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57세, 홀로 캐나다(밴쿠버)
다소 낮은 음색에 말수가 적은 사람에게 좀 더 믿음이 갑니다. 경박한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일 테지요. 내가 좋아하는 여행도 그와 비슷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이나 낡은 벽을 바라보는 일, 다른 하늘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의 대화를 엿듣는 일, 그 사소하고 소박한 시간과 공간 속에 놓임을 좋아합니다. 거창한 역사나 인물들을 머릿속에 입력하는 건 중요치 않지요. 나의 여행은 후회 없을 선택이며 나를 찾아가는 길일뿐입니다. 발길 닿는 곳이 곧 나만의 주소이며, 그 어떤 생각도 나누지 않아도 되는, 오직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 그게 홀로 여행의 좋은 점이 아닐까요? I, my, me, mine을 이룰 수 있는 계절, 그 하나 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7월 19일 저녁 6시 50분(수요일), 밑 불만 남은 가마솥처럼 한낮의 열기가 한소끔 빠져나갈 무렵, 300톤이 넘는 거대한 쇳덩어리가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저녁 6시 50분 비행기를 타고 10시간을 날아갔는데 같은 날, 낮 12시 50분입니다. 밴쿠버가 한국보다 16시간 늦은 까닭이지요. 집으로 돌아갈 때는 시간을 도둑맞은 느낌이 들겠지만 우선은 좋습니다. 늦가을 같이 선선한 바람이 불어요. 그 서늘함이 환영의 메시지 같아 맘에 듭니다. 공항에서 980번 버스를 타고 밴쿠버 시티 센터에서 내려서 Hugo네 집을 찾아가야 합니다.
밴쿠버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은 상상을 통해 여행 프리뷰에 썼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다만 숙소가 위고네 집에서 제이슨의 집으로 바뀌었을 뿐이지요. 여행 한 달 전 위고에게서 메일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매니저로부터 에어 비앤비를 운영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예약을 취소한다는 내용이었어요.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지요. 위고네 집보다 1.5배나 되는 금액을 주고서 얻은 숙소는 다행히 단독 스튜디오였습니다. 호스트인 제이슨은 배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밴쿠버에 도착하기 이틀 전, 자신의 집 현관키의 넘버를 알려주며 소파 베드를 펼치는 방법과 린넨에 들어있는 곳의 위치까지 알려주는 동영상을 보내왔습니다.
전형적인 주택가인 1762번지, 그의 집은 혼자서 생활하기에 편리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이집트와 인도 타지마할, 만리장성에서 찍은 사진이 액자에 들어있는 걸 보아 그도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임을 짐작합니다. 내 키보다 더 큰 전신 거울이 거실 한편에 새워져 있고 복도 끝에 걸려있는 커다란 칠판에 흰 분필 글씨가 빼곡합니다. 피자나 초밥 같은 근처 맛집과 브런치를 먹을 수 있는 음식점, 빨래방, 펍의 이름과 소요 시간 등을 적어두어서 그 집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명시해 둔 거였어요. 꽤 다정하고 꼼꼼한 성격임을 엿볼 수 있었지요. 프라이빗 가든이라 명시되어있던 작은 정원에는 장미 몇 송이와 옥잠화, 수국, 글라디올러스가 꾸미지 않은 듯 무심하게 피어 있습니다. 해와 비바람에 칠이 벗겨진 두 개의 의자와 타일을 붙여 만든 소박한 테이블이 부담스럽지 않으니 내 집처럼 맘이 편합니. 예정된 약속이나 예약 같은 게 없으니 딱히 뭔가를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세면도구와 화장품, 실내에서 입을 옷 가지를 꺼내놓고 소파에 벌렁 누웠지요.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옵니다. 나에게 주는 28,800분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집에서 나와 50m쯤 걸어가니 일본 레스토랑, 인디아 레스토랑, 버거 집들이 즐비합니다. 기다리는 버스는 20분이 지나도 오질 않아요. 버스 진행 방향으로 슬슬 걷습니다. 밴쿠버는 대부분의 버스들이 트램 같이 전선이 연결된 전기버스(굴절 버스)들이 대부분입니다. 시민들은 대부분 교통카드를 이용하지만 여행자들은 1일권이나 운전기사 옆에 놓인 통에 동전을 넣어야 하지요.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왔으니 동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근처 상점으로 들어갔습니다. papa, mom, sister, brother, son, daughter, grandpa, uncle 하는 식으로 누군가를 위한 축하 카드냐에 따라 구분하여 진열이 되어 있어요. 그냥 그 글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하고 흐뭇했어요. 가족이 이렇게 따뜻한 거구나 새삼 느꼈습니다. 버스를 타야 하는데 동전을 바꿔줄 수 있냐고 물으니 흔쾌히 교환해 주더군요.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보일 수 있으나 사실 대단히 고마운 일이라는 걸 알기에 기분이 좋습니다.
