 감탄하고
인형처럼 귀여운 아기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노부부의 정겨운 걸음걸이에서 따뜻함을 느끼며
한가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웃고 떠들다 보니 호텔 체크인 시각이 다 되었네요.
일단 씻고 좀 쉬다가 컨디션이 괜찮으면 저녁에 다시 움직이기로 하고 힐튼으로 갔어요.
혹시나 비행기 소음이 들리지 않을까 살짝 염려했는데 방음이 완벽해요.
룸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도 근사해요.
왼쪽으로 바다가 있고 그 옆은 도로, 도로의 옆은 철로,
그러니까 바닷길, 찻길, 기찻길이 나란한 흔치 않은 풍경이었죠.
그 오른쪽은 공항 주차장으로 마치 공장에서 출시된 자동차들을 세워 놓은 것 같아요.
크루즈와 비행기의 이착륙이 호텔 유리창으로 훤히 내다보였지요.
새로운 도시에서의 여행이 시작되는 시점인 호텔은, 분위기나 위치도 중요합니다.
막힘없이 툭 터진 시야가 아주 만족했어요.
비행기가 오르내리는 걸 바라보다 잠이 들었어요.
얼마나 잤는지 모릅니다.
눈을 떴을 때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열심히 붓질을 하더군요.
몸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졌어요.
아무리 많이 걸어도 자고 나면 거뜬한 걸 보면 아마도 몸은 기분이 지배하는 것 같아요.
오늘이 며칠이지?
여행을 하면 요일은 물론 날짜도 잊어버려요.
여행의 매력은 삶의 여러 가지를 툭! 끊고,
오직 나를 위해 지낼 수 있는 시간,
오롯이 내가 원하는 대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시간으로 들어감,
틀에서 벗어나 무한대로 틈을 늘일 수 있는 자유,
바로 그것입니다.
폴 발레리가 말했어요.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에 생겨나는 틈이다.’
8월이네요.
저녁도 먹을 겸 다시 시가지로 나갑니다.
어둑어둑해요.
다리 위 벤치에는 밤마실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아요.
쇼윈도엔 맑고 고운 조명과 침구들과 멋진 스칸디나비아 풍 가구들이 발길을 멈추게 만듭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냥, 걷습니다.
노랫소리가 들려요.
작은 광장에서 작은 콘서트가 열리고 있더군요.
맥주를 마시며 자연스레 앉거나 선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있어요.
그들의 자연스러운 여유가 멋져요.
우리의 목적 없는 저녁 산책 역시 여유지요.
여행은 도착보다 과정이 더 의미가 있으니까요.
다음날, 이른 아침 뉘하운을 다시 찾아갔어요.
청소를 하는 카페의 종업원들의 손길만 분주할 뿐 고적한 풍경이 고요를 타고 놀아요.
보트를 타고 운하를 돌며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어요.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거라는 마르셸 프루스트의 말을 떠올리며 강 같은 바다를 타고 가요.
네 마리의 용꼬리들이 서로 꼬이며 틀어 올린 모양의 첨탑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증권 거래소입니다.
초록색 지붕과 붉은 벽돌 벽의 장식이 독특하고 아름다웠어요.
임금님이 쓰던 모자 익선관을 연상시키는 건물이 당당하게 서있어요.
덴마크 오페라 하우스에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한 사람의 작품입니다.
오페라 하우스들은 아름다운 소리를 품고 사는 터라 외관에서부터 고매한 품격이 느껴지곤 하죠.
그런데 오페라 하우스보다 더 독특하고 화려한 건물이 눈길을 잡아끌어요.
북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왕립 도서관입니다.
1999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해 증개축한 왕립도서관의 별관, 블랙 다이아몬드에는 책방을 물론이요,
카페와 공연 시설이 되어있다는데 들어가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도서관이니 오죽하겠어요?
음악뿐 아니라 그림, 사람, 이야기, 온갖 시간의 틀에 저장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릇장 같은 거죠.
검은 유리에 반사된 물과 빛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였습니다.
그 순간의 사진은 기록이라는 의미보다 찍고 싶어서 찍었다는 게 맞을 거예요.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보면 맘에 드는 건 늘 사람이었어요.
편안하고 깨끗하고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미소를 가진 사람,
아이든, 걸인이든, 노인이든 관계없이요.
사실 사람 없는 도서관, 오페라 하우스가 무슨 의미겠어요.
사람이 주인공이고 사람만큼 예쁜 꽃은 없지요.
돛을 감아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는 그 줄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정박 중인 보트는 모두 돛을 내리고 쉼의 시간을 즐기고 있어요.
항해할 때는 늘 돛에 가려졌던 줄들이 뼈를 드러내고 일광욕을 하네요.
연필화처럼 매력적이에요.
주택들이 몰려있는 좁은 수로로 들어서니 개인용 작은 보트들이 가지런히 정박되어 있어요.
소득이 높은 나라이니 가정용 요트들을 많이들 즐기나봐요.
