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기억의 온도 5 (로마, 바티칸)
나폴리에서 테르미니 역까지는 1시간 10분쯤 걸렸다. 피렌체에서처럼 호텔까지는 멀지 않았으나 캐리어 때문에 택시를 타기로 했다. ‘로마 테르미니 역 앞에서 택시를 타려면 미리 가격을 물어봐라.’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봉 꽁빠니에 거리에 있는 로마니코 팰리스 호텔까지 얼마죠, 큰 가방 두 갠데?
“28유로 주쇼”
비싸도 너무 비싸다. 다른 택시 앞으로 갔다
“봉 꽁빠니에 거리에 있는 로마니코 팰리스 호텔까지 얼마죠?, 가방은 두 개에요.
“미터기로 계산합니다. 가방 한 개에 1유로씩 추가고요, 봉 꽁빠니에는 가까우니까 많이 안 나올 거예요.”
‘그러면 그렇지, 이 사람은 양심적이군’ 생각하고 차에 올랐다.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광장과 동상, 대리석을 조각한 분수 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식당도 카페도 문을 닫고 버스도 제멋대로 오지 않는 산골짝에서 고립되듯 지내다가 수도 로마에 입성하니 촌놈이 따로 없다. 도로는 널찍하고 사람도, 자동차도 많다. 넋을 잃고 밖을 내다보는데 무슨 소리가 철컥철컥 들린다. 미터기 소리였다. 이거 뭐가 잘못된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는데
“여기가 미국 대사관이에요, 여기 모퉁이에서 돌면 봉 꽁빠니에 거리입니다.”
택시가 호텔 <로마니코 팰리스> 앞에 도착했다. 26유로라는 숫자가 미터기에 정지해있다. 가방 두 개 추가 요금까지 28유로(약 42,000원)다. 짐작하건대 4-5km 정도 거리밖에 안 될 텐데 이럴 수가 있나? 의심스럽다. 그러나 미터기가 가리키는 숫자를 보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사기를 당한 게 분명했지만 심증만 있을 뿐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태리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것이니 만큼 로마에서는 왠지 품위 있는 호텔에 묵고 싶었다. 물론 7 성도, 5 성도 아닌 4성 호텔이지만 그동안 묵었던 3성 호텔에 비하면 훨씬 훌륭했다. 회전문을 밀고 들어서니 그리 크진 않지만 아름답고 우아한 분위기의 로비가 반겼다. 세콘도 피아노(2층)를 알려주는 이태리 여성의 매력적인 목소리에 의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벨 스태프가 짐을 방까지 가져다주니 팁도 주고 기분도 좋다.
그것이 벽지인지 그림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와은 천장에 천사가 그려진 천장화가 있다는 게 중요하다. 옷장이며 침대, 화장대와 의자, 조명, 커튼, 심지어 욕실까지 금테를 두른 붉고 화려한 집기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마치 궁전을 축소해 놓은 듯하다. 마지막 호텔 역시 만족스러워 다행이다. 용도와 공간에 맞게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고 기온이 살짝 높은 게 외투를 벗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 뭐 입을까?”
“흰 셔츠와 빨간 브이넥 니트 입는 게 좋겠어”
코디네이터도 내 몫이다. 남편은 여행 일수가 더해질수록 의상도 사진을 찍는 포즈도 신경을 쓰는 눈치다. 다행이다. 여행에 즐거운 마음을 갖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그것도 고마운 생각이 든다.
“익스큐즈 미!”
로마에 와서 세 번째, 그러니까 이탈리아에 와서 총 이백 예순 한 번째쯤? 의 ‘실례합니다’ 로 물어서 찾아간 곳은 스페인 광장과 스페인 계단이다. 17세기에 교황청 스페인 대사가 그곳에 본부를 두게 되어 붙여진 이름이란다. 스페인 계단 위쪽으로는 <트리니타 데이 몬티 교회>가 있고 아래쪽엔 <물이 새는 배>라는 이름의 분수가 있다. 그러나 분수는 보수 공사 중이라 볼 수 없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구불구불한 긴 머리의 공주가 숏 커트를 한다. 산책 나온 평범한 아가씨처럼 젤라토를 먹으며 스페인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공주의 신분으로선 상상도 못할 행동이다. 자유를 흠뻑 만끽하는 한 여인의 모습이 그렇게 발랄하고 싱그러울 수 있을까. 헵번의 헤어스타일이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을 일으켰듯이 여행자들은 그곳에 가면 반드시 젤라토를 먹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젤라토를 여기저기 흘려 계단의 얼룩이 심각해지자 최근 로마 시에서는 아예 광장 부근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지 못하도록 금지했다고 한다.
