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1정리 카페에서 1월 한 달동안 '극강의 냉장고 파먹기'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도미니크로로의 '심플하게 산다'라는 책을 보며 유대인들은 1년에 한 번 굳은 조미료, 오래된 티백, 냉장고에 빵부스러기 조차 남기지 않도록 식재료들을 관리하는 전통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부러웠죠. 저도 정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전통을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한 달동안 저 역시 결혼 이후 가장 열심히 노력해서 냉파를 했고, 몇 가지 깨달음을 얻어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눈에 보이는 양이 많으면 먹기가 싫다
쌍화탕의 매력에 빠진적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 세번씩 사 먹다가, 아예 한 박스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놨죠.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박스 구매한 날 바로 한 병을 따서 마신 뒤로는 쌍화탕을 즐기지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냉장고 속 쌍화탕은 몇 개월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가시가 발린 고등어, 닭가슴살을 대구매했었습니다. 맛있어서 그 다음 주문할 때는 주문량을 2배로 늘렸죠. 이상하게 그 뒤로는 먹기가 싫었습니다. 고등어는 느끼했고, 닭가슴살은 처음맛과는 다르게 닭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냉장고를 볼 때마다 쌓여 있는 팩들을 보며 한 숨이 나왔죠.
2) 포장은 반드시 뜯어서 밀폐용기에 담아야 한다
엄마께서 지난 추석에 선물로 들어온 '완도 건새우 한 박스'를 위생백에 싸고, 튼튼하게 묶어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그 대로 집에와서 냉장고에 넣어두었지요. 위생백 안 고급 상자 속에 건새우는 그 뒤로 봉인되고 말았습니다. 예전에 곤도마리에가 옷을 사면 반드시 택을 떼서 옷장에 넣어야 진짜 내 식구가 된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앞으로 식재료를 사면 패키지 속에서 내용물을 꺼내, 밀폐용기에 따로 담거나 낱개포장, 소분하는 행위를 바구니에 담는 행위를 반드시 하려고 합니다. 덩어리와 패키지는 너무나 견고합니다.
3) 잠재된 죄책감에서 해방하라
반나절을 외출 하고, 장시간 운전을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도저히 요리할 힘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배달음식을 시키기로 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치킨을 시킬까, 짜장면을 시킬까 고민하다가 냉장고 속에 있는 신선함을 잃어가고 있는 쌈채소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반찬가게에서 제육볶음과 아이를 위한 반찬 두 가지를 주문해서 먹었습니다. 계획에 없던 쌈채소에 대한 해방감은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짐의 무게를 깨닫게 된다'라는 말처럼, 다 먹고 난 후에 느낀 안도감은 그간 쌈채소를 빨리 먹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잠재되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은 냉장고를 열고 닫으며 우리는 냉장고 속 음식들의 아우성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4) 비빔밥은 최고의 냉파 요리
예전에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한 달 내내 먹을 수 있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친구는 요즘꽂힌 음식으로 묵은지 김밥을 꼽았고, 저는 비빔밥이나 샌드위치를 꼽았습니다. 제가 비빔밥을 꼽은 이유는 조리도 간단하고, 맛도 수준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참기름, 깨소금, 거기에다가 김가루만 있으면 예상가능한 평균 이상의 맛을 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신기한 점은 한 달동안 냉파만 해야 한다면 가장 효과적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요리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냉파도 역시나 쌈채소, 나물, 볶음들을 비우기 위해 비빔밥을 열심히 만들어 먹었죠.
5)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레시피가 필요하다
거의 배추 크기만한 양배추가 배송되었습니다. 양배추 스테이크 한 번 해먹고 난 뒤에 거들떠도 보지 않았었죠. 극강의 냉파를 하게 되어서야 꺼낼 수 있었습니다. 양배추 전, 샐러드(채쳐서), 양배추 닭가슴살 볶음을 해먹었습니다. 양배추는 먹을 수록 단맛이 나고 오래 볶으면 양파처럼 글레이징 된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어요. 그래서 양배추 김치 볶음밥을 만들어봤습니다. 물론 양파의 부드러운 식감은 아니었지만, 양배추의 아삭한 식감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레시피라는 것은 최상의 맛을 내는 것이 목적일 겁니다. 그래서 최상의 맛을 위한 '준비물'을 안내하지요. 하지만 매일 끼니를 준비하는 이의 목적은 매끼 최상의 맛을 내는 것은 아닐겁니다. 오늘 한끼 '잘 먹었습니다' 할 수 있을 정도의 맛이면 되죠. 집에 있는 재료만을 가지고, 활용할 수 있다면 맛의 덜하더라도 그게 베스트일 겁니다.
'냉장고 파먹기'라는 단어는 참 재밌습니다. 원래는 재테크 카페에서 식비를 줄이기 위해 시작된 용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정리 카페를 9년 간 운영하면서 냉장고 파먹기라는 메뉴는 회원들의 요청에 의해 여러번 만들었다가 없앴습니다.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활성화가 어려울까요.
경제적인 여유가 정말 없거나, 시작과 끝이 있는 깜짝 이벤트가 아니고서는 '파'먹기까지는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극강의 냉장고 파먹기'라고 한 것이죠.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마음, 극강의 마음가짐으로 해야만 꺼내게 되거나, 끝까지 다 먹게 되는 재료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번 냉파 이벤트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전히 냉장고 속에는 먹기 부담스러운, 내 취향이 아닌, 유통기한이 지난, 외면하고 싶은 식재료들의 아우성을 듣고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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