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성실했던 나의 동지에게
며칠 전부터 뒷베란다의 세탁기에서 '으득으득', '드르륵' 하는 낯선 마찰음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오늘따라 아기 빨래가 많아서 버거운가 보다' 하고 무심코 넘겼습니다. '조금 소리가 나도 그냥 쓰지 뭐' 하고 미뤄둔 게 벌써 여섯 달째. 그러다 며칠 전, 결국 요란한 소리와 함께 통이 완전히 멈춰 섰습니다.
전원을 껐다 켜며 가만히 녀석의 외관을 훑어보니, 이 세탁기를 들인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2017년인가 2018년쯤이었을 겁니다. 좁은 반지하 원룸 생활을 정리하고, 처음으로 지상에 있는 월세방으로 이사하던 날 장만했던 녀석이었습니다. 고맙게도 세 번의 이사를 거치는 동안, 한결같이 우리 가족의 세탁물을 책임져 주었습니다. 그 후로 몇 번의 크고 작은 이사가 있었지만, 이 무겁고 투박한 쇳덩이는 군말 없이 우리 가족의 짐칸을 따라다녔습니다.
가동을 멈춘 세탁기를 보며, 지난 10년 동안 이 통 안에서 돌아갔던 빨랫감들의 궤적을 찬찬히 되짚어 봅니다.
처음엔 그저 단출한 어른 두 사람의 옷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조금 더 넓은 집으로 가며 산뜻한 새 커튼을 빨았고, 어느 날부턴가 우리 집 반려견 헬씨의 털이 묻은 옷과 담요가 더해졌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해준이의 기저귀와 아기 용품들이 매일같이 세탁기를 채웠습니다. 식구가 늘어나고 위생에 더 신경을 쓰게 되면서, 세탁기는 하루도 쉴 틈 없이 돌아가야 했습니다.
어쩌면 그 오래된 모터가 감당하기엔 우리 가족의 삶이 너무 빠르게 커졌지도 모릅니다. 드르륵거리던 마지막 소리는 "이제 내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나도 쉴 때가 됐어"라며 한계치를 알려주는 소리였던 셈입니다.
거실 한가운데 두는 TV는 화면이 작아 보이거나 화질이 아쉬워지면 쉽게 눈에 뜨입니다. 하지만 다용도실 구석에 숨어 묵묵히 궂은일을 하는 세탁기는, 이렇게 고장이 나서 완전히 멈춰 설 때까지 10년이고 곁에 두기 마련입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가장 성실하게 우리 삶의 찌든 때를 벗겨준 동지 같은 존재입니다.
이제 드디어 이 낡은 세탁기를 보내주고, 새로운 녀석을 들여야 할 때가 왔습니다.
세탁기를 비우고 새것을 들이는 이 과정이, 마치 30대를 치열하게 통과했던 제 인생의 1막이 마무리되는 의식처럼 느껴집니다. 반지하 원룸에서 시작해, 아내와 헬씨, 그리고 해준이까지 완전한 가족을 이룬 지금. 새로 들어올 두 번째 세탁기와 함께 저 역시 본격적인 '중년'이라는 인생의 2막을 맞이하는 것이겠지요.
오랜 시간 우리 집의 궂은일을 도맡아준 세탁기에게 무언의 인사를 건넵니다. 조만간 도착할 새 세탁기는 어떨지, 그 안에는 또 어떤 삶의 흔적들이 새롭게 담기게 될지 조용히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