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기억의 온도 4 (포지타노, 나폴리, 소렌토, 폼페이)
모라끄와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바르비노의 집을 떠났다. 어느 도시든 사나흘만 머물면 대략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알만하면 떠나게 되는 게 여행이다. 나폴리와 소렌토를 거쳐 포지타노 까지 가야 하는 날이다. 나폴리로 가는 도중에 로마가 있지만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하는 스케줄이다. 로마를 마지막까지 남겨두고 싶은 마음에서 잡은 스케줄이다.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엔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기차가 출발하는 즈음부터 또다시 비가 내렸다. 나폴리까지 가는 기차 역시 프레치아 로사이다. 모라끄에게 부탁하여 얻은 보온병의 커피를 마시며 피렌체에의 아쉬움을 달랬다.
나폴리에서 소렌토로 가는 사철, 그러니까 우리나라 국철 같은 기차로 갈아타는 것은, 같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조금 복잡하다. 남편에게 짐을 맡기고 일단 타바키에서 기차 티켓을 샀다. 이젠 거의 가이드 수준으로 순서를 척척 꿰고 있다. 남편이 신통하다고 한다. 어디서 어떻게 갈아타야 하는지 방법을 알고 있지만 확인 차 어떤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늙수그레한 남자는 계속 따라오며 친절을 베풀었다.
“여기부터는 나도 알아요. 고맙습니다, 이제 가셔도 돼요”
그러다 보니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 올라오는 건 에스컬레이터인데 내려가는 건 계단밖에 없다. 어느새 따라온 그가 내 트렁크를 집어 들더니 성큼성큼 내려가는 게 아닌가?
“이거 뭔가 수상한데, 돈 달라고 할 거 같아”
“그럴 리가 있어? 그런데 저 노인네 힘도 좋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여기서 3분만 기다리면 소렌토 가는 기차가 올 거 에요” 하면서 5유로를 달라고 한다.
이쯤 되면 친절의 가면을 쓴 사기다. 알고 있는 길을 확인하기 위해 물어본 것뿐인데 5유로를 달라고 한다. 짐을 내려다 주었으니 그냥 말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갑엔 5유로는커녕, 10유로나 20유로짜리 한 장 없이 50유로와 100유로뿐이다. 2유로짜리 동전 하나를 주니 남자의 표정이 멘붕이다. 미안하다고 하며 그에게 지갑을 보여주니 남자는 말없이 동전을 받아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사철이라 불리는 기차 역시 고속철처럼 좌석이 두 개씩 마주 보는 형태이다. 무사히 기차를 갈아탄 것에 안도하며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았다. 나폴리는 도둑이 많기로 유명한 도시인지라 트렁크 가까이 앉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소렌토까지는 약 한 시간이 소요되는데 사철의 정류장은 어림잡아 30개는 되는 듯하다.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사람들이 내리고 타기를 반복했다. 포지타노에 도착하기까지 점심 사 먹을 곳도 시간도 없으리라 짐작했기에 미리 준비한 빵과 잼, 우유, 삶은 달걀, 과일들을 꺼내 먹었다. 통로 건너 쪽, 그러니까 우리 좌석의 대각선 쪽 맞은편에 약 40대의 남녀가 아까부터 뽀뽀와 키스를 섞느라 여념이 없다. 남자는 여자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눈치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여자의 미모는 영 형편없다. 그런들 어떠하리, 사랑에 눈먼 남녀의 애정행각이 보기 쑥스럽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감정을 아무데서나 솔직하게 표현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과히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점심을 다 먹은 남편이 바퀴 때문에 세워둔 트렁크가 굴러다니자 정리하러 나간 사이, 우리 앞자리에 젊은 남녀 커플이 들어와 앉았다.
내 허벅지의 거의 두 배나 되는 건강한 아가씨는 검정 레깅스에 숏 팬츠를 입고 있었다. 보기가 민망했다. 검은색 아이라인을 또렷하게 그린 눈매는 매섭고,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렸는데 그다지 예쁜 얼굴은 아니다. 왜소한 체격의 남자는 살짝 대머리에 가죽 재킷을 입었는데 품위라곤 한 푼어치도 없어 보이는 인상이다.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는 숏 타임의 뽀뽀를 수시로 나눈다. ‘쪽’, ‘쪽쪽’, 5초 후, 3초 후, 10초 후, 1초 후 연속으로 ‘뽀뽀뽀’, ‘쪽쪽’, 불규칙한 타이밍으로 이어지던 입맞춤이 급기야 롱 타임으로 진입한다. 자석처럼 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의 딥 키스가 계속된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눈앞에서 라이브로 실시되는 그들의 행위가 영 불편하기 짝이 없다. 다른 곳에 자리가 빈 것도 아니다. 빈자리가 있다 해도 좌석을 옮긴다면 그 모양새 또한 웃기는 일일 것 같았다. 시선은 책에 꽂혀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간간히 창밖의 풍경을 내다본다. 노란, 또는 연두 빛 레몬과 오렌지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남쪽이 가까워지고 있음이다. 사태를 알아차린 남편은 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객차 연결부에 서서 가방을 잡고 있다. 가끔씩 나를 쳐다보며 웃는다. 종착역인 소렌토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에겐 기쁨과 환희였을 시간이겠지만 내겐 고통의 시간이었다.
