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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Dec 13. 2016

살로메와 유디트의 남자

목 잘린 남자 이야기를 담은 오페라와 회화




영화 뮤지엄 아워스의 배경이 된 Wien Kunsthistorisches Museum


지루한 부분도 있었어요.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멋진 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녜요.

특별한 스토리도 없어요.

그런데 멈출 수 없었죠.

영화 뮤지엄 아워스의 묘한 끌림은 멋들어진 미술관의 공간과 그림 때문이었습니다.

6년째 미술관 안내원으로 일하고 있는 요한은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해요. 

'등 뒤에 있는 커다란 나무문은 대문 같고 앞에 둘러쳐진 밧줄은 울타리 같다.'




미술관과 박물관의 안내원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아요.

짐작하건대 그림처럼 그저 앉아서 보내게 되는 미술관의 시간을 견디기 어려워서가 아닐까 합니다.

딱히 어떤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요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페이가 높은 것도 아닐 테고요. 

피터 브뤼겔의 그림을 설명하던 도슨트가 기억에 남더군요.

비엔나에 다시 가게 된다면 저곳부터 가야지 했어요.

그리고 1년 후 그곳에 갔습니다.


이탈리아에 메디치 가문이 없었다면,

오스트리아에 합스부르그 가문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못한 작품들이 많겠지요?

개인적으로 19세기의 예술가들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화가와 문학가들에 대해서요.

빈은 그림과 음악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도시예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말러 등 클래식의 중심이 되는 음악가들이 빈에서 활동했고 빈에 묻혔습니다.

슈베르트 피아노 음악 하나 들으면서 시작할게요.


Schubert Fantasy in f minor D.940 임동혁, 김정원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이 빈을 대표하는 화가이죠.

영화 뮤지엄 아워스에 등장하는 미술사 박물관과 빈 슈타츠오퍼의 오페라, 

그 두 가지만 해도 여행은 짭짤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입니다

흐뭇한 미소가 번지네요.


빈의 구시가는 중세부터 이어지는 좁고 불규칙한 길로 얽혀 있습니다. 

거의 모든 볼거리가 링슈트라세에 모여있어서 링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걷다 보면 차례로 만나게 되지요.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건물 앞에서 훤칠하게 큰 신사에게 물었지요.

그곳은 추측대로 국회 의사당이었습니다.


                                                                          빈 국회의사당




친절한 신사는 주변 건물들 이름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어요. 

시민공원(Volkgarden) 국회의사당(Parlament), 국회의사당 옆의 시청(Rathaus), 시청 건너편의 부르크 극장까지요.

덧셈을 물어봤는데 뺄셈 곱셈 나눗셈까지 한 번에 가르쳐준 셈이죠. 

갑자기 많은 걸 알게 되었되었으니까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무척 밝고 화사하다는 것을 느낌이 들더군요.

건물들의 색상이 화이트나 크림색, 밝은 노랑 등 색이 대부분 밝기 때문입니다.

쉔브룬 궁전이 밝은 노랑빛인 이유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좋아했던 색이어서 라는군요.

그래서 빈 시민들은 그 노랑을 마리아 테레지아 색이라고 부른다고 해요.


시민공원
빈 시청


하얀색 건물은 국립도서관,     

실제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은 관광객들이 출입할 수 없어요.

대신 2십만 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는 전시실인 스테이트 홀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모자이크 지붕이 인상적인 슈테판 대성당은 빈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에요.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소년 성가대로 노래를 불렀던 곳입니다.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한 곳이며, 10년 후 장례식이 치러진 곳이기도 하지요.        


성 삼위일체 탑(페스트 탑)


슈테판 대성당에서 국립 오페라 하우스(빈 슈타츠 오퍼)까지 이르는 비엔나의 중심가 케른트너 거리,

그곳은 보행자 전용 거리로 세계 유명 디자이너의 상품들이 즐비하지만 여행자의 관심을 끌진 못합니다.


프라다, 구찌, 루이뷔통 등 명품 거리, 그날 따라 사람이 없던 한산한 모습


빈에는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 평가받는 빈 필하모니(WIEN PHILHARMONIE)와 빈 심포니(WIEN SYMPHONIE)가 있습니다. 

