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함부르크의 겨울
전혜린의 뮌헨,
내가 한겨울 독일 여행을 원했던 가장 큰 이유였을 겁니다.
마치 그녀가 쓴 '먼 곳에의 그리움' 그 비슷한 것이에요.
함부르크의 공기는 아침부터 밤까지 변함없이 블루,
짧은 글, 긴 침묵이라는 책 제목 같은 그런 날이었어요.
나무는 겨울 동안 제 이름을 잃어버려요.
그냥 겨울나무일 뿐이지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실 가지 모세 혈관으로, 미미한 수액이 느릿느릿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유럽에는 유독 부르크가 붙은 도시 이름이 많아요.
함부르크, 하이델베르크, 로텐부르크, 스트라스부르크, 잘츠부르크, 뉘른베르크, 인스부르크...
부르크(bourg)는 원래 프랑스 말로 <성>이라는 뜻입니다.
함부르크의 함(Ham)은 '물 가까이 있다'는 뜻이고요.
그러니 함부르크는 물 가까운 곳의 성?
이름처럼 함부르크는 독일 최대의 항구 도시입니다.
도시에는 알스터 강, 빌레 강과 엘베 강이 흐르죠.
엘베강은 드레스덴까지 1000km 넘게 이어져요.
영화 대니쉬 걸에서 주인공 에이나르 베게너가 드레스덴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으러 갑니다.
한껏 우아한 여인처럼 차려입고 간 그에게 간호사가 이름을 묻지요.
'제 이름은 릴리 엘베예요, 강 이름이랑 똑같아요.'라고...
기차역의 가장 높은 곳이나 가운데에는 대장처럼 어디나 시계가 차지하고 있어요.
함부르크도 그래요.
역은 떠남과 만남과 헤어짐, 돌아옴의 시간과 관계되는 곳이니까요.
바다가 멀지 않은가 봅니다.
갈매기들이 비둘기처럼 도시를 날고 있어요.
호텔 현관 앞의 낡은 오크 통 위에 빨간 열매가 소담스럽네요.
얼마 전이 크리스마스였으니까요.
꼭 보고 싶은 그림이 있어요.
함부르크 미술관에 가야 합니다.
그곳이 중앙역 부근이라는 것,
그리고 독일어로 쿤스트(kunst)가 예술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침침한 색의 오래된 건물에 MUSEUM FUR KUNST UND DEWERBE라고 쓰여있어요.
'Fur는 영어의 for일테고 und는 and 겠지?' 아쉬운대로 편한대로 짐작했어요.
게다가 어떤 여인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그림이 건물 벽에 턱~ 걸려 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네요.
확신에 가득 차 반가운 마음으로 냉큼 들어갔지요.
여기도 뭉크의 마돈나가 있군요.
피아노도, 골동품 의자도 있어요.
가구, 의상, 장식품... 회화는 거의 없고 뭔가 이상해요.
30분쯤 돌았나 봐요.
내가 보려고 하는 그림도 찾을 수 없거니와 회화 작품과는 거리가 먼 공예품이 더 많아요.
여기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짐작했죠.
맡긴 외투를 찾아 입으며 말했어요.
-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를 보러 왔는데 여기가 아닌 가봐요.'
옆에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말씀을 하셨어요.
- 여기는 쿤스트 운트 게베르베에요.
아트 앤 크래프트로 디자인, 장식, 공예 등을 전시하는 곳입니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중앙역 옆에 있는 함부르크 쿤스트할레로 가야 해요.
- 아~ 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돌아서는데 그가 다시 말을 걸었어요.
- 지금 그 그림을 보러 갈 거예요?
- 네
-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세요.
그는 티켓 오피스로 가더니 자기들끼리 무슨 대화를 나누고는 제게 티켓 값 12유로를 내주는 겁니다.
- 모르고 잘못 온 것이니 환불해 드릴게요. 쿤스트할레로 가서 그림을 보세요.
예기치 못한 그들의 친절과 넉넉한 인심이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고맙다는 내 말에 그는 그저 미소로 답을 했어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함부르크 미술관의 구관은 공사 중이었어요.
다행히 신관으로 옮겨진 그림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유한 무역 도시답게 뭉크, 르네 마그리트, 르누아르, 마네 등 방대한 회화 컬렉션을 자랑하더군요.
드디어 찾았습니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위의 방랑자>,
뒷모습은 앞모습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더 많이 보여줍니다.
미셸 투르니에의 <뒷모습>이라는 책이 있어요.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에 글을 붙였는데요.
여기저기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되지요.
'뒷모습'이라는 독특한 소재에 삶, 사랑, 우정, 신앙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과 여운이 있는 문체가 무척 매력 있는 책입니다.
그때부터 누군가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게 됐어요.
'뒷모습은 스스로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마주한 이를 속이지도 않는다.
진실은 이 사이, 밝히지 않는 것과 속이지 않는 것 사이에 있다.
뒷모습이 요령부득으로 느껴진다면 이는 진실이 요령부득이기 때문이다.'