포지타노 까지는 시타 버스를 타야 한다. ‘반드시 오른쪽에 앉을 것’ 여행안내 책자에 써진 문구다. 구불구불한 해안 절벽 도로를 달리는 코스인 만큼 오른쪽에 앉아야 기막힌 절경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버스 티켓을 사서 역사 밖으로 나오니 버스가 한 대 서 있는 게 보였다.
“포지타노 가나요?”
“예, 그래요.”
“몇 시에 출발하죠?”
“3분 후 떠납니다.”
하지만 화장실이 급했다. 키씽 남녀 때문에 긴장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대로 버스를 타는 건 무리일 듯싶었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 동전을 넣고 화장실에 다녀오니 역시나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다. 2시가 막 지났는데 시간표를 보니 다음 버스는 3시 30분이다. 그냥 참고 탈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짐을 맡기고 소렌토 시가지를 둘러볼까 생각에 가방을 끌고 한 100m쯤 내려왔을까? 주차장과 짐 보관소가 보였다.
“짐을 맡길 수 있나요?”
“여름에만 운영합니다. 지금은 안 해요”
그래서 우리는 카페에서 커피라도 마시며 시간을 보내자고 생각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머리는 허옇고 낡고 얇은 점퍼에 키는 작달만 한 할아버지가 말을 건다.
“어디로 가슈”
“포지타노요”
“버스가 없는데 내 차를 타는 게 어떠쇼? 택시는 70유로지만 나는 50유로에 태워 주리 다” 한다.
“3시 30분 버스 타면 돼요”
“그건 평일 버스 시간 표고 오늘은 일요일이라 5시에 떠나는 막차 밖에 없다오”
“뭐라고요?”
그때 머릿속에 꼬마전구가 ‘팍’ 하고 켜지듯, 어디선가 본 듯한 문구가 떠올랐다. 포지타노로 가는 시타 버스는 평일과 일요일, 성수기인 여름과 비수기인 겨울의 버스 시간표가 다르니 확인이 필요하다는…, 가격을 흥정해서 택시를 타고 가자는 내 의견에 남편이 동의했다.
“너무 비싸요, 30유로 해 주세요”
“택시는 70유론데 나는 50유로만 받는다니까, 그건 엄청 싼 거세요, 그럼 40유로 해드리리라. 그런데 호텔이 어디유?”
“파지티아 호텔이요. 30 유로면 타고 아니면 기다렸다가 버스 탈거예요, 게다가 버스 티켓도 샀는데 이건 못 쓰잖아요”
“파지티아 호텔은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 걸어가야 하니까 가방을 끌고 가려면 무척 힘들 거요. 그럼 이렇게 하구려, 그 버스 티켓을 나한테 주고 30유로에 타고 가슈”
그렇게 흥정은 끝나고 3유로의 버스 티켓과 30유로에 차를 타기로 했다.
“차는 어디 있어요?”
그가 안내한 차는 할아버지만큼 나이가 들어 보이는 올드 카로 택시가 아닌 자가용이었다. 택시가 아니라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자동차 안은 더 가관이다. 조악한 조화에 엽서와 사진 등, 지저분한 장식물로 정신없이 치장되어 있다. 자동차는 덜덜거리며 출발했다. 그는 소렌토에 살며 70세라고 한다. 그의 유창하지 않은 영어, 즉 느리고 어눌한 발음이 내겐 훨씬 편안하게 들렸다. 바다를 끼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도로는 과연 절경이다. 할아버지는 몇 번 인가 차를 세우고는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우리 둘의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 찍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수전증이 있는지 손을 떨기 때문이다. 30분쯤 갔을까? 마을이 나타났다. 이미 책이나 사진으로 수도 없이 보아왔던 터라 그곳이 포지타노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말한 대로 좁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한참이나 오르락내리락하며 호텔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왔더라면 꽤 고생했을 법했다. 짐을 내리고 돈을 건네니 5유로 더 달라고 한다. 사진 찍을 수 있게 여러 번 시간을 주었으니 팁을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약속과 다르니 줄 수 없다고 하며 30유로만 건넸다. 그는 내게 명함을 주었다.
“고마워요, 당신이 필요하면 꼭 전화할게요”
그는 느린 몸짓으로 뭔가 아쉬운 듯,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바다 방향으로 발코니가 있는 방은 온통 화이트, 벽도 가구도 침구도 모두 흰색이다. 마치 그리스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했다. 파란 지중해가 눈앞에 시원스레 펼쳐져 있고 발코니까지 뻗어온 나뭇가지엔 진분홍의 부겐빌레아 꽃이 그림처럼 피어 있다. 우리가 묵었던 모든 호텔의 TV가 모두 삼성이나 LG이듯 그곳 역시 LG다.
