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초콜릿 케이크 같은 성
프라하 흘라브니 나드라지역에서 기차를 타고 체스키 부데요비체에서 내리면 꼬마 열차가 기다리고 있어요.
꼬마열차로 갈아타고 체스키 크룸로프 역까지 갑니다.
그리고 또 택시를 타고 올드 타운으로 들어가야 하죠.
프라하에서 버스를 타면 쉽게 갈 수 있지만 유레일 패스가 있으니 좀 복잡하긴 해도 기차를 선택했어요.
Hotel The Old Inn은 마을의 중앙 광장인 스보르노스티 광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데자뷔 현상은 뭐죠?
정말이지 어디선가 분명 본 듯한 건물이,광장,골목이 눈앞에 펼쳐진 거에요.
그곳 역시 영화 아마데우스를 촬영한 곳이었습니다.
눈 덮인 마을 풍경이 동화책에 나오는 그림과 똑같아요.
게다가 간판 하나하나의 디자인이며 색깔이 너무 예쁘고 아기자기합니다.
사람은 드드문드문 나타나고, 고즈넉한데다가 조용하기까지한 분위기,그래서 더 맘에 드는 곳이네요.
딱히 어디를 찾아봐야지 할 곳은 없어요.
광장으로 통하는 골목길들이 서로 '이쪽으로 와~' 라고 하듯 예쁨이 지천이네요.
여름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들지 않을 정도로 지금이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체스키는 체코어로 '보헤미아의 것', 크룸로프는 '강의 만곡부의 습지'라는 뜻입니다.
푸른 전나무 가지와 길쭉한 열매, 그리고 음표가 그려진 낡은 머그잔을 엮어 쇠 틀에 주렁주렁 무심하게 매달아 놓은 상점,
빨강과 흰색 단 두 가지 색의 물감으로 화덕 속에서 돼지 통구이를 하는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그려놓은 나무 판,
자잘한 꽃을 엮어 만든 리스가 걸린 갈색 문,
한 조각 잘라서 갖고 가고 싶을 만큼 맘에 드는 노란 칠이 벗겨진 낡은 벽,
눈 쌓인 살구색 나무 의자,
떼어다가 화목 난로에 올려놓고 차 한 잔 끓여 마시고 싶은 양철 주전자,
앙증맞은 꽃과 울타리 쳐진 집 모양의 나무 조형물,
피노키오와 피에로가 유혹하는 기념품점,
강렬한 빨강의 손가락 하나가 '바로 여기야~ ' 하는 1790년부터 문구용품을 만들어온 Koh - I - Noor,
100년은 되었을 법한 나무 팔레트가 걸린 갤러리,
도무지 이곳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이토록 자연스레 나타낼 줄 아는 걸까요?
한 걸음 한 걸음을 그냥 떼어 놓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집과 간판과 벽과 창문이 나를 붙잡고 쉬 놓아주질 않습니다.
이곳 사람들의 예술적인 감각과 탁월한 안목이 부러울 지경이에요.
오래된 나무다리를 건넙니다.
이발사의 다리,
이 다리는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 옛적, 체스키 크룸로프 이발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이발소 집 딸이 당시 체스키 크룸로프를 지배하던 영주의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뭔가 수상한 기미가 보이지요?
영주의 아들과 이발소 집 딸의 결혼이라는 매치가 자연스럽지 않으니까요.
영주의 아들은 정신병 환자였어요.
이발사는 당연히 고생할 딸 걱정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이발사 딸이 목 졸려 죽은 채 발견되었어요.
이에 신부를 잃은 영주의 아들은 마을 사람들을 하나씩 죽여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범인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엄포를 내렸지요.
자신의 딸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보다 못한 이발사는 자신이 딸을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했습니다.
이발사는 당연히 죽임을 당했지요.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이발사를 기리기 위해 다리를 만들고 이발사의 다리라는 이름을 붙인 거랍니다.
다리에는 얀 후스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동상이 세워져 있어요.
