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이 떠오르던 수도원의 안개
기차를 놓쳤다.
30분 늦어질 뿐이니 걱정할 일은 아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너그러워진다.
집 떠나면 긍정 모드로 변하는 내 피의 성질이 궁금하다.
밤베르크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
언제나 그랬듯 호텔에 캐리어를 맡기고 나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인심 좋은 인상의 중년 남자는 별도의 페이 없이 얼리 체크인을 해주었다.
생각의 품이 너른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배워야지 하면서 잘 되지 않는다.
독일에 온 이후 최고 포근한 날이다.
2차 세계대전 중 공습을 당하지 않은 밤베르크는 수백 년 된 건물들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복 받은 도시이다.
밤베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다리 위에 세워진 구 시청사,
레크니츠강(Recknitz River)이 합류하는 지점에 놓인 두 개의 쌍둥이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건물이 미술관처럼 아기자기하게 예쁘다.
옛날에는 도시 가운데로 흐르는 강을 경계로 시민 지구와 주 교구로 나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다리 위에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야트막한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니 대성당과 신왕궁이 나타난다.
돔광장의 중심에 서니 중세 유럽의 장엄함이 느껴졌다.
4개의 첨탑이 솟은 대성당과 주교 궁전의 크기가 밤베르크라는 작은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크다.
중세 유럽의 주교의 권력은 왕권을 능가했던 시대이니 그럴 법도 하다.
여느 대성당보다 훨씬 고요하고 엄숙한 건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성당 안에는 무명의 조각가가 만든 밤베르크의 말 탄 기사 조각상이 유명하다기에 찾아보았다.
하인리히 2세의 궁전은 대성당과 단짝 친구처럼 붙어 있다.
1704년 합스부르크 왕가는 구 궁전이 파손되어 제 역할을 못하자 바로 옆에 신 궁전을 지었다.
총 4개의 건물로 2개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프랑스식 르네상스 풍으로 건설했고, 2개는 바로크 양식으로 건설했다.
100여 개의 방으로 만들어진 궁전은 규모 못지않게 각양각색의 조각과 프레스코화로 내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장미정원이 유명하지만 겨울이라 을씨년스러울 뿐이다.
왕궁보다 더 높은 곳에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던 성 미하엘 교회가 있다.
가파르지도 않은 언덕을 오르는 일이 쉽지 않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소년 둘이 보였다.
장난을 하며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이가 들수록 소리 내어 웃는 일이 사라지고 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카메라를 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고 있다.
말을 걸어볼까 하다 그만둔다.
그녀가 원하는 건 혼자만의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게스트 하우스 간판이 제법 많이 보였다.
밤베르크를 찾는 여행자가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청년 둘이 나뭇가지를 자르고 있다.
높은 곳에 올라오니 안개가 부옇게 어려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지 않는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地上)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 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무진에 가고 싶은 꿈을 가졌었다.
무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그때가 좋았다.
독일은 도시마다 하우스 와인처럼 자신들만의 독특한 맥주를 갖고 있다.
밤베르크만 해도 30여 종의 자체 맥주가 있는데 특별히 유명한 건 바로 훈제 맥주이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 밤베르크에서는 독일 전통 음식에 훈제 맥주 한 잔 정도 맛보고 싶었다.
레스토랑 슐렝케를라 (Schlenkerla)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족발과 비슷한 요리 슈바인 학센(Schweins Haxen)은 당근과 샐러리, 양파 등과 곁들여 나오기 때문에 맛이 담백했다.
양배추를 식초에 절여서 만든 독일식 김치인 싸우어 크라우트를 곁들여지니 더욱 상큼하고 맛있었다.
예전에 엄마가 하시던 말씀이 있다.
껍질이 두 겹인 식품은 모두 몸에 좋은 거라고...
단단한 겉껍질을 벗겨내면 그 안에 또 한 겹의 속 껍질이 있는 견과류를 말씀하신 것이다.
밤, 호두, 잣, 은행, 아몬드, 마카다미아, 피스타치오...
호두는 견과류 종류 중에서도 껍데기가 매우 단단하다.