“여긴 구경하러 다니지 않고 그냥 호텔에서 휴식만 해도 좋겠어”
긴 시간에 걸쳐 도착한 만큼 피곤한 지 침대에 누운 남편이 말했다.
“그래도 좋고…”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로마 여행을 하면서 하루 시간을 내서 나폴리, 소렌토, 폼페이, 포지타노, 아말피, 카프리 섬을 한 번에 묶어 돌아보는 남부 1일 투어로 휘~ 돌아보고 끝낸다. 그러나 나는 포지타노에서 느긋한 여유와 휴식을 즐기고 싶음에 3박을 예약했다.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을 보면 다이앤 레인(프란시스)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러 포지타노로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참으로 예뻤다. 그 영화에서 본 포지타노가 기억에 생생하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프란시스는 뉴욕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한 순간에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하고, 집까지 빼앗긴다.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던 그녀에게 친구 패티가 건네준 게이들의 이탈리아 여행 티켓. 무작정 떠난 그곳에서 기적처럼 캐서린이라는 여자를 알게 되고, 얼떨결에 '브라 마솔레(태양을 갈망하는 곳)'라는 이름의 빌라를 구입한다. 그런데 300년이나 된 이 빌라는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집을 소개해 준 부동산업체 마티니는 집을 수리해 줄 인부들을 소개하여 주고, 프란시스는 인부들과 마을 사람들과 집 꾸미기에 여념이 없다. 여전히 외로운 그녀는 중 틈을 내서 로마를 여행했다. 그때 기적 같은 미소의 마르첼로를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공교롭게도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게 되어 그는 고향으로 떠나버렸다. 어느 날 프란시스가 포지타노로 마르첼로를 찾아가지만 이미 그에겐 다른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투스카니의 태양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가고 마침내 환한 미소를 찾게 된다.
짐을 풀고 프런트로 갔다. 우아하게 저녁 식사를 할 만한 장소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으로 어디가 좋을까요?”
“겨울엔 식당들이 거의 문을 닫아요. 산 위 빌라에 있는 레스토랑과 해변에 있는 식당 한 곳만 영업을 하는데 오늘은 일요일이라 빌라 쪽으로 가야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긴 아주 멀어요. 만일 그곳에서 식사를 하려면 6시까지 로비로 내려오세요. 택시를 타고 가야 하니까요, 택시비는 공짜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네~ 알았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말피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알 수 있을까요?”
“아말피로 가는 버스는 없습니다. 도로가 끊어졌거든요”
“왜요?”
“그건 모르겠어요”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계속 이슬비 같은 비가 끊이지 않고 내렸다. 그즈음 TV 일기 예보를 보면 연일 이탈리아는 전국에 비가 내리고 어느 지역엔 홍수가 난 듯했다. 베니스엔 아쿠아 알타가 일어났다. 포지타노로 가는 도로는 괜찮을까 하는 염려를 했었다. 그런데 아말피까지 가는 도로가 끊겼다니 산사태가 난 게 아닐까 추측했다. 식사를 해결할 일도 큰일이었다. 호텔 밖으로 나가 보니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영업을 하지 않는 호텔도 많았다. 포지타노는 마치 겨울잠을 자는 거대한 섬처럼 느껴졌다. 프런트 직원이 가르쳐준 마켓을 찾아갔으나 그곳 역시 문이 잠겨 있다. 일종의 위기의식이 들었다.
저녁 6시, 로비로 내려오니 밖에 택시가 와 있다. 벤츠다. 미국 텍사스에서 온 부부와 우리 부부, 네 사람이 택시에 탔다. 퉁퉁하고 푸근한 인상의 남자와 작은 체구의 부인은 상냥했다. 조수석에 앉은 남자가 기사에게 이것저것 묻다가 아이들이 있냐고 물었다.
“2살 난 딸이 하나 있어요”
하더니 스마트 폰을 뒤적여서 사진을 보여준다.
우리는 사진을 보고 폭소를 터트렸다. 기사의 2살 난 딸아이는 견공이었다.
한 바탕 웃고 나서 내 옆에 앉은 부인이 말했다.
“우리 딸은 조금 있으면 출산을 해요. 그러니 나는 할머니가 될 거랍니다” 하며 역시 폰을 뒤적여서 사진을 보여주는데 그 역시 개였다.
나 또한 스마트 폰의 갤러리에 있는 사진을 재빨리 찾아냈다.
