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MIN Jan 02. 2024

악마의 품에서 잠들었습니다


악마의 품에서 자는 꿈을 꾸었습니다.

악몽이 아니었습니다.






머리가 긴 악마입니다. 빨간색 뿔이 두 개 달려 있지만, 피부색과 얼굴은 사람과 같습니다. 바라보는 눈빛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악마에게선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피부의 건조하고 따듯한 공기만 전해질 뿐입니다.

따듯한 냄새라고 해도 될까요. 깨끗하지만 날카롭지 않은 무취입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서로'로 정의되는 현재를 음미합니다.


돌과 무늬.

마루와 먼지.

피와 감정.

고기와 죽음.

바다와 별.

시집과 자살.

이불과 엄마.

빵과 우유.

노인과 혈액형.

사람과 악마.


두 무관은 하나의 유관입니다.

과거에 무관했으나, 현재에 유관합니다.

현재에 무관하나, 미래에 유관할 것입니다.



외로운 무관들이 관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과 저것, 저것과 그것, 그것과 이것, ...


무관은 유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관은 무관할 수 없습니다.

관계는 만들어지고 버려지고 부패합니다. 또 만들어지고 또 버려지고 또 부패합니다.

어느새 '세상'과 '악취'는 같은 뜻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악마가 나를 바라보고, 내가 악마를 바라봅니다.






품에 안깁니다. 피부의 저항감이 편안합니다.

얼굴을 묻습니다. 스치는 솜털이 부드럽습니다.

살을 부빕니다. 전해오는 온기가 나른합니다.


악마의 얼굴을 올려다 봅니다.

얇게 벌린 입술이 있습니다. 사이로 혈액이 흘러 나옵니다.

일정한 두께의 유체는 매끈한 관처럼 보입니다. 만져보면 정말로 단단할지 모르겠습니다.



붉은 따스함이 이마에 닿습니다. 걸쭉하지만 끈적이지 않습니다.

혐오하지 않습니다. 나침반은 오래전에 버렸습니다.

모두가 그대로 있고, 그대로 있는 그대로 있습니다.


입을 맞춥니다. 피가 알이 되어 넘어옵니다.

고소하고 비릿한 풍미가 눈을 채웁니다.


향을 맡고 맛을 보고 가득 차면 삼킵니다.

향을 맡고 맛을 보고 가득 차면 삼킵니다.

향을 맡고 맛을 보고 가득 차면 삼킵니다.

...


나는 배부릅니다.

나는 따듯합니다.

나는 만족합니다.






졸리고 따듯하고 부드럽고 폭신합니다. 이 곳이 좋습니다.

언제부터 눈을 감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눈을 감았는데, 더 감을 수 있습니다.

품이 검었는데, 더 검을 수 있습니다.



허스키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듯, 귀에 소리가 그려집니다.

너무 졸려서 언어의 소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목소리는 흥얼거림을 중얼거립니다.

계속 중얼거립니다.



마음이 부풀어오르고,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악마는 어쩌면 좋은 것인가 봅니다.

나는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여기는 천국입니다.



잠에서 잠듭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비를 시비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