유럽 여러 나라들처럼 이탈리아 역시 광장이 많다. 성당과 분수대로 둘러싸여 있는 형태인 포폴로 광장의 ‘포폴로’는 민중이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오벨리스크가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을 중심으로 다른 쪽엔 두 개의 쌍둥이 성당이 있다. 왼쪽엔 산타마리아 인 몬테 산토, 오른쪽엔 산타마리아 디 미라 콜리 성당이다. 분수 주변과 광장을 포진하고 있는 건축물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과연 로마답다는 생각을 했다. 포폴로는 세 길이 만나는 곳으로 왼쪽으로 가면 스페인 광장, 가운데로 가면 베네치아 광장, 오른쪽으로 가면 판테온이 나온다.
로마에서는 장미꽃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여행자들을 환영하는 의미의 랜덤 서비스로 나눠주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헤이 친구! 반가워, 이 장미 너에게 줄게”
“땡큐”, 또는 “그라찌에” 하고 받는 순간 5유로를 줘야 한다.
실로 엮은 팔찌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왔어?, 코리아? 나 싸이 완전 사랑하잖아, 언젠가 가보고 싶어,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기념으로 이거 줄게.”
하면서 손목에 실 팔찌를 묶어 주겠다고 할 때,
‘이 사람들은 정말 낭만적이야, 내가 맘에 드나 봐!’ 하면서 팔을 내민다면? 그것도 영락없이 5유로를 줘야 한다.
사진을 찍다가 돌아보니 남편의 손목에 알록달록하여 인디언들이나 묶을법한 실 팔찌가 수갑처럼 막 채워지는 찰나였다. 나는 순악질 여사 같은 표정으로 다가가 외쳤다.
“노∼ 땡큐"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짐은 물론 신경질적으로 팔찌를 빼버리곤 휙 가버렸다.
포폴로 광장에서 정면으로 통하는 문을 나오니 대로변에 메트로 역이 보였다. 포지타노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못한 탓도 있고 로마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기념할 겸 처음으로 한식당에 가기로 했다. 식당은 테르미니 역 근처이다. 메트로를 타려고 지하로 내려갔다. 로마에서는 메트로를 처음 타는 거고 역 이름도 모르는지라 어느 쪽에서 타야 할지 분간이 안 되었다. 물론 어딘가 노선도가 있겠지만 묻는 게 빠르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가르쳐 준 쪽으로 가니 기차가 막 떠나고 있어서 의자에 앉았다. 한 5분쯤 지났을까? 지도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드니 방금 내게 방향을 가르쳐 준 그 청년이다.
“저, 좀 전에 나한테 테르미니 역으로 가는 방향 물어봤죠?”
“네”
“제가 잘못 가르쳐 주었어요. 이쪽이 아니고 반대쪽에서 타야 합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그는 우리를 반대 방향으로 데려다주고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천사가 나타나질 않나, 산타가 다녀가질 않나, 게다가 또 이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테르미니 역에 내리니 또 비가 내린다. 우리는 가방에 챙겨 온 작은 우산 하나에 의지하여 밖으로 나갔다. ‘몇 번째 블록에서 좌회전하고 무슨 거리에서 우회전하세요’라는 행인의 말대로 걸어가니 <가인>이라는 식당이 보인다. 예쁜 이름이다. 남편은 돌솥 비빔밥(22500원), 나는 육개장(22500원)을 주문했다. 그런데 파전(15000원)도 먹고 싶다. 그러자면 이슬이 필요한데 거금 15유로(22500원)이다.