“우리 막내아들도 보실래요? 하며 우리 집 강아지 ‘별’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웃다가 그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한국 사람들은 크레디트 카드와 현금 중 무엇을 많이 사용하는지, 여행 중엔 뭘 주로 쓰는지, 이탈리아에 와서 기차를 타 보았는지? 기차는 어땠는지, 미국은 넓어서 국내에서도 대부분 비행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고속철 같은 기차가 없다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프랑스와 일본, 한국에 고속 철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탈리아에서의 기차 여행이 기대된다고 했다. 이태리의 기차도 빠르고 무척 깨끗하여 쾌적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레스토랑은 꽤 멀었다. 이미 컴컴해진 좁고 꼬불꼬불한 언덕을 돌고 또 돌아서 오르고 있었다. 도로가 좁기 때문에 거의 일방통행인 데다가 한쪽에 주차된 자동차들로 인해 운전은 쉽지 않아 보였다.
드디어 도착한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형적인 이탈리아 아저씨가 반갑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머리는 반쯤 벗어지고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 주방장인 듯, 그러나 레스토랑엔 그 외엔 아무도 없다. 생일 파티가 있었는지 한쪽 벽면엔 ‘해피 버스데이’ 로 짐작되는 이태리어가 써진 종이들이 붙어있고 서너 개의 테이블은 아직 치워지지 않은 채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다.
메뉴엔 피자도 리조또도 없다. 바닷가에 가면 회를 먹는 게 정석이듯 스테이크는 먹고 싶진 않았다.
“어떤 음식이 좋을까 추천해주세요”
“여긴 바닷가니까 해산물이 싱싱해요. 이건 플래시 한 피쉬 요린데 아주 맛이 끝내준답니다.”
하며 그가 손가락으로 메뉴를 가리키며 추천한 음식과 샐러드, 꼬체(홍합) 파스타와 물을 주문했다. 싱글벙글 뭐가 그리 좋은지 땡큐를 연발하곤 미국인 부부에게도 주문을 받았다. 그리곤 주방으로 사라졌다. TV에선 올드 팝이 이어지고 부인이 저 노래를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많이 들었던 곡이라 하니까 나이를 묻는다. 미국 남자는 남편과 동갑이고 그의 부인은 그보다 한 살 많은 59세라고 했다. 그들은 주문한 와인을 디켄더에 따라 마시고 있고 우린 하릴없이 애꿎은 TV만 바라보았다. 레스토랑의 3면이 유리창이지만 밖은 컴컴해서 이렇다 할 야경도 없어 구경할 게 없다. 식전 빵을 뜯으며 별 달리 할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홍합이 든 파스타와 샐러드, 그리고 그 플래시하고 끝내준다는 휘시의 정체는? 그릴이나 프라이팬에 노릇하게 구운 통통한 생선과 구운 감자나 토마토 같은 가니쉬가 곁들여진 요리려니 상상했다. 접시엔 달랑 작은 통 오징어 한 마리가 날씬한 자태로 토막 난 채 누워 있다. 17유로(약 25,000원)의 플래시 한 피쉬가 올리브유에 구운 통 오징어 한 마리라니…
홍합 파스타나 오징어는 짭짤하면서 그다지 별다른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쥔장은 연신 싱글벙글하며 맛이 어떠냐? 필요한 건 없냐? 계속 물으러 왔고 그때마다 우린 울며 겨자 먹기로 맛있다며 거짓 미소를 띠어야만 했다. 한 편 다른 테이블에 앉은 미국인 부부 역시 ‘나이스’와 ‘굿’을 연발했는데 과연 그게 진짜 ‘나이스’한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서비스로 초콜릿 푸딩을 서비스했지만 꼭 초콜릿으로 풀 쒀 놓은 것처럼 그 마저 별로 입맛에 맞지 않았다. 일찍 식사를 끝낸 우리는 와인을 즐기느라 늦게 주문한 미국인 부부를 기다리는 일도 고역이었다.
“우리 호텔엔 어떻게 돌아가죠? 내가 물으니 부인이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여기서 자야 할지도 모르죠?”해서 웃었다.
어찌어찌 그들의 식사도 끝났다. 부인은 남은 와인을 알뜰하게 병에 따라서 챙겼다. 그걸 보면서 미국 아줌마도 한국 아줌마와 비슷하구나 싶었다. 자릿세와 봉사료를 포함한 식사비는 55유로, 이탈리아에 온 이후 최고 비싼 식사를 했다. 그러나 배가 부른 것도 아니요,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택시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미진한 느낌에 컵라면으로 2차 저녁 식사를 하고 급기야 소화제를 먹은 후 잠을 잘 수 있었다.
도무지 손님이 없을 듯 호텔은 조용했고 오가는 투숙객도 없었다. 그러나 아침 식사를 하러 가보니 손님이 꽤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포지타노에도 여전히 비가 내린다. 그러나 희 부연한 구름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평선은 극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아말피로 가서 구경하고 거기서 페리를 타고 카프리 섬에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말피 쪽 도로가 끊어졌다니 카프리 섬이니, 폼페이로 가려면 소렌토로 다시 나가야만 한다.
