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한 권의 책이다.
여행은 담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입에 담고
그림과 집, 자연, 사람을 눈에 담고
웃음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또는 수 백 년된 오페라 하우스에서 음악을 귀에 담고
낡은 벽과 흐드러진 꽃, 노인의 주름살과 소녀의 미소, 하늘의 구름과 오래된 돌길을 카메라에 담고
그 모든 생각과 느낌을 버무려 가슴과 마음에 담는 시간입니다.
나무, 비, 우리, 모래, 아기, 레이스, 하루, 바다…,
받침이 없는 단어들은 모두 순하고 부드럽습니다.
프라하라는 이름도 그렇지요.
드레스덴에서 프라하로 가는 기차의 이름은 Carl Maria Von Weber,
드레스덴 인근에서 태어난 베버는 프라하와 드레스덴에서 주로 활동을 했어요.
그런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기차가 그의 이름을 달고 있는 건 이색적이면서 낭만적이죠?
여행은 옛날로 찾아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중심에 사람이 있어요.
그림, 성당, 음악, 문학이 결국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여행은 사람의 역사를 알아가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요?
나는 그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사람 하나,
곁에 있나 생각해 보세요.
1000만 명이 조금 넘는 인구의 체코를 찾는 연간 여행자 수는 1억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 많은 사람들을 그곳으로 인도했을까요?
명화 가득한 미술관이 있는 것도 아니요,
알프스 같이 뛰어난 자연환경이 그림처럼 펼쳐지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내가 그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프라하의 사랑, 아니 프라하의 사람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까 해요.
프라하에서 있는 동안 묵을 호텔 이름은 쇼팽,
쇼팽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고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한 때 프라하에서도 지냈습니다.
모차르트 역시 프라하에서 지낸 적이 있지요.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최고 스타는 모차르트였습니다.
그는 나빠진 건강을 치유하기 위해 아름답고 물 맑은 프라하로 갔어요.
당시 프라하는 합스부르크가의 통치를 받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프랑스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는 합스부르크가의 여왕을 지냈던 마리아 테레지아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를 빼앗는 데 성공하여 보헤미아 여왕으로도 등극하였기 때문이지요.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프라하 시민들은 그를 극진하게 대했습니다.
특히 노스티츠 백작은 모차르트에게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며 스타보브스케 극장을 세웠습니다.
모차르트가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했어요.
지휘는 물론 피아노 연주까지 모차르트가 직접 맡아 초연을 했습니다.
공연은 대단한 성공이었고
우쭐해진 모차르트는 “나를 알아주다니 프라하 사람들은 대단한데...”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돈 조반니가 초연되었던 스타보브스케 극장은 연중 내내 오페라 ‘돈 조반니’를 공연합니다.
그뿐인가요?
국립 마리오네트 극장은 오로지 인형극 ‘돈 조반니’만 공연합니다.
그 후 프라하는 ‘돈 조반니의 도시’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생겼지요.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로 먹고사는 도시라면 프라하는 돈 조반니로 먹고사는 도시가 돼버린 거예요.
노스티츠 백작과 프라하 시민들은 모차르트에게 청동으로 만든 동상을 선물했습니다.
일명 '얼굴 없는 유령'이라고 불러요.
그러나 모차르트는 그 무거운 청동상을 고향으로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청동상은 스타보브스케 극장에 기증되었지요.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도 이 청동상을 그대로 모방한 작품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품은 프라하에 그대로 남았으니 인심은 인심대로 쓰고 모차르트를 가진 셈이죠.
스타보브스케 극장은 1984년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수상했던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 장소입니다.
아마데우스의 촬영지는 영화의 무대였던 비엔나가 아닌 프라하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 빈은 단 1초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아셨나요?
아마데우스를 감독한 밀로스 포먼 역시 체코 사람이에요.
2차 세계 대전에서 운 좋게 폭격을 비켜갈 수 있었던 프라하는 당시를 재연하기 맞춤이었습니다.
