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다 아름다운 브륄의 테라스
- 티켓 보여주세요.
승무원이 검표를 하러 기차 룸으로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갑이 없어요.
크로스 백의 그 좁은 공간에서 단박에 눈에 뜨여야 할 푸른색 지갑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 순간 아마도 나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렸을 거예요.
여권은 물론 유레일 패스와 약간의 현금이 들어있던 지갑이거든요.
그때 승무원의 말소리가 들렸어요.
- 혹시 이것이 당신 지갑인가요?
고개를 드니 검표를 하러 온 승무원이 내 푸른색 지갑을 들고 있는 거예요.
거짓말 같았죠.
내 지갑을 어떻게 그녀가 갖고 있을 수 있는 걸까요?
- 어머나! 맞아요, 제 거예요.
그녀는 지갑을 열어 여권 사진과 내 얼굴을 대조한 뒤 건네주었죠.
기차 통로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웠다고 해요.
불행 중 다행으로 여권과 유레일 패스는 그대로 있고 40유로쯤 되는 현금은 사라졌더군요.
아마도 범인은 친절의 탈을 썼던 늙수그레한 그 남자일 거라고 짐작했어요.
기차 탈 때 내 캐리어를 들어주었는데 굳이 선반 위에까지 올려주느라 애를 쓰더군요.
미안한 마음에 나도 도왔었거든요.
아마도 내가 두 팔을 선반으로 뻗어 올렸을 때 지갑을 가로챘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든 놀람의 징후는 조금 있다가 전해지죠.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끼어들거나 급 정거를 할 때, 그 순간이 지나면 가슴이 마구 떨리기 시작하잖아요.
가슴이 콩닥콩닥하더군요.
승무원이 주웠기에 찾아줄 수 있었다는 것,
여권과 유레일 패스가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것,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지요.
23일이나 남은 여행 기간 동안 기차 패스 없이 여행하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습니다.
'스카이 블루'
하늘은 정말이지 딱 스카이 블루예요.
독일에 온 후 처음으로 태양의 얼굴을 마주한 날입니다.
아치 모양의 통로 너머로 노란색 트램이 지나가는 게 보여요.
그리고
아치를 넘어간 순간 생각의 조각들이 산산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시간이 박제된 공간이라고 할까요?
노란색 바탕에 무채색 벽화가 보입니다.
옛 왕궁의 마구간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아우구스투스 거리 옆 슈탈호프벽에
작센 왕국 군주들의 행렬을 연대기 식으로 그린 작품이에요.
약 100년 전, 작품의 훼손을 염려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이센 타일을 붙인 것입니다.
102m에 어마어마한 길이의 장엄한 벽화에는 군주와 예술가, 과학자 등 100여 명이 말을 타고 행진을 하고 있어요.
마치 대형 태피스트리를 장식 핀으로 벽에 건 듯 밑 부분엔 태슬도 주르륵 달려있어요.
그 섬세함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2차 대전의 폭격 속에서 90%가 사라진 드레스덴에서 이런 역작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드레스덴은 15세기부터 작센의 대공과 선제후들, 그리고 왕이 살던 곳입니다.
벽화를 지나니 마치 돌을 퀼트 한 것처럼 색깔이 얼룩덜룩한 건물이 있어요.
프라우엔 교회입니다.
교회 앞에는 종교개혁의 주인공 마틴 루터의 동상이 서 있어요.
중세 말 유럽의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돈이 필요했습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으로 죄지은 사람의 벌을 면죄해준다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했지요.
그때 신학대학교 교수였던 루터는 이를 반대하는 95개의 개조 의견서를 공개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
그는 라틴어로 쓰여 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게 했고
1555년에 루터파 신교가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작센에서 세계로 퍼진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닌, 몇 백 년에 걸친 끈질긴 투쟁 끝에 얻은 자유였던 것이지요.
1945년 2월 13일에서 15일까지 미국과 영국은 네 번의 공습을 감행했습니다.
폭격기 527대가 드레스덴 시에 3,900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고,
그리고 3월과 4월에 3번의 공격이 더해졌지요.
그야말로 폭탄 비가 쏟아진 거죠.
드레스덴의 90%가 파괴되었고 수 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문화와 예술 그리고 음악을 영위하던 도시는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지요.
하지만 시민들은 슬픔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폭격으로 무너지고 검게 타버린 교회의 돌들을 하나 둘 정성스레 모았지요.
그리고 50여 년 동안 폐허의 상처를 껴안은 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1990년 독일은 통일되었고 드레스덴의 건축물들의 수술이 시작되었지요.
일일이 번호를 매겨 보관했던 돌들은 빠짐없이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정형외과, 성형외과 등 세상의 명의들이 모여 꿰매고 끼우고 다듬고 두드리는 대수술이 20년 동안 지속되었어요.
그리고 2005년, 프라우엔 교회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벽면이 짜깁기한 듯 얼룩덜룩한 흉터가 가득한 건 그 이유 때문이에요.
드레스덴 시민들의 눈물과 희생, 그리도 사랑이 모여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게르만 민족의 강인함과 저력이 보이더군요.
참으로 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비극이 알려준 긍정의 태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에요.
해의 조도가 얼마나 높은지 그늘진 곳은 불 꺼진 방 같이 어두컴컴해요.
드레스덴의 어원은 강변 숲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에요.