빈 악우협회 황금홀 (Wien Musikverein Goldener Saal), 이럴 때 어색함을 느끼는 건 나 혼자 만일까요?

명칭 그대로 무지크페라인이라고 하면 좋을 텐데 빈 악우협회라는 한자음을 달아놓은 게 영 마땅치 않습니다.

빈 미술사 박물관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도 마찬가지예요.

쿤스트히스토리쉐스 무제움 빈이라고 명칭 그대로 불렀으면 자연스럽지요.

오페라는 어느 나라에서 공연을 하든지 원어로 노래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언어가 바뀌면 음악의 맛이 영 딴 판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지요.

쉽게 말해 춘향가를 영어나 프랑스어로 노래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판소리의 깊은 감칠맛이 나지 않겠지요?

 

하던 얘기로 돌아갈게요.

매년 1월 1일 정오에 빈 무지크페라인 골드너 잘에서 빈 신년음악회가 개최됩니다.

정식 명칭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Neujahrskonzert der Wiener Philharmoniker)예요.

요한 슈트라우스와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왈츠와 폴카 등의 대표되는 빈 춤곡이 연주되는데요.

상임 지휘자를 두지 않는 빈 필하모닉은 매년 신년 음악회의 객원지휘자가 누구냐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앙코르곡으로는 보통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는데 청중들이 박자에 맞추어 손뼉을 치는 것으로도 유명하죠.

그때 지휘자가 청중들을 바라보며 지휘하게 되는데 그 또한 관습처럼 이어지고 있고요.

빈 필하모닉은 창단한 지 155년 만인 1997년 처음으로 여성 하피스트를 정식 단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154년 동안 금녀의 집이었지요.

물론 지금도 3~4명 정도 될까요? 

역사적인 전통이기도 하지만  출산에 따른 휴직기간 중 연주 기량이 저하된다, 또는 여성의 체력으로는 리허설이나 콘서트, 연주여행에서 오는 과로를 견딜 수 없다, 등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여성의 입단을 거부해왔던 겁니다.

2009 빈 신년음악회, 라테츠키 행진곡 다니엘 바렌보임
빈 호프부르크 궁전 입구


500년의 역사를 가진 빈 소년 합창단은 왕궁 예배당(여름철을 제외한 일요일)의 미사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빈 소년 합창단


빈은 수준 높은 청중과 훌륭한 연주회장을 갖고 있어 명실공히 음악의 도시입니다.

빈 슈타츠오퍼에서 맨 처음 공연된 작품은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에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 밀라노의 라 스칼라,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프라하 루돌피눔 등 오래된 콘서트홀을 다녀보았어요.

그곳들은 외관보다 내부 구조가 더 아름다운데 각각 다른 게 신기할 정도예요.

로비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넓은 계단과 대리석 기둥이 당당하면서 기품이 넘쳐요.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에서 보던 화려함과 다르지 않더군요.

화장실에 가다가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에 나오는 장면을 표현한 호화로운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는 방을 보게 되었어요.

예전엔 '고블랭살'이라 불렸지만 현재는 구스타프 말러 홀이라는 이름을 쓰죠.

말러의 초상화가 태피스트리의 중앙에 놓여 있었습니다.

 

빈 슈타츠오퍼(빈 국립 오페라 극장)
말러 홀


발코니석을 예약했는데요. 

라 스칼라와 달리 각각의 룸에는 옷걸이와 거울이 마련되어 있어 따로 외투를 맡기지 않아도 되어 편하더군요.

거울을 보고 얼굴 없는 사진을 찍어봤어요.

의자는 빨간색, 벽지는 벽돌색, 조금씩 톤이 다른 붉은색이 촌스럽거나 어색하지 않아요.

좌석 앞에는 자막을 보여주는 모니터들이 앙증맞게 달려있습니다.

오케스트라 박스에 몇몇 연주자들이 악기 소리를  고르고 있네요.

그런데 영 안 어울리는 풍경이 하나 있습니다.

무대 가림막이 현대적인 의상을 입은 여인이 앉아있는 프린트예요.

고풍스러운 오페라홀의 분위기를 깨트리는 이미지라 살짝 못마땅했습니다.

 

오페라 티켓 암표상
오페라 자막을 영어로 보여주는 모니터(좌석마다 붙어있다)


오페라 살로메는 한 마디로 충격입니다.