200여 년 전 프라하 시민들이 모차르트에게 가졌던 애정이 밀로스 포먼에게서 재현되었다고 할까요?
영화 아마데우스는 프라하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기여를 했지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역시 그가 감독한 영화입니다.
프라하를 빛내는데 힘이 되는 또 한 사람의 음악가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입니다.
독일에서 나고 빈에서 주로 활동했던 베토벤이 왜 프라하의 자랑거리가 되었을까요?
당시 음악가들은 왕족이나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음악활동을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월급 받는 음악 하인인 셈이죠.
하지만 베토벤은 귀족들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연주하는 것을 모욕으로 여겼습니다.
가난은 늘 그의 곁은 떠나지 않았지요.
그런 베토벤에게 체코 프라하의 귀족 로브코비츠가 접근했습니다.
후원을 해주는 본인이 아닌 베토벤 자신을 위한 음악을 하라고 권했던 것이죠.
베토벤은 기꺼이 그의 제안에 동의했고 여러 곡의 음악을 로브코비츠 가문에 헌정했습니다.
프라하성 내의 로브코비츠 궁전에는 그 교향곡들의 원본 악보가 전시되어 있어요.
베토벤에 대한 프라하의 사랑은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제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매년 체코를 대표하는 작곡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으로 시작한 축제는 역시 체코 출신의 작곡가 드보르작이나 야나체크가 아닌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으로 마무리하거든요.
바츨라프 광장의 끝에 서 있는 국립 박물관, 바츨라프 기마상, 화약탑을 지나 구 시가지로 걸어갑니다.
얀 후스 기념비, 천문 시계 등은 13년 전과 다를 바가 없군요.
트램 정류장에 정명훈 씨의 연주 홍보 포스터가 붙어있습니다.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그의 이름과 사진을 만날 때마다 흐뭇한 마음이 가득해요.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마에스트로 그의 행보가 부드럽게 굴러가길 바랍니다.
여전히 천문시계는 돌아가고 여행자들의 미소는 떠나질 않습니다.
몇 년 전,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라는 책을 즐겁게 보았었습니다.
제목이 눈길을 아니 궁금증을 잡아끌죠?
광고회사 대표다운 발상입니다.
<책은 도끼다>라는 책 제목은 카프카가 <변신>을 출간하면서 쓴 글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에서 따온 말이더군요.
'프라하는 카프카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카프카는 프라하를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프라하 국립 박물관과 바츨라프 광장이 만나는 시점부터 카프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르누보 스타일의 노란색 건물인 호텔 유로파는 카프카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눈에 띄게 아름답습니다.
공사 중인지 1층을 천막으로 가려놓았네요.
1912년, 그곳에서 카프카의 '심판'의 공식적인 낭독회가 열린 곳이에요.
대중 앞에 나서기 싫어했던 성격이라 그 의미가 더 큰 것일지도 모릅니다.
프라하에는 카프카가 즐겨 찾던 카페와 살던 집, 근무하던 회사 등 그를 기념하는 곳은 30군데가 넘습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에서 태어난 유대인 작가입니다.
당시 공산국이었던 체코에서 자유와 인권을 찾았던 그는 불온한 작가, 퇴폐적 허무주의자로 낙인찍혔지요.
그의 작품은 당연히 금서로 취급되었고 체코인들은 벨벳 혁명 뒤에서야 그의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만 유명했던 비운의 작가였던 그는 인간의 부조리, 존재의 불안을 통찰하며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했습니다.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변신, 심판 등이 대표작이라는 건 아시죠?
카프카 생가 근처에 카프카의 동상이 있습니다.
머리 없이 걸어가고 있는 거인의 어깨 위에 카프카가 앉아 있는 모습인데 카프카의 작품 '어느 투쟁의 기술'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라고 해요.
동상 밑에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하려는 듯 벌레를 새겨 놓았네요.
