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베를린
베를린 호텔 정문 옆에 빨간 곰이 두 팔을 번쩍 들고 서있어요.
로비에는 곰이 물구나무로 서있고요.
베를린이라는 이름이 ‘어린 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800년 전 한 사냥꾼이 슈프레 강 주변에서 큰 곰을 만났데요.
곰을 잡으러 동굴까지 뒤쫓아 간 사냥꾼은 엄마 곰을 기다리고 있는 애기 곰들을 발견했지요.
그 어린 곰을 본 사냥꾼이 엄마 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겠죠.
거기서 베를리너(BAELINER)가 유래하였고 베를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베를린에서는 곰 모형을 쉽게 볼 수 있어요.
베를린 영화제의 트로피도 황금색 곰입니다.
베를린의 첫 느낌은 ‘크다’입니다.
게르만 민족답게 사람도 크지만 눈에 보이는 건물도 어마어마합니다.
독일의 수도다워요.
십오 년 전, 독일 도시로는 처음으로 방문했던 프랑크푸르트와는 전혀 느낌이 다릅니다.
제일 먼저 중앙역이 그래요.
프레임을 제외한 모든 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요.
유리창에 반사된 불빛 때문에 무척 화려하게 보입니다.
베를린 인터시티 호텔은 투숙객들이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무료로 쓸 수 있는 교통 카드를 서비스해요.
든든한 교통 카드도 있겠다 실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일단 걸어서 갈 수 있는 곳부터 가기로 했지요.
슈프레 강을 따라 푸른 공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건물은 큰데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유럽은 인구가 많지 않으니 넓은 공간감으로부터 더더욱 여유가 느껴지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베를린만 해도 그래요.
면적은 서울의 1.5배인데 인구는 3백만이니 헐렁할 수밖에요.
국회의사당이 보입니다.
의사당 정면 중앙의 큰 글씨 Dem Deucschen Volke는 ‘국민에게 봉사한다’라는 뜻이에요.
국민에게 봉사하는 국회, 멋진 문구입니다.
베를린의 국회의사당은 꼭대기의 유리 돔이 명물이에요.
저 멀리 브란덴부르크 문이 보이네요.
꼭대기에는 승리의 여신이 네 마리의 말을 끌고 있습니다.
베를린의 중심가인 파리저 광장은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내릴 때와는 반대로 시커멓게 남아있어요.
브란덴부르크는 서 베를린과 동 베를린의 경계선이었어요.
독일이 분단 시절이던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어요.
허가를 받은 사람들만이 이 문을 통해서 동베를린과 서 베를린으로 왕래할 수 있었지요.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은 허물어지고 독일은 통일되었습니다.
독일 출신의 대표 음악가 요한 세바스챤 바흐는 6개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남겼습니다.
그중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은 5번이지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바흐가 이 작품들을 브란덴부르크 공 크리스티안 루트비히에게 바쳤기 때문입니다.
직육면체의 회색 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습니다.
눈물이 흘러요.
돌 하나하나마다 모두 다른 눈물의 시를 쓰고 있습니다.
돌과 돌 사이로 들어갈수록 지면이 낮아지면서 내 키는 점점 작아집니다.
돌의 높이나 크기는 제각각 다릅니다.
어린이, 아저씨, 엄마, 할아버지, 누나, 삼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의 묘지 아닌 묘지,
즉 독일인들이 검은 비석으로 쓴 반성문입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하늘은 까마득해지고 미로 속에 갇힌 느낌이 드는 것은,
수용소에서, 가스실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야만 했던 유대인들의 절망스러운 심정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죠.
원래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쓰이지요.
특히 1945년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나치스에 의해 학살되었어요.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그 시절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피아니스트 등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미안해요, 편히 쉬어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포츠담 광장은 옛 동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콘크리트 장벽이 들어선 후 탈출과 감시의 공간이 되었죠.
동서를 가로지르는 43㎞의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된 후 포츠담 광장은 평화와 통일을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광장엔 무너진 장벽의 일부를 세워놓았습니다.
한국식 정자가 있어요,
이름은 통일정,
통일 독일처럼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는 집인 셈이죠.
과연 그 바람이 언제쯤 이루어질까요?
포츠담 지역은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되고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벤츠와 소니는 각각 1조가 넘는 돈을 투자해 베를린의 명소로 탈바꿈시켰어요.