근친상간에 스트립 쇼 격인 일곱 베일의 춤에서는 오페라 가수가 전라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어 19금 오페라라고도 하지요.

선혈이 낭자하게 참수당한 머리까지 오싹하고 역겹기가 도를 넘습니다.


이 괴기스러운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음악을 작곡한 사람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독일 1864-1949)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의 음악 <정화된 밤>을 처음 들었었지요.

현악 4중주가 펼치는 밤의 소리는 충격이었어요.

새로운 별을 본 느낌이랄까?  낯설지만 아름다웠습니다. 

니체가 쓴 소설「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제목은 익히 들어 익숙하리라 생각합니다. 

그가 작곡한 동명의 교향시(1896)「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도 있습니다. 

니체의 원작을 바탕으로 해당 챕터의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여 모두 9개 부분으로 구성했는데요.

니체의 소설은 몰라도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분 30초 남짓한 인트로 부분은 들어본 사람이 대부분일 거라 짐작합니다. 

우렁찬 트럼펫 소리를 시작으로 황금빛 금관과 함께 때려 부술 듯 두드리는 팀파니 소리를 들으면 마치 세상이 열릴 때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하는 감흥을 갖게 되지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삽입되어 더 유명해졌습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곡


살로메는 ‘팜므파탈(Femme fatale) 신화’의 극단적 표현입니다.

오페라 [살로메]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영국 1854-1900)의 [살로메](1891)를 원작으로 만들었어요. 

[살로메]는 오페라로 만들어지기 전, 파리에서 연극으로 초연되었는데요.

오스카는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려 법정 구속되었고, [살로메]에는 주홍글씨가 새겨졌지요. 

많은 극장들이 상연을 거부했습니다. 

물론 모든 극장이 그랬던 건 아니에요.

와일드가 태어난 영국의 극장들은 문을 굳게 닫아버렸지만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간간히 공연이 되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는 관객들의 반응이 워낙 뜨거워서 돈벌이가 꽤 쏠쏠한 연극이었기 때문이지요. 

1903년 베를린 공연 때도 입소문에 힘입은 관객들이 대거 몰렸습니다. 

당시 39세였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객석에 앉아 있었고 슈트라우스는 와일드의 희곡을 대본으로 각색하여 오페라로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인 1905년, 독일 드레스덴의 궁정 오페라 극장(드레스덴 젬퍼 오페라)에선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노골적이고 충격적인 오페라가 초연되었습니다. 


Oscar Wild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기원전 1세기. 유대의 왕 헤롯의 궁전에서 화려한 연회가 열리고 있다. 

의붓아버지인 헤롯왕의 추파에 넌덜머리가 난 16세의 공주 살로메는 혼자 연회장을 빠져나와 정원을 산책한다. 경비대장 나라보트는 달빛이 비치는 정원을 산책하는 공주의 아름다움에 한눈에 반해버린다. 

공주를 바라보지 말라는 시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라보트는 공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산책을 하던 살로메는 죄인은 회개하라고 외치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우물 감옥에 갇혀있는 세례 요한(오페라 속의 이름은 요카난)이다. 

그가 말한 죄인이란 왕을 시해하고 남편의 이복동생인 헤롯과 결혼한, 살로메의 어머니 헤로디아스를 말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살로메는 자신의 미모에 빠져 있는 경비대장 나라보트를 꼬드겨, 우물 속에 갇힌 죄인을 데려오라고 지시한다. 

우물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더러운 누더기에 검은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다. 

그 사이로 드러난 살결이 달빛에 비쳐 더욱 파리하다.

그의 붉은 입술이 강렬한 에너지로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니 살로메는 요한의 치명적인 모습에 그만 넋을 잃는다. 

헤롯과 헤로디아스의 죄를 계속 외치던 요한은 살로메에게 “이 여인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그녀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르듯 욕정을 느낌과 동시에 서슴없이 말한다. 

“당신의 하얀 피부를 만지고 싶어요.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어요. 

당신의 붉은 입술에 키스하고 싶어요.” 

그러나 이렇듯 과감하게 드러내는 욕정은 오페라의 시작에 불과하다. 

살로메가 다른 남자에게 구애하는 모습에 충격과 실망을 한 경비대장 나라보트는 그녀 앞에서 자결을 한다. 