테이블에 나와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모처럼 찾아온 친구와 맥주를 나누는 젊은이들,
손을 흔들어 반가움을 전하는 아저씨,
카약을 타는 사람들,
선글라스를 낀 여자 아이가 작은 보트에서 뭔가를 정리하는 모습이 보여요.
마치 자기 방을 치우듯이 능숙해요.
그러니 성인이 되어서도 자연스레 그런 생활 패턴으로 살아가게 되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 몰려있어요.
뭔가에 집중하며 사진을 찍네요.
그 물체가 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단박에 짐작할 수 있었죠.
바로 인어공주가 놓여있는 바위였어요.
어차피 인어공주를 만나러 갈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배를 타고 지나다 보니 정말 작고 볼품이 없어요.
일부러 찾아가서 봤다면 참 허무했겠다 싶었어요.
아마도 그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말하자면 인어공주가 무척 예뻐서 라든가 하는 것이 아닌 기념으로 찍겠지만요.
보트에서 우리가 앉은자리 앞 쪽에 40대로 보이는 부부가 탔어요.
여인은 히잡을 썼는데 얌전하고 차분했어요.
문제는 그 남편이었죠.
시종 배에서 일어나 셀카 봉에 달린 카메라를 360도 회전하며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거나 와이프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기 좀 바라봐 허니! ’ 아니면 '아나~ 아나~’ 이름을 부르며 연신 찍어댔죠.
그의 말소리 때문에 설명이 잘 안 들리기도 했어요.
우리가 사진을 찍으려 하면 그도 가차 없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내 카메라의 뷰파인더에는 그의 셀카 봉 기둥이나 그의 머리 꼭대기가 뷰 파인더에 초승달처럼 들어오는 거예요.
그이로 인해 우리를 포함해서 보트 투어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산만했을 것을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이에게 언짢은 표현을 하지 않았지요.
매너가 뭔지 아니까요.
크리스티안 보르 궁전의 첨탑은 세 개의 왕관 모양이 3단 케이크처럼 올려 있습니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을 뜻한다고 해요.
제일 큰 것이 아래에 있고 위에 있는 게 작은데 어떤 게 가장 힘 있는 나라를 의미하는 걸까 궁금했어요.
덴마크 왕립극장 앞에 루드비히 홀베르그라는 이름이 새겨진 동상이 있어요.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태어난 작가라고 합니다.
코펜하겐에서 오래도록 교수로 재직하며 명성을 떨친 작가라 동상이 세워졌나 봅니다.
마가신 뒤 노르는 코펜하겐의 대표적인 백화점인데요.
마가신이란 잡다한 것을 넣어두는 의미, 즉 잡지를 뜻하는 magazine과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시청광장에는 역시 사람이 많군요.
중앙역이 인접해있고 티볼리 공원, 스트뢰에 거리가 만나는 지역이라 더 그런 듯해요.
광장 옆엔 궁전 같은 고풍스러운 건물이 있어요.
스칸딕 팔레스 호텔입니다.
호텔이라는 글씨가 없었다면 그 이름마따나 스칸딕 궁전인 줄 알았을 거예요.
시청은 붉은 벽돌의 중세풍 건물로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정면 중앙에는 코펜하겐의 창설자 압살론 주교 상이 있어요.
그 아래 발코니가 있는데 매년 1월 1일, 덴마크 여왕이 그곳에서 신년인사를 한다는군요.
청사 내부에는 독특한 문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코펜하겐 시청 안에는 100년에 1천 분의 1초밖에 오차가 생기지 않는다는 옌슨 올센의 천문시계가 있어요.
도저히 해독 불가한 숫자들이 유리판에 낙서처럼 써져있는데 제 눈엔 그게 무슨 기호나 암호처럼 보였답니다.
그 숫자들은 시계를 제작하기 위한 계산의 일부로 실제 시계의 제작은 1943년부터 1955년까지,
그런데 시계의 설계와 초기 제작을 맡았던 옌슨 올센은 안타깝게도 시계가 완성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100년 동안 1/1000초의 오차도 없다면 컴퓨터 아닌가요?
시간이란 것이, 예나 지금이나 우주를 관통하는 기준인 만큼 가치를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시계에 대한 연구가 지속된 게 아닐까 합니다.
시청광장에는 청동과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용의 분수가 있습니다.
왠지 용은 중국을 연상시키는데 유독 그곳 코펜하겐에는 용의 꼬리 형상을 한 첨탑이나 분수가 있어 좀 특이하다 싶었어요.
<미운 오리 새끼>, <벌거숭이 임금님>, <인어공주>, 등 동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안데르센 동상이 티볼리 공원을 바라보며 않아 있습니다.
티볼리 공원 옆에 있는 리치 빌딩의 꼭대기에는 날씨를 알려주는 것으로 유명한 소녀상이 있는데요.
황금색의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면 맑은 날씨를, 강아지와 함께 우산을 쓰고 나타나면 비를 예보한다고 하니 확률은 50%네요.
코펜하겐에는 중심가에 명동처럼 보행자 거리인 스트뢰에가 있어요.
