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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Dec 07. 2016

파리, 어디까지 보셨어요?

필하모니 드 파리,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오로라, 본 적 없어요.

새벽이라는 뜻의 오로라(aurora)는 맑고 차가운 대기 중에 나타난다지요.

노르웨이에서 피오르드는 보았지만 빙하 역시 실제로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 맑고 차가운 느낌은 뭐지?

그의 피아노를 처음 들었을 때 오로라와 빙하가 떠올랐어요.

‘Nuvole Bianche’,

제목이 하얀 구름이에요.


‘Nuvole Bianche’


앙드레 가뇽, 유키 구라모토, 케빈 컨, 시크릿 가든 등의 음악을 즐겨 듣던 때가 있습니다.

소위 '뉴 에이지'라는 장르죠.

그러나 ‘하얀 구름’은 그것들과는 차별화된 그 무엇이 있었어요.


젠 스타일이라고 할까?

제주도 비오토피아에 이타미 준이 설계한 바람 박물관, 물 박물관이 있습니다.

간결한 편안함이 그곳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더군요.

차가움, 맑음, 간결함, 편안함은 곧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으로 마무리할 수 있겠네요.

     


얼마 전 국제 환경단체인 그린피스(Greenpeace)가 북극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퍼포먼스를 기획했습니다.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의 한 빙하지대,

얼음 조각 모양의 장식을 한 간이 배위에 피아노가 놓여있어요.

여기저기서 퍽~퍽 하며 거인의 눈물 같은 빙하 조각이 떨어집니다.

     


“Elegy For The Arctic(북극을 위한 애가)”      

그날 피아노를 연주한 이가 바로 ‘Nuvole Bianche’의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o Einaudi, 1955~ 이탈리아)입니다.

그의 음악에 대한 내 느낌이 옳았던 걸까요?     


“Elegy For The Arctic(북극을 위한 애가)”


여행 일정이 정해지면 제일 먼저 하는 일,

방문할 도시의 오페라 홀이나 콘서트홀의 홈페이지 검색입니다.

음악회에 일정을 맞출 수는 없는 일,

여행과 공연 일정이 어긋나서 좋은 연주를 놓칠 때면 안타까움이 많아요.     


필하모니 드 파리 홈페이지를 찾아들어간 건 파리에 도착하기 6개월 전,

날짜를 클릭하니 화면에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사진이 떡~ 하니 나타납니다.


Ludovico Einaudi


어떤 곡을 연주하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았어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티켓을 예매했습니다.

왜냐고요?

믿음이죠.

그 후로도 몇 번, 홈피에 들어갔지만 연주곡은 끝내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티켓은 오픈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솔드 아웃!

함께 예매했던 하루 전의 프로그램, 파리 오케스트라보다 티켓이 비쌌는데도 불구하고요.


드디어 그날(2016.1.29)입니다.

공연장에 들어서서 좌석에 앉을 때 까지도 어떤 음악을 연주할 것인지 알 수 없었어요.

인쇄된 프로그램도 없고요.

피아노 위엔 어설프기 짝이 없어 보이는 악보 한 장이 달랑 놓여있을 뿐이지요.     



필하모니 드 파리는 우리 돈으로 약 5천2백억 원,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해서 2015년 완공된 콘서트홀입니다.

하지만 모든 연주회의 입장권은 10유로(한화 약 1만 3천 원)에서 시작된다는 거, 참으로 멋지고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묵고 있는 호텔이 파리 리옹 역 앞이었어요.

리옹 역에서 라 데팡스행 메트로 1번을 타고 바스티유 역에서 내렸습니다.

라 데팡스는 파리에서 유일하게 고층 빌딩이 건축될 수 있는 그러니까 신도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에요.

거기서 파블로 피카 소행 메트로 5번으로 갈아타고 포르 드 팡탱 역에서 내리기까지 1시간쯤 걸렸을까요?     



저 멀리 무슨 모양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건물이 괴물처럼 앉아있습니다.

범상치 않은 디자인으로 보아 콘서트홀이 틀림없을 거라 생각했지요.

꽃잎 같기도 하고, 갈매기 날개 모양 같기도 한 메탈 조각을 건물 가득 촘촘하게 붙여 놓았어요.

건물의 껍데기는 각도에 따라 검거나 하얗게 빛나며 입체적으로 보였지요.

금속 조각 때문에 잠시 불시착한 우주선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우선 압도적인 크기와 모양, 그리고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은빛 조각이 신비로웠어요.
하지만 놀라기엔 아직 이릅니다.

내부에서도 신기함이 거듭 되었거든요.

로비 천장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PVC인지 금속인지 모를 얇은 조각들이 블랙 귀걸이처럼 빽빽하게 걸려 있어요.

거기다 하얀 벽은 미니멀 그 자체입니다.

흑백의 세련된 조합이죠.



콘서트홀의 내부는 영화에서나 볼법한 환상의 공간처럼 기막히게 아름다웠어요.

벽, 발코니, 천장에 걸린 음향 판 등 모든 면이 곡선의 날개로 춤을 추듯 걸려 있습니다.

다의 춤 같기도 하고요.

금속판으로 인해 북극처럼 차게 느껴진 바깥과 반대로 달걀을 풀어놓은 듯한 노랑과 아이보리 컬러의 내부는 아늑하고 부드러워요.

패브릭 의자는 모서리마저 둥글게 마감되어서 마카롱처럼 폭신해 보이고요.   

아래층은 무거워보이는 블랙, 위로 갈수록 밝은 컬러로 배치시켜 안정감을 줍니다.



콘서트홀은 공간의 아름다움만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아니 아름답기만 하면 안 됩니다.