그나저나 이곳 포츠담 광장은 포츠담 회담이 이루어진 곳과는 전혀 상관없는 장소예요.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여기처럼 많이 부서진 곳도 없다고 하는군요.
말 그대로 폐허가 되었는데 유일하게 기적같이 살아남은 건물이 하우스 후트 (Haus Huth),
후트 가족이 지었고 살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원래는 와인하우스였는데 최근 건물 지하실에서 전쟁 전 생산한 와인이 발견되었다고 해요.
참 명이 긴 집이네요.
이번 26일간의 여행 동안 예매한 음악회는 여섯 번,
오늘은 베를린 슈타츠 카펠레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가는 날입니다.
주빈 메타(1936~ )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 음악회로
세계적인 지휘자면서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피아노를 협연할 예정이에요.
베를린 필하모니 건물은 아까 낮에 가보았어요.
하지만 베를린 슈타츠 카펠레는 어딘지 아직 몰라요.
나는 음악회에 갈 때면 그곳이 어디든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유 있게 프로그램도 읽어보고 차 한 잔 마시며 기다리는 시간마저 음악회의 한 부분이라 여기거든요.
충분한 시간을 두고 호텔을 나섰지요.
택시를 탔습니다.
눈이 내렸어요.
그런데 이럴 수가…
코트 깃을 여미며 눈보라를 헤치고 찾아간 슈타츠 카펠레는 공사 중이라 천막에 가려져 있는 거예요.
당황스럽더군요.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남자에게 티켓을 보이며 물어보았어요.
걸어가기에는 머니까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물어보라고 말하는 순간 그가 타야 할 버스가 왔어요.
그런데 택시가 없어요.
사위는 깜깜하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터라 무척 춥더군요.
몹시 초조합니다.
이쪽저쪽을 얼마나 살폈는지 머리가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어요.
한참을 기다려 겨우 택시를 탄 후 기사에게 물었지요.
콘서트홀까지 얼마나 걸리냐고요.
20분쯤 걸린다고 했어요.
늦진 않겠다 싶어 다행이었어요.
그가 나를 데려다준 곳은 실러 극장,
불이 환하게 켜있고 몇몇 사람들이 서 있어요.
택시 기사에게 후한 팁 까지 주고 기분 좋게 내렸지요.
그런데,
그런데 실러 극장의 문이 굳게 닫혀 있어요.
공연이 없음인 거죠.
서성거리는 사람들에게 물었지요.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음악회에 가려고 나온 사람들이었어요.
슈타츠 카펠레가 공사 중이라 실러 극장으로 알고 왔는데 아니라는 거죠.
콘서트는 8시에 시작하는데 그때가 벌써 7시 30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에요.
티켓을 자세히 보니 베를린 필하모니라는 글씨가 보였어요.
낮에 유리창 안쪽을 들여다보며 꼭 들어가보고 싶던 그곳,
베를린 필이 상주하는 그곳이 오늘의 연주 장소였어요.
베를린 슈타츠 카펠레 오케스트라의 연주니까 당연히 슈타츠 카펠레에서 연주할 것이라고 판단한 제 불찰이지요.
실러 극장 앞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어디론가 떠나고 빈 택시는 여전히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발을 동동 굴렀어요.
극적으로 택시를 탔고 기사에게 최대한 빨리 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필하모니에 도착한 시각은 7시 58분,
티켓을 보여주고 내 좌석이 있는 쪽의 콘서트홀 출입문 앞에 도착했지만, 이미 문은 굳게 닫힌 후였어요.
하우스 매니저가 말했어요.
서곡은 8분쯤 걸리니 그 곡이 끝나면 문을 열어주겠다고요.
그건 나도 이미 아는 상식이죠.
놓친 서곡이 아쉽더군요.
좌석은 제일 앞 열이라 주빈 메타도, 바렌보임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지요.
십수 년 전 시카고 심포니 홀에서 봤던 바렌보임은 세월을 거스르지 못했더군요.
둘 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지만 오동통하고 천진난만한 아기처럼 순수하고 귀여웠어요.
그가 연주할 곡, ROBERT SCHUMANN Klavier konzert a-Moll op. 54
바렌보임의 피아노 페달링은 무척 강렬했어요.
쿵쿵 소리가 들릴 정도니까요.
다니엘 바렌보임은 지휘자로서가 아닌 피아니스트로 연주를 했습니다.
그의 포디움은 생일을 맞은 주빈 메타에게 내준 거죠.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1942~ )은 유대인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시민권도 갖고 있어요.