세계에서 가장 긴 보행자 전용 상점거리라고 하더군요.
스트뢰에는 덴마크어로 ‘걷는다’라는 뜻이라고 하니 그보다 더 적절할 수가 없겠죠?
사람들이 운집하는 곳이다 보니 명품 샵, 카페와 기념품 샵이 많아요.
레고 샵도 있네요.
저도 한 때 그 앙증스러운 블록놀이를 즐겼거든요.
코펜하겐을 대표하는 빵집 라그카게후세트도 그 거리에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요즘은 어느 도시든 다 있는 마네킹 사람, 버스커, 노숙자가 코펜하겐이라고 없을 리가 없죠.
아마게토르 광장에는 황새 분수가 있는데요. 제 눈엔 SoSo~~
은세공으로 유명한 게오르그 젠센과 도자기의 명품 로열 코펜하겐 매장을 지나갑니다.
나이가 들면서 예쁜 그릇과 접시, 커피 잔에 눈이 가요.
품격 있는 식기에 어울릴법한 음식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모셔둘 게 뻔 하지만 그래도 보기 좋은 떡이에요.
왕가의 그릇에 눈이 호강합니다.
미술관과 왕궁은 다음 날 가기로 했죠.
이제 메트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려고 해요.
스트뢰에 거리를 벗어나 한적한 길에 접어들었어요.
그런데 방향 감각도 잃고 메트로를 가리키는 빨간색 M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도를 들여다보며 두리번거리는데 한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어요.
실례한다며 길을 물었죠.
그는 흔쾌히 방향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리고 덧붙여 말했죠.
이곳은 마약거래가 종종 이루어지는 위험한 지역이다.
지금 이 지역을 조사하러 다니는 중이다. 하면서 무슨 신분증을 내밀며 자기의 신분을 확인시켜주었죠.
미국 범죄 수사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장면하고 똑같아요.
그러더니 현금이 들어있는 지갑을 보자는 거예요.
유로나 달러, 모두 다 보여 달라고 했죠.
그 순간 또 한 남자가 우리 곁으로 와서 그 역시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는 겁니다.
‘마약이라니? 이 양반들이 무슨 소리를 하시나? 우리를 뭐로 보는 거야?’
‘우리는 단지 여행자일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자기들도 안다면서 이건 간단한 절차일 뿐이라는 것이에요.
거리낄 것 없는 우리는 당당하게 백에서 지갑을 꺼내 건넸습니다.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니지 않던 터라 소액의 덴마크 크로네와 유로, 그리고 100달러 지폐가 들어있었지요.
두 사람은 친구와 내 지갑을 두루두루 살피고는 바로 건네며 말했지요.
이곳은 위험한 지역이니 속히 떠나라고요.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자마자,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우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해요.
서두르는 듯한 기색,
그들은 분명 모퉁이에서 걸어왔는데 느닷없이 차를 타고 떠났다는 것,
불현듯 미심쩍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스쳤습니다.
‘자동차가 원래 저기 있었어? 나는 기억에 없는데….’
내가 물었습니다.
친구는 ‘글쎄~ ’ 했어요.
뭔가 나쁜 기운이 뒤통수에서 스멀거리듯, 무엇에 홀린 듯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요.
‘저 사람들 이상하지 않아? 지갑에 돈이 그대로 있는지 다시 잘 살펴보자. 뭐가 없어진 게 없는지~’
우리는 그들이 돌려준 지갑을 각자 꺼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법이죠.
유로든 달러든 고액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몇 장 안 되는 소액 지폐만이 들어있었어요.
분명 그들의 우리의 지갑 안을 살필 때, 우리 눈도 그들과 같은 위치에 있었는데 말이죠.
그걸 보고 바로 눈 뜨고 코 베였다고 하는 건가 봅니다.
갑자기 무섭고 떨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곧 위로라는 이름의 요건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 돈을 잃어버린 게 차라리 다행이다.
- 자동차까지 타고 여럿이 다니는데 잘못했다간 납치당했을 수도 있다.
- 칼이라도 들이댔더라면 어쩔 뻔했느냐?
- 카메라는 안 뺐겼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 우리에게 보여준 건 주민등록증 같은 신분증일수도 있을 것이다.
- 우리가 덴마크 글씨를 무슨 수로 알겠냐? 그걸 노린 것일 것이다.
- 작달막한 키, 눈썹이 짙고 독특한 억양이 이탈리안 같다.
우리는 셜록 홈즈풍 추측으로 나름대로의 시나리오를 작성했습니다.
어쨌거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면서도, 두 눈 멀쩡히 뜨고 도둑질당한 것이 분하고 원통했지요.
왔던 길을 되짚어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그들의 인상착의와 옷차림, 말투 등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폴리스 리포트를 받을 수 있었어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여행자 보험을 청구할 요량이었지요.
그날 저녁, 우리는 무기로 위협을 당하지 않은 것과 납치당하지 않은 것을 축하하는 건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국적불명의 욕을 지어내며 그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