카프카의 아버지는 천문시계로 유명한 프라하의 시청광장에서 귀부인용 장신구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상인이었습니다.
경제적 성공 덕분에 카프카와 그의 가족은 평생 동안 프라하의 가장 중심부인 시청광장에서 살 수 있었어요.
하지만 부자간의 갈등이 컸습니다.
요컨대 자수성가로‚ 떼돈을 번 아버지와 인문교양 교육을 받고 자란 자식 간의 새대차이 때문이었지요.
시민적 삶과 예술가적 삶 간의 갈등 문제를 형상화한 토마스 만을 동경하며 독문학도를 꿈꾸었던 카프카는 아버지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프라하 카렐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5년 만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 후 굴지의 보험사에 취업했지요.
그러나 엄청난 근무량과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었기에 얼마 안 가서 퇴직을 합니다.
그리고 평생직장이 될 보헤미아의 산재보험청에 입사했어요.
업무 종료 시간이 오후 2시였던 덕택에 퇴근 후에는 문학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때 당시 집필하던 곳이 바로 황금소로 22번지에 있는 작은 집입니다.
사실 12000원이라는 입장료 생각을 하면 이름값을 못하는 곳이 황금소로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도 여전히 줄 지어, 고개를 숙여 낮고 좁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황금소로는 생각보다 짧고 좁아요.
30미터나 될까요?
좁고 옹색하지만 고즈넉한 기운이 흐릅니다.
세상과 차단된 듯한 분위기 속에서 카프카는 영혼의 소리를 들었을 테지요.
파스텔 톤의 집들은 어린이들이 색종이로 만들어놓은 장난감 집 같아요.
이곳에서 카프카는 퇴근 후 자정 무렵까지 글을 썼습니다.
그 시간의 결이 느껴지네요.
성실하고 남에게 밉보이는 것을 싫어했던 카프카는 직장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직원이었어요.
그가 폐병으로 인해 퇴직할 때까지 15년간 근무했던 산재보험청의 건물은 오늘날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호텔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철저한 채식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여름이면 몰다우 강에서 1km가 넘는 거리를 수영을 하고 날마다 체조를 했죠.
폐결핵으로 마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독신이었습니다.
프라하 하면 카프카,
그러면 릴케 하면 무엇이 생각나세요?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사람?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 12. 4 ~ 1926. 12. 29) 역시 프라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릴케의 생일이군요.
죽은 자의 생일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요만, 그래도 왠지 마음이 싸해져요.
릴케는 철도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프라하의 명망 있는 가문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릴케는 19세에 사랑에 빠져 편지와 사랑을 고백하는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사람 같으면 연애편지도 쓸만하네요.
스무 살에 <삶과 노래>라는 시집을 자비로 출판했어요.
프라하 대학에서 예술사, 문학사 공부를 시작했고 21세에 뮌헨 대학으로 옮겨 예술사, 미학 등을 공부하였습니다.
그의 시집은 베를린과 뮌헨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어린 나이에 유명한 시인이 되었어요.
뮌헨은 자신의 내면의 욕구에 따라 전 유럽을 떠돌게 되는 시작점인 도시였어요.
게다가 22세의 앳된 청년 릴케와 36세의 루 살로메(1861. 2. 12 ~ 1937. 1. 5)가 맨 처음 만난 곳도 뮌헨입니다.
루 살로메는 이미 릴케가 꿈꾸던 유명한 작가였고, 세상 이치에도 밝았으며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였지요.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니 릴케가 안 빠져들 수 없었지요.
두 사람은 3년 동안 정신과 영혼을 서로 교감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루는 릴케가 독일 최고의 시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어요.
반면 루는 릴케가 사는 동안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릴케의 삶과 작품 세계는 루 살로메 없이 논할 수 없으니까요.