시타 버스를 타기 위해 도로를 따라 정류장으로 갔다. 어제와는 달리 많은 마켓이 영업을 하고 있다. 타바키에서 티켓을 사고 버스 시간을 물어보니 20분 뒤에 올 것이라고 했다. 정류장엔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 대 여섯 명이 버스를 기다리는 듯 서성거렸다. 좁은 도로 탓이리라.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자동차들이 많았다. 유아들이 타고 놀 법한 장난감 같은 작은 1인용 자동차가 세 개의 바퀴를 달고 다닌다. 짐을 싣는 화물차도 삼륜차가 많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고령자가 많은 듯 노인 운전자들이 많았다. 관광지로 명성을 얻기 이전엔 이를테면 산골 오지 마을 같은 곳이었음이 틀림없다. 채소를 기를 수 있는 땅 한 평도 없는 바닷가 산골 마을에서 모두들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 궁금했다. 오밀조밀 레고 같은 집들이 성냥갑 쌓아 올린 듯 다닥다닥 붙어있고 그 사이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좁은 길들이 구불구불 나 있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풍경이 지금이야 아름답게 칠하고 가꾸어서 그렇지 옛날에는 산골 판자촌 같았으리라 생각된다. 바쁠 것 없이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찍고 상점을 기웃거리는 일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시간이 넘어가자 이상한 예감이 든다.
온다는 버스는 오지 않는다. 이쪽저쪽 상점에서, 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묻고 또 물었다. ‘올 거니 기다려라, 왜 안 오는지 나도 모르겠다.’ 하는 한결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 버스를 기다리길 두 시간, 마을을 도는 로컬 버스와 노란색 스쿨버스가 몇 차례씩 돌아왔다. 몇몇은 포기했는지 어디론가 떠나갔고, 또 몇몇은 지나가는 지인의 자동차를 얻어 타고 떠나갔다. 버스를 타러 온 새로운 승객이 늘었다가 또 사라지고 반복하길 두 시간, 버스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짜증이 났다. 생수와 우유, 토마토와 빵 등을 사 가지고 호텔로 돌아왔다.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그야말로 ‘쉼’의 시간을 가졌다. 오후가 되자 비가 그치는듯하여 해변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집집마다 번지수를 나타내는 표시의 타일이 붙어있다. 그런데 그 모양이나 그림이 같은 게 하나도 없다. 단지 세 자리 숫자일 뿐인데 하나같이 예쁘고 특색 있다. 깎아지른 듯한 산비탈엔 빼곡히 집이 들어차 있다. 해변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 계단으로 이어졌다. 엽서에 나올법한 컬러의 집들이 올망졸망 나타났다. 바닷가에 성당이 있다. 마요르카 양식의 도자기 타일로 만들어진 돔이 무척 아름답다. 거품을 쏟아내는 그란데 해안엔 사진을 찍는 한 커플 외에 아무도 없다. 바람이 불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생각나지만 그 많은 카페들과 레스토랑은 모두 문을 닫았다. 멀리 작은 고성 같은 건축물이 보였다. 그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고적하고 인적이 뜸한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삶을 유지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지막한 성처럼 보이던 것은 해적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방어탑이었다. 안쪽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지금은 레지던스 호텔이지만 겨울이라 영업을 안 하는 듯하다. 막다른 곳이라 발을 돌려 걸으며 호텔에서 얻어온 지도를 보았다. 포지타노의 정상 쪽에 <몬테 페르 투소>라는 지명이 있었다. <산속의 구멍>이라는 뜻으로 해발 420m쯤의 마을이며, 그 보다 높은 곳은 <노첼라>이다.
“로컬 버스를 타면 여기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며 지도를 가리키는데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젊잖아 보이는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나직하고 침착한 목소리다.
“도와 드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이곳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는 몬테 페르 투소가 정말 아름다운 곳이니 꼭 가보라면서 로컬 버스 정류장이 있는 작은 교회의 위치와 버스 시간까지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묵는 호텔 이름을 물어보더니 돌아올 때는 호텔 앞에서 내리면 된다는 것 까지 꼼꼼하게 가르쳐준다. 이 근처에 사느냐고 하니 그렇다고 하면서 거듭거듭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방향을 알려주고는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내려올 때는 계단을 이용했지만 올라갈 때는 다른 길을 이용했다. 관광지답게 아기자기하고 예쁜 상점들이 많지만 모두 철시한 상태다.
교회 앞에 도착하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햇살이 하늘의 영광처럼 바다에 내리 꽂히는 걸 보고 나온 터라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버스는 20분 후에 올 테고 티켓을 파는 타바키는 내부 수리로 영업을 하지 않았다. 기사에게 돈을 내면 되지만 비도 내리고 그냥 호텔로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아무튼 잠깐 비를 피해야 했기에 성당 처마 아래 서있었다. 그때 축지법을 쓴 듯, 아까 그 할아버지가 불쑥 나타나 우리에게 왔다. 그리곤 잘 찾아왔다면서 여기서 버스를 타면 된다고 했다. 그리곤 지갑에서 버스 티켓 묶음을 꺼내더니 두 장을 떼어 내게 준다.
