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이름 스칸디나비아 (9. 코펜하겐, 훔레백)
슬픔도 아름다움의 한 갈래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워서 슬프다는 말도 이해될까요?
아름다워서 슬픔을 느꼈던 곳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안다’라는 게 뭘까요?
다분히 주관적인 명제이기 때문에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위치한 미술관,
그 외의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곳에 갔습니다.
어제 헬싱게르갈 때 탔던 기차를 타고 흄레백 역에서 내렸어요.
소도시라고도 할 수 없는 그냥 작은 마을,
기차역은 오래된 건물답게 붉은 벽돌에 하얀 아치형 창문을 갖고 있어요.
싱싱한 초록의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오르고 빨간 우체통이 문 앞에 있네요.
공공건물 같은 집과 주차된 자동차 몇 대, 그리고 나이 든 나무들, 동네가 참 소박하고 조용해요.
잔디는 방금 이발소에 다녀온 소년처럼 언제 어디서든 말끔한 자태를 뽐내곤 합니다.
유일하게 눈에 띈 상점이 꽃집,
동네 풍경이 짐작되시죠?
먹거리보다 꽃이 더 중요한 사람들,
꽃과 나무를 좋아하고 예쁜 집 가꾸는 걸 일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해석했어요.
빛과 바람이 적절히 버무려진 호젓한 길을 걸어갑니다.
가정집이 대부분 삼각 지붕들이에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나 보다 생각했어요.
어떤 집은 분홍 장미가 흰 벽을 배경으로 피어있고,
또 다른 집은 청보라 수국을 진회색 벽 앞에 두었는데 무척 시크해 보였어요.
나이테로 보아 족히 30~40년은 되어 보이는 나무 둥치들이 동강 난 채 마당에 부려져 있습니다.
겨울이 오면 벽난로 속에서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전하며 제 몸을 태우겠지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 쪽은>과 함께 어릴 때 읽었던 쉘 실버스타인의 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생각납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 책이 주는 울림과 공감이 무척 대단했거든요.
다크 초콜릿색의 짚단을 켜켜이 올려놓은 독특한 지붕이 보였어요.
무슨 곰 털 같기도 한데 분명 식물성 줄기더군요.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루이지애나를 알리는 포스터 패널이 길가에 서 있네요.
Emil Nolde라는 화가의 특별전 중인지 그의 이름과 그림 한 점이 인쇄되어 있어요.
검어 보일 정도로 진한 청색의 철문 옆에 조그만 간판이 보입니다.
요일별 관람 시간이 쓰여 있는 걸 보니 제대로 왔나 봅니다.
그런데 이건 미술관이 아니에요.
그냥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주택의 모습이에요.
마당이라고 할 것도 없는 소박한 크기,
무슨 웅장한 건축물이나 화려한 구조물을 상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의외이긴 했지요.
말하자면 우리네 대문 격인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왼쪽에 청동 조각 작품이 보였어요.
한눈에 헨리 무어 작품인 걸 알 수 있었지요.
메인 엔터런스라는 글씨와 티켓 화살표가 그려진 정면 건물을 보니 맞나 봅니다.
주 건물 좌우로 작은 창고 같은 집은 온통 담쟁이를 휘감고 있더군요.
11시 오픈,
아직 시간이 안 됐어요.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죠.
드문드문 주택이 있고 바다가 보입니다.
한 두 사람이 수영을 하네요.
벤치에서 잠든 사람들을 발견했어요.
차림새로 보아 동네 주민 같아 보이지는 않아요.
아주 세상 편한 모습입니다.
20 여 분 후, 미술관으로 가니 그새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시골 마을 한쪽에 있는 작고 평범한 집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그 속에 숨어있는 마법 같은 풍경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충격의 행복은 더 크기 마련이었지요.
제일 먼저 도록과 미술 서적, 기념품들을 판매하는 중앙 숍이 보입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디자인과 세련된 색상의 기념품들이 맘에 쏙 들더군요.
가방이나 외투를 맡겨두는 라커룸도 있지만 겉옷도 큰 백도 없으므로 곧장 들어갔어요.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작가 에밀 놀데에 대한 프로필이 그의 사진과 함께 전시되고 있습니다.
양 쪽이 통유리로 만들어진 복도를 지나가요.
천장은 바닥에 놓여 있을법한 쪽마루가 통로를 더 길게 보이게 하네요.
온통 초록 잔디와 그보다 초록의 나무들을 바라보는 제 눈동자가 그 순간 초록색 눈동자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가을의 그 통로는 어떤 그림으로 펼쳐질까요?
봄과 겨울의 그 유리창은 무슨 색으로 변신할까요?
평범한 주택의 현관문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딴 세상에 도착한 겁니다.
하지만 감동은 아직 이르다는 걸 그때도 몰랐어요.
햇살이 쏟아지는 유리창 옆에 어린이들이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네요.
그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한 지 알까요?
그저 바라보는 어른의 눈에는 천사처럼 예쁘기만 했지요.
부피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골격만 앙상한 다섯의 사람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어요.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자코메티의 작품이 거기 있습니다.
병풍 같은 일곱 쪽의 유리창 너머로 바람을 타고 흔들거리는 버드나무의 부드러운 가지가 호수에 어른어른 비쳐요.
그게 바로 선경(仙境)이 아닐까 합니다.
자코메티 홀입니다.
메인 작품은 <walking man>,
생명이 없는 한낱 조형물일 뿐인데 조각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앙상한 뼈대만 남은 사람이 걷는 형상에서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는 힘이 느껴졌어요.
밖이 밝으니 상대적으로 조각은 더 어둡고 검게 느껴집니다.