성품이 유약하고 섬세하며 날카롭고 불안정하였던 릴케에게 루는 연인이었고, 어머니였고, 영적 교감을 넘어 그를 성숙시키는 예술가이며 정신분석학자였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출판하며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 독일, 프랑스, 카프리 섬을 홀로 전전하며 여행을 다녔습니다.
릴케의 대표작인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가 완성된 것도 이 무렵이에요.
22세의 릴케가 51세에 사망하는 순간까지 30년 동안 루와의 정신적 교감이 그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릴케에게 루는 절대적인 존재였지요.
릴케는 르네라는 자신의 이름이 여성적이라는 루의 지적에 따라 라이너로 이름을 바꾼 건 물론이요,
글씨체도 루를 따라 바꿨다고 하네요.
38세의 루와 24세의 릴케와 55세의 안드레아스는 55일 동안 러시아 여행길에 오릅니다.
안드레아스는 루의 남편이에요.
루의 제안에 따라 미리 러시아어를 공부를 한 릴케에게 그 여행은 정신적, 시적 성장에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지요.
톨스토이를 만나고 러시아의 예술과 역사를 배우며 죽이 맞는 친구가 되었어요.
이때 루는 릴케가 육체적 첫사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1년 뒤 두 사람은 두 번째 러시아 여행을 떠났어요.
3개월 동안 이어진 여행 중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루가 릴케의 불안정한 정서와 폭발적인 신경증에 대하여 냉정하게 반응했기 때문이에요.
루가 떠난 후 릴케는 며칠 동안 러시아에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루 살로메가 릴케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것은 찬란히 빛나는 햇빛과 고요함뿐입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결실을 맺어 잘 익은 달콤한 과실을 얻었습니다.
지금 나는 지난 시간의 추억을 생각해서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엄마 노릇을 해야겠어요.
내가 마치 엄마처럼 당신에게 다가갔던 그곳 발터스 하우젠에서 지낸 그날에 대한 추억은 우리 두 사람에게 여전히 소중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엄마로서 의무감을 갖고 말해야겠어요.
몇 해 전에도 내가 오랜 이야기 끝에 체메크에게 당신 치료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잖아요.
당신이 지금 또다시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예전의 증세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봐야 하는 게 내게는 얼마나 큰 공포이며 얼마나 심한 심적 학대인지 알기나 하나요?
또다시 그 의지박약 증세를 봐야 하다니요?
심리적으로 조금만 위축되어도 무조건 움츠러들면서 당신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한 신경 발작에 시달리는 그 의지박약을 봐야 하다니요?
그래서 마침내 나도 고통에 뒤틀리고 일그러지고 지쳐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발터스 하우젠에서 같이 지낸 뒤로, 우리 두 사람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내가 항상 성장하도록 이끌어주었어요.
나는 자라고 또 자랐어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 젊은 날만큼 되자랐어요.
이제야 난 젊어졌어요.
지금 나는 남들이 열여덟 살에 느끼는 것처럼, 완전한 나 자신이 된 듯한 기분이에요.
그래서 당신의 그림자는 점차 내 눈에서 없어졌어요.
마치 전체 풍경 속의 작은 한 부분이 없어지듯 말이에요.
그 풍경에서 보이는 작은 이즈바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따라가세요.
어둠에 싸인 당신의 신을 마중하러 그 길을 따라가세요.
내가 당신을 위해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을 그분은 할 겁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나는 당신에게 당신을 찾으라고 권유합니다."
릴케가 답장했습니다.
내 눈빛을 지우십시오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십시오
나는 당신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나의 양팔이 꺾이어 당신을 붙들 수 없다면
나의 불붙은 심장으로 당신을 붙잡을 것입니다.
나의 심장이 멈춘다면 나의 뇌수라도
그대를 향해 노래할 것입니다.
나의 뇌수마저 불태운다면
나는 당신을 내 핏속에
싣고 갈 것입니다.
그 후 릴케는 로댕의 조수로 일하던 조각가 클라라와 결혼했지만 각자의 작품 활동을 이유로 헤어졌습니다.