“이거 받아요, 내 선물이요, 티켓 값은 무척 싸니까 부담 갖지 말고 좋은 여행이 되길 바라요.”
하곤 어안이 벙벙하여 내가 고맙다는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그는 어디론가 총총 가버리는 게 아닌가?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한 손을 번쩍 들어 답하며 모퉁이로 사라졌다.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주고 가다 보니 버스 티켓 살 곳이 없다는 걸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발을 돌려 우리를 찾아와 티켓을 주고 간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피렌체에서 천사를 만났다면 포지타노에선 산타클로스를 만난 셈이다. 어찌 보면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 처마 밑에서 겨울비를 그으며 떨고 있던 우리에게 노인이 베풀어 준 세심한 배려와 정은 따스한 온기로 가슴 한쪽을 훈훈하게 만들어주었다.
‘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안도현의 시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난 저 노인처럼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어본 적이 있던가?
버스를 탔다. 빗발은 더욱 거세졌다. 소형 버스지만 그야말로 베테랑만이 운전이 가능할 법한 좁은 도로가 구불구불 이어졌다. 맑은 날씨라면 기막힌 풍광이 보일 건 자명했다. 그러나 차창을 줄줄 흐르는 빗물과 안개와 구름은 어떤 풍경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30-40 분쯤 올라갔을까? 중간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내리고 우리 두 사람만 남았다. 기사가 말했다.
“여기가 몬테 페르 투르솝니다, 내릴 거요?”
내릴 수 없었다. 사위는 어둡고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 우산도 없이 내려 비가 잦아들 때까지 머물만한 장소도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저었다. 우린 그렇게 버스에서 몬테 페르 투소에 발을 내딛지도 못하고 내려와야만 했다. 티켓을 주신 할아버지께 죄송했다.
“우리 내려야 돼”
익숙한 목소리가 꿈처럼 들려왔다. 어디부터 얼마 동안 졸았는지 알 수가 없다. 버스는 이미 호텔 근처에 와 있었다. 깜짝 놀라 버스에서 내렸다. 여행 11일 차, 피곤하긴 했나 보다.
다음 날, 여전히 비가 간헐적으로 내리다 말다를 지속한다. 호텔 프런트에서 어제 시타 버스가 결코 오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소렌토 가는 버스 시간을 다시 물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고 난 직원이 프린트한 종이를 뽑아 주었다. 버스가 아말피까지 못 가고 프라이아모 까지만 운행하게 되어 구간이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새로 받은 버스 시간표에 맞추어 나갔지만 그날 역시 1시간 넘게 버스가 오지 않았다. 히치하이킹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삼거리인 그곳에서 소렌토 방향으로 가는 차는 거의 없고 호텔 쪽으로 가는 차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1인용, 2인용 승용차가 많으니 두 사람이 얻어 탈 수도 없다. 오늘도 포기해야 하나 어쩌나 하는데 저 아래쪽에서 커다란 버스가 천천히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버스를 타고 소렌토에 도착했다. 기사에게 포지타노로 돌아가는 버스 시간표 프린트를 보여주고 그 시각에 버스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한다. 천천히 확인하고 거듭 확인해서 물어보았다. 맞다고 했다. 소렌토에서 나폴리로 가는 중간쯤에 폼페이가 있다. 바다 저편으로 멀리 베수비오 산이 보였다. 다른 화산들처럼 거대한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매끈한 모양이다.
서기 79년 8월 24일 정오.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했다. 이날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폼페이는 2000여 년 동안 화산재와 용암에 묻혀 있었다. 1748년 발굴이 시작되면서 폼페이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건물의 지붕과 벽은 엄청난 화산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지만, 나머지 부분은 화산 폭발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폼페이가 옛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두께로 쌓여 있던 화산재 덕분이라고 한다. 화산재는 장소에 따라 1m가 조금 넘는 곳부터 7m가 넘게 쌓인 곳까지 있었는데 평균 높이가 6m나 되었다고 한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날아온 돌과 용암, 화산재, 유독 가스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적어도 2000명, 대부분 기둥과 대리석 바닥만 남아있지만 귀족의 별장, 극장, 도로, 우물 등을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보였다. 비극이라고 표현하기엔 그 재앙은 너무도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곳에 어울릴 수 있는 건 침묵밖에 없었다. 왠지 사진을 찍는다는 것 자체가 죄스럽게 느껴진다. 그래도 한 컷 해야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모를 청년이 근처에 있다.
“캔 유 테이크 어 픽춰~ㄹ 오브 어스?” 청년이 웃으며 한국말로 대답했다.