그러나 살로메는 최면에 걸린 듯 나라보트의 죽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요한에게 구애의 애원을 계속한다. 

하지만 요한은 “간음이 낳은 저주받은 소돔의 딸이여,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갈릴리의 그분(예수)뿐’이라는 말을 남긴 채 스스로 우물 아래로 들어간다.      

살로메가 연회장에서 사라진 걸 안 헤롯왕이 살로메를 찾으러 나온다. 

요한의 비난이 다시 들려오자 헤로디아스는 제발 저 소리 좀 멈추게 하라고 외치고, 헤롯은 살로메에게 자기를 위해 춤을 춰달라고 부탁한다. 

살로메가 춤을 추지 않겠다고 하자, 헤롯은 춤을 추면 왕국의 반이라도 떼어주겠다며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노라며 살로메를 구슬린다. 

그러자 살로메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마치 요한에게 품은 욕망을 드러내듯 관능적인 몸짓은 에로틱하기 그지없다. 

베일을 한 겹씩 걷어내며 춤을 추는 살로메는 헤롯의 넋을 완전히 빼놓는다. 

나신이 된 그녀가 호색적인 의붓아버지 헤롯왕의 발밑에 쓰러진다. 


일곱 베일의 춤


요염하고 음탕한 춤의 선율이 마음을 흥분시키고, 넋 나간 헤롯은 그녀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살로메가 “요한의 머리”라고 말하자 왕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른 어떠한 것도 줄 수 있으나 그것만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비수 같은 목소리로 요한의 머리를 외친다. 

헤롯은 마지못해 손가락에서 권위의 상징인 반지를 뽑아 그녀에게 던진다. 

살로메의 명령으로 사형 집행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의미이다.     


귀스트프 모로의 춤추는 살로메

                    

칼을 든 망나니가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B플랫의 더블베이스 솔로가 어둡고 무겁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 피로 칠갑을 한 망나니가 요한의 목을 은쟁반에 들고 등장함이 자못 충격적이다. 




마침내 오페라 사상 전무후무한 장면이 벌어진다. 

은쟁반에 담겨 나온 죽은 요한의 머리를 본 살로메의 목소리가 부르르 떨린다. 

‘당신에게 키스하지 못하게 했지. 하지만 이제 키스할 거야, 그대만을 사랑해, 그대의 아름다움에 굶주려 있고, 그대의 육체에 목말라 있어. 사랑의 신비는 죽음의 신비보다 더 위대해.’ 하며 피투성이가 된 입술에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고 극은 절정에 이른다.      

저주 어린 사랑의 언사를 내뱉는 살로메는 베어진 요한의 목을 한껏 희롱한다. 

허나 영혼의 교감이 없는 소유욕은 채워지지 않는 법, 어느새 망나니처럼 붉게 물든 육체가 사랑을 탐하는 손길은 더없이 공허해지고 만다. 

에로스 못지않게 강렬한 게 광기(狂氣)이다. 

죽음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의 심연 앞에서 느끼는 무력과 권태에 살로메는 잘린 요한의 목을 껴안고 광기를 발산한다. 

퇴폐적인 몸짓의 춤을 추며 욕정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정점을 달리는 긴장 관계는 결국 피를 부른다. 

살로메가 피범벅이 된 요한의 잘린 목을 들고 한참이나 애무한다. 

결국 자신의 뜻을 이루었건만 차갑고 퍼런 입술만을 쟁취했을 따름이다. 

우울에 가득 차 미칠 수 있는 기운, 바로 그 에너지가 광기이다. 

십 대 소녀의 집착적 구애와 스트립 댄스, 잘린 목의 입술에 키스하는 시체 애호증은 결국 헤롯왕의 경악을 불러일으키며 살로메의 죽음을 부르는 행위로 귀결되고 만다.

헤롯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미친년을 죽여라”라고 고함친다. 

왕의 호위병들이 재빨리 들어와 그들의 방패로 살로메를 누른다. 

이렇게 하드코어적이고 광기 어린 굿판은 핏빛으로 귀결된다.   

     



오페라 살로메가 초연되었을 당시, 관객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안 봤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는 <살로메>의 공연을 27년이나 금지했어요. 