체스키 크룸로프 성탑이 보이네요.
커다란 케이크 같아요.
원래 파스텔톤 컬러지만 한 단 마다 각각 다른 두 가지 색이 칠해져 있는 데다가 눈이 덮여 있으니 영락없는 생크림 무스 케이크를 연상시킵니다.
밋밋한 벽을 마치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듯 입체적인 느낌을 주게 만들었어요.
당시 영향력과 덕망을 두루 갖춘 체코의 한 귀족 가문이 누렸던 호화로운 생활양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더군요.
색이 바래긴 했지만 정갈한 레이스 테이블보가 덮인 원탁엔 푸른 장식이 그려진 도자기 주전자와 찻잔이 놓여있어요.
그 옆엔 과일이 담긴 보울, 그리고 촛대가 빠질 수 없지요.
기품 있는 부인이 우아한 손 놀림으로 에프터눈 티를 즐겼을 모습이 그려지더군요.
뚜껑을 덮으면 영락없는 가죽 소파지만 용변을 볼 수 있는 좌변기가 여럿 보입니다.
처음 보는 호른들이 유리 상자 속에 걸려 있어요.
호른의 종류로만 치자면 벨기에 브뤼셀의 악기 박물관에 있는 것보다 더 많네요.
아마도 영주가 호른 소리를 좋아한 모양이에요.
거무튀뮈하게 그을린 돌 벽에 칠을 하지 않고 그대로 놔둔 것이 고풍스럽고 소중합니다.
1576이라는 숫자가 동그란 문장 아래에 쓰여있어요.
162개의 계단을 올라간 캐슬 타워에서 내려다본 체스키 크룸로프는 그냥 그림이에요.
현실감이 없어요.
보고 있어도 그냥 꿈 속인 거죠.
검은 건 흘러가는 강물이에요.
눈 덮인 마을은 18세기 그대로입니다.
하얀 눈 아래로 언뜻언뜻 보이는 지붕과 벽의 색깔이 파스텔을 쏟아 놓은 듯해요.
성에서 내려와 다시 광장으로 갑니다.
골목 몇 개를 지나니 에곤 쉴레 아트센터가 보이네요.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 6.12, 오스트리아 - 1918. 10. 31)는 오스트리아의 화가입니다.
그는 분출하는 생의 에너지와 죽음의 공포를 관능적으로 표현했지요.
이곳에 그의 미술관이 생기게 된 것은 이유가 있어요.
체스키 크룸로프는 어머니의 고향이거든요.
에곤 쉴레는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발리와 이곳에서 동거를 했어요.
쉴레는 스물둘, 발리는 열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쉴레는 이곳에서 오래 살지 못했어요.
주민들의 반대로 그는 다시 빈 근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유분방한 사생활과 외설적인 그림이 문제였지요.
내가 아는 한,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화가 중 에곤 실레 보다 요절한 화가는 없습니다.
살아서는 물론이요, 죽어서도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죠.
그는 의혹과 혐의가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가지만 에곤 쉴레만큼 많은 스토리를 남긴 사람도 드물 거예요.
개인적으로 그의 그림이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에요.
음침하다.
괴기스럽다.
외설적이다.
그의 그림에 늘 따라다니는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세기말의 예술가들의 이야기 속에 그를 제외할 수는 없기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요.
<죽음과 소녀>라는 제목의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곡이 있어요.
뭉크 역시 <죽음과 소녀>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지요.
같은 제목의 쉴레 그림은 1915년 동거녀 발리와 헤어진 후 그린 그림입니다.
4년 간 이어진 그들의 사랑은 쉴레가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하면서 끝이 났어요.
그러나 쉴레는 결혼 후에도 발리와의 관계를 지속하려는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요.
언뜻 보면 죽음에 가까운 남자를 여자가 끌어안고 있는 듯 보여요.
그러나 자세히 보면 끌어안은 여자의 손은 확고하지만 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매달리는 여인보다 밀쳐내는 남자의 오른손에서 단호함이 묻어나네요.