기온이 우리나라의 9월 말쯤과 비슷해요. 노천카페에 반려견과 앉아 맥주를 홀짝이는 젊은이들이나 강렬한 그라피티 벽을 배경으로 지나가는 자전거를 타는 남자들이 자연스럽습니다. 도무지 카페도 아닌 것이, 어떤 집의 테라스도 아닌 것이 인도 한 켠에 딱 하나뿐인 철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한 남자가 그토록 평화스러워 보일 수가 없네요. 붉은 벽돌의 건물 벽을 배경으로 앉아 한 손엔 담배를, 한 손엔 커피 잔을 쥐고 있는 모습이 연극 무대의 세트 같기도 해요. 하지만 그 공간 속의 남자는 어느 고급 응접실보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아서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어요. 그곳에 뭐가 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지요. 매 시각 15분마다 증기를 내뿜으며 소리를 뿜뿜거린다는 개스 타운의 증기 시계였습니다. 프라하의 천문시계의 인형들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처럼 그곳 개스 타운에서도 사람들이 증기 뿜는 시계를 보기 위해 기다렸다는 걸 알 수 있었지요. 시계가 증기를 멈추자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집니다. 증기의 힘을 톱니 기어로 보내 시곗바늘의 침을 돌리는 속도로 변속하고 분침이 한 바퀴를 돌면 시침이 돌도록 디자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맞은편 모퉁이의 스타 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사서 길가에 앉았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그날도 오가는 여행자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배낭을 깔고 앉은 젊은 여인이 박스 위에 뭔가를 적습니다. 여행 중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스토리였는데 배가 등에 붙을 정도로 야윈 게 안타까워요.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이런 문구를 써 놓고 길바닥에 앉아있는 아들 같은 청년을 또 만났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를 의심치 않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많진 않지만 일조를 했습니다.