어떤 이들은 그 광기 어린 장면을 시신 애호증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죽인 자와 죽은 자를 잇는 표정과 시선은 자못 인상적이에요. 


오페라를 이끌어 나가는 오케스트라는 무대 아래쪽 박스에 자리합니다.

대부분 소편성으로 구성되지만 살로메는 달라요. 

4관 편성에 여덟 개의 콘트라베이스와 하프 두 개, 100여 명의 연주자가 필요해요. 

게다가 첼레스타, 탐탐, 하프 등의 다채로운 악기들이 신비하고 오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파격적인 소재에 어울리도록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감행한 것이에요. 

목소리와 오케스트라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감겨드는 관능적 혼융이지요. 

거기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살로메의 강박적인 팜 파탈의 모티프를 주도하는 클라리넷이 요한을 향한 살로메의 집요한 욕망을 표현합니다. 

오케스트라는 시종 화려하다 못해 강렬한 음향으로 객석의 사람들을 엑스터시에 가까운 무아지경으로 몰고 가요. 


살로메는 여느 오페라와 달리 서곡이 없습니다. 

단막이기에 당연히 전주곡, 간주곡도 없어요. 

연주 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로 오페라로서는 아주 짧은 편인데  그게 단점이에요. 

그러나 동시 상영처럼 다른 작품과 묶을 수도 없어요.

대체 어느 작품이 살로메의 앞이나 뒤에서 들러리를 설 수 있느냐는 거죠. 

20세기의 새로운 오페라 <살로메>의 충격은 당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맹목적인 사랑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원시적인 본능에 근접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요한은 자신이 죽음으로써 신의 뜻을 이루고자 했어요.

반면 요한의 입술에 이끌린 소녀의 내재된 감정이 정염과 만나 폭죽이 터지듯 폭발한 살로메는 에로스 그 자체예요. 

그러나 페티시적 집착으로 뒤틀린 에로스는 상대를 어루만져주는 정열적 사랑이 아니라 닥치는 대로 태우고 파괴하는 공격적인 모습으로 죽음의 본능을 향해 달려갑니다. 

육체의 몸부림은 그렇게 차가운 미장센과 프레임 속에서 서서히 죽음을 초대하죠.

       

너무나 자연스레 관능과 퇴폐, 광기와 에로티시즘의 절정으로 치닫는 하이라이트는 일곱 베일의 춤(Dance of the seven veils)입니다. 

그저 무작정 옷을 벗어던지는 게 아니에요. 

일곱 개의 천으로 몸을 감싼 채 춤을 추기 시작해서 누드가 되어 끝을 맺는 매우 선정적인 춤이지요.

관객들은 소프라노가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그리고 얼마나 노출을 하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은 초연부터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호기심입니다. 

사실 이 대목은 춤이 아닌 음악만으로도 대단히 아름답고 뛰어나지만 관객의 가슴에 어떻게 불을 지르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임에 확실하죠. 

비교적 대중적인 연극이나 뮤지컬, 현대 무용에서도 이처럼 완전히 나신이 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하물며 엄격함을 지키는 오페라에서 이 장면은 가히 충격이지 않을 수 없지요. 

그것도 100년도 더 훨씬 전에 말이에요. 

일곱 개의 베일을 하나씩 벗어던지며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숨바꼭질을 하며 에로틱한 긴장감과 두려움, 

거절과 허락 사이의 갈등은 마치 로리타의 기질을 연상케 하는 의붓아버지의 관음증을 한껏 자극하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극대화합니다. 


이때 오케스트라는 동양적인 선율로 시작해 왈츠로 절묘하게 고조되어 가요. 

햇빛에 영롱하게 빛나는 오묘한 빛깔의 비단 같은 관현악을 추구했던 슈트라우스의 의도가 효과적으로 실현된 부분입니다. 

마치 요한에게 품은 욕망을 표현하듯 살로메의 관능적인 몸짓은 에로틱하기 그지없지요.

베일을 한 겹씩 걷어내며 살로메는 헤롯의 넋을 완전히 빼놓아요. 

단 한 소절의 노래도 없이 오직 에로틱한 스트립 쇼 걸처럼 춤을 추어야 하므로 노래만 해 오던 오페라 가수들에게는 상당한 무리수로 다가오지만요. 