3년이 지나 릴케는 다시 루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어요.
릴케의 작품을 가장 처음 읽는 사람은 언제나 루였습니다.
루는 릴케의 훌륭한 비평가였고 뛰어난 조언자였지요.
그러던 1923년, 릴케에게 백혈병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진행된 불치병으로 스러진 것이지요.
릴케는 죽기 얼마 전, 루에게 자신을 보러 와 달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결국 루를 만나지 못한 채 스위스의 발몽에서 51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한 것을 매우 마음 아파한 루는 2년 뒤 릴케와의 추억을 담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우리나라 : 하얀 길 위의 릴케>를 출판했어요.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뜨겁고 위험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루는 릴케에게 다가감으로써 진정한 여자가 되었고 여성성에 비로소 눈뜨게 되었어요.
릴케는 루를 만남으로써 지적,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섬세한 작품을 쓸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힘은 그 무엇보다 강렬합니다.
1861년, 루 살로메는 러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보다 100년 먼저 태어났군요.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철학과 종교, 예술에 흥미가 많았으며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이었어요.
루는 당시 여성을 받아주는 몇 개 안 되는 대학 중 하나였던 취리히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한 열아홉의 루는 한 남자로부터 사랑을 고백받게 됩니다.
철학자 파울레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독일의 시인이며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니체였습니다.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던 그녀는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셋이 함께 살자'
그들의 삼각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만 갔지요.
그러나 루 살로메가 결혼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카를 안드레아스입니다.
안드레아스는 43세의 페르시아 문화에 정통한 베를린 대학교 교수였습니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어요.
루를 처음 본 날, 그녀에게 빠져들었으니까요.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안드레아스는 무슨 이유인지 항상 가슴속에 칼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루에게 정중하게 청혼하였지요.
루는 들을 것도 없이 거절했고 그는 마치 각본에 짜있었던 듯 조용히 칼을 꺼내서 자신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피를 본 것이 주효했을까요?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그는 루에게서 결혼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루에게는 조건이 있었어요.
'결혼은 하되 성관계는 갖지 않는다. 다른 남자와의 교제는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일은 계속한다.'
안드레아스는 '그래 봤자 그 생각이 얼마나 가겠어?' 하면서 그녀의 조건이 일시적일 것이라는 기대로 조건을 받아들였지요.
그러나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비난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나는 이상에 따라 살 수도 없고, 다른 누군가에게 모델이 되어줄 수도 없다.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는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어떤 원칙도 내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살아 있는 훨씬 더 경이로운 그 무엇이, 환희로 가득 찬 삶의 아주 따뜻한 그 무엇이 있다."
안드레아스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결혼 이후 50년 동안 사랑하는 아내를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채 그저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지요.
그에게 루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안드레아스는 단지 루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을까요?
니체가 루에게서 버림받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쓴 작품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입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만든 교향시도 유명하지요.
니체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음을 맞이했고 파울레 또한 4년 동안 방황하다가 그녀와의 추억이 깃든 절벽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니까 루가 안드레아스와 결혼 생활을 하면서 또 다른 남자의 고백을 받게 된 사람이 바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입니다.
사실 루 살로메가 안드레아스와 결혼할 때 결혼 조건이 있었고 그것이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루는 결혼 후에도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므로 러시아 여행도 셋이 갔던 거죠.
러시아 여행에서 릴케와 헤어진 루 살로메는 또 다른 남자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받게 되는데요.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아주 대가들이 줄을 서는군요.
똑똑하지, 예쁘지, 게다가 튕기기까지 하니 남자들 애간장이 다 녹아내렸겠지요.
그는 다름 아닌 정신분석학의 지그문트 프로이트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천재들에게 사랑을 받은 루 살로메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여자는 사랑 때문에 죽지 않는다. 다만 사랑의 결핍에 의해서 서서히 죽어간다'
천하의 루 살로메도 병에는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75세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니까요.