“오랜만에 소주 한 병 마시지?, 가이드하느라 고생했는데”
남편의 부추김에 못 이기는 척 술과 파전을 주문했다. 베니스로 가기 전, 프랑크푸르트에서 환승하면서 샀던 헤네시 한 병을 아끼고 아껴서 피렌체를 떠나는 날까지 모두 마신 터였다. 맥주와 와인은 안 마시는 지라 딱히 술 마실 기회가 없었다. 이태리에서 마시는 소주가 일품이었다. 모처럼 맛있는 식사로 배부르고 알딸딸한 상태가 되니 천국이 따로 없다. 공기 밥 4개를 주문하여 남은 파전과 포장해달라고 했다. 사장님께 호텔 주소를 알려주고 버스 노선을 물어보니 대중교통은 모른다면서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잘못 알려준 건 지, 술이 잘못 간 건 지, 한 시간이나 걸려 호텔에 도착했다.
로마 이틀 째, 로마니코 팰리스의 식당은 7층, 3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경관이 훌륭하다. 보타이를 매고 클래식한 의상을 입은 웨이터들이 분주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을 충당하느라 바쁘다. 대접받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호텔 주변의 버스 노선과 메트로 지도를 챙겼다. 이제 로마 패스를 본격적으로 쓸 작정이다. 로마 패스는 버스나 메트로는 물론 처음 들어가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무료, 그 외 50% 할인 등 혜택이 많다. 3일 이상 로마에 머무는 사람이면 손해 나지 않을 카드이다.
버스를 타고 맨 먼저 도착한 곳은 베네치아 광장. 당초 생각은 중간에 메트로로 갈아타고 포로 로마노와 팔라치오 언덕, 콜로세오, 콘스탄티노 개선문 쪽으로 가려고 했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물어보니 베네치아 광장으로 가는 게 더 좋을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그곳이 관광 포인트이며 주변엔 수많은 볼 것들이 포진해 있다는 것이다. 로마 사람들이니 어련히 잘 알까 싶어 그녀 말대로 베네치아 광장에서 내렸다. 그곳은 그야말로 로마의 관광 포인트로 6개의 도로가 만나는 곳이다.
광장이 있으면 분수나 동상이 반드시 있다. 그리고 계단 위엔 성당이나 미술관, 건물을 감싸는 회랑 옆엔 조각들, 그건 로마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공식이다. 베네치아 광장 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하얀 대리석 건물은 이탈리아를 통일한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베네치아 궁이다. 왠지 다른 로마 건축물과는 조금 다른 외관과 컬러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알고 보니 세워진지 100년이 채 안 되는 건축이다. 100년이라는 시간은 명함도 못 내미는 곳, 그곳이 로마이다.
멀리 포로 로마노가 보인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다. 언제나처럼 서너 걸음 뒤에 따라오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기 어르듯 부드럽게
“그럼 안되지~~!”
뒤를 돌아보니 여자 아이 둘이 반대쪽으로 잰걸음으로 가는 게 보였다.
“재들이 내 가방에 손을 대기에…”
그날은 남편이 크로스백을 매고 나온 날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부드럽게 말해? 소리를 빽 질러야지!”
“어차피 가방 속에 지갑도 없는데 뭘…”
참 속도 좋다.
<포로 로마노>의 포로는 이탈리아어로 ‘공공 광장’이라는 뜻으로 고대 로마인들이 일상에 필요한 시설이 있던 곳이다.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니 언덕 사이의 낮은 지역으로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이면서 발전한 곳이다. 그러나 제정 로마 시대가 되면서 정치 활동의 중심이 황제의 궁전이 있는 팔라티노로 옮겨지면서 포로 로마노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비 온 뒤 생긴 물 웅덩이엔 무너진 돌기둥의 검은 그림자만이 쓸쓸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다. 도로가 집중되는 곳에 힘도 모이기 마련이다. 길이 모이는 곳이 소통의 중심이고, 부와 힘도 모인다. 개선문 옆에 웬 돌 무더기가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상징적인 중심이라고 한다. 그곳이 2000년 전 모두가 향하는 로마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한때 로마의 정치·상업·종교 활동이 활발히 이뤄졌던 도시의 위용은 잠든 지 오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장군들이 개선 행진을 하던 거리엔 활기와 시끄러움 대신 무너진 크고 작은 돌 무더기만 잔뜩 깔려 있다. 그 돌 하나하나가 가진 시간과 의미를 생각하니 짜릿한 전율이 느껴진다.