마지막 베일을 벗어던지고 마침내 알몸이 되기까지 약 10여 분 동안, 관객들 역시 살로메의 베일이 벗겨지는 과정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긴장감을 맛보게 됩니다. 

관객의 집단적 관음증을 유발하는 시점이 아닐까 싶어요. 

욕망에 대한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퇴폐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 배경에 흐르는 음악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흠뻑 빠지게 되는 매력이 있어요.

20세기의 새로운 화성이 완성미 높게 펼쳐지고 결국 엽기의 극단을 달렸던 사랑은 결국 자기 파멸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원래 성서에는 살로메가 어머니 헤로디아스의 사주에 의해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여주인공 살로메가 요한의 목소리와 아름다운 몸에 반해 헤롯에게 그의 목을 요구하게 만들었죠. 

그러니까 요한의 목은 잔칫날 의부 헤롯 왕 앞에서 아름다운 춤을 춘 대가로 받은 상인 셈입니다. 

살로메가 잘린 요한의 목에 입 맞추는 장면은 오스카 와일드가 지향했던 탐미주의의 극치가 아닌가 싶어요.

와일드는 마태복음의 구절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성경 속에서 잠시 등장하는 살로메라는 여인을 중심으로 비극을 만들어낸 것이죠. 

살로메는 성경에선 그저 어머니의 요구를 위해 왕에게 요한의 목을 요구했던 수동적인 면이 있었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성경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물을 향한 욕구를 드러내는 여인의 심성을 부여했어요. 

또한 근친상간적인 요소와 선지자를 향한 한 여인의 집요한 사랑 등 19세기 말 당시 영국의 보수적인 사회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내용을 담았다는 점도  특징이다.        


그날 빈 슈타츠오퍼의 살로메에 출연한 가수들은 모두 웰터급 이상이었어요.

왕과 왕비, 심지어 16세의 살로메 역을 맡은 프리마돈나 까지도요.

일곱 번 째 마지막 베일을 벗는 순간 라이트를 끄는 바람에 관중들은 아쉬웠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노래와 연기, 그리고 오케스트라는 최고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요카난 역을 맡은 바리톤 가수의 음색이 깊고 묵직한 것이 맘에 들었지요.

 

커튼 콜
살로메


카페 첸트랄은 1868년 처음 문을 연 이래로 지금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전통 있는 카페입니다. 

럭셔리한 인테리어와 고풍스러운 느낌으로 더욱 사랑을 받고 있는데,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 카페를 드나들던 유명인들도 많지요. 
카페 첸트랄 입구 쪽에는 앉아있는 마네킹은 페터 알텐베르크입니다.

생소한 이름이지만 빈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진 작가라고 해요.

그는 이 카페를 자신의 주소지로 사용할 정도로 카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죽어서도 카페에 앉아있는 걸 보면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네요.

                                  

카페 첸트럴


비엔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겠죠. 

그는 숱한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지만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면 늘 아프리카풍의 스먹 같은 인디고 블루의 길고 헐렁한 디자인의 작업복을 고집했어요. 

그건 클림트가 동반자라고 여겼던 디자이너 에밀리 플뤼게가 만든 옷입니다.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금세공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일까요?

그는 유독 금색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클림트는 사실 수수께끼 같은 화가예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지요.

게다가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습니다.


트램에서 내려 몇 분 걷지 않았는데 옥색 지붕이 보입니다.

벨베데레 궁전이에요.

'좋은'이라는 뜻의 bel, vedere는 전망이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 영화 <전망 좋은 방>이 떠오르는 이 이름은 이탈리아 건축 용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상궁과 하궁으로 나뉘어 있는데 클림트의 그림이 목적이므로 상궁 티켓만 구입했어요.

세계에서 그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입니다.


벨베데레 궁전 상궁


꽃이 흩뿌려진 초원 위의 두 연인이 금빛 아우라 안에서 황홀하게 취해 있습니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여자의 표정은 아기같이 순수해 보입니다.

남자를 안은 손과 무릎 꿇은 그녀의 발에서 평화롭고 황홀하고 충만한 사랑이 전해집니다.

한 점의 자화상도 그리지 않고 여성과 풍경만을 그린 클림트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는 작품은 단연 ‘키스’ 일 겁니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만큼 아름다운 것도 드물지 싶습니다. 