다음은 루 살로메가 릴케와 사귈 때 쓴 시, 볼가강입니다.
그대 멀리 있어도 나는 그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대 멀리 있어도 나는 그대를 느낄 수 있습니다
퇴색할 수 없는 현재같이 나의 풍경같이
그대는 내 삶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내가 그대의 기슭에 쉬지 않았을 지라도
내 그대의 넓이를 알 것만 같습니다
밀려오는 꿈에 물결이 나를 그대의 거대한 고독에
상륙시키는 것만 같습니다.
무지갯빛 비누 방울이 눈 풍선처럼 흩어져 날립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꿈꾸듯 좋아하네요.
이곳 프라하에는 이름 난 올드 타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또각거리는 마차가 다니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귀부인처럼 품위 있는 올드 클래식 카들이 골목에서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오래된 성벽을 지나, 마차가 지나가던 골목을 건너, 할머니의 미소를 지나니 빵 굽는 냄새가 납니다.
굴뚝 빵이라고 불리는 전통 빵 뜨르들로예요.
밀가루를 부드럽게 반죽해서 원통형 쇠틀에 돌돌 말아서 숯불에 굽습니다.
설탕이나 계핏가루를 뿌려 먹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넣어서 먹기도 하는데요.
아이스크림 없이 커피와 먹었는데 고소하고 부드러워요.
은근 중독성이 있네요.
맥주로 유명한 나라와 도시는 많습니다.
그중 뺄 수 없는 나라가 체코는 세계에서 개인 맥주 소비가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국민 1인당 연간 맥주 소비량은 150리터, 정말 어마어마하죠?
프라하에 간 모든 사람들이 절대 놓치지 않고 보는 1위는 단연 구 시청의 천문 시계가 아닐까요?
정 시가 가까워지면 하나둘 모여드는 사람들,
사람들은 고개를 빼고 시계에서 뭐가 나올까 기대에 부풀어 쳐다보죠.
정각이 되면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인형이 나와 맨 먼저 종을 치고 두 개의 창문에서 12 사도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허영을 상징하는 거울을 보는 사람, 돈지갑을 움켜쥔 유태인, 음악을 연주하는 터키인...
프라하에는 존 레넌 벽이 있습니다.
1980년 12월 8일, 비틀스의 멤버인 잉글랜드의 음악가 존 레넌은 뉴욕에 있는 자신의 집 앞에서 피살당했습니다.
당시 프라하 예술대학의 학생 몇 명이 카를교 옆 공원 한쪽, 수도원의 낡은 벽에 존 레넌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 이후 이 벽은 전 세계인의 낙서장이 되었지요.
존 레넌의 이름을 딴 펍을 지나 사랑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다리를 건너면 동그란 안경을 쓴 레논의 얼굴이 보입니다.
비틀스 노래를 부르던 버스커들이 잠시 간식을 먹네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가 밀란 쿤데라 역시 체코 사람입니다.
그는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로 유명한데요.
밀란 쿤데라(1929.4.1~ )는 체코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체코의 주요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로 체코의 대표 작곡가인 야나체크의 제자였어요.
쿤데라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자연스레 피아노를 배우고 음악학을 공부했습니다.
1958년 프라하 공연예술대학교 영화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시와 희곡을 집필하면서 같은 주제로 강의했는데, 이때 밀로스 포먼 등 체코의 누벨바그계 영화인이 된 사람들이 그의 제자들입니다.
1984년 발간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역사의 상처라는 무게에 짓눌려 단 한 번도 ‘존재의 가벼움’을 느껴 보지 못한 현대인의 삶과 사랑을 다룬 이 소설로 쿤데라는 명실공히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지요.
1988년에 미국 영화감독 필립 코프먼이 영화화했습니다.
사랑과 혁명에 무모하고 맹목적인 열아홉 나이에 열혈 청년은 밀란 쿤데라는 공산당이 내건 달콤한 구호에 넘어갔어요.