바로 엘베 강변에 위치해 있음이죠.
드레스덴 박물관과 드레스덴 미술대학이 그 엘베 강을 안고 있는 형상이에요.
굳이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엘베 강변에 자리한 건축과 나무와 벤치 하나하나가 모두 오래된 풍경화요, 고매한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강 건너 일본식 궁전과 작센 궁이 보이네요.
드레스덴 미술 대학교는 250년의 역사를 가졌어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 대학이고 건물 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복원 미술과 무대미술이 특히 유명해서 프라우엔 교회의 대수술에 중심 역할을 했다고 해요.
지붕 꼭대기에 유리로 된 지붕이 보입니다.
그것은 옥토곤 이라는 갤러리로 졸업 전시회나 초대 작가 특별전이 열린다고 하네요.
아~ 그 특별한 유리 갤러리에 내 작품이 걸린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미술대학 유리창에 구름이 들어있네요.
흰 종이에 써진 雨,
한 편의 시입니다.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어요.
유리창에 들어있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비라는 글씨가 너무 아름다워요.
갑자기 눈물이 글썽거려졌어요.
눈물은 슬플 때만 흘리는 건 아니잖아요.
미술 대학 앞에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벤치가 있어요.
브륄의 테라스입니다.
드레스덴을 독일의 피렌체라 부르고, 브륄의 테라스는 괴테가 말하길 유럽의 발코니라고 했다죠.
하지만 그런 수식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우아하고 품위 있게 서 있고
건물을 닮은 거무튀튀한 아름드리나무들이 줄 지어 있고
저 멀리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건너가는 연인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
조깅하는 아가씨,
강변 계단에 앉아 강물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아저씨,
그저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간이 소중한 것이죠.
범상치 않은 원형 건물이 완벽한 대칭의 모양으로 서있습니다.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 하우스입니다.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의 실력을 자랑하는 오케스트라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지요.
1841년에 작센의 국립 오페라극장으로서 세워진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젬퍼는 건물의 설계를 맡았던 독일 건축의 거장인 고트프리트 젬퍼의 이름입니다.
화재로 소실된 후에 그의 아들 만프레트 젬퍼의 설계로 다시 지어졌어요.
리하르트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 비롯한 유명한 오페라들이 초연된 곳이에요.
그게 다가 아니에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와 장미의 기사 등 걸작들이 이곳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그곳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어 역시나 복구작업을 했어요.
복구 작업이 끝난 1985년 2월,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마탄의 사수가 맨 처음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베버가 결혼을 하고 드레스덴에서 살 때 작곡한 곡이거든요.
제가 드레스덴 슈타츠 카펠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보고 썼던 음악회 리뷰가 브런치 매거진에 있어서 소개합니다. 제목 : <제 나이는 461세입니다>
https://brunch.co.kr/@silviano/18
그날은 공연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여인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날이었어요.
작센 지방에서 가장 큰 가톨릭 교회인 가톨릭 궁전 교회의 위용은 정말 대단하네요.
독일 최초의 오르간 제작자로 유명한 질버만의 웅장한 오르간이 눈길을 사로잡아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로코코 양식의 설교단 역시 눈길을 잡아끌어요.
이제 츠빙거 궁전으로 들어갑니다.
츠빙거는 축제의 장소라는 뜻이에요.
드레스덴에 있는 것들은 이름이 다 예뻐요.
우선 드레스덴이라는 도시의 이름도 그렇지만 엘베강, 브륄의 테라스, 프라우엔 교회, 츠빙거 궁전, 젬퍼 오페라 하우스...
도무지 독일이 주는 웅장함이나 딱딱하고 거친 어감의 언어와 다르게 부드러운 느낌이 있습니다.
츠빙거 궁전과 젬퍼 오페라 하우스 사이의 광장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기마상은 작센의 왕 요한입니다.
츠빙거 궁전은 좌우 대칭으로 지어져 궁 안에 십자형의 큰 정원이 있는 것이 특징이에요.
주로 유럽의 궁전은 건물과 정원이 뚝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궁전 안에 정원이 있습니다.
십자 모양의 넓은 뜰에는 조각된 분수가 있는 연못이 있습니다.
미술관에는 루벤스, 렘브란트, 뒤러 등의 작품이 있어고 남쪽 회랑에는 화려한 왕궁의 도자기 컬렉션이 전시되어 있어요.
츠빙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왕관의 문과 아치 문을 통해 보이는 작센 왕의 기마상이었어요.
드레스덴의 거무튀튀한 건축들은 겨울을 닮았어요.
밝은 햇살이 외롭고 아픈 세월을 위로하듯 비추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요.
노란색 트램이 광장 앞을 지나갑니다.
내가 만난 드레스덴은 2016년이 아니었어요.
1616년이나 1716년이었습니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부수고
사람이 지키고
사람이 되살린
결국
사람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지만 수 백 년 전 시간을 완벽하게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드레스덴은 구시가지는 다른 도시의 올드 타운과 다른 게 있어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흔한 카페나 레스토랑, 호텔 하나가 없어요.
오롯이 궁전과 교회와 오페라 하우스, 박물관, 그리고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 엘베강만이 세월을 아우르고 있었지요.
이제 아치 문으로 나가면 2016년이라는 세상과 만나겠지요.
드레스덴과 함께 한 시간의 색깔들,
지금 이곳에 있어서 나는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