콘서트홀은 복잡한 과학과 수학이 중심이니까요.

소리의 울림과 진동, 배음, 잔향 등 치밀한 계산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지 않아도 짐작하시죠?

  

필하모니 드 파리의 공간감이 부드럽고 따뜻한 이유는 나무 소재와 곡선 때문일 거예요.

발코니나 벽면에도 음향을 고려한 초콜릿 조각 같은 나무 타일이 드문드문 붙어 있는데 그것도 무슨 디자인처럼 모던했습니다.  

초승달, 그믐달이 보기 좋게 걸려 있어요.

음악을 들으러 온 게 아니라 현대적인 설치 미술 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 전후좌우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이 훌륭한 건축을 설계한 장 누벨(Jean Nouvel, 1945 프랑스)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건축계의 마술사예요.

파리 아랍문화원, 아부다비 루브르, 삼성미술관 리움 등이 그의 작품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팔색조라 불리는 그는 건축을 시로 만드는 인물이지요.


Jean Nouvel


그런데 장 누벨은 자기가 설계한 '필하모니 드 파리'에서 자기 이름을 빼 달라며 파리를 고소했습니다.

그는 파리 일간지 '르 몽드'에 기고한 칼럼에서

"필하모니는 스스로 두 다리에 총을 쏘았다, 이것은 건축가에 대한 모욕이다. 건축은 순교했고 디테일은 망가졌다" 고 험담을 쏟아부었죠.

건물은 물론 음향 시설도 자신의 설계대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건축가에게 건축은 자식이잖아요.

자식을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사람은 그 누구보다 장 누벨이었을 테니까요.

아랍 에미레이트에 가면 그가 만든 아부다비 루브르를 가장 먼저 찾아갈 겁니다.


아부다비 루브르


무대 위엔 피아노를 중심으로 알 수 없는 악기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습니다.

루도비코 에이나우디는 원래 혼자 연주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할 때도 있어요.

기존의 악기보다 색다른 소리, 아니 작곡가가 원하는 소리를 내기 위한 악기 아닌 악기들이 더 많아요.


연주자들 또한 걸작입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친구가 베이스 기타를 치기도 하고

키보드를 맡던 친구가 타악기를 두드리기도 해요.

한 사람의 연주자가 보통 3~4개의 악기를 바꿔가며 연주하는 모습이 비범해 보였습니다.

  


루도비코가 무대로 나왔어요.

블랙의 라운드 티셔츠에 얇은 재킷을 걸친 피아니스트는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입니다.

객석의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은 편안한 박수로 그를 반겼죠.     

그는 인사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시를 쓰듯 흰건반과 검은건반이 차례로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반복적으로 움직였죠.

그때서 알았습니다.

곡의 제목이 뭐가 중요한가?

나는 왜 그토록 프로그램을 궁금해했던가?

그는 그의 음악 알맹이를 노출 콘크리트 기법처럼 날 것 그대로 소리 내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음악회가 가지는 짜임이나 순서, 그런 건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저 음악이 저 혼자 날아서 여기와 거기에 머무르거나 숨어들었어요.

갑자기, 그날 그 시간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진하게 전해집니다.


곡이 끝났지만 피아노에서 일어서지 않았어요.

박수에도 인사하지 않았지요.

그저 다소곳이 침묵하다 이내 건반에 손을 얹곤 했지요.

어느새 그의 몸짓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눈치 빠르게 박수를 치지 않게 되었어요.

그렇게 그와 함께 하는 법을 안 거죠.


멋 부리지 않아도 멋있는 사람 있듯

은은하지만 한없이 깊은 울림을 주는 연주가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이미 제목을 알고 있는 곡,

처음 들어보는 곡,

들어봤어도 제목은 모르는 곡,

여러 종류가 있었지요.

하지만 들꽃의 이름을 안다고 더 예쁜 것은 아니듯

음악은 그저 물처럼 흘러가고

나는 그 물에 발 담그고 하늘바라기 하듯 편안했습니다.


음악에 있어 반복은 지루합니다.

반대로 멜로디와 리듬이 계속 바뀌면 어떨까요?

그 또한 통일감이 없고 어수선하며 집중력이 떨어지게 되지요.

하지만 그의 음악은 반복이지만 우아해요.

그게 그의 매력이고 그가 만든 음악의 힘이에요.

반복되지만 지루할 틈 없이 슬쩍 비켜가지요.

그의 음악은 언제나 문을 열어놓은 성당 같습니다.     


그가 말했어요.


'나는 정의하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이 우아하고 개방적인 음악을 지칭하는 단어라면,

나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미니멀리스트로 불리고 싶다.'


모든 예술이 그렇습니다.

소위 명품이라는 물건의 공통점은 심플입니다.

클래식(Classis)이 ‘유행을 타지 않는 최고의’라는 뜻을 가진 것처럼 ‘고급스럽다’라는 것은 절제의 미학을 기본으로 하지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음악은 그 미니멀리즘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는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자랐고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출판업자였대요.

그의 할아버지는 이탈리아의 대통령을 지낸 분이시라니 유복한 가정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랐겠지요.

밀라노 음악원에서 작곡 학위를 받은 후 처음에는 전통적인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만의 음악 컬러를 갖고 싶었지요.

그 시도로 무용과 멀티미디어 작품 시리즈를 만들었고 영화계에 큰 충격을 주며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언터처블>과 <블랙 스완>, 그의 음악이 있어 더 빛나는 영화입니다.


Ludovico Einaudi - Best soundtracks


파리에 가세요?

필하모니 드 파리도 가보세요.



그리고

그곳이 어디든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연주를 만날 수 있다면 꼭 가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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