콜로세움 주변엔 검투사 복장을 한 근육질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얼쩡댄다. 무턱대고 그와 함께 사진을 찍다간 덤터기 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콜로세움은 인간들의 쾌락을 위해 피비린내 나게 하던 아픔의 장소다. 콜로세움 아래쪽에 검투사와 맹수들이 대기했던 장소가 적나라하게 보인다. 잔인함과 공포심이 즐겼던 당시 광경을 생각하면 섬뜩하다. 콜로세움은 80여 개의 아치형 문을 통해 5만 명이 넘는 인원이 10분 안에 입장할 수 있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에는 돔 형태의 천장 지붕이 태양을 막아주는 설계이다. 검투사 러셀 크로우가 열연한 영화 <글레디에이터>가 뇌리를 스친다.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근처엔 큰 키의 위용을 자랑하듯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이 있다. 줄기나 형태가 기품 있는 소나무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아니 영혼이 깃든 나무처럼 느껴졌다. 마치 2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고고하고 웅장한 표정으로 서 있다. 나무도 하나의 역사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나무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레스피기(이탈리아의 작곡가)가 만든 로마의 소나무가 떠올랐다. 막연하게 로마와 소나무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생각했었다. 로마의 소나무는 한국의 산에서 보는 소나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대전차 경기장, 뭔가 웅장하고 긴 타원형의 트랙이 펼쳐져 있는 스타디움 같은 걸 상상했다. 그러나 형태만 비슷하게 남아있는 덩그런 풀밭이다. 소풍 나온 가족이 점심을 먹거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트랙 돌듯 걷고 있을 뿐 벤허도, 멧살라도 없었다. 허탈한 마음에 가뜩이나 기운이 빠지는데 남편이 말했다.
“진실의 입이 어딘가 물어봐”
나 원 참, 남편은 나를 무슨 자동 동시 통역사쯤으로 생각하는 걸까? 진실의 입이 이태리어로 나도 뭔지 모른다. 'Mouth of truth?'라고 물어보면 과연 로마인들이 알까?
산마르코 광장은 ‘피아차 디 산 마르코’,
트레비 분수는 ‘폰타나 디 트레비’,
봉 꽁빠니에 거리 하면 ‘비아 디 봉 꽁빠니에’,
리알토 다리 하면 ‘폰테 디 리알토’,
산타 마리아 성당은 ‘끼에사 디 산타 마리아’,
산타 마조레 성당은 ‘바실리카 디 산타 마조레’
하는 식으로 성당, 광장, 분수, 다리 등을 나타내는 이태리어는 이제 입에 착착 붙어 저절로 나온다. 물론 영어로 길을 묻지만 유물이나 유적지는 대부분 고유 명사니만큼 이태리어로 물어봐야 이해가 쉽기 때문이다. 이름을 모를 때는 사진을 보여주며 묻는 게 최고다. ‘진실의 입’을 찾아보니 ‘라 보카 델라 베리따’이다.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있는 게 보였다. 진실의 입에 손을 넣으며 사진을 찍기 위한 사람들일 거라는 추측이 맞았다. 진실의 입이란 코스메딘 산타 마리아 델라 교회 입구의 벽면에 있는 대리석 가면이다. 진실을 심판하는 것으로 전해지는 대리석으로 만든 얼굴 조각상인데 거짓말하는 사람이 손을 넣으면 손목이 잘린다는 설이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손을 넣었던 장면으로 더 유명해졌다. 그런데 사실 그 대리석은 가축시장의 하수도 뚜껑으로 사용되던 것이라고 한다. 사진 한 장 찍기 위해 그 긴 대열에 합류하여 기다리고 싶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고대 로마의 경기장 트랙을 그대로 살려 광장으로 조성한 나보나 광장 주변엔 아름다운 노천카페가 많았다. 나보나 광장의 명물은 무어인의 분수,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을 모티브로 만든 포세이돈의 분수, 나일・갠지스・다뉴브・라플라타 강을 각각의 신 모습으로 형상화해 표현한 4대 강의 분수로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광장은 예로부터 생활의 중심지이자 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때로는 혁명이 일어나는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광장에 얽힌 다양한 문화와 역사와 뒷이야기를 상상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 숨어있을 갖가지 슬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광장엔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수백 년 전의 전통의상과 가발을 쓴 사람들이 여행자들을 기다린다. 과거와 현재의 사람이 어울려 한 장의 사진에 담기도 한다. 화가들은 어제처럼 오늘도 이젤을 세워 놓고 분수와 조각, 그리고 즐겁고 다정한 사람들을 그린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돌연 인사를 하여 놀라게 하는 인간 동상, 기타와 아코디언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악사들,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같은 수로를 통해 흘러온 물을 뿜어대는 분수와 대리석 조각이 자리를 지킨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그림이고 사람이 음악이다. 그러니 변함없다. 마차를 모는 사람, 피자를 굽는 사람, 젤라토를 만드는 사람, 무두질하는 사람, 모두들 조각처럼 분수처럼 여전히 거기 있다.