그는 유럽과 미국 등 전 세계에서 높은 영향력을 갖고 있는 지휘자며 피아니스트입니다.
모차르트, 베토벤의 뛰어난 해석을 보이면서 수많은 명반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반 유대주의자의 대표 아이콘인 아돌프 히틀러,
그가 제일 좋아했던 음악가는 바그너였습니다.
바그너 역시 독일인으로 반 유대주의자입니다.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를 많이 만들었지요.
히틀러는 심지어 가스실속에서 죽어가는 유대인들에게 바그너 음악을 들려줄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인 바렌보임은 바그너 음악을 즐겨 연주합니다.
파리 관현악단, 시카고 심포니 교향악단 음악 감독을 역임한 다니엘 바렌보임,
중요한 건 유대인인 그가 베를린 슈타츠 카펠레와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 겸 종신지휘자라는 거예요.
즉, 그가 죽을 때까지 독일을 대표하는 오페라극장의 수장이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정명훈이 일본 도쿄 시향의 종신 지휘자가 되는 거나 같은 이치죠.
다니엘 바렌보임을 얘기하자면 세계적인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Jacquelin du Pre , 1945-1987)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재클린 뒤프레는 영국인들이 ‘영국의 붉은 장미’라며 애지중지하던 국보급 첼리스트였습니다.
1967년, 두 사람의 결혼 소식에 세계가 떠들썩했지요.
슈만과 클라라 이후 최고의 음악가 부부가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어요.
재클린은 29살의 젊은 나이에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는 다발성 근육 경화증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렸거든요.
간호는커녕 병에 걸린 아내를 내 팽기고 연주여행만 다니던 바렌보임은 어느 날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바렌보임은 이미 러시아 피아니스트와의 사이에서 두 아이가 있었어요.
재클린은 1975년 이후 몸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얼굴을 움직이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불가능해졌지요.
그녀는 서서히 살아있는 박제가 되어갔지만 간신히 수프를 삼키며 자신이 연주했던 음악들을 들었습니다.
그녀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일이었지요.
뒤프레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고 1987년 10월 외롭고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나이 42세였어요.
그 후 바렌보임은 그녀의 무덤조차 찾아가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므로 바렌보임의 명성 뒤에는 ‘뒤프레를 이용한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이 족쇄처럼 따라다니기도 합니다.
카잘스의 대나무
로스트로포비치의 전나무
다니엘 샤프란의 백양나무
피에르 푸르니에의 플라타너스
야누스 쉬타거의 느티나무
마이스키의 회화나무
뒤프레의 메타세콰이어
요요마의 버드나무
린 하렐의 측백
오프라 하노이의 이팝나무 사이에
하이모비츠의 사과나무와
장한나의 미선나무가 자라고 있는
거대한 첼로의 숲
내 손길이 바람을 만들면
현의 우림이 온 우주에 퍼지지
그러면 새들이 공중에서 잠시
숨을 멈추지
첼로 주자를 위하여 - 조용미
인터미션에 리셉션으로 나갔습니다.
실러 극장 앞에서 만났던 노부부가 나를 보고 반갑게 다가오더군요.
사실 저를 태우고 오고 싶었지만 그들의 자동차가 2인승이라 태울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해요.
아쉬웠던 그들의 맘을 전하고 싶었던 거죠.
여유 있고 온화한 미소의 노인들이 삼삼오오 샴페인 잔을 부딪치고 있어요.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음이 기분 좋더군요.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메인 곡은 말러 심포니 1번, 타이탄입니다.
메타는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났어요.
봄베이 교향악단을 창단한 지휘자였던 아버지의 유전자가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거죠.
그의 음악은 뼈대가 굵고 당당한 스케일이 큰 역동감이 넘쳐납니다.
동시에, 부드럽고 유려한 울림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날 말러의 교향곡 1번, 거인도 그랬어요.
말러가 독일 낭만파 작가인 장 파울에게 심취되어 있었을 때,
그의 시 제목인 『거인』을 본떠서 자신의 교향곡 제1번에 붙인 이름입니다.
팀파니의 연타 속에 음악은 장렬하게 끝났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택시를 기다리던 그날 밤을 생각하면 이제는 웃을 수 있습니다.
음악회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포츠담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게 그랬지요.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갔습니다.
엘레지아코 그레이(Elegiaco Grey), 슬픔을 호소하는 듯한 회색 비석들을 잊을 수 없는 곳
여기는 베를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