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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IN Nov 19. 2023

시비를 시비합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성격과 기질의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바른 길로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수학 문제의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글을 쓸 때는 문법을 따라야 합니다.

기계는 조작법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국민은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중력은 지구의 중심을 향해야 합니다.

지구는 태양 주변을 돌아야 합니다.


인공, 자연, 진리는 옳고 그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래온 것들은 사실 온 힘을 다해 규칙을 따르는 중일지 모릅니다. 학교의 규칙, 사회의 규칙, 인간의 규칙, 야생의 규칙, 우주의 규칙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규칙은 돌탑의 돌과 같습니다. 진리에 가까운 돌일수록 더 아래에서 다른 돌들을 떠받칩니다. 돌을 움직이면 탑이 흔들립니다.






시비를 가리는 것은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애초에 시비로 이루어진 세상이니, 시비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물건을 살 땐 돈을 내야 한다”, “바람 피우면 안 된다” 등은 사람들이 만든 규칙입니다. 지키지 않아도 문제될 이유가 없지만, 함께 지키는 편이 모두에게 좋으므로 정당한 옳음으로 인정받은 경우입니다. 인간의 옮음입니다.


철학자, 종교가, 많은 사람들이 옳음을 정의하려는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 단계의 옳음을 넘어서, 우주의 옳음을 찾으려 했습니다. 모든 것을 꿰뚫는 단 하나의 시비, 진리를 원했습니다.

어쩌면 진리는 이미 발견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모든 옳음의 부모로써 그 역할을 다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곁에 있어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찾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찾습니다.


나의 옳음은 만들어지고 부서지고 만들어지고 부서집니다.






각자의 옳음으로 각자의 우주가 만들어집니다. 옮음에서 나온 규칙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동작합니다.

우리는 같은 차원에 살지만 다른 우주에 사는 독립된 존재들입니다.


견고한 우주도 있고, 위태로운 우주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우주도 있고, 흉한 우주도 있습니다.

유연한 우주도 있고, 경직된 우주도 있습니다.

밝은 우주도 있고, 어두운 우주도 있습니다.

넓은 우주도 있고, 좁은 우주도 있습니다.

따듯한 우주도 있고, 추운 우주도 있습니다.

조용한 우주도 있고, 소란스러운 우주도 있습니다.

건강한 우주도 있고, 병든 우주도 있습니다.

빠른 우주도 있고, 느린 우주도 있습니다.

부유한 우주도 있고, 빈곤한 우주도 있습니다.

움직이는 우주도 있고, 정지한 우주도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우주도 있고, 할 수 없는 우주도 있습니다.






타인의 우주는 나의 우주와 다릅니다. 비슷할 수 있어도, 같을 수 없습니다.


우주가 다른 이유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준이 다른 이유는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다른 이유는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다른 이유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곳은 가치의 중력이 반대이기도 하고, 어떤 곳은 밤에 해가 뜨기도 합니다.



관계를 맺는 것은 나의 우주로 타인을 초대하고, 타인의 우주에 내가 방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우주에서는 기괴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호의로 내어 온 맛있는 음식을 보고 구역질하고, 깨끗히 씻어서 더러워지고, 감사 인사가 욕으로 들립니다.


관계가 더 깊어질수록, 더 깊은 세상을 공유할수록, 서로는 서로에게 더 기이해집니다.






상대적인 존재로 태어났기에, 무엇이 맞는지 무엇이 틀린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절대적 존재만이 알고 있을 기준을 짐작해볼 뿐입니다.

하지만 옳음과 그름 사이에 연속적으로 펼쳐진, 그른 것보다는 조금 더 옳은 것들과, 옳은 것보다는 조금 더 그른 것들은 몇 개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로 간신히 살아갑니다.


삶은 나에게 판단을 요구하고 결정을 재촉합니다. 다그침이 무서워 떠밀리듯 시비하지만, 가끔씩은 침묵으로 반항해봅니다.


불완전한 옳음은 상처를 주고, 불완전한 그름은 상처받기 마련입니다.


나는 시비 없이 살고 싶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으며 (是是非非非是是)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음이 아니다 (是非非是非非是)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그른 것이 아니며 (是非非是是非非)
옳다는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함이 도리어 이 그른 것을 옳다 함이다 (是是非非是是非)

시시비비(是是非非) -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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