기획 전시실을 지나면 에곤 쉴레의 상설전시관에 들어가게 돼요.
그림뿐 아니라 그가 디자인한 가구, 동상까지 있어요.
쉴레는 말을 배울 무렵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해요.
조부와 부친이 아마추어 소묘가로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는 분이었기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겠지요.
철로 기술자였던 조부와 역시 철도국 고급 관리였던 부친은 그의 미술가적 자질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곱 살 무렵엔 스케치와 드로잉으로 두툼한 노트 하나 가득 그려낼 정도로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어요.
공부를 소홀이 하고 그림 그리기에 빠져있는 실레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부친은 어느 날, 그의 드로잉들을 태워 버렸습니다.
실레는 스스로를 '약간 자신이 있고 또 약간 자신 없다'라고 할 정도로 그는 격정적인 그림과는 전혀 다른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사람이었어요.
부친이 사망한 후 그의 백부와 모친은 16세의 쉴레가 간절히 원하는 빈 미술 아카데미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보수적이던 그의 스승은
"사탄이 너를 토해 놓았다. 어디 가서 내가 너의 선생이라 말하지 말거라"라며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는군요.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쉴레는 학교를 중퇴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습니다.
클림트는 쉴레의 그림이 자신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며 그의 재능을 칭찬해 주었거든요.
그는 마치 쉴레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렸던 사람처럼 빈 미술계의 중심으로 이끌어 주었고, 든든한 후원자들을 소개했습니다.
쉴레는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자화상은 실제 에곤 쉴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보기 드문 미남이에요.
머리는 항상 단정했고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 잘 다려진 바지에 매일 면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지요.
화가라면 의례히 볼 수 있던 손톱 밑의 물감 자욱도 보이지 않았으며 빈곤해도 궁색해 보이는 옷은 절대 입지 않았습니다.
그 흔한 작업복 차림의 사진을 찾아볼 수 없네요.
돈을 헤프게 쓰면서도 가난한 척했고, 화가의 고단한 삶을 추구했지만 실제로는 보다 안락하고 평온한 삶을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선택한 배우자는 지극히 헌신적이었던 모델이자 동거녀였던 발리가 아닌 부유한 철도 공무원의 딸이었죠.
자신과 비슷한 가정에서 자란 여성이 맘에 들었나 봅니다.
사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외설적인 구설수와는 달리 여자관계는 비교적? 건전한 편이었습니다.
악명 높은 스페인 독감이 빈을 휩쓸던 1918년, 임신 6개월이던 부인이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쉴레 역시 사흘 뒤 아내의 뒤를 따랐습니다.
스물여덟의 짧은 생을 살다 간 화가는 총 300 여점의 작품 중 100여 점이 자화상이에요.
자화상 속 화가는 자기 과시적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자기변호적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쾌락을 좇기도 하고, 성적 욕망과 운명의 비극 사이에서 서성였습니다.
그의 그림 성향 때문에 어린 소녀를 유괴했다는 죄목과 청소년을 유혹하는 포르노물을 그린다는 이유로 21일간의 구류형과 3일간의 징역형을 살기도 했어요.
물론 그 사건으로 그의 그림이 더 유명해지기도 했지요.
누구나 감추고 있는 인간의 에로티시즘과 비틀림의 미학을 표현한 그의 미술 시각은 아마도 시대를 먼저 살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겨울에는 어둠이 쉬 내립니다.
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불빛이 하나 둘 켜지고 문을 열었던 몇 개 상점들은 덧문을 굳게 닫습니다.
체스키 크룸로프 사람들이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마을을 지키고 있음이 다행이고 고맙습니다.
1851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싱거 미싱이 호텔 복도에 놓여있어요.
그 풍경이 낯설지 않은 것은 호텔 이름이 올드 인 이어서만은 아닐 테지요.
인적 드문 밤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방으로 돌아오니 마치 시골 외갓집에 온 듯 푸근하고 편안합니다.
겨울 동화책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듯 아름다운 이곳을 잊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