“네 찍어 드릴게요”
폼페이는 하나의 도시였던 곳이니 만큼 엄청 넓다. 여기저기 돌아보다 보니 출구를 찾지 못할 정도였다. 지도를 봐도 도무지 내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드문드문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무리들이 보일 뿐 여행자는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사진을 찍어준 청년과 또 만나게 되었다. 지도를 보고 청년이 추측한 쪽으로 가서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저 멀리 깃발을 따라오는 일본 관광객 한 무리가 왁자지껄 폼페이를 향하는 모습이 보인다. 포지타노로 가는 시타 버스를 제대로 잘 탈 수 있을까 걱정하며 플랫폼으로 나갔는데 한국 관광객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그란디 우리 나폴리는 원제 간다요?” 한 아주머니가 물었다.
“아이고 내 참, 어제 나폴리에서 잤잖아요, 이제 쏘렌토로 갑니다.” 가이드가 말했다.
”잉, 그런감?, 그런데 여긴 오렌지 나무가 집집마다 주렁주렁 많이도 열렸더구먼 값은 요로코 롬 비싼지 모르겄네, 요곳이 5유로여“
“여기서 한국 돈으로 환산해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사요. 5 유로면 5천 원이다 생각해야 편해요”
사철이 도착하고 우르르 기차에 몰려 탄 사람들은 요리로 와서 앉으라는 둥, 기차가 우리나라 전철보다 후졌다는 둥, 떠들썩하다. 소렌토에 도착하니 포지타노로 가는 시타 버스가 정차해있음을 확인했다. 기사는 없고 출발 시간까지는 약 50분쯤의 여유가 있었다. 가까운 거리의 타쏘 광장에 다녀와도 충분할 듯싶어 부지런히 걸었다. 단체 여행자들은 관광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 듯했다. 작고 아담한 타쏘 광장엔 동상과 오렌지와 레몬을 섞어 놓은 듯한 노란색의 카르미네 성당이 있다. 우리나라 자동차 이름에 쏘렌토가 있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나폴리 민요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도시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보다 훨씬 조용하고 작다.
마트에서 저녁으로 해결할 빵과 먹거리를 사 가지고 버스를 타러 가니 기사가 문을 열고 있다. 아침에 포지타노에서 나올 때의 그 기사였다. 내일은 포지타노를 떠나야 하는 날이다. 아침 버스 시간표를 물어보니 우리가 로마로 갈 기차를 탈 시간표와 맞지 않았고 만일 버스가 오지 않는다면 문제가 심각할 터였다. 게다가 트렁크를 끌고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호텔로 돌아와 리셉션으로 전화를 했다. 시타 버스 정류장까지 타고 갈 택시를 부를 수 있냐고 하니 없다고 한다. 쏘렌토 까지는 55유로라고 한다. 내가 이곳에 올 때 30유로 줬다고 하니 1인당 30유로씩 준 거 아니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니 무척 싼 값에 잘 왔다면서 여기서는 그런 가격에 나갈 수 있는 차는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쏘렌토 할아버지가 준 명함을 보고 전화를 했다.
“헬로! 저 기억하세요? 이틀 전에 파지티아 호텔까지 타고 온 사람인데”
“그럼요, 알다마다요.”
“내일 우리가 여기를 떠나는데 호텔로 8시 30분까지 와 줄 수 있어요?”
“네, 그러지요. 하지만 40유로는 줘야 해요.”
“에이 그러지 말고 똑같이 30유로 드릴게요”
“안됩니다. 택시는 70유로라니까… , 그럼 35유로 주세요.”
“알았어요, 내일 시간 지켜 오세요”
통화를 마치고 그래도 다행이다 생각하며 짐을 챙기고 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혹시 내일 쏘렌토로 갈 콜택시 부르셨습니까?”
“네”
“그 사람이 전화를 했는데 내일 못 온다고 전해달랍니다.”
“왜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궁금하면 그에게 다시 전화해 보세요.”
그러나 나는 전화하지 않았다. 못 온다는 이유를 알아서 무엇 하리, 대신 프런트에 택시를 불러달라는 전화를 했다.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하면서 시티 텍스를 내려고 하는데 조식 비를 함께 청구했다. 나는 분명히 모든 일정의 호텔에 아침이 포함된 것으로 예약했다. 그런데 조식이 인크루딩되지 않는 걸로 예약되었다는 것이다. 호텔 바우처를 꺼내 확인해보니 어찌 된 일인가? “only room”과 “wifi free”만 표시되어 있다.
처음 호텔을 예약하고 두 달쯤 뒤, 포지타노의 객실 요금이 더 싸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원래 예약을 취소하고 더 싼 가격에 자시 예약을 했던 게 기억났다. 그게 아마도 가격이 내려간 게 아니고 조식 불 포함 요금이라 쌌던 모양이다. 예정에 없던 조식 비 56유로를 주고 나니 속이 상하다. 게다가 예기치 않게 왕복 택시비 85유로, 가장 비쌌지만 가장 형편없었던 저녁 식사 등 예상외의 지출이 많았던 곳, 그래도 왠지 포지타노를 떠나는 마음이 섭섭했다.
사진 얘기를 또 해야겠다.
“왜 안 찍어?”