청담동이나 가로수 길 느낌이 난다는 예일타운의 언덕을 쭉 내려가니 정박 중인 요트들이 보입니다. 그곳에선 여러 곳으로 갈 수 있는 배가 있습니다. 아쿠아 버스라는 이름의 조그만 통통배를 타고 그랜빌 아일랜드로 건너갔지요. 배를 운항하는 청년의 아빠스런 양말이 재미있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곳은 원주민들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곳인데 공업 지역이 들어서면서 삶터를 잃은 곳입니다. 지금은 공장도 운영을 하지 않고 퍼블릭 마켓과 갖가지 수공예품들을 만들어 팔거나 수제 맥주로 유명한 명소로 탈바꿈했습니다. 갈매기들이 사람만큼 많았지요. 수제 맥주 공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걸 알았지만 맥주를 선호하지 않으므로 굳이 그곳까지 가고픈 생각은 없었어요. 마켓을 한 바퀴 돌다 보니 수제 소시지를 넣은 핫도그가 맛있어 보여요. 쫄깃한 핫도그를 먹다 보니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캐나다는 마트에서 술을 팔지 않습니다. 북유럽이나 인도처럼요. 맥주도 주류 전문점에서 사거나 레스토랑 또는 펍에서만 마실 수 있습니다. 검은 창틀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손님이 제법 많아 보이는 모던한 펍으로 들어갔습니다. 수십 가지가 넘는 맥주 이름만 보고 도저히 선택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수제 맥주 중 한 가지를 추천해 달라고 하니 아가씨는 친절하게 여러 가지 맛의 취향을 물었습니다. 그녀가 가져다준 흑맥주의 맛은? 많이는 아니지만 그동안 마셔본 맥주 중에 최고였어요. 습쓸함과 달큼함이 내 입맛에는 제격이었는데 무엇보다 깔끔하게 마무리해주는 뒷맛이 최고였지요. 맛이 어떠냐고 묻는 호스티스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지 척하며 'perfect'를 외쳤더니 그녀 또한 미소를 얹어 'nice' 합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서양 사람들의 리액션은 과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나도 해보니 나쁘지 않아요. 좋다는 표현을 강조하는 것뿐이니까요. 일부러 작정하듯 그 어느 때보다 great, perfect, nice, wonderful을 많이 썼습니다. 그렇데 그 말들을 하는 순간 내 기분도 좋아지고, 듣는 사람도 기분 좋아지는 거예요. 비로소 왜 그들이 그렇게 리액션이 강했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다음 날 아침, 친절한 청년이 가르쳐 준 버스를 타고 도착한 스탠리 파크는 상상했던 대로 걷기엔 너무 넓었습니다. 공원 이름은 당시 캐나다 총독인 프레데릭 스탠리 경(卿)의 이름을 따서 지었고 그를 기리는 동상도 있어요. 마침 버스에서 내린 곳은 마차 투어를 시작하는 곳과 가깝웠습니다. 서부 영화에 나올법한 올드한 마차의 비주얼에 이끌려 티켓을 샀습니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을 태운 마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끌었습니다. 또각거리는 말발굽 소리의 경쾌함과 함께 마음에도 영롱한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요. 젊고 잘 생긴 청년이 마부이자 가이드예요. 말이 가거나 서기를 조련하면서 한 시간 내내 공원의 역사와 면적, 가까이 또는 멀리 있는 건축물의 설명을 끊임없이 말했습니다. 젊은 혈기로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말을 해야 하는 그 일은 참으로 힘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칭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차의 속도는 걷는 것보다 약간 빠른 정도지만 긴소매 니트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오싹오싹 끼쳤습니다. 마차에 준비되어 있던 모포는 옆 자리에 앉은 할머니 두 분이 사이좋게 덮고 계셨지요. 한 여름에 추위를 느끼다니 얼마나 행복한 거야 하는 생각을 했지요, 순간 존 레넌의 imagine 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다봐야 하는 커다란 나무들과 장미 정원, 하늘에 뜬 구름, 갖가지 동물들이 평화롭게 사는 센트럴 파크보다 넓은 스탠리 공원을 마차에 앉아 편히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평화로운지요.
토템폴에서 잠시 멈춘 마차는 투어객들에게 5분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토템폴에는 인디언 원주민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으며 원주민들이 세습적으로 예배하는 동물의 기둥인 토템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해안에는 요트들이 정박해 있고, 콜 하버(Coal Harbour) 저편으로 캐나다 플레이스와 고층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원 속을 마차를 타고 달리다 보니 잠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속을 달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지요. 한 시간 후, 출발한 곳으로 돌아온 두 마리의 말이 다리를 쉴 시간이 되었습니다. 곁눈질하지 못하게 눈을 가려놓은 말이 안타깝고 미안했어요.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깨진 말발굽을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마차에 탔던 한 노부인은 말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바퀴 씩 공원을 돌고 돌 그들에게 미안한 맘이 드는 건 나뿐이 아니었지요.