호두를 깨기 위한 도구는 여러 종류가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호두를 까는 실용적인 목적 외에 장식용으로도 쓸 수 있도록 목각인형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발레 음악으로 유명한 호두까기 인형은 호두를 까기 위한 인형 모양의 도구를 말하는 것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빨갛고 노란색의 깜찍한 군인 옷을 입은 인형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게 바로 호두까기 인형이다.
호두까기 인형은 성탄절과 결부되어 선물용으로도 많이 쓰였다.
보통 목제가 많지만, 지역과 장인에 따라 금속이나 도자기 등으로 만들기도 한다.
전통적인 호두까기 인형은 카이저수염을 기르고 정복을 입은 군인의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등 쪽의 레버를 올리면 입이 열리고 열린 입에 호두를 넣고 레버를 내리면 호두가 깨지는 구조이다.
이러한 전통 호두까기 인형은 지금도 많이 제작되고 있다.
독일이 2차 대전 패전 후 동, 서독으로 분리되었을 때 동독의 귀중한 외화벌이 상품 중 하나이기도 했다.
발레(Ballet)는 이탈리아어 발라레(ballare)에서 파생한 말로 '춤을 춘다'라는 뜻이다.
발레가 다른 춤과 다른 특징은 몸짓과 표정으로 음악에 맞춰 스토리를 전개해나가는 춤이다.
반드시 오케스트라가 무대 아래에서 연주를 해야 한다.
오페라와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발레는 눈과 귀가 동시에 즐거울 수 있는 예술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 <호두까기 인형, 1816> 은 원제가 <호두까기와 생쥐 대왕>이다.
'호두까기 인형'의 원작자 호프만은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밤베르크에서 살았다.
그런 이유로 이것에 호프만 극장이 있다.
호프만이 친구의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동화가 호두까기 인형이다.
동화 속 등장인물인 마리, 프리츠도 실제 아이들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한다.
주인공인 마리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호두까기 인형을 받는다.
한밤중에 사악한 쥐들과 호두까기 인형 군대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호두까기는 은인인 마리를 눈꽃이 흩날리는 숲을 지나 과자의 왕국으로 데려간다.
이 부분부터 <중국의 춤>이나 <갈잎 피리의 춤>처럼 유명한 곡들이 즐비한 막간 여흥이 시작된다.
밤베르크에도 작은 베니스라 불리는 곳이 있다.
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잡고, 잡은 고기를 자기 집 테라스에서 말릴 수 있도록 하다 보니, 지금처럼 테라스가 강에 곧장 이어지는 구조가 된 것이다.
도심을 유유히 흐르는 레그니쓰 강가에 오래된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지붕과 집집마다 갖고 있는 테라스는 작은 정원처럼 앙증맞다.
강변의 집들은 서로서로 닿아있다.
사람들이 이곳 레그 니쓰 강가에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9세기경부터였다.
당시 그들은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어부들이었다.
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잡고, 잡은 고기를 자기 집 테라스에서 말릴 수 있도록 하다 보니, 지금처럼 테라스가 강에 곧장 이어지는 구조가 된 것이다.
20세기부터 그들이 살았던 단순한 집들을 정원이 있는 아기자기하고 아담한 집으로 개조하면서 낭만적인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이곳이 작은 베네치아라고 불리게 된 것은 독일을 여행하던 저널리스트가 작은 베네치아라고 소개한 이후라고 한다.
<정신현상학>을 집필하던 게오르크 헤겔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조간신문을 읽는 것은 현실주의자의 아침 기도다.”
심원한 관념 철학을 구축해가던 헤겔은 신문을 펼치는 일이야말로 세상과 만나 세상을 읽는 불가결의 기회이자 일과였던 것이다.
그는 <정신현상학>을 완성한 직후 <밤베르크 신문> 편집장이 되어 1년 남짓 기사를 쓰고 신문을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밤베르크에 남아있는 헤겔의 집 또한 자랑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뭔가 족적을 남긴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했다는 점이다.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더 행복하다.
그러므로 지금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