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싸웠다. 10여 년을 살았으면 이젠 AS센터에 갈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델로 바꿔봐야 하나를 고민할 법도 한데, 우리는 아직도 드릴과 망치를 들고 상대를 내 맘에 맞게 고쳐보려 애쓴다. 인생의 대선배 되시는 나의 부모님을 관찰해보고, 시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래 함께 산 부부가 서로에게 저절로 잘 맞추어지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친정 엄마의 폭포 같은 잔소리에 대체로 혼나는 역할을 담당하시는 친정 아빠는 "여보, 나 다음 주에 동창들이랑 열흘간 러시아 기차 여행 다녀올 거야." 통보하곤 홀연히 바람과 함께 사라지셨던 기억이 난다. 뙤약볕 아래서 작은 텃밭조차 하기 싫다는 엄마의 라이프스타일이 무색하게, 갑자기 친구들과 수백 평 주말농장을 덜컥 시작하신 적도. 권투로 치자면 수만 번 날린 자잘한 잽을 한 방의 파워 발차기로 상쇄시키는 느낌이랄까?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수저통에 수저를 똑바로 세우냐, 거꾸로 세우냐를 놓고 다투셨는데, 결국 시어머님이 수저통을 버려버리는 걸로 사건이 종결됐다. 설거지 한 번 안 하시는, 왕 같은 시아버지께서, 밭일해야지 자꾸 어딜 가냐고 타박하는 어머님 눈치를 보시며, 몰래 서울 병원 나들이 일정을 잡으시더라.
웃음이 난다. 부모님의 이런 모습이, 외람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귀여우시다. 나이 들면 다 돌부처 가운데 토막처럼 달관해서 티격태격할 일 하나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사나.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께서 당신들의 남편 흉이라도 보는 날이면, 나는 귀를 더욱 쫑긋하며 재밌게 듣는다. 묘하게 위안을 얻는다. 인간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 수십 년 같이 살아도 여전히 부부관계가 노력해야 하는 건데, 우리는 부부는 아직 더 많이 들이받고 파이팅(Fighting) 해도 되지 않을까, 합리화한다.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뜨거운 사랑의 증거다.
싸움의 링 위에 올라간 나는, 불길이 머리 위로 화르르하고, 상대를 벨만큼 날카로운 레이저 광선을 눈에서 발사한다. 남편은 내게 처키 같다며 놀린다. 마음에 두둑하게 장전된 화살을 남편에게 조준한다. 그도 나름의 고충을 가지고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일터에서 고군분투하는 것은, 모르쇠 한다. 당신이 그때, 파주 헤이리에서, 으슥한 벤치에 앉아, 내게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가. 아침에 된장찌개 끓여줄 여자를 원하는 게 아니라, 평생 꿈을 지지하며 응원하고 싶다고. 쳇, 그 달콤한 속삭임을 내가 믿었단 말이다. 그 옛날 옛적 얘기를 꺼내면, 양심이 아직 꺼지지 않은 그는, 한 번 멈칫하며 웃는다. 그것은 나의 지혜로운 부부싸움 십팔번 명대사다. 하지만 그것도 먹히지 않을 만큼 둘 다 감정이 상했을 때가 있다. 냉전 단계로 넘어가면 부부싸움의 골이 심각 해지기 십상이다.
AI와 로봇이 발달한 최첨단의 시대에 우리는 우연히 현명한 재판관을 발견했다.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데이터가 분명한 심판, 바로 아들의 스마트 워치다. 걸음 수 측정, 수면 측정, 심박수 측정 등의 여러 가지 간단한 일들을 해 주는데 여기에 놀랍게도 스트레스를 측정해 주는 기능이 있다. 스트레스 지수는 0부터 100 사이의 숫자로 표현된다. 숫자가 작을수록 초록이나 파랑 방향으로 이완된 상태를, 숫자가 높을수록 노랑과 주황 쪽의 긴장된 상태를 나타낸다.
사실 부부싸움의 많은 경우 내가 힘드니, 네가 더 힘드니의 싸움이다. 각자 자기의 속상함이 더 크다고 토로하며, 상대가 이해해 주고 한 발 물러서 주길 바란다. 아주 사소한 가사 분담 같은 문제도, 내가 이렇게 힘든데, 이번에는 네가 엉덩이 좀 들고 해결해라 하면, 상대는 나도 힘들다, 내가 너보다 더 되다고 경쟁한다. 고통 올림픽 출전이다.
한 번은 다그치면서 화를 내는 남편에게 내가 당신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하니, 그는 날더러 화의 원인을 제공을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본인이 더 고단하다고 항변했다. 그때, 이 솔로몬 선생 같은 스마트 워치가 떠올랐다. 우리 그러면 과학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자고 제안했다. 공정하게!
내가 먼저 팔을 내밀었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 스마트 워치를 손목에 최대한으로 쫄리게 당겨 차고, 지시대로 한 터럭도 움직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가만한 자세를 유지했다. 마음속에 제발 나의 스트레스 수치가 높게 나오길 바라며! 순간, 거짓말 탐지기 앞에 선 것처럼 심장이 떨렸다. 화살표가 왔다 갔다 하며 뜸을 들였다. 오줌도 시원하게 쌀 수 없을 만한 짧은 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나 생각할 무렵, 부르륵 진동이 울렸다. "69" 나의 스트레스 수치는 보통 이상의 약간 높은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 실망이었다. 내 느낌엔 빨강 색깔 즈음의 최고 높은 스트레스 단계가 나올 줄 알았는데. 기세 당당하게 '이것 봐! 내가 지금 이렇게 상태가 안 좋다잖아, 기계도 인정해 주잖아' 하려 했는데, 안심할 수 없는 수치였다. 다음은 남편의 차례였다. 그가 재는 시간의 긴장감은 배가되었다. 곧 나올 결과로 승자와 패자가 나뉠 터! 나는 마음속으로 제발 제발 낮게 나와라 유치하도록 간절하게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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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 어린 마음의 텔레파시가 스마트워치에 전달되었나, 남편의 스트레스 수치는 청정한 초록을 향했다. 륄랙스 한 상태라며 고맙게도 나의 압승을 드러냈다. 이겼다는 사실 자체로 나는 기분이 다 풀렸다. 그도 올림픽 정신에 의하여 승패에 상관없이 회복된 듯 보였다.
물론 스트레스 수치는 HRV(심박수 변동)에 의해 계산되며, 이를 참고용으로만 사용하라는 메시지는 혼자서만 확인했다.
사실, 그 후로 재판관을 다시 소환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아들과 실랑이하면서 한 번 썼다가 완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내 느낌은 분명히 빨강이었건만, 푸르게 나온 걸 보고 부부싸움같이 중요한 걸 운에 맡길 순 없다고 판단했다.
역시, 대화와 협상, 화해와 조정의 지름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