일본인 젊은이들이 간이 판매대에서 자파 도그를 팔고 있습니다. Japan과 hotdog의 합성어인데 밴쿠버 다운타운에 점포를 갖고 있어요. 김치가 들어있는 메뉴도 있었지만 스테디셀러 격인 데리 마요와 콜라를 선택했습니다. 7월의 햇빛이 그토록 따듯하게 여겨진 때가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먹는 핫도그 맛이 생각보다 맛있었어요.
스탠리 파크에서 다운타운으로 돌아와 걷고 있는데 멀리 KEB하나은행과 하나로 마트가 보였어요. 밴쿠버에 한인이 많이 거주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은행과 마트를 보니 공연히 마음이 흐뭇합니다.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연상시키는 공공 도서관을 지나고 BC플레이스 스타디움이 보였습니다. 이영표 선수가 소속했던 밴쿠버 화이트 캡스의 홈구장인 게지요. 스타디움 앞에 의족을 한 남자의 독특한 동상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테리 폭스(Terry Fox). 18세 때 골육종으로 오른쪽 다리의 무릎까지 절단했습니다. 그리고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많은 어린이들이 병으로 고통받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서 마라톤으로 캐나다 횡단을 시작했으나 병이 심해져서 완주를 못하고 2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 후 밴쿠버에서는 테리 폭스를 기리는 달리기 대회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고 하네요.
딱히 정해진 시간 없이 배고프면 먹습니다. 먹은 지 2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배고프면 또 먹어요. 내 맘대로입니다. 누군가에게 먹을까 말까? 뭐로 할까? 여기저기? 하는 거 말하지 않아도 되니 세상 편합니다. 게다가 먹을 때마다 왜 그리 맛있는지요. 어떤 사람은 식당에서 혼자 밥 먹기 싫어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는데 말이죠. 다운 타운 대부분의 레스토랑들은 손님이 뜸한 시각인 오후 3시부터 5시 까지를 Happy Hour라는 타이틀 하에 값을 저렴하게 받습니다. 빨간 파라솔이 경쾌하게 펼쳐진 Jimmy's tap house로 들어간 건 길가에 거치된 칠판에 써진 글씨 때문이었습니다.
Today special Menu
fish & chips 10$,
Margarita 6$
나처럼 혼자이거나 아니면 두 사람, 또는 네 사람, 거의 대부분의 손님들은 서빙을 하는 아가씨와 친분이 있는 듯했습니다. 그녀는 유쾌하게 대화를 잘 이끌어내며 에너지가 넘치는 호스티스였습니다. 난생처음 만난 이방인인 제가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피시 앤 칩스와 마르가리타를 주문하니 그녀는 내가 예상한 대로 perfect! 라 말합니다. 주문한 음식과 술을 가져다준 후 얼마 지난 후 그녀는 분명히 내게 물어봅니다. '맛이 어때?' 그러면 나는 'excellent' 대답하지요. 말 한마디로 기분을 좋게 한다는 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더군요. 대답만큼이나 피시 앤 칩스도, 칵테일도 훌륭한 맛이었습니다.
밴쿠버의 차이나 타운은 어마어마하게 크더군요. 버스 정류장이 몇 개 지나도록 이어져요. 그런데 그 지역을 지나갈 때마다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집시들이나 노숙자들이 벼룩시장 같은 걸 열고 있었는데 얼핏 보아도 형편없는 물건들이 대부분인 데다가 마약 중독자들도 있어 보여요. 몇 번이고 버스에서 내릴까 생각했지만 좀 무서운 생각이 들더군요.