에로스와 아름다움, 사랑과 열정으로 직조된 매혹의 태피스트리는 최고의 값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많은 상품에 그의 그림이 사용되는 사실 또한 클림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의례적으로 구입하던 전시 도록마저 외면한 건 방금 본 클림트의 황금빛 비밀과 유혹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클림트 입맞춤


구약성서 속 유디트를 팜파탈로 표현한 ‘유디트’도 벨베데레 궁전에서 만날 수 있는데요. 

남자의 잘린 목을 들고 희열에 찬 모습을 그린 유명한 작품이 바로 유디트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보티첼리, 카라바조와 루벤스를 거쳐 20세기 초의 클림트에 이르기까지 역사상의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 소재로 유디트를 선택했지요. 

당시에는 유일했던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6)가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1618년경)>가 특히 유명합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디트의 일화는 ‘아름다운 여인의 대담한 살인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성(性)과 죽음을 동시에 표출할 수 있는 드라마적 요소를 갖춘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어요.

 

유럽판 논개라고 할까요? 

유디트는 유대의 산악도시인 베툴리아에 살았던 아름답고 정숙한 과부입니다.

홀로페르네스가 지휘하는 아시리아 군대가 베툴리아를 침략하게 되자 유디트는 그녀의 미모를 이용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함께 연회를 즐겨요.

연회가 끝날 무렵 적장 홀로페르네스와 단둘이 남은 그녀가 만취한 그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유디트는 성녀이며 영웅이지만 성적 매력을 이용하여 팜 파탈의 이미지로 대체되기도 하지요. 

유디트는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작가의 개성에 따라 성격과 표정의 표현방식이 현저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후 클림트까지 많은 화가들이 유디트를 그렸는데 베어진 목을 들고 희열에 차 있는 모습이 살로메와 닮아있어요.

계속 목 잘린 남자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글쓴이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겠다 하는 걱정이 되네요.   

 

클림트 이전의 예술가는 대부분 유디트가 적장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버리는 행위에 초점을 맞춰 그림을 그렸어요. 

반면 클림트는 유디트를 승리감에 도취해 황홀경에 빠져 있는 여인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지요.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은 채로 유혹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클림트의 유디트는 매혹적인 힘을 과시하며 감상자들을 에로틱한 상상으로 이끌고 있는데 그 힘이 매우 강합니다.


그녀의 한 쪽 눈에 찍힌 금색 물감이 화룡점정같아요. 

유디트의 단 한 번 눈길에 중독되어 목이 베어지는지도 몰랐던 적장 홀로페르네스처럼, 나 또한 최면이라도 걸린 듯 시간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도 모르고 그림 앞에 서 있었습니다. 

클림트는 그림을 그릴 때 액자까지 염두에 둘 만큼 섬세하게 액자와 그림의 조화를 고려했습니다. 

유디트의 액자 윗면에 제목이 적혀있었는데 그 글씨체는 빈 분리파의 타이포그래피(글씨체)와 똑같다고 하더군요. 


유디트를 소재로 한 그림은 살로메만큼 많습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데일 것 같은 팜므파탈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 꺼리는 흔치 않으니까요.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린다고 했습니다. 

유디트나 다나에, 살로메의 스토리를 모르면서 그림을 보는 건 색의 조화와 면의 분할을 보는 의미 이상은 아닐 겁니다. 

남성 화가인 카라바조가 그린 유디트와 여성 화가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는 다릅니다. 

카라바조의 유디트는 칼로 남자의 목을 자르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망설임과 혐오감이 가득하며 멈칫거림이 보입니다. 

하지만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억셉니다. 

굵은 팔뚝과 미간을 잔뜩 찡그린 표정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꼭 베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지요. 


아르테미시아 젠틸리스키의 유디트
카라바조의 유디트


그러면 클림트의 유디트는 어떨까요? 

검은 머리칼에 반쯤 벌린 입과 눈 속에 일렁이는 미소가 신비로운 황홀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마치 적장의 목을 베는 순간 오르가슴을 느낀 여인처럼 말이지요. 

온통 황금빛인 그의 그림에서는 화려한 치장에서 느껴지는 거부감이 들지 않더군요. 