훗날 그는 <작가 수업>이라는 산문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스트라빈스키, 피카소,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나를 사로잡았듯이 공산주의는 나를 매혹시켰다.”라고요.
구시가지 광장에 둥근 모양의 거대한 청동상이 서 있어요.
1415년,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를 비판하다 콘스탄트 종교 회의로 화형에 처한 ‘얀 후스’와 그의 제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1915년 그의 사망 500주년을 맞아 제작되었다고 해요.
구시가지와 프라하 성 사이에는 블타바 강이 흐릅니다.
두 곳을 연결해 주는 카렐교는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자 유럽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이죠.
16개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이 다리의 시작과 끝에 세운 탑은 본래 통행료를 받기 위한 것이지만 지금은 블타바 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리 위에는 약 300년에 걸쳐 제작된 30개의 성인상이 있는데 이 또한 특별한 볼거리입니다.
이 조각상들은 모두 성경에 나오거나 성인으로 칭송받는 사람들을 새겨 놓은 것인데 진품은 박물관에 있고 다리에 있는 것은 모조품입니다.
모조품이거나 말거나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을 모두 믿고 싶은지 사람들의 손길이 스친 곳은 반들반들 윤이 나네요.
길거리 악사와 화가, 사진 찍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요.
프라하 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메트로에서 내려서 트램으로 바꿔 탔지요.
그런데 실수로 한 정거장 먼저 내렸어요.
눈길을 걷습니다.
성으로 가는 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이 없고 조용한 언덕 마을이 이어져요.
어느 만큼 가니 성을 지키는 근위병이 서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정문 위의 칼과 몽둥이를 든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의미하고 밑에 깔린 사람은 체코 백성이라고 해요.
세금을 제대로 내라는 의미로 만들었답니다.
프라하 성은 왕궁을 비롯해 비투스 성당 등 3개의 교회와 수도원 등 다양한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비투스 성당의 위용이 대단하네요.
종교와 무관한 사람이 보더라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압도적인 크기,
섬세한 돌 세공, 그리고 크리스털의 본고장답게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까지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펼쳐지더군요.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버금가는 장미 창도 있어요.
프라하를 상징하는 인물인 카를 4세 바츨라프의 무덤의 벽면은 붉은 보석 가넷으로 장식되어있습니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반대한 바츨라프의 형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어요.
매년 5월이면 스메타나를 추모하는 음악축제 ‘프라하의 봄’이 열립니다.
서막으로 연주되는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제2곡 블타바는 체코인의 영혼에 흐르는 불멸의 선율이나 다름없지요.
놀랍게도 <나의 조국>은 그가 청력을 잃은 상태에서 만들어졌고 프라하에 헌정했습니다.
체코 음악계 최고의 자리인 임시 국립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던 그는 말년에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6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호텔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습니다.
체코 필이 연주하는 말러 심포니 거인을 들으러 가야 하니까요.
프라하의 대표적인 콘서트홀은 루돌피눔입니다.
블타바 강변 옆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정면에 두 사람의 동상이 있어요.
체코의 대표 음악가 드보르작과 화가 요세프 마네에요.
루돌피눔은 ‘루돌프의 전당’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루돌프가 누구일까요?
체코에서 루돌프라는 이름을 가진 가장 중요한 인물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2세(1552 – 1612)입니다. 그는 체코의 세종대왕 격인 카렐 4세 다음으로 프라하를 황금기로 이끌어 올린 황제지요.
그는 합스부르크가의 궁정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아예 프라하로 옮겨버릴 정도로 빈보다 프라하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루돌피눔의 루돌프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루돌피눔이 세워질 당시 보헤미아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권좌를 이어받을 황태자, 그 루돌프에서 따 온 것입니다.
루돌피눔의 메인홀인 드보르작 홀의 전면은 화려한 파이프들이 장식처럼 자리 잡고 있어요.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치아키가 지휘 경연대회에 나갔을 때 촬영했던 바로 그곳입니다.