밴쿠버에서 이틀을 설렁설렁 보내고 사흘 째 되는 날, 오후 2시 50분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사촌이 살고 있는 캠룹스로 가야 합니다. 기차역과 버스 터미널이 한 곳에 있는 pacific Central로 가야 하지요. 숙소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내려 sky train을 갈아타기 전에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 중국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에게 내려야 할 곳을 물어보았지요. 그런데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역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리면 곤 바로 퍼시픽 센트럴로 연결된다는 말을 했어요. 현지에 사는 사람으로 보였고 유창한 영어 실력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 있게 말하기에 그녀를 믿고 내렸습니다. 역사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없었습니다. 계단으로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는 일은 언제나 힘이 듭니다. 그렇게 힘들게 밖으로 나가니 맙소사입니다. 그곳은 제가 수없이 오가던 다운타운 복판으로 마치 러시아의 어느 도시에 있을법한 건물 외양을 가진 퍼시픽 센트럴은 보이지 않았지요. 담배를 피우며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남자에게 물어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한 정거장 더 가야 한다는 거였지요. 차로 가면 가깝지만 캐리어를 끌고 걷기에는 다소 멀고 힘들 거라면서 다시 트레인을 타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저 계단으로 다시 내려갈 자신이 없으니 택시를 불러줄 수 있냐고 물었어요. 남자는 우버 택시 어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면 자기 자동차로 태워다 줄 수 있다고 묻더군요. 고맙지만 미안해서 그럴 수 없다고 했지요. 남자는 어차피 자기는 지금 시간을 죽이고 있는 터라 상관없다고 합니다. 남자의 호의를 무시하기엔 그의 인상이 너무나 선 해 보였습니다. 그 말을 믿기로 했지요. 길 건너 주차 빌딩에 있는 그의 차를 얻어 타고 5분쯤 가니 역 건물이 눈 앞에 떡 하니 보였습니다. 4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는 인테리어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뭐라도 감사 표시를 하고 싶지만 돈을 줄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고맙다는 말만 연거푸 했지요. 남자는 즐거운 여행을 하라면서 캐리어를 내려주고 별 일 아닌 듯 떠났습니다.
그레이 하운드는 비행기처럼 수화물의 무게가 오버되면 추가 요금을 받아요. 예정된 시각에서 30분이 지나서야 버스는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금요일 오후의 도심은 휴가를 떠나는 차량들로 북새통입니다. 고속도로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더군요. 캠핑카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도로는 우리나라 명절 때의 고속도로만큼이나 정체가 심했습니다. 다행히 버스 내에 와이파이가 돼서 사촌에게 예정보다 많이 늦어진다는 연락을 주고받았지요. 1시쯤 역사 내에 있는 캐나다의 롯데리아 격인 A&W에서 사 먹은 버거 하나가 고작인 터라 시장기가 몰려왔지만 배낭에는 달랑 물 한 병이 있을 뿐이었어요. 3시간쯤 지나 잠시 정차한 코퀴틀람에서는 사람만 내리고 탔을 뿐 바로 출발했고 두 번째 정차한 첼로왁 터미널에서 15분이 주어졌지만 음료 자판기만 달랑 있고 근처에는 주유소만 있어서 허기를 면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버스 기사는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미안하다. 이제 속력을 높여 최대한 빨리 가도록 노력하겠다 라는 안내 멘트를 했습니다. 도심을 벗어난 버스는 멋진 풍경을 가로지르며 달렸습니다. 로키가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었지요. 캠룹스는 밴쿠버와 로키의 관문인 재스퍼의 중간쯤 되는 곳이에요. 그곳 역시 주립 공원과 스키장, 호수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곳에 사는 사촌은 쉬는 날이면 카누를 타거나 낚시, 또는 허가된 기간에는 사냥을 즐긴다고 해요. 예정 시각보다 2시간 늦은 밤 9시 캠룹스에 도착하니 사촌 내외가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캐나다에 정착한 지 16년이 되는 사촌 동생도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합니다. 온 식구가 저녁 식사도 하지 않고 내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시장한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정성으로 마련한 음식을 먹으며 대화하는 밤이 따뜻하고 빠르게 지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