그러므로 금빛 마술사라는 표현은 적절합니다. 

화면 오른쪽 하단에 목 잘린 남자의 모습이 살짝 보입니다.


클림트의 유디트


다름이 느껴지죠?

클림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에로스의 여성입니다. 

프로이트는 여성이 자기 몸에 없는 것을 강렬하게 욕망하며 결국 자신이 그 욕망의 대상으로 직접 변해간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가 죽는 날까지 생각한 것은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였습니다. 

예술 사회학자 아널드 하우저는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에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 짝이다.”라고 했습니다. 

최초의 팜므파탈은 이브이며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은 에로티시즘이 아닐까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곧 쾌락이라고 하니까요. 

이 작품 외에도 벨베데레에서  ‘요하나 슈타우데의 초상’ ‘아담과 이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
요하나 슈타우데의 초상


영화 ‘우먼 인 골드’를 보셨나요?

오스트리아 유대계 금융업자의 딸이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원자이자 뮤즈였습니다. 황금빛 연못에서 아델레가 수련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을 표현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의 모델이지요. 클림트는 그를 모델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클림트가 죽고 난 뒤 아델레는 자신의 집에 클림트를 기리는 ‘성소’를 마련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했습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초상


클림트의 또 다른 작품 베토벤 프리즈를 보러 제체시온을 찾았습니다.

프리즈(frieze)란 방이나 건물의 윗부분에 그림이나 조각으로 띠 모양의 장식을 한 것을 뜻합니다.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의 제9교향곡을 회화적으로 재현한 작품이지요. 


제체시온


이해를 돕기 위해 [네이버 지식백과]의 기사를 첨부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분리파(제체시온 Secession)의 주요한 인물이었다. 종합예술을 모토로 세웠던 분리파는 1902년 제14회 전시에서 그들의 주장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단순히 예술작품을 거는 것이 아니라, 전시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에서부터 전시공간에서 들려줄 음악의 선곡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종합적인 구성을 하였다. 

특히 조각가 막스 클링거(Max Klinger)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로, 그의 베토벤 흉상을 전시장 가운데에 설치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천재적인 작곡가 베토벤에 대한 찬양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음악가들은 앞 다투어 그에게 헌정하는 작품을 내놓았고, 화가나 조각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점에서 분리파 역시 전시 전체가 베토벤을 기리도록 구성하였다.

여기서 클림트는 전시장 세 벽면을 활용한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를 제작했다. 

본래 이 작품은 전시기간 동안에만 잠시 세워졌다 철거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리 견고한 소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호프만(Josef Hoffmann)이 구성한 중성적인 느낌의 석회 면에 프레스코와 금박 등을 이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파기되지 않고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작품은 <베토벤 프리즈> 중 첫 번째 장면인 ‘행복의 열망’ 중 한 부분이다. 

여기서 클림트는 고통받는 연약한 인간들이 행복을 가져다 줄 용감한 기사에게 간청하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금색의 갑옷을 입고 있는 이 늠름한 기사는 거대한 장검을 들고 의연히 서있다. 

그는 공명심과 동정심이라는 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기사로, 장검으로 상징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두 손을 모은 여인들은 그를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프리즈는 클림트의 세 학문 천장화처럼, 비난을 받는다. 

인물의 표현에 생기가 없고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프리즈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적대적인 힘’ 역시 등장하는 여성의 누드가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논란으로 전시는 실패로 돌아갔고, 급기야 분리파 내부에도 갈등이 생겼다. 

결국 초창기부터 함께한 클림트는 자신의 동료인 호프만,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 오토 바그너(Otto Wagner) 등과 함께 분리파를 떠난다. 

이후 그는 사회 문제나 정치적인 사안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개인적인 작품만을 했다.            




베토벤 프리즘


제체시온에 간 이유는 물론 베토벤 프리즘 때문이지만 그야말로 딱 그 작품 외엔 딱히 볼거리는 없었습니다.

이보다 더 단순할 수는 없다는 듯한 현대 작품이 드문드문 걸려있었어요.

모차르트가 바흐보다 우수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베토벤보다 말러의 음악이 발전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보다 피카소가 더 훌륭하다거나, 고흐보다 앤디 워홀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술은 발전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변화할 뿐이지요. 

바로 오늘이 예술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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