줄리아 로버츠가 주인공인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로마, 인도, 발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먹고’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로마다. 줄리아 로버츠처럼 맛있게 파스타를 먹어보리라, 그녀처럼 나보나 광장 수녀님 곁에서 젤라토를 먹어보리라 했듯 나보나의 노천카페에 앉아 루꼴라 토마토 스파게티와 민트 젤라토를 먹고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그 모두를 바라보는 평화로운 시간이 역사의 스토리를 한 개 더 아는 것보다 풍요로웠다. 사람이 꽃이다. 나도 그 순간 꽃이었다.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을 찾아가는 중이다. 건물 외벽에 모딜리아니의 포스터가 덕지덕지 나붙은 걸 보고 어제 지나갔던 길임을 알 수 있었다. 모딜리아니 특별 전시회를 하고 있는 <로마 폰다지오네 미술관>이다. 어제는 ‘앗! 모딜리아니잖아’ 하며 단순하게 지나쳤지만 공교롭게 그 옆을 다시 지나가게 되니 어제와는 달리 그림을 보고 싶었다. 시간 약속도 없고 꼭 가야 하는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닌 자유여행이다. 보고 싶으면 보고, 멈추고 싶으면 멈춰야 한다.
“나 이 전시회 보고 싶은데…”
“그래? 그렇게 해, 나는 다리가 아파서 여기 앉아서 쉬고 싶어”
남편을 매표소 앞, 의자에 앉혀두고 혼자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잘 익은 감 같은 주황빛 방, 진한 파란색 방, 살구 방, 레몬 방, 블랙 방, 전시실은 저마다 다른 컬러로 구분되어있으며 각 방의 크기는 작았다. 조명을 받은 그림들이 수줍게 몸을 드러내고 있다. 파리를 대표하는 후기 인상파의 작품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거리의 여자였고, 뭇 화가들의 모델이었던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38)과 그녀에게 그림을 배운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 1883~1955) 모자의 작품이 대 여섯 점씩 걸려있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한 방에 서넛 될까? 오디오 가이드 이어폰을 끼고 심취해 있다. 곁에 누가 있는지 같은 건 관심이 없다. 침묵이 음악처럼 방을 떠돌고 있다. 그림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하염없이 바라보듯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건성건성 지나가는 내가 물에 뜬 기름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왁자지껄한 철부지 어린아이들 사이에 끼어 그림을 보게 되는 우리나라에서의 특별전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다. 이태리의 예술이 왜 뛰어난지, 이태리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관심과 수준이 짐작되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의 그림이 걸려 있는 방에 들어섰다. 역시 그의 작품에는 잔느 에뷔테른을 빼놓을 수 없다. 잔느는 모딜리아니가 죽자 사흘 만에 그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남편을 따라 자살했다. 8개월 만삭의 몸이었다. ‘죽어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겠어요’ 했던 그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파란 옷을 입은 소녀’가 보였다. 반가웠다. 지금까지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다섯 명의 여고 동창생이 있다. 우리의 공통점은 많다. 모딜리아니를 좋아하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카카오 톡 프로필 사진이 모두 모디의 그림으로 설정되어 있다면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그중 하나가 ‘파란 옷을 입은 소녀’이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여유 있게 그림을 볼 수는 없는 일, 미술관에 들어온 지 40여 분쯤 지났을까? 아트 숍에서 친구들에게 선물할 모디의 그림을 몇 장 사곤 재빨리 나오니 혼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그 모습이 안 쓰러 보였다.