가냘프지만 절대 넘어지거나 쓰러질 것 같지 않은 것은 그의 작품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큰 발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은 이제 자신이 우연의 산물이고,
정말로 하찮은 존재이며,
이유 없이 게임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본래 무의미한 것인데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자코메티의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깎아내고 덜어낸 형상을 통해 살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고독한 모습을 보여 준 것이지요.
도무지 풍경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나갔습니다.
해의 가루가 뿌려진 듯 온통 반짝임 가득한 바다를 배경으로 푸른 잔디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어요.
알렌산더 칼더의 모빌 Janey-Waney 가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처럼 서 있습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어른들이 그 앞에서 뜀을 뛰며 사진을 찍어요
움직이는 조각은 선과 면, 그리고 원색의 컬러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룹니다.
쇠 조각이 주는 부드러운 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매력입니다.
그 옆의 검은 조각 역시 칼더의 작품으로 제목은 snow plow.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자코메티 홀,
1945년 이후 유러피안 아트홀,
1945년 이후 아메리칸 아트홀,
그리고 대니쉬(덴마크 화가) 아트홀,
1990년 이후 현대 미술,
조각 공원과 특별 초대전을 여는 홀로 구분하더군요.
헨리 무어의 조각 <가족>이 마치 칼더와 한 가족이라는 듯, 아니 내가 가장이야 하는 듯,
위엄 있고 묵직한 무게로 앉아 있습니다.
블랙의 철재 기둥 몇 개로 만든 조엘 사피로의 작품도 보입니다.
조각은 일정한 거리감 없이 여기저기 하나씩 심심하면 나타났어요.
그곳은 미술관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루이지애나는 미술관도 공원도 아닌 별장 느낌,
그 시간 그 공간 속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곳의 주인이었지요.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라든가 잔디에 들어가지 마시오 라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앉거나 먹거나 눕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내 집 같은 공간입니다.
잔디 위에 앉았습니다.
곡물 빵에 크림치즈, 초코 칩 쿠키, 사과 두 알, 그리고 카페에서 산 커피와 물이 전부인 런치 타임을 즐겼어요.
마네의 그림 제목 <풀밭 위의 식사>가 생각났어요.
하지만 그 그림을 따라잡으려면 옷을 다 벗어야 하니 안 되겠네요.
두 사람이 악기를 들고 연주 준비를 하네요.
미술관에서의 음악회라니, 그것도 바다가 보이는 잔디밭에서요.
이건 무슨 예정된 별책 부록도, 보너스도 아닌 정말 행운이 아닐까요?
작은 탁자 위에 랩 탑을 올려놓은 남자가 보입니다.
아마도 작곡자인가 봐요.
악기에는 소형 마이크가 달려있고 한쪽에선 카메라가 녹화를 하고 있네요.
백발의 퉁퉁한 트럼페터와 은발의 남자가 베이스 클라리넷을 들고 나왔습니다.
어느새 사람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레 몰려들어 앉거나 섰지요.
아~
처음 듣는 멜로디지만 가슴 한쪽이 요동을 칩니다.
감정이라는 게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흄래백이라는 보도 듣지도 못한 마을의 미술관에 찾아와, 스웨덴과 덴마크를 가르는 외래순 해협이 훤히 내다보이는 잔디밭에 앉아 라이브 연주를 듣게 되다니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모든 상황이 그저 기분 좋은 꿈을 꾸는 듯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행복했어요.
아름답고요.
평화롭고 편안한 그곳이 너무 좋아요.
떠나기 싫었습니다.
해변에는 자전거에 벗은 옷을 걸쳐 놓고 수영을 하는 가족이 보이네요.
루이지애나는 단순히 하나의 건물이 아닙니다.
하늘, 바다, 나무, 언덕, 구름 등 자연과 함께 하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지요.
무슨 치장 같은 것 없습니다.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아요.
그저 자연 속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요.
세계의 내로라하는 미술관들을 거의 다녀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편하고 아쉬움 가득한 기억을 주었던 곳은 없었습니다.
이 미술관의 설립자는 코펜하겐에서 치즈 도매 사업을 하던 가문의 크누드 젠센(Knud W. Jensen)입니다.
그는 1955년, 흄레백에 있는 오래된 주택(1855년 건축)과 주변의 땅을 샀답니다.
미술관 설립자 젠센이 루이지애나를 인수한 해는 그 집이 지어진 후 100년이 되던 해이기도 했네요.
미술관이 루이지애나라는 이름이 붙여진 사연이 있어요.
그 집을 처음 지었던 사람인 알렉산더 브룬은 결혼을 세 번 했는데 공교롭게도 3명의 아내 이름이 모두 루이스 Louise 였대요.
이쯤 되면 사람을 좋아한 게 아니라 루이스라는 이름을 사랑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죠?
Art shop으로 갔어요.
그곳을 기억할 뭔가를 사고 싶었던 거죠.
다른 미술관들에서 볼 수 있는 뻔한 물건들이 아닌 상품들이 꽤 많았습니다.
연노랑 구슬과 은색 니켈 조각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긴 목걸이,
그리고 카멜색 가죽이 고급스러운 손지갑을 샀어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미술관을 나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큰 미술관과 정원이 어디에 들어있었는지 신기할 뿐이에요.
최면에 걸려 다른 공간으로 순간 이동했다가 돌아온 느낌이었죠.
기차역까지 걸어서 15분쯤 걸렸어요.
황홀한 느낌이 너무 강한 후유증일까요?
갑자기 맥이 빠지더군요.
버스를 타기로 했지요.
정류장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세요.
인사를 하니 루이지애나에 다녀오냐고 물으세요.
그렇다고 하니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루이지애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에요. 나는 1주일에 서너 번은 간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이 생각이 들었어요.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할머니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분이세요.’
사람들이 루이지애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많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루이지애나는 사랑이다.’ 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