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생 샤펠
때때로 손에 대해 생각한다.
피아니스트의 손,
화가의 손,
시골 장터에서 만나지는 투박하고 쭈글쭈글한 노인의 손,
피렌체 두오모나 인도 타지마할의 대리석 벽을 보았을 때에도 나는 사람의 손을 생각했었다.
파리 생 샤펠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본 순간 생각난 것은 역시 사람의 손이었다.
이 성당은 두 개의 예배당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어두운 지하 예배당은 성당 관리인들이나 낮은 지위의 궁정직들이 사용했다.
좁은 나선형 계단으로 올라가면 상층 예배당을 만날 수 있다.
왕가 식구들이나 그들의 대리인들만이 다닐 수 있던 곳이다.
보라색 바다가 일어서 있는 느낌이었다.
색유리 한 장 한 장이 모두 다르다.
그 색유리를 바느질하듯 이어놓은 스테인드 글라스는 인간의 손이 빚은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컴퓨터 그래픽처럼 치밀하고 정교한 색유리가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다.
소망 같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인생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사람을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이렇게 비유했다.
'사람들은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과 같다.
그들은 해가 떴을 때 반짝이고 빛난다.
그러나 어둠이 깔리면, 그들의 진짜 아름다움은 오직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빛으로만 드러난다.'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 또는 색유리창은 금속산화물이나 안료를 이용하여 구운 색판 유리조각을 접합하여 만든 유리공예로 주로 유리창에 쓰인다.
7세기경 중동지역에서 비롯되었으며 11~12세기경 유럽의 기독교 문화 지역에 들어와 교회 건축의 필수 예술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고딕 건축으로 인하여 벽이 좀 더 얇아지고 창문 크기가 커지면서 어두운 성당 내부에 색색의 빛을 비출 목적으로 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생 샤펠은 루이 9세가 세운 고딕 양식의 교회이다.
1239년 콘스탄티노플 황제로부터 기증받은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과 십자가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건립했다.
가시관(Crown of Thorns)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머리에 씌운 것이라고 전승되는 종교 유물로 5세기 이전까지는 가시관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1063년에 예루살렘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으며, 1238년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성 루이)가 파리로 옮겨놓았다.
그는 이 가시관을 넣어두기 위하여 생트 샤펠(Sainte-Chapelle)을 짓도록 했다(1242~48).
가시가 없어진 관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보물창고 안에 보존되어 있다.
중세의 독실한 신자들은 이 교회를 '천국으로 가는 입구'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마치 우리나라 사찰의 단청이 바랜 것처럼 군데군데 벗겨진 기둥의 칠이 멋스러웠다.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늙음,
나도 저렇게 자연스레 늙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딕 예술은 흔히 그 규모와 웅장함으로 가장 명성이 높기 마련이지만, 생트 샤펠은 훌륭한 예외이다.
프랑스의 대성당들보다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보석 같은 그 완벽함은 생트 샤펠을 고딕 예술 양식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테인드 글라스는 많다.
그러나 세계 미인 대회에 참가한 미녀처럼 모습이 모두 다르다.
공통적인 건 아름답다는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사물의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집, 가구, 자동차, 옷, 가방, 신발 등 여성이라면 의례히 좋아할 만한 밝고 블링 블링 한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simple하고 basic한 컬러를 즐긴다.
사실 스테인드 글라스를 봐오면서 입이 딱 벌어졌던 곳은 바르셀로나 성 가족 성당에서였다.
밝은 컬러가 천장을 통과한 빛을 빨아들이면서 나무 끝에 피어난 꽃 같았다.
그리고 이곳 생 샤펠에서 다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는 게 너무 힘들어서 맘 같아선 바닥에 누워 사진을 찍고 싶었을 정도였다.
이 예배당은 일 년에 한 번, 성 이브 축일에는 미사가 열린다고 한다.
대신 연주를 하는 공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실 성당은 울림이 좋기 때문에 음악가들이 실제로 음반 녹음을 하기도 한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성당에서 음악을 듣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래본다.
생 샤펠 성당 옆은 콩시에주리,
사실 이곳은 왕실 전용 공간으로 파리에서 맨 처음 지어진 궁전이다.
14세기 말, 루브르 궁전으로 이전하면서 15세기부터는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유명한 인물들이 여기에 갇히곤 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뜨이다.
20세기 초반부터는 감옥으로서의 사용을 중지하고 역사 기념관 용도로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건물의 일부는 파리 법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1755)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루이 16세에게 시집간 오스트리아의 공주는 38세에 단두대에서 비운의 최후를 맞았다.
삶의 방향과 길이를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애면글면 살 일 아니다.
베르사유 궁전 티켓 오피스 내부에 루이 15세, 16세와 그의 부인들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