코끼리 상 위에 오벨리스크가 있는 걸 보니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일 터였다. 작은 광장에 거리 악사들이 첼로와 기타를 연주한다. 소리의 궁합이 꽤 좋다. 에릭 클렙튼의 <Tears in Heaven>을 연주하는데 얼마나 좋은지 떠날 수가 없어 한참 동안 들었다. 바닥에 놓인 기타 케이스 안에 CD가 보였다. 두 사람이 녹음한 대 여섯 곡의 음악이 들어있었다. 동전을 던져주느니 한 장 사주는 게 낫겠다 싶어 10유로를 주고 구입했다.
2천 년 전 만들어진 교회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이 천사의 설계라고 극찬한 곳, 천장에 있는 지름 9m의 유일한 구멍 오쿨루스에서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내부의 청동 부조를 아름답게 비출 뿐 창문 하나 없는 곳, 건물 내부의 공기가 위로 올라가는 기류로 인해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만들어진 곳,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와 움베르토 1세 및 라파엘로 등 이탈리아 명사들의 무덤이 있는 곳, 그곳은 판테온이다.
‘판’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고 ‘테온’은 ‘신’을 뜻하는, 그러니까 모든 신을 모시는 만신전이었으나 지금은 성당으로 사용한다. 과연 불후의 명작이다. 외부는 낡았지만 내부는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한지 잠시 의자에 앉아 황홀하게 취해있었다.
이탈리아는 식당이든, 기차역이든 커피를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뽑아준다. 서서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 잔은 1유로다. 판테온 근처에 가면 꼭 <타짜도르> 를 찾아가서 커피를 마시라던 친구 말대로 카페를 찾아갔다. 명성대로 사람들이 많다. 에스프레소 한 잔의 여운이 교향곡처럼 입안에 오래 남아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스타 벅스나 카페 베네 같은 카페는 명함도 못 내민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물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다. 발길을 더할수록 물소리는 더욱더 커진다. 골목을 벗어나자 갑자기 확 트인 광장이 나타나면서 시원한 물소리가 귀에 가득 찬다. 분수의 조각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트레비 분수이다.
황갈색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의 벽면에 하얀 대리석 조각들이 무대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바다의 신 트리톤이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거대한 조개껍질 모양의 마차에 올라서 있다. 매끄럽게 깎은 돌 수반이 주는 부드러움은 거칠고 울퉁불퉁한 바위와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분수의 물은 군데군데서 작은 폭포가 되어 흘러내린다. 그 뒤로 수직의 기둥들, 좌우의 조각상, 그리고 육중한 띠를 두른 르네상스의 벽이 격정적인 무대를 고요히 조율하고 있다.
이 격렬한 인상을 <정오의 트레비 분수>라는 제목의 오케스트라 곡으로 만든 사람이 있다. 볼로냐 출신의 레스피기(O. Respighi 1879-1946)이다. 그는 20세기 초 쇠퇴해 가는 이탈리아 오페라 음악을 대신하여 기악음악으로 새로운 장을 연 대표적인 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다. 러시아에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가르침을 받고 돌아와 탄생한 것이 ‘로마 3부작’, 즉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이다. 그중 <로마의 분수>는 새벽부터 황혼까지 네 개의 분수가 주는 인상을 네 개의 음악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연주시간은 대략 15분 정도 된다.