“뒤에 지금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어서…”
“사람 있으면 어때? 그냥 찍어 그게 더 자연스러워”
남편은 자신의 사진이나 내 사진을 찍을 때 다른 사람들이 찍히는 걸 싫어한다. 여행지에서 배경과 주인공만 깔끔하게 찍힐 수 있는 타이밍을 기다리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내 경우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이국적인 분위기가 나서 더 좋은데 그는 매번 사람 없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어렵게 사진을 찍고 배낭을 다시 메려면 한 바탕 퍼포먼스를 치른다. 어색하고 불편한 포즈의 연속이다. 두꺼운 겉옷 때문에도 그렇지만 뻣뻣한 팔로 배낭을 메는 일은 그에겐 인수분해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어찌어찌하여 겨우 가방을 메고 나면, 줄은 배배 꼬이고 겉옷의 깃은 접히거나 눌려 엉망진창인 게 꼭 팔푼이 같아 보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걸 알아채지 못한다. 그 꼴을 못 견디는 나는 매번 애 챙기듯 바로 돌려주고 반듯하게 펴주게 된다. 내 성미가 문제라면 문제다. 책이나 물 한 병 꺼내는 것도 복잡하고 더디다. 차라리 내가 모두 메고 들고 다니는 게 편하겠다 싶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에 와서 며칠 지나지 않아서부터 남편에게 가방을 메게 하거나 카메라도 들지 않고 빈손으로 다니게 했다. 그러다 보니 우산이나 물, 책 등이 들어있는 배낭과, 여권과 지갑, 돋보기, 스마트 폰, 지도 등이 들어있는 클로스 백, 카메라는 늘 내 차지였다. 그래도 날개 달린 망아지처럼 발 빠르게 여러 몫을 해 나갔다. 그게 미안했는지 호텔에 들어오면 라면 끓이고 설거지하고 양말 빠는 일을 도맡아 했다. 뭔가 모양새가 이상하다.
포지타노를 일찍 떠난 이유는 잠깐이나마 나폴리를 둘러보자는 데 있다. 나폴리에 도착해서 로마행 기차를 타기까지는 약 두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짧은 시간에 명소를 둘러보자면 버스를 타는 게 좋을 듯했다. 나폴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옆 자리에 앉은 아가씨에게 물었다. 타야 할 버스 번호와 내려할 곳의 이름을 알려주면서 덧붙이는 말,
“배낭은 꼭 앞쪽으로 메세요, 나폴리는 매우 위험한 곳이에요”
자국인이 외국인에게 가방을 앞으로 메라고 당부한다. 그것도 ‘매우’라고 강조하는 건 정말 무섭다는 뜻일 거다. 나폴리 중앙역의 짐 보관소를 찾아갔다. 보관 시간은 최소 5시간이며 짐 한 개에 무조건 6유로니 꽤 비싸다. 1시간 30분만 맡길 거니까 깎아달라고 했지만 타협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짐을 맡기고 역사를 빠져나갔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은 지저분하고 사람도 많고 시끄러워서 정신이 없다. 위험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중동인, 흑인 등, 여러 인종이 있다는 것보다도 대체 딱히 뭘 하는 사람인 것 같지 않은, 그러니까 어떤 기회 포착? 을 위해 얼쩡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바닥은 질척거리고 한쪽은 공사 중이라 복잡했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밀라노의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 갈레리아와 매우 흡사한 움베르토 1세 갈레리아였다. 플레비시토 광장의 위치를 물어봐야 한다. 이제 이탈리아 현지인 구분하는 건 도사 급이다. 페도라를 쓰고 갈색 모직 롱코트를 걸친 노신사가 포착되었다. 노인들의 경우 영어는 잘 못 알아듣지만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탈리아 지명 즉, ‘~피아짜 디 플레비시토?’ 하는 순간 거의 대부분 복창을 한다.
“아하, 피아짜 디 플레비시토!” ‘아하 ~ 거기! 내가 알지’ 하는 듯 급히 밝은 표정이 된 다음, 십 중 팔구 신나게 설명한다, 이태리어로. 그 노신사도 그랬다. 내가 못 알아듣자 따라오라면서 손짓으로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라찌에”
고맙다는 말을 듣고서도 여전히, 다시 한 번 확인하곤 한다. 자식 염려하는 부모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 노인이 되면 다 비슷해지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넓은 플레비시토 광장 내의 플레비시토 성당과, 산 카를로 극장, 누오보 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해안가로 내려가니 저 멀리 산타루치아 항구가 눈에 보였다. 우리가 구입한 버스 티켓은 90분용이다. 시간 안에 중앙역으로 돌아가야 한다. 버스를 타고 중앙역엔 내리기 한 정거장 전, 사나운 인상의 검표원이 탔다. 그가 내 버스표를 확인하더니
“이 티켓은 이제 시간이 끝났어” 하듯 냉소적으로 말했다.
“나도 알거든!" 나 또한 빠르게 차갑게 대꾸하곤 버스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