- 미셸 투르니에, 『뒷모습』 중에서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역시, 그의 책에
나오는 사진처럼 뒷모습을 즐겨 그린 화가입니다.
프리드리히는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이듬해에는 누이를, 5년 후에는 스케이트를 타던 형이 자신을 구하고 난 후 익사했어요.
형의 사고에 대한 죄의식은 평생 트라우마로 따라다녔습니다.
뒤이어 또 다른 누이가 잇따라 세상을 떠났지요.
그는 이러한 이유로 병적인 고독에 깊이 침잠하게 되었어요.
<안개 위의 방랑자>는
세상 한가운데서 방향을 잃은 고독한 인간,
세상 끝에 홀로 선 인간,
대자연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뒷모습을 보여줍니다.
현장 학습하는 학생들이 무리 지어, 또는 홀로 자연스레 앉아 제 맘에 드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반 고흐 전, 오르셰 미술관 전 등이 열리는 덕수궁 미술관에 엄마 손에 이끌려 헤찰하며 지나가는 우리 아이들과는 대조적인 풍경이죠.
함부르크의 시청사 역시 아름답습니다.
붉은색 사암 벽돌로 지어진 함부르크 시청사는 영국의 버킹엄 궁전보다 더 많은 방을 갖고 있다고 해요.
내부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증권 거래소와 전통적인 상공회의소도 있고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습니다.
과연 업무를 보는 곳인가 싶을 정도로 웅장하고 압도적인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어요.
집이든 가구든 의상이든 옛날이 더 멋지고 고풍스러워요.
나는 중세풍 집기들을 너무 좋아합니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알스터 호수의 얼음 위에 오리들이 있어요.
호수의 얼음과 물 사이로 스며든 불빛이 보석 같이 아름다워요
추운지도 모르고 한참을 바라보았어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지 싶습니다.
시청사 근처에 쇼핑몰에 잠깐 들어갔어요.
내부 디자인이 독특한 현대식 건물이에요.
계단 틈새로 찍힌 사진이 재미있네요.
햄버거는 함부르크를 대표하는 음식이니 꼭 먹어봐야겠죠?
체인점인 Jim Block은 햄버거는 유명세만큼 맛도 훌륭했습니다.
단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것,
그래도 맛있어서 다 먹고나서 씩씩거리게 되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어요.
스물네 살의 프랑수아즈 사강이 쓴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 브람스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의 생가는 2차 대전 중 폭격되었고, 그 부근에 다시 지은 집이라고 합니다.
텔레만의 집도 바로 옆이에요.
21세기와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입간판이 세워져있어요.
그런데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그 부분이 더 맘에 들더군요.
브람스 박물관이 있는 동네 집들이 책 같아요.
그러니까 동네가 도서관 같은 아우라가 느껴졌다는 거죠.
브람스의 흉상, 사진, 그리고 데드 마스크가 있습니다.
슈만이 브람스를 소개하기 위해 음악 신보에 쓴 새로운 길(Neue Bahnen)이라는 제목의 글도 남아 있네요.
안내를 하시는 할머니가 특별히 보여줄 게 있다고 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간 방에는 브람스가 1861년부터 1862년 사이에 사용하던 피아노가 기품 있는 모습으로 놓여 있습니다.
겨울에는 공개를 안 하고 보관하는데 보여주고 싶다는 거예요.
심지어 저보고 연주해보고 싶으냐고 물으시네요.
맘이야 굴뚝같지만 감히 브람스의 그 고색창연한 피아노를 유려하게 연주할만한 실력이 있어야지요.
브람스와 슈만의 자필 악보들이 유리 상자 속에 들어있어요.
사람마다 필체가 다르듯 두 사람의 악보체가 다르지만 비교적 정갈한 사보였어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치가 여러 군데 있어서 듣고 싶은 곡을 골라 들어볼 수 있습니다.
티켓을 사고 신분증을 맡기면 헤드폰을 빌려주거든요.
어떤 경로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오는지,
즉 무슨 오디오 시스템인지 모르지만 음질이 환상적으로 깨끗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브람스와 멘델스존이 태어난 도시지만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가 초연된 곳 또한 함부르크입니다.
구스타프 말러 역시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일했어요.
그는 함부르크에 있는 6년 동안 교향곡 2,3번을 작곡했지요.
독일은 음악 도시 아닌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서양 음악의 본토지만 함부르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도시입니다.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이 유명하고요.
브람스의 음악 중 제가 특히 좋아하는 곡 현악 6중주 1번 2악장이예요.
근처에 성 미카엘 교회가 있어요.
아마도 브람스가 그곳에서 오르간을 연주하지 않았을까 상상했지요.
주인 닮은 멋쟁이 달마시안이 경쾌하게 걸어갑니다.
하늘은 여전히 깊고 푸르러요.
짧은 글, 긴 침묵 같은 시간이 지나갑니다.
함부르크의 코모도 블루, 당케 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