등을 돌리고 서서 오른손에 동전을 쥐고 왼쪽 어깨너머로 던지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 인산인해이다. 로마에 다시 오게 해 달라고,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그 덕에 분수엔 세계의 동전들이 모두 모인다. 트레비(Tre, 3이라는 뜻)라는 이름은 이 지역이 세 개의 물길이 모이는 장소이라는 설과 여기 분수로부터 세 개의 길이 나누어진다는 설이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근처에 테이크아웃 음식점이 보였다. 피자와 모둠 샐러드, 치킨, 초밥, 과일 등 다양한 먹 거리를 몇 개 사서 호텔로 돌아갔다. 생선회가 올려진 초밥은 네 개뿐이고 나머지는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꼬마 김밥이다. 김밥 속에 들어 있는 노랑과 초록의 정체는 오이와 단무지 한쪽이었다. 그런 초밥 1인분이 20유로니 금쪽같다. 먹었지만 여전히 뱃속이 허전하다. 전 날 한국식당에서 사 온 공기 밥에 튜브 고추장을 치약 짜듯 쭉 짜서 넣고 쓱쓱 비벼 먹으니 그나마 좀 먹은 것 같았다. “역시 한국 사람은 밥 심이야”
이렇듯 불가능의 변수를 기꺼이 감당해야 하는 자유여행을 택하는 이유는 객고에 담긴 여행의 의미 때문이다. 객지에서 느끼는 어려움의 성장통이 없다면, 방랑자의 설움을 느껴보지 못한다면, 여행의 기쁨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버스 왔습니다. 자, 타세요, 여기 공짜 화장실이니 다녀오세요, 오늘 메뉴는 티본스테이크입니다, 여기가 포토 포인트니 한 장씩 찍으시고…,’
호텔 앞에 사뿐히 대령하는 버스를 타고 내리는 식의 여행은 편안하다. 거기 그냥 완벽한 여행의 밥상이 차려져 있고, 설렘이라는 이름의 숟가락만 달랑 들고 남이 차린 밥을 떠먹기만 하는 여행은 매력이 없다. 함께하는 일행과 입은 옷만 다르지 다름이 없다. 같은 시간에 같은 걸 보고, 똑같은 걸 먹고, 똑같은 설명을 듣고 따라야 한다. 행동반경이나 자유의 틈바구니가 없다. 여행이란 모름지기 정해진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탈이다. 그런데 여행마저 누군가 정해 놓은 틀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꼭두각시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느낌이라는 이에게 구속 복을 입히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로마엔 로마 버스 투어, 로마 워킹 투어, 바티칸 투어 등 1일 투어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다. 투어를 이용하면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정해진 루트를 따라다녀야 하므로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작다 는 타이틀이 붙지만 그래도 하나의 국가이다. 바티칸의 방대한 유물과 그림들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바티칸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다. 다음 날 아침 7시 45분까지 메트로를 타고 옥타비아노 역으로 가야 한다. 단체가 움직이는 가이드 투어니만큼 늦으면 합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과연 아침을 먹고도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리셉션의 남자는 훤칠한 키에 미남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말했다.
“Can I ask you something?"
“네, 마담. 얼마든지요.”
“나는 영어를 잘 못해요, 그러니 천천히 말해주실래요 플리즈.”
그가 웃었다.
“그러죠, 걱정 마세요”
“내일 아침 7시 45분까지 메트로를 타고 옥타비아노 역까지 가야 해요.
거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그리고 여기서 어떤 방법으로 가야 하는지,
아침 식사가 7시부터라 시간이 촉박한데 혹시 도시락을 준비해 줄 수 있는지요?”
그는 명확한 답을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도시락을 준비해 줄 수는 있지만 가까운 거리니까 식사를 하고 가도 충분하다는 것과 메트로 역까지 가는 버스 번호를 메모해주었다. 그의 말은 모두 맞았다. 메트로 역에 도착하니 가이드를 제외하고 우리가 1등이었다.
투어 인원은 모두 40명, 우리 또래의 부부, 대학생 딸과 엄마 아빠, 임산부를 포함한 대가족, 그 외엔 대부분 대학생 커플들이다. 여자 친구와 함께 왔다고 당당히 자기소개를 하는 그들을 보며 격세지감을 실감했다.
인구 천여 명에 면적은 경복궁의 1.3배, 군대, 방송국, 금융기관, 화폐까지 보유한 나라 바티칸 박물관에 입장하는 건 비행기 탈 때처럼 검색대를 거쳐야 한다.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와 최후의 심판에 대해 약 한 시간 동안 설명을 듣고서야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지도의 방을 지나 회화 관인 피나코테카는 대충 건성으로 지나가는 바람에 카라바조나 젠틸레스키 등의 그림을 못 보고 지나가서 섭섭했다. 라파엘로의 방에 있는 그림 <아테네의 학당>은 책에서 사진으로 익히 보아 친숙하나 진품을 보니 역시 달랐다. 소실점을 화면 중앙에 두고 완벽한 원근법을 구사한 작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중심으로 54명의 등장인물은 산만하거나 복잡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조화롭게 배치하고 4단 대리석 계단 위에 현인들을 수평구도로 배열하였다. 완벽한 구도감과 조화가 더 없이 아름다웠다.