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과하지 않은 화려함과 오래된 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러니까 노신사의 중후한 멋을 닮았어요.
체코 필의 상임 지휘자 이르지 벨로흘라베크가 사진보다 훨씬 부드럽고 밝은 인상의 지휘자였습니다.
생전 화 내지 않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인상의 젊은 악장,
100년도 넘었을 듯한 고색창연한 나무 포디움 지지대의 주석은 닳아서 보석처럼 반짝반짝 윤이 나고요.
오케스트라의 앤티크한 나무 보면대가 유독 눈길을 끌었습니다.
보면대 하나 얻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맘에 들었던 것은 그것의 투박한 낡음이었습니다.
음악을 듣기 전에 벌써 감동이에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지만 음악을 들으러 온 그들의 눈은 반짝입니다.
오프 숄더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합창석에서 리듬에 맞춰 몸을 들썩거리는 모습 또한 경쾌합니다.
마르티누 교향곡과 말러 교향곡 1번이 꿈결처럼 지나가더군요.
맨 앞 열이라 고개는 조금 아팠지만 티켓 값을 생각하면 그저 황송할 뿐이지요.
우리나라에선 지방 오케스트라도 최소 20,000원은 하거든요.
영화 티켓 값에 불과한 12,500원의 행복한 콘서트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멀리 프라하 성의 불빛이 판타스틱합니다.
카를교엔 여전히 젊은이들의 사랑이 불을 밝히고 있네요.
영화 <조스>의 배경음악으로 더 유명한 <신세계 교향곡>과 <슬라브 무곡>의 작곡가 드보르자크의 음악 인생은 비교적 평탄하고 명예와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푸줏간 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음악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스메타나가 지휘자로 있는 임시 극장에서 오페라 연주에 참여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어요.
미국의 닐 암스트롱이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기 직전 들었던 음악, 그러니까 우주에 최초로 울려 퍼진 지구인의 음악이 바로 <신세계 교향곡>이었는데 드보르자크는 우주선을 좋아했을까요?
드보르자크는 곡이 잘 풀리지 않거나 머리가 복잡해지면 프라하 중앙역 근처로 산책을 나가곤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프라하 중앙역을 드나드는 모든 기차를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는 기차를 좋아했어요.
그러므로 기차에 대해 해박한 지식도 갖고 있었던 건 당연한 일이지요.
프라하에서 출발하는 모든 열차 시간표를 훤히 꿰고 있어서 몇 시에 어디서 출발한 열차가 프라하 역에 도착하는지도 전부 알고 있었습니다.
신세계 교향곡은 드보르작이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1893년에 작곡했습니다.
신세계, 그러니까 'from the new world'라는 제목이 가리키는 곳은 곧 아메리카인 셈이에요.
미국의 초청을 수락하게 된 이유 역시 기차,
그곳에 가면 더 많은 종류의 기차를 보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서 채루하고 있던 거처가 기차역은 멀고 항구가 가까웠다고 해요.
기차역 대신 항구를 자주 드나들던 드보르작은 모든 배의 이름과 승조원의 이름을 암기했다지요.
드보르작은 열차가 늦어질 때면 승무원과 함께 승객들에게 사과를 하고,
증기기관차를 소유할 수 만 있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썼던 모든 곡을 모두 주겠다고 하기도 했다고 해요.
한 번은 열차 소리가 평소와 다른 걸 알아채고 그 사실을 차장에게 이야기하여 점검을 해보니 열차에 결함을 발견했다는 미담도 전해집니다.
그 정도의 기차 사랑이라면 기차역 옆에 묻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블타바강변의 치헬나에 내려가 보았던 백조 무리들도 잠을 청하고 있을까요?
프라하는 무겁고 진득한 느낌을 줍니다.
프라하의 예술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프라하에도 봄이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