한 시간의 점심시간이 주어졌다. 바티칸의 레스토랑은 맛없고 비싸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태리 샌드위치인 파니니와 과일을 준비해서 도시락으로 가져갔다. 해묵은 아름다운 정원을 배경으로 먹는 점심식사가 맛있고 따사로웠다.
솔방울 정원을 거쳐 드디어 시스티나 성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교황을 선출하는 장소인 콘클라베로 쓰이는 시스티나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와 벽화인 최후의 심판이 있다. 과연 그 그림들은 어떤 미소로 다가올까? 내심 궁금했다. 성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을 향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스티나 성당은 상상보다 크지 않았고 사람들이 빼곡했다. 사진을 찍는 것도, 대화도 허용되지 않는다. 침묵으로 일관한 사람들의 눈이 미켈란젤로의 말씀을 숙독하듯 모두 천장을 향해 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1475-1564)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수놓았던 천재 미술가 중 한 명이자, 지금도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바티칸으로 끌어 모으는 시스티나 성당의 알짜배기라 할 수 있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세상의 시작과 마지막을 그린 셈이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교황 바오로 10세가 맡긴 베드로 성당 돔의 설계만 겨우 완성한 채 로마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그의 나이 90세였다. 그림과 조각과 건축에 전념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신은 고향 피렌체로 보내져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고 산타크로체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조각가인가? 화가인가? 건축가인가? 그가 디자인한 메디치 가문의 예배당과 묘소, 도서관을 보면 마치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 하나가 꿈틀거리는 듯하다. 24세 때 완성했다는 조각 작품 피에타는 피에트로 성당 안쪽 방탄유리벽 속에 들어있다. 수년전 어떤 정신병자가 망치로 일부를 깨버린 이후 복원을 거듭하여 방탄 옷을 입게 된 것이다. 부드러운 고무 찰흙으로도 그토록 매끄럽게 만들 수는 없으리라. 예수의 근육은 물론이거니와 팔뚝의 실핏줄까지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다. 돌에서 영혼을 캐낸 사람 미켈란젤로, 그는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티칸의 경비는 스위스 근위병이 맡는다.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성 베드로 성당을 개축하면서 공사기간 동안 취리히, 루체른 주와 용병 파견 계약을 맺었다. 훗날 카를 5세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를 침략하여 국가 전체가 위급한 상황이었는데, 스위스 용병들만이 목숨을 걸고 교황을 보호한 것이다. 그 후로 지금까지 스위스 근위병이 바티칸시국을 지키게 되었다고 한다. 바티칸 근위병이 되기 위해서는 스위스 태생의 가톨릭 신자이면서 신장 175cm 이상, 19~30세의 미혼 남성으로 4개 국어 이상의 조건을 충족해야 하니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근위병들의 화려한 근무복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것이라고 하니 그에게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함도 붙여야 할 것 같다. 바티칸이 마치 미켈란젤로의 집처럼 그의 작품이 도처에 널려있다.
바티칸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니 꽤 피곤했다. 그러나 남은 시간은 달랑 내일 하루뿐이다. 그동안 어디로 어떻게 누구와 간 여행이든 혼자만의 시간이 있었고 내겐 그게 필요했다. 집에서처럼 말했다.
“나 쇼핑 좀 하고 와도 될까?”
“응 그래! 갔다 와”
로마 패스와 지갑, 휴대 전화만 달랑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막상 나가니 어디로 가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어디로 가볼까? 생각하는데 버스가 왔다. 버스로 세 정거장 간 다음 메트로로 바꿔 탔다. 사람이 많았다. 한 정류장 뒤에 내릴 거라 문 앞에 섰다. 기차 문이 닫히는 순간 내 가방 속으로 어떤 이의 손이 들어가려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내게 들켜버린 그 손은 아무것도 꺼내지 못한 채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지만 도무지 그 손의 임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다. 가방을 단단히 여며 잡고 기차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그 도둑과 